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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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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4.2022 왜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실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민족이 포로로 팔리고, 주변 강대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치 물고기 낚시하듯 잡아채도 마냥 응답도 구원도 없으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잔뜩 원망에 찬 질문을 쏟아놓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런 질문이 왜 하박국에게만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보면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눈뜬 장님처럼 세상의 부조리와 악과 잔꾀가 많은 사람들의 사기행각들에 대해서 분노할 일들이 산더 미처럼 쌓여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에덴은 천국이었습니다. 악이 머물 수 없는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로 채우셨는데 이상하게도 그 동산의 한구석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로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와의 눈을 생명나무 보다는 선악과에 두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차라리 그 선악과를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동산에 두지 않았더라면 하와의 범죄로 이어지지 않았을텐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두어서 잔혹한 인간의 범죄로 잇게 하셨을까요? 이상합니다. 노아시대도 그렇습니다. 노아 방주로 피신시킨 동물은 정결한 짐승만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까지 태우셨습니다. 모든 것을 없앨때에 부정한 것들을 말살시켜서 정결한 것만 남겼더라면 이 후에 고민도 없이 인간은 정결법에 신경쓰지 않고도 살 수 있었을텐데,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함께 두셨을까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은 비단길이나 꽃길 이 아닙니다. 순종하기 위하여는 우리는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로봇처럼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한 길만 주어졌다면, 우리가 선택할 기회가 없이 그냥 그 길만 갈 수만 있으면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 때, 다른 것을 희생하고 하는 것일 때 가장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배우자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그 배우자만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가치가 있고, 고귀합니다. 만일 선택할 아무 것도 없는데 선택된 것이라면 그 선택은 바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인 선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노아 방주속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갈등의 요소를 두고서 그 갈등속에서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악이 성행합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은 우리로 침몰하도록 만드는 지뢰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길임을 증명하는 훈련의 장소입니 다. 왜 악을 만드셨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그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을 때에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선을 택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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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7.2022 죄는 진실을 타고 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창조자 자신이 감탄하셨습 니다. 그리고 특정한 장소에 ‘에덴 유토피아’를 만드시고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과의 막힘없는 교제가 축복이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존재하지 않는 ‘만족’의 상태와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곳에서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저 버린 것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렸습니다. 죄는 그래서 적극적으로는 그 분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범하는 것이며,소극적으로는 그분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죄는 곧바로 인식이 가능한데,문제는 소극적인 죄입니다. 그것이 죄가 아닌 양,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고 살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인줄 모르고 지낸 것입니다. 태초의 시간에 인간은 죄를 범했는데,그 과정을 생각해 보면 머릿발이 쭈빗하게 설정도로 날카롭고 교묘합니다. 그 죄는 ‘뱀’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으신 짐승가운데 가장 ‘슬기로운(간교한)’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지혜가 ‘덕’ 이 되지 못하고 악한 것에 쓰임받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장점이라고 여겼거나,기질이라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어이없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대목입니다. 하와 역시,평시에 궁금했던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왜 하나님은 저것만 못먹게 하시지? 뭐가 있을까?’ 호기심이 상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 호기심이 자극을 받아 생각이 들어가니 얼른 그 열매 를 따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진실을 거짓 으로 보이게 가져오면 곧 바로 알아차릴텐데,진실을 가지고 들어오면,정말 속아넘어가기 딱입니다. 들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합니다. ‘네가 먹으면 눈이 밝아져 네가 하나님같이 되기 때문 이야!’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눈이 밝아진 것도 사실이었고,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은 거짓으로 승부한 것이 아니라,진실을 가지고 승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대처럼 그 열매를 먹음으로 눈도 밝아졌고,하나님의 속성중의 하나를 갖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그 결과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죽을까 하노라’고 희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이 아닌, 비참한 존재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팬더믹의 시대를 지나고도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 있다면,우린 정말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팬더믹의 시대에 사탄은 ‘진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했 습니다. ‘모이면 바이러스에 감염돼! 위험하잖아? 그러니까 온라인 밖으로 나가면 절대 안돼,죽는다!’ 맞았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였 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친 것입니다. ‘안전가옥’ 속으로 숨어는 지냈지만,하나님과의 관계는 한없이 쇠약해졌습니다. 우리의 허술한 ‘보안의식’이 영적인 무장해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을 우리는 정신차리고 대응해야 합니다. 주는대로 냉큼 받으면 사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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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31.2022 하나님의 안전장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베가스의 여름은 유명합니다. 처음에 겪은 이곳의 여름날씨는 마치 여름에 한국에서 온풍기를 틀어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뜨거운 사막 기후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1-2년은 정말 힘들었지만 이후에는 적응이 되어, 110도가 되어야 좀 덥네...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라스베가스에 유별난 한 주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보너스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시원한 한 주간을 보낸 것이지요. 그렇게 만족을 하면서 살았는데 카톡에서 여러분들이 문자를 갑자기 주셨습니다. 라스베가스에 비가 많이 와서 물난리가 났는데 괜찮느냐는 외부인들의 안부가 아니었다면 그런 소식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내에서는 엄청난 비로 인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뉴그가 눈에 보였습니다. 참 희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인생은 이렇게 수많은 일들이 기적(?)처럼 일어나게 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한마디로, 교만하게 살지 말아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교만'과 벗을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조금만 됐다 싶으면 어김없이 교만해져서 우쭐해지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높아지려는 바벨탑쌓는 심정이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게 다가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교만 입니다. 왜냐면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자신을 속이는 촉매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충만'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충만'을 볼 수 있겠습니까? 교만 하지 않아도 하나님없이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인데, 교만이 들어가면 보이는 것이 없어집니다.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경험한 은혜가 많다고 했습니다. 삼층천에 올라가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계시가 많았습니다. 아, 멀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요? 내가 이런 은혜받았다. 내가 이런 사랑받았고, 이런 능력을 받았다!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의 마음에 교만하지 말라고 육체에 가시, 사탄의 사자인 자신의 질병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마저도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걸로 족하다. 네가 약할 때에 내 능력이 강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바울의 풀리지 않는 숙제는 당신의 자녀를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정장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내게 어려운 숙제가 생겼다. 문제가 터녔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다. 아이고 난 이제 망했구나.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가?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안정장치가 없으면 금방 문제가 해결되고, 즉각 즉각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행복하다고 하겠지만, 안정장치가 풀려있으면 언젠가는 사고가 나게 마련입니다. 마치 천사가 타락해서 사탄ㅇ이 된 것 처럼 말입니다. 교만은 그래서 망하는 지금길입니다. 하나님의 안전장치가 있다면 오히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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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4.2022 아까운 생각이 들때
    베가스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간혹 빌보드에 누가 얼마를 땄다. 잭팟이 터졌다 등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카지노가 베가스 방문객이나 주민들에 게 그만한 혜택을 준다는 ‘호의’가 아니라, 와서 돈을 쓰고 가라는 상술과 유혹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지노에 머물수록 결국 카지노가 돈을 버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따는 사람이 있으니 나도 돈을 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지 않지만 제가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혹시 돈을 10만불을 땄습니다. 그럼 그 돈은 사실 공짜입니다. 내 수종의 돈이 아니었는데 내 돈이라고 주는 것입니다. 이 순간 우린 10만불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금으로 30-40%를 떼고 주는 것에 대해서 무지하게 아까워합니다. 사실 1불도 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공짜로 10만불, 아니 세금 공제하고 6만불만 받게 되는 순간에 내것을 빼앗겼다는 손해의식이 생깁니다. 사실은 6만불도 공짜로 받았으니 기분좋게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기분이 찜찜합니다. 이것이 사람 의 의식입니다. 일단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그순간부터 우리는 내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나가는 것을 아까워하고 싫어합니다. 공짜였기에 얼마든지 나누 어도 될 것 같은데 일단 내 주머니에 들어왔으니 아까운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그런 말을 합니다. 시편 50편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 (학2:8)’이라고 할 때에 우리의 고백은 맞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욥의 고백 처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고 우리 자신이 그 렇게 멋진 고백을 하게도 됩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니까? 맞습니다. 모든 것 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고백이 말의 고백에 그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과 말 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사는 것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 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라고 하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달라고 해도 사실은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 아까운지요.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가운데 우리의 찬송가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 네’라는 가사를 바꿔, ‘내게 있는 약간을 주를 위해 바치네’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을 들으며 웃었는데 사실은 그게 우리의 진심인게지요.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것들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이 나에게 은 혜로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려고 해 야 합니다. 내 것으로 여기고, 나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우리는 주님께 드리거나, 흩어 나누는 일에 인색하게 됩니다. 인색하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짧은 인생을 살 아갑니다. 아끼고 인색한 모습이 아니라, ‘흩어 구제하여도 부유하게되는 일이 있 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것이 있는 것’(잠11:24)을 인정하고 남을 위하 여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의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나누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이기 때문입니다. 나누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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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7.2022 전도 한다는 것
    전도는 꼭 해야 하는 것일까요? 목회를 하다가 보면,우리 성도들의 헌신이 눈물겨울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 삶의 필요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는 기꺼이 내것을 내놓는 헌신을 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선교를 위한 요청에는 우리의 거룩한 부담감이 자원하는 물질로 이어지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생명 구원에 관하여는 ‘빚진 자의 심정’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교회가 구원의 방주역할, 영혼구원의 산실이어야 한다는 사명을 잘 이해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잘 알아들지도 못하는 사람 들에게, 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외계인에게 오는 메시지처럼 공허 하에 들리는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지 믿는 우리 조차도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다투기 싫고, 논쟁하기 싫고, 부끄럼을 당할 것을 피하기 위해서 웬만 하면 전도를 꺼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전도한다고 해도 겨우 ‘우리 교회 혹은 아무 교회나 나가보라’는 말 정도가 우리의 전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전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으니 우리 성도들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요 영성 훈련의 도서로 ‘이것이 복음이다 (simply good news)’ 라는 책을 읽으면서 도전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외계인같은 우리의 복음의 내용 은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왔는데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23-24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은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씀합니다. 복음, 좋은 소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부끄러운 것이고, 거리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그게 누구이냐면 ‘부르심은 받은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 복음이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도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입니다 (롬8장). 결국 부르심을 받는 사람만이 복음에 반응을 보입니다. 이 세상의 신 (그것이 물질이든, 숭배하는 것이든) 에 의해서 복음이 가리워 진 사람에게는 복음, 좋은 소식은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반 응을 합니다. 그 반응은 때론 강렬해서, 주님의 영을 경험하기도 하고, 육신의 질병을 뚫어내기도 하고,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기도 하고, 반대와 핍박을 뚫고 복음에 반응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만큼 복음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는 11월 15일을 한 생명을 주님앞으로 인도하려는 시도를 하려 고 합니다. 누구에게 전할까, 그 사람이 거절하면 어쩌나, ‘너나 믿어라’고 모멸감 을 받으면 어쩌나 그런 염려를 버리십시다. 우리의 전도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아닙니다. 기독교나 우리 교회의 우월성을 근거로 교회한번 나오라는 ‘비지니스 전략’도 아닙니다. 우리의 전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를 찾는 작업’일 뿐입니다. 부지런히 찾아다니다 보면, 그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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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0.2022 목사님이 그러면 안되지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몰상식하고 불편부당한 일에 대해서 서로가 같은 공분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이랬습니다. ‘에이, 나도 욕이 나오려고 하네...’ 이랬더니 한창 열을 품던 그 친구가 전화기 속으로 이렇 게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그래도 목사님은 그러면 안되지요’ 자기는 평신도 이니까 그렇게 욕을 해도 되지만 목사님은 욕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생각이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욕해도 되는데 목사님은 욕하면 안된다? 왜? 목사 이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목사에게 거는 기대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목사님은 그래서 안된다는 기대치입니다. 나는 미워하고 살아도 당신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으나 적어도 목사인 당신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하고, 그런 기대치에 어긋 나면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습니다. 이것이 어찌 목사뿐이겠습니까? 사회에서 신망을 받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대통령은, 우리 사장님은, 우리 장관님은... 나름대로 사회적 기대치가 있어서 그 기대치에 어긋나면 실망은 물론이거니와 심각할 때에는 사회적 매장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청문회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누구하나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내로남불 인생’을 살았음이 온 천하에 알려지면서 낙마하기도 하고, 저열한 인간으로 낙인찍히기도 합니다. 그동안 그런 인간들을 손가락질하며 살았는데 막상 내 문제로 들어가 보면 나 역시 손가락질을 받는 인간일 수 밖에 없음이 자명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 다. 그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이지요.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 지만 누구나 그런 부류의 사람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롬3;21)고 선언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 하나 님의 정의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죄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 니다. 그렇다고 죄인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죄인답게 살자 그러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곳에서 생명의 씨앗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뀔 수 있는 지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자 만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근본이 바뀝니다. 지옥과 멸망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 천국을 상 속받을 자녀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다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안에 옛 성품들과 싸워야 하는 전쟁터가 상존합니다. 그 싸움을 싸우는 것이 영적 전쟁입 니다. 오늘 실패가 실패가 아닙니다. 오늘의 실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기대속에 우리는 오늘의 옛 성품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성품은 언제나 ‘나 (자아/이고)’ 중심으로 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야 합니다. 목사님 은 그러면 안되지요라는 기준이 이젠 ‘그리스도인은 그러면 안되지요’라는 기준과 함께 살게 됩니다. 장로님은, 권사님은, 집사님은 그러면 안되지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대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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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03.2022 작품사진이 나오기까지...
    새벽기도회에 올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하나는 아침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입니다. 강렬하기도 하지만 부드럽고, 찐하지만 파스텔톤과 같은 아름다움은 세상의 그 뛰어난 미술가나 카메라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 작품을 눈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고 핸펀에도 담으며 오는 새벽 시간은 또다른 즐거움입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서 감탄을 자아낼 때가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구도, 색상, 그 어느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작품으로의 사진 을 보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나도 거기에 갔었는데? 그곳은 나도 알고 가본 장소인데? 아니,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장면, 그런 아름다운 사진을 못찍었지?’ 아, 이런 곳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니... 하면서 감탄을 하지만 왜 나는 그런 작품 과 같은 결과물을 못얻었는지 아쉬움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 즉, 일반인들은 제한 된 범위로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내 발이 닿는 곳까지만 가고, 내 눈이 보는 것까지만 보기에 누구나 같은 그림을 봅니다. 그런데 전문가는 다릅니다. 그들은 기다립니다. 시간을 기다리고, 환경을 기다립 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감각까지를 느끼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움직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구도와 빛의 느낌을 보려고 부단히 움직입니다. 위로, 아래로, 때로는 발걸음이 멈추게 하는 이상의 곳을 넘어서 물에 빠지기도 하고, 높은 곳에 기어 오르기도 하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 리기도 합니다. 일반인은 할 수 있는 것까지만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없는 것까 지 만들어냅니다. 바싹 다가가기도 하고, 너 멀리 떨어져도 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작품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보는 각도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봅니다. 아픔도 있고, 시험도 있고, 고통의 시간을 지나도 갑니 다. 즐거운 시간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냥 즐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시간을 그렇지 못합니다. 정말 아픕니다. 회의감이 생기고, 좌절감에 빠져 서 삶의 의욕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됩 니까? 그냥 누구나 볼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내려면 그냥 남들같이 살면됩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어 내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 (angle)을 달리해 보는 것입니다. 삶이 고달파 아플 때에, 무엇인가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힘들 때에는 그것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면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뀌게 됩니다. 그 각도를 달리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 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부대끼고 아픔을 주는 요인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것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참 놀라운 유익을 우리게 줍니다. 오른 손 잡이인 제가 왼손으로 파리를 잡아보았습니다. 오른 손만큼 정확하지 않았습 니다. 이유는 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지도 록 단련을 해야 합니다. 익숙하기 전에 포기합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고통 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속에서도 만들어내는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롬5:3-4). 앵글을 바꾸어 보십시오. 그 앵글은 훈련/노력에서 얻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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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6.2022 옛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올 해의 여름 성경학교는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2박3일 정도 하루 2-3시간으로 편성된 일정으로 소화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하루를 잡아서 교회에서가 아닌 곳에서 camp형식으로 열리게 된 것이 특징입니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들로 인하여 당황스러운 가운데 여러 부담을 안고 시작한 캠프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 목회자로서 그 동안 주일학교 지도자나 부 교역자에 의해서 준비되고 진행 된 여름성경학교를 맞다가, 처음으로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느낀 가장 귀한 한 가지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영특하고, 실력과 믿음이 뛰어나다’ 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 교육이 헛되지 않았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본 것이 제게 는 정말 소중한 발견이었습니다. 이번 캠프는 영어권 선생님들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때보다도 준비와 운영에서 그리고 만족도 에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근래 우리 교회 주일학교는 선생님들이 영어권이 아니고, 나이든 분들이 선생님으로 투입되 었습니다. 하지만 운영되어지고 아이들의 집중력과 응집력을 보면 그 어느 때 보 다도 짜임새있게 운영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이런 관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청년들이 하는 것이야. 특별히 이민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영어에 익숙해져서,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꼭 영어를 쓰는 사람이 해야 하고, 나이든 사람보다는 청.대학부 학생들이 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입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영어를 하는 교사 가 오면 만사가 오케이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영어가 서툴면 이미 한풀 접고 무시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영어가 편하지 않는 기성세대나 어른들은 아예 주일학교 교사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부모들도 알게 모르게 그런 눈치를 줍니다). 영어를 좀 하는 선생님이 오면 ‘와~~!’ 환영일색이고, 영어를 잘 못하면 ‘에이,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 보입니다. 정말 그럴 까요? 아이들의 영혼을 다루는 문제가 나이와 언어에 관한 것일까요? 그것이 실력일까요? 이런 고정관념이 교회교육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교육, 특별히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교육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감과 영혼 사랑의 열정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제가 유년 주일학교 다닐 때에 주일학교 선생님들 대부분이 젊은 교사들이 아니라 아줌마, 아저씨들인 집사님, 권사님, 장로 님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이모 집사님이 계셨는데, 50대가 훨씬 넘긴 분이 어른 예배가 끝나고 나서 오후 2시에 열리는 주일학교 교사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사하시던 분이십니다. 실력이 뛰어나서일까요? 아이들을 향한 영혼구원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캠프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그 집사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 다. 제 친구 어머니이셨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목회하면 할수록 그 집사 님이 생각나는 이유는 주일학교 교육은 젊음이나, 언어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명감으로 하는 것을 더욱 더 느끼기 때 문입니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 빛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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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3
    아름다운교회 Jun 19.2022 우연일까? 하니님의 섭리일까?
    새벽예배를 위하여 달려오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보너스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빛의 향연입니다. 얼마 나 곱고 아름다운지, 어떻게 그 색을 만들어내는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구름이 많고, 전날 바람이 휘몰아 치고나서의 하늘에 그려진 빛과 무늬의 환상적인 조화로움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인생의 풍랑이 어렵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있기에 인생이 묘미가 있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 다. 교회도 그러하고, 국가나 가정의 경제도 그러하고,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생에 고통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알고 계십니까? 때로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인생 의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 기나긴 침묵속에서도 하나님은 홈런을 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요즘 새벽 큐티가 에스더 성경 입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오묘한 섭지가 마치 ‘우연의 일치’ 처럼 가장되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스더 6장을 보면 그것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왕이 그날 밤에 잠을 못자게 된 것이 우연일까요? 그 잠못이루는 밤에 역사기록을 더듬어 볼 생각이 난 것이 우연일까요? 그 많은 조각난 역사기 록물 중에서 하필이면 모르드개 사건 기록을 꺼내어 온 것이 의도된 목적이었을 까요? 모르드개의 사건을 들으면서 왜 하필이면 그가 상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가 궁금하도록 생각이 든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하필이면 하만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우리 인생에도 이와 같은 역사가 반복됩니다.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상황이 돌아간 것이, 그것이 그렇게 돌아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이 우연의 일치일 까요? 사람들은 두 가지로 결론을 내립니다. 맞아, 그건 우연히 그렇게 된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까닭이 있겠어? 또 다른 하나는 ‘아, 맞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한 가운데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 하나님의 섭리 혹은 뜻이야’ 결국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아닌가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갈라집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하나님 의 섭리를 믿고 있는 것일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계셨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그냥 헛되게 보내지 않습니 다. 불평하거나 원망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망과 불평 을 음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 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현실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것 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습니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 1%의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침묵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으신 우리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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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
    아름다운교회 Jun 12.2022 우리 교회의 선교 과제
    팬더믹을 3년 지나는 동안에 인류사회는 많은 변화와 몸살을 겪게 되었습니다. 가장 피부에 맞닿아 있는 것은 경제문제일 것입니다. 정부 도움 때문에 팬데믹 동안 삶이 나아졌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짜 돈을 받았으니 풍성한 삶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회적 비용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앙갚음(?)으로 우리 곁에 찾아와서 고통은 더 배가 되는 듯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위기가 겹쳤다고 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제 눈에는 모든 유통과 생산의 혼란을 팬데믹이 초래했다고 보여지는 것은 어쩔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사회적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그 폐해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나마 다원주의 (post-modernism)으로 인해 신앙생활에 타격을 입던 차에 팬데믹은 그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어치피 당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더욱 불에 기름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탈종교화,탈 교회화 현상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과거에는 교회는 필수 사항이었다면 이제 교회는 선택 사항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physical local church가 아니라 이젠 online church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과거에 한인 유학생들로 붐비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씻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문제일 수 있지만 전반적인 현상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인 유학생들의 유입이 이젠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지난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한인 유학생을 향한 선교가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다민족 청년들을 품는 선교를 교회가 새롭게 열어 가야겠다는 새로운 비전입니다. 그 동기는 ‘K-Pop’으로 일컬어지는 한류문화를 통한 선교입니다. 다행스럽게 BTS나 한국 드라마가 동남 아시아 혹은 중,남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서 많은 청년들이 한국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즉,각 대학에 한글을 가르치는 써클을 만들어 한국 문화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글교육과 한국음식 그리고 음악과 드라마를 통해서 접촉점을 만들어 근본적으로 교회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각 나라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얻게 된다면 여기에 앉아서 선교사를 양성하고 파송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미국 교회와 연결하여 유학생들에 대한 영어능력 향상을 돕도록 하면 아주 훌륭한 선교의 hub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가슴 설레는 꿈입니다. 이제 생각이 들었는데 이것을 놓고 그동안 기도를 하는데 그 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끼며,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을 주시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시대가 점점 어렵게 발전해 간다고 해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꿈이 있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역류해 갈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습니다. 문제는 꿈이 없는 것이겠지요. 성경에도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은 익숙해져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풍랑을 만나도 풍랑속을 잘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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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
    아름다운교회 Jun 05.2022 장점과 단점, 무엇을 볼 것인가?
    어느 신문사에서 어떤 분이 옷을 입을 것을 놓고서 정 반대의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한쪽에선 그 옷은 한국에서 안파는 것이어서 특혜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선 정상적으로 유통된 것이라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다같이 취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두고서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짧은 생각으로 얻은 결론은 서로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방향이 설정되면 진실은 너무나 쉽게 가려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0 눈에는 0만 보인다’는 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보고 싶은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런 편향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어떨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개인의 성격 이나 삶의 성향이나 배경등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받은 ‘한 형제요 자매’ ‘한 몸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몸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심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중심으로 사지 백체가 있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몸은 하나이지만 다양성이 있는 반면에 ‘상호성’이 있습니다. 각각의 다름이 하나됨을 방해하지 않고 서로 합하여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삼위일체의 신비처럼 신비한 연합입니다. 다른 듯 하지만 같고, 하나인 듯 하지만 여럿이고, 혼자 하는 것 같지만 같이하는 이 여러 비밀들이 작동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싫은 사람의 단점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눈에 콩깍지가 씌여서 장점만 보입니다. 이것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장점’을 볼수 있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내재합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단점이 아니라 바로 ‘장점’입니다. 사람은 ‘단점’으로 일하지 않고 ‘장점’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천재는 머리가 명석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도 수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한 가지 때문에 인정을 받습니다. 그동안 실패한 것이 많으니 너는안돼! 이것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 가운데 빛나는 한 가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손에게 다리 역할을 못한다고 잘라버릴 수 없습니다. 다리에게 손역을 잘 못한다고 비난해서도 안됩니다.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역시 장점도 있는 법이지요. 단점 때문에 미움이 더 커지게 보일 때, 장점으로 덮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다 할 수 있다면 아무나 감동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면, 내가 ‘포행자요, 핍박자요,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보면 남의 단점이 보일 수 없습니다. 내 단점보다 남의 단점이 더 크게 보이면 우리는 가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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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
    아름다운교회 May 29.2022 무엇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가?
    목회를 하면서 받은 사랑과 혜택이 참으로 과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사랑과 섬김을 받을 때엔 부끄럽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혼자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에 누구 하나 없이는 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섬김과 사랑을 귀히 받으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오랜 기간을 목회하다가 보니 가끔은 우리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의 세미나 혹은 목회자 모임등에서 위로와 격려, 배움과 깨달을 많이 얻기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세미나와 교육훈련들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감동이 남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그 모임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교회나 기관에서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 때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오시는 손님맞이하는 것이 격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러 호텔에 들어갔는데 그 방에 이름이 쓰인 메모지에 환영인사를 적어서 두고, 꽃을 꽂아 두었습니다. 방에서 마실 음료수와 선물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썼다니, 고개가 숙여지고 이 행사를 준비한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절로 올라옵니다. 음식을 해도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고급호텔의 식탁세팅과 비교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 자체였습니다. 다 돈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의 재능을 살려서 준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serving하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마치 주인을 섬기는 종들처럼 공손하고 훌륭한 매너를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시간이 남아도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의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등등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휴가까지 내면서 오시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이 절로 올라옵니다. 많은 모임을 가보고, 수많은 접대를 받아보아도 형식적으로 대접하는 것과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냥 밥만 먹고 가고, 잘 쉬었다 가면되지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수준에서 맞도록 거기까지만 해도 되는데 뭐 더 나가냐는 사람의 시선도 읽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임은 감동이 없습니다. 왜냐면 말은 안해도 그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초청해서 행사를 치룬 ‘북미주 학사장교 목회자 켠퍼런스’는 어했을까요 나름대로 정성으로 잘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이 섬김의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제가 깜짝 놀랄만큼 우리 교우들의 사랑과 섬김의 마음이 큰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 목회자들은 서로 처음 보는 분들입니다. 오랜 친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와서 머무는 짧은 기간동안 이구동성으로 칭찬과 감동과 사랑 그리고 부러움이 가득 담긴 은혜가 넘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하나같이 그 사랑과 정성의 그림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은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감동,그 자체였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돌아가시는 분들의 마음에는 따뜻한 생기가 돌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만큼 우리 성도님들 한분 한분의 정성과 사랑이 컸습니다. 감동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에 감동은 없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은혜로 감당할 때 감동이 옵니다. 이번 모임이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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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9
    아름다운교회 May 22.2022 능력의 발전소
    기쁨이 사라진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 혹은 가정 생활은 행복이 아니라 고역입니다. 억지 웃음을 지어야 하고,행복하지도 않은데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내 속 은 그렇지 않은데 그래야 하는 것들은 정말 고역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 생활 혹은 직장생활은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냐면 내게는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돈받고 일을 하니 좋아도 하고,싫어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 혹은 신 앙생활은 돈을 받고 하지 않고 돈을 내며 합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감사, 선교, 건축등의 이유로 우리는 헌신을 합니다. 자기 돈을 내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면 주인노릇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저 돈내고 죽도록 충성하는데도 이 땅에서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 나라와 주님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데가 없습니다. 자기 돈내고, 죽도록 일하고, 칭찬도 못받는데도 마음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가 알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알게해 주셔서 그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니다. 이것을 모르면 짜증이 나고,손해의식 혹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신앙생활하려면 이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고역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헌신이 고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으로 시작했다가 고역으로 끝나게 되는 것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결국 이 고갈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물론 다른 환경이나 사람이 나를 시험들게 만들어 그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도 나의 문제입니다. 바다는 물을 가려받지 않습니다. 오염된 물이든 깨끗한 물이든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도 바다는 병들지 않습니다. 충분히 담을 그릇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이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은혜의 그릇’이 크고 넓으면 됩니다. 강이나 바다가 그렇게 오염된 것들을 받아들여도 병들지 않는 것은 ‘자정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정능력을 키우는 것은 잔잔할 때가 아닙니다. 폭풍과 같이 노도광풍이 불어서 강바닥,바다 바닥을 뒤흔들 때라고 힙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의 노도광풍과 같은 것들이 휘몰아 칠 때에는 그것은 우리로 자정능력을 키워주는 은혜의 방편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의 인격을 갈고 닦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곧잘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그것을 일으키는 힘, 그것은 전기를 발전하는 힘인데 우리는 그 힘이 ‘말씀과 기도’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능력의 발전소입니다. 능력의 발전소가 고갈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라지고 기도가 사라진다는 것은 발전하는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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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8
    아름다운교회 May 15.2022 죄가 반드시 가는 곳
    20년 동안 도박에 중독되어 지독한 어려움과 아픔을 겪던 어느 형제가 기적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를 믿게 되면서 하루 아침에 도박중독을 끊어내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사는 그 동안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이 마를 낳이 없이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몇 년간의 꿈과 같은 은혜의 시간을 보내고 지난 팬데믹 기간동안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성도들과의 교제도 소원해지면서 점차 무료함을 느끼던중 우연히 딱 한번 카지노를 지나가다가 재미삼아 게임을 했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지요? 그때부터 끊었던 도박에 대한 양수가 살아나면서 그냥 재미로, 이번만 하는 순간에 상당한 돈을 잃어버리고 정신이 바짝 들어보니 '지금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저는 도박의 도시에 살면서 이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카지노에 가서 돈을 따는 순간 망하는 길로 들어섭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아채리고 처음 카지노 가는 사람을 신기하게 알아차리고 돈을 따게 해줍니다. 그러니 돈을 따서 돈 맛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돈을 따는 줄알고 카지노 출입하다가 결국에는 망합니다. 그래서 돈을 따면 정말 안됩니다.' 내 경험을 보면 그렇더라구요. 돈을 따니까 계속 딸줄 알고 자꾸만 카지노에 출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돈을 잃는 것이 차라리 은혜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돈을 잃어도 더 카지노에 매인다고 합니다. 돈을 잃으면 오기가 생겨서 잃은 돈을 만회하고 싶은 욕심이 나기 떄문에 돈을 잃어도 카지노에 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돈을 따노 문제, 잃어도 문제인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여다 보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망하고 나서야 끝을 보게 되는것이 도박 중독입니다.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죄성,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성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근분은 욕심/탐욕입니다. 그 욕심이 우리안에 본성과 연합하는 순간 죄의 씨앗이 되고맙니다. 일단 죄의 씨앗이 심겨지면 놀랍게도 그것은 자랍니다. 그냥 묻혀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욕심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더 자랍니다. 그리고 죄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그 죄가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은 '죽음/사망'입니다. 옛말에도 '바는 도둑이 소도둑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안에서 욕심은 죄를 향하고, 죄가 결국에 맺는 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초기 단계에서 우리가 잘 정리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한번 드러내면 우리 주변의 온갖 스마트 기계들이 나의 욕구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부지런히 끌어다가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더욱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여 결국에 사망으로 끝냅니다. 우리는 은혜의 자녀들입니다. 이겨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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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08.2022 십자가는 가정의 중심
    오늘은 미국에서는 Mothers day이지만,교회력으로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현대 사회가 핵가족 중심으로 변화되면서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가족 중심으로 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 들어선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가족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작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가치 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의 첫 번째 가치도 가정중심의 활동이 주를 이루는 것도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기도 합니다. 더더구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가족은 더더욱 핵심 가치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다가 보니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깊은 곳에서는 어느 새 가족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Russell Moore목사님은 그의 책 ‘폭풍속의 가정’에서 가족 우상화’라는 단어로 기존 가치관에 풍파를 만들었습니다. 그 분의 논리는 가족 (가정) 이 정말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을 우선시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을 음미해 보면 어떤 때는 정말 우리가 가족을 우상화하고 절대 가치를 부여함으로 어느 것도 비집고 들어올 강력한 요새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가족이라는 가치는 정말 중요합니다. 부모됨도,자녀됨도,형제 자매됨 그리고 인간의 기초 사회생활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가정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부부는 부부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부모와 자녀간에도 엄청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우 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역기능 가정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시작했던 가정이 바로이 역기능의 가정을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간의 행복한, 가정에 일어난 것들은 견제와 비방 그리고 살인과 폭력등이 사라지지 않고 인류의 가정을 위협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떠난 가정의 모습입니다.가정은 행복의 원천이자,아픔의 장소입니다.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가정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간에 갈등의 연속입니다. 자녀들의 탈선에 가슴을 새하얗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부모 때문에 평생 가슴에 멍을 지고 살아가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더 큰 아픔은 그것들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드러내야 치유가 가능한데,드러내는 순간에 우리는 천박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함부러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이혼과 불신,온갖 불편한 일들이 가정안에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처럼 웃어야 하는 웃픈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Moor목사님의 말대로 가정은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아픔의 장소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장소이지만,형벌과 고통이 따르는 아픔의 장소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그래서 십자가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바라보아야 하고,십자가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 주장이 지금까지 사회 심리학적 방법으로 가정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보다 신선해 보입니다. 복음은 이것들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비록 우리의 성향들이 방해를 해도 복음을 깨달은만큼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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