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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권순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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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3.2026 믿음으로 살되, 상식을 잃지 않는 삶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자주 듣고, 또 그렇게 살고자 애씁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상식과 대립되는 개념처럼 사용하는 데 익숙해진 듯합니다. 마치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무모하게 결단해야만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상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기도로 시작했지만, 동시에 파수꾼을 세우고 무기를 든 채 일했습니다(느헤미야 4장).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활용했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지혜롭게 피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과 지혜, 믿음과 분별은 결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두 축입니다. 요셉의 삶은 이 균형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소명을 믿었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는 7년의 풍년 동안 곡식을 체계적으로 저장하는 지혜로운 행정을 펼쳤습니다(창세기 41장). 만약 요셉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며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다면, 그 땅과 많은 백성이 흉년 가운데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잠언 기자는 "지혜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언 22:3)고 말하며, 분별력 있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열매임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도,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고 합의에 이르는 상식적인 절차를 따랐습니다. 상식을 저버린 믿음은 때로 무모함으로, 심지어 무책임함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 말하거나, 재정을 무계획하게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 말하는 태도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가깝습니다(마태복음 4:7). 반대로 상식만 있고 믿음이 없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배제한 채, 오직 자기 계산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은 이 둘의 균형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되, 동시에 주어진 지혜와 분별력을 활용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결국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하나님께 드려 그 안에서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삶의 크고 작은 결정 앞에서, 우리가 무모함이 아닌 신중함으로, 그러나 두려움이 아닌 신뢰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믿음과 상식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우리를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두 날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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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3
    아름다운교회 Sep 06.2026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문 앞에 서서 사방에서 몰려오는 백성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지파마다, 마을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짐을 지고 오는 이도 있었고, 노래하며 오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광경 앞에서 다윗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왕의 자리에 앉은 다윗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왕관보다도 성전으로 향하는 백성들의 발걸음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저는 이 다윗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성도님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어떤 이는 한 주간의 피로를 채 씻어내지 못한 얼굴로, 어떤 이는 걱정을 가슴 한편에 담은 채로, 또 어떤 이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걸어옵니다. 저마다의 사정은 다르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하나입니다. 마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이 저마다 다른 길을 지나왔지만 결국 하나의 강으로 모여들듯, 이번 한 주도 각자의 자리에서 씨름하며 살아온 성도님들이 마침내 같은 자리, 같은 예배로 모여듭니다. 그 물줄기가 모여 도도한 강을 이루는 광경 앞에서, 저는 목회자로서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느끼는 이 기쁨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기쁨의 아주 작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목자가 양 떼를 세어보며 한 마리도 빠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때 느끼는 안도와 감격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분주함을 뚫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그 순간을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의 실루엣만 보고도 달려나갔던 것처럼(눅 15:20),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성전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발걸음을 알아보시고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발소리를 그 무엇보다 먼저 알아채는 법이니까요. 다윗은 왕이었지만 그 기쁨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예배자였습니다. 저 또한 목회자이지만, 주일 아침 몰려오는 성도들 앞에서는 그저 하나님의 그 크신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도 성전 문 앞에 선 다윗처럼, 몰려오는 성도님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그 크신 기쁨에 작게나마 동참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 발걸음을 옮기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도 함께 흐르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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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2
    아름다운교회 Aug 30.2026 부족함이 은혜를 채우는 통로입니다
    완벽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SNS 속 사람들은 늘 흠 없이 웃고, 성공하고, 반짝입니다. 우리는 그 틈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재촉합니다. "더 잘해야 해, 더 완벽해야 해, 부족함을 보이면 안 돼." 그렇게 애쓰다 지쳐버린 우리의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애초에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인데, 완벽해지려고 몸부림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요. 한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딸은 삐뚤빼뚤한 선으로 집을 그리고, 하늘은 초록색으로 칠하고, 해는 네모로 그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놓고 매일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딸의 그림이 완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서툰 선 하나하나에 딸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그림이 아니라, 딸이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놓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된 작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채로 나아오는 우리의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성경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한 모세를 부르셨고, 연약한 기드온을 세우셨고, 눈물로 무너진 베드로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완벽함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빈자리, 우리의 연약함 그 위에 부어집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채워져 있을 때가 아니라 비어 있을 때 가장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소중합니다. 세상은 완벽함을 요구하지만, 교회는 연약함을 용납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부족함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넘어진 이야기를 해도 괜찮고,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꺼내 놓아도 괜찮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 말씀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전하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써 완벽해 보이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공동체는 바로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가야 할 곳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을 끌어안고 함께 채워가는 곳. 그것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이유입니다. 이번 전교인 별빛수련회의 주제는 "함께, 더 아름답게"(시 133:1~3)입니다.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완벽한 시간을 만드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모자란 우리가 함께 모여, 그 빈자리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각자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내어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더 아름답게 스며들 수 있습니다.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질 때, 우리는 함께,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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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1
    아름다운교회 Aug 23.2026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 그래서 기도입니다
    베드로는 자신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마 26:33). 그의 결단은 진심이었고, 그의 의지는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자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고, 결국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이번엔 다르다",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내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고.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정직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결단과 의지만으로는 결코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나고, 굳게 다짐한 신앙의 결단이 며칠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함, 곧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육신은 약하고, 세상은 강하고, 유혹은 끈질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이 아니라, 우리보다 강하신 분을 붙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혼자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도 귀하지만, 함께 모여 드리는 기도에는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고, 함께 무릎 꿇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힘을 얻습니다. 나뭇가지 하나는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개의 가지를 한데 묶으면, 웬만한 힘으로는 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결단도 이와 같습니다. 홀로 서 있는 의지는 삶의 작은 압력에도 쉽게 부러지지만, 함께 붙들고 함께 엎드리는 기도의 공동체는 서로를 단단하게 지탱해 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묶인 나뭇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촛불 하나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꺼집니다. 그러나 여러 개의 촛불이 함께 모이면, 서로가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선 결단은 삶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꺼지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자리에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촛불을 처음 밝히시고 끝까지 지켜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함께 모여 드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이지만,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우리는 함께 묶인 나뭇가지처럼, 함께 밝힌 촛불처럼, 결코 꺾이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믿음의 공동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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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
    아름다운교회 Aug 16.2026 영혼의 양식과 호흡
    우리의 몸은 한 번에 많은 것을 채워 둔다고 해서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오늘 일주일치 밥을 한꺼번에 먹어 두고 앞으로 6일 동안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제 많이 먹었다고 오늘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매일 양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영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주일에 말씀을 들은 것으로 일주일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주일에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주일치 밥을 주일에 몰아서 먹을 수 없듯이, 말씀도 한 번에 몰아서 먹을 수 없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인 의무를 하나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때로는 한 장을 읽어도 좋고, 몇 절만 천천히 묵상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보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는 것입니다. 매일 먹는 밥이 우리의 몸을 만들듯, 매일 읽는 말씀이 조금씩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결국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흔히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숨 쉬는 것을 미루지 않습니다. “오늘은 너무 바쁘니까 저녁에 몰아서 숨 쉬어야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호흡이 멈추면 생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영적 호흡입니다. 또 이런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거의 떨어졌는데 “너무 바빠서 주유소에 갈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며 계속 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중요한 약속이 있고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어도 결국 자동차는 길 한가운데 멈추게 됩니다. 오히려 바쁠수록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것이 아니라, 바쁘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계속 달리는 삶은 언젠가 영적으로 멈춰 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 잠시라도 말씀 앞에 앉아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기도합시다. “주님, 오늘 제게 필요한 말씀을 먹여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숨 쉬게 해 주십시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배우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창한 결심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반복입니다. 매일 먹듯 말씀을 읽고, 매일 숨 쉬듯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루하루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지고, 우리의 삶은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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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9
    아름다운교회 Aug 09.2026 성경을 읽으면 인생의 큰 그림이 보입니다
    성경통독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읽기는 읽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까지는 흥미롭게 읽다가 레위기에 들어서면 속도가 느려지고, 낯선 지명과 사람들의 이름이 계속 등장하면 ‘이것을 꼭 다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통독을 시작한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경을 통독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조각이 아니라 큰 그림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퍼즐 한 조각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파란색 조각 하나를 보면 그것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조각이 연결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전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구절 몇 개만 읽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큰 그림이 성경 전체를 읽어갈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아브라함을 지나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어지고, 선지자들의 외침을 거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의 교회를 지나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성경은 더 이상 오래된 책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을 설명해 주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됩니다. 성경통독이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교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뉴스와 유튜브, SNS와 사람들의 말을 통해 무엇이 성공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으면 어느 순간 세상의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은 마치 나침반을 다시 북쪽으로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하시는구나.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구나”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삶의 방향이 조금씩 하나님께 맞추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통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성경 한 권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는 동안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 진짜 목표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루 분량을 놓쳤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말씀 앞에 앉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말씀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읽고 있었고, 나를 고치고 있었으며,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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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2.2026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 끝내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는 흔히 고민이 없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빨리 답을 찾고, 고민을 끝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답을 한 번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질문하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자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등산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굽이굽이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직선으로 올라가면 더 빠를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산길이 구불구불한 이유는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오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빠른 길보다 가장 바른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고민이라는 굽은 길이 있습니다. 또 씨앗 하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은 땅속에서 "언제 싹이 날까?", "왜 아직도 어둠 속일까?"라는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고민도 그렇습니다. 답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하나님께서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도 모두 질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손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모세는 "제가 누구이기에 갑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었으며, 하박국은 악이 왜 번성하는지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끊임없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질문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기보다 그 질문을 통해 더 깊은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민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묻고 있느냐입니다. 세상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 지혜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인생은 정답을 외우는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고민이 있다면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 고민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드는 통로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질문을 멈추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묻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결국 답보다 더 귀한 하나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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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7
    아름다운교회 Jul 26.2026 거저 받은 은혜, 거저 받은 구원
    어린 시절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잘한 아이에게는 상장이 주어졌습니다. 상장은 실력과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생일날 부모님이 건네주신 선물은 달랐습니다. 그 선물은 아이가 무엇을 잘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 때문에 받은 것이었습니다. 상장은 노력의 대가이지만, 선물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상장처럼 생각합니다. "조금 더 착하게 살면, 더 많이 봉사하면, 더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상장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 사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진 사람이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스스로 육지에 올라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몸부림은 물 위에 조금 더 떠 있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누군가 배를 타고 와 손을 내밀어 건져 주어야만 그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헤엄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건져 주시는 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었습니다. 아이는 밤낮으로 일하며 빚을 갚아 보려고 애쓰지만, 이자는 계속 불어나고 원금은 거의 줄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나타나 모든 빚을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그 순간 아이는 더 이상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얻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가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이유는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준 아버지에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값을 갚을 수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드리는 감사의 열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장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빈손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빈손이어야만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랑을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의 삶에는 의무감이 아니라 감사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 공로가 아니라 은혜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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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9.2026 AI시대, 교회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인공지능(AI)은 이제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빠르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설교 자료를 찾고,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며, 번역이나 행정 업무를 돕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AI를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사역의 효율을 높이고 복음을 전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발전할수록 교회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진리로 믿고 있는가?" AI는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내지만, 그럴듯한 말이 언제나 진리는 아닙니다. AI는 진리를 분별하거나 책임지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보를 확신에 찬 말투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AI가 제시하는 성경 해석이나 신앙적인 조언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스마트폰만 열면 수많은 설교와 신학 강의, 신앙 콘텐츠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보가 넘칠수록 말씀을 직접 읽고, 기도하며,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분별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 그리고 교회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경보다 검색 결과를 신뢰하고, 기도보다 기술의 분석을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알고리즘의 판단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AI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목회하시는 동기 목사님에게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신앙상담을 AI에게 받으라 기도의 자리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AI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수많은 거짓과 미혹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미혹은 노골적인 거짓이 아니라 진실과 매우 비슷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보가 많아질수록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자 진리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AI는 성경을 요약할 수 있지만 말씀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고, 기도문을 작성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기술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에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뛰어난 기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AI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보다, 항상 말씀 위에 굳게 서 있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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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5
    아름다운교회 Jul 12.2026 영광을 본 사람은 십자가를 견딜 수 있습니다
    한 마라톤 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승선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결승선이 보이는 순간, 다리에 힘이 다시 생기더군요." 결승선을 바라보는 소망이 현재의 고통을 이길 힘을 준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사건 직후 예수님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영광을 먼저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영광을 본 사람만이 십자가를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등산을 해 본 사람들은 정상에 올랐을 때의 풍경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순간에도 "조금만 더 가면 그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억이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게 합니다. 정상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은 내려오는 길의 피곤함까지도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영광의 기억은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 말씀 가운데, 기도 가운데, 또는 삶의 작은 은혜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경험은 단지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순종과 희생, 그리고 인내의 길을 걸어갈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현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크고 분명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신앙생활은 '감동을 찾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보여주신 영광을 붙들고 현실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산 위의 영광은 산 아래의 삶을 위한 준비였습니다.혹시 지금 감당하기 버거운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셨던 은혜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광의 기억은 오늘의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영광을 본 사람은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산 위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 아래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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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4
    아름다운교회 Jul 05.2026 맥추감사절, 첫 열매를 드리는 믿음
    이스라엘 백성에게 맥추절은 단순한 추수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에서 거두게 하신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였습니다. 성경은 맥추절을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출애굽기 23:16)라고 부르며, 추수의 시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도록 명령합니다. 백성들은 가장 먼저 거둔 밀을 자신의 창고에 들이기 전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농사를 짓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맥추절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 줍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수많은 '첫 열매'가 있습니다. 건강하게 한 해의 절반을 지나오게 하신 은혜, 가정과 일터를 지켜주신 은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신 은혜,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또한 맥추절은 앞으로 남은 추수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절기였습니다. 첫 열매를 드린다고 해서 추수가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직 거두지 않은 더 많은 열매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먼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앞으로의 수확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풍성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을 지나왔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들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남은 시간도 동일한 은혜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번 맥추감사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며 믿음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는 지나온 은혜를 기억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신실하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올해의 맥추감사절이 우리 모두에게 감사와 믿음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절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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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3
    아름다운교회 Jun 28.2026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없애거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삶입니다. 세상은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맞추어 가는 여정입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힘든 일을 견디거나 어려움을 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난이 곧 십자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기꺼이 감당하는 희생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정직하게 살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것,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세상의 성공보다 하나님 나라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한 성도가 직장에서 중요한 승진 기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상사는 실적을 조금만 과장하면 충분히 승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직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승진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승진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실패자라고 평가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진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애쓴다고 해서 온전히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여전히 내 뜻과 욕심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새롭게 하시고,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순종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순종을 기쁨으로 여기게 되고, 손해처럼 보였던 길에서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삶도, 십자가를 지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일 한 시간 예배를 드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매일의 선택 속에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욕심보다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작은 순종이 쌓여 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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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1.2026 진리 안에 거하는 교회, 미혹을 이기는 성도
    최근까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새벽마다 묵상하면서 초대 교회 안에도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단이 침투한다면 그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단이 교회를 공격하고 이단 사상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려 할 때, 성도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성도는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서 지속적으로 훈련할 때 자라납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유가 있습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 매일같이 수많은 지폐를 세다 보면, 진짜 지폐의 질감과 무게, 인쇄의 특징이 손에 익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가짜 지폐 한 장이 섞여 들어오면, 그것을 자세히 비교하지 않아도 이상함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진리를 묵상하며 살아갈 때, 무엇이 참된 복음이고 무엇이 왜곡된 가르침인지 자연스럽게 분별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형성됩니다. 반대로 말씀에 익숙하지 않은 신앙은 쉽게 혼합된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나 흥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개인의 느낌이나 인기 있는 주장, 혹은 공동체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 자신의 기준을 세울 때, 비로소 진리와 왜곡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자라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건강한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단 사상은 대개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나만 아는 특별한 진리”, “교회는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계시”라는 말로 접근할 때, 사람은 공동체의 검증에서 벗어나 쉽게 미혹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지도자들과 열린 대화를 지속하며, 신앙을 개인의 판단으로만 끌고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에게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교회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일은 단지 외부를 향한 판단이 아니라, 내 안의 믿음이 과연 복음 위에 굳게 서 있는지를 돌아보는 과정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언하는 참된 주님이신지, 아니면 내가 편하게 만들어 놓은 예수는 아닌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결국 이단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응은 과도한 논쟁이나 공격이 아니라, 더욱 깊은 말씀 묵상과 더욱 견고한 복음 중심의 삶입니다. 진리는 스스로를 지키는 능력이 있으며, 빛은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결국 그것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 빛 안에 거함으로써 미혹을 이기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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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
    아름다운교회 Jun 14.2026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치참여
    선거철이 되면 사회 전체가 뜨거워집니다. 최근 한국에서 있었던 선거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고, 선거 결과를 두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치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부분에 대해 한번은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외면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국가의 권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 안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롬 13:1).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무관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투표는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회적 책임이며, 우리는 양심과 믿음 안에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선거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지 후보가 반드시 승리해야만 나라가 살아날 것처럼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정권도 완전할 수 없으며, 어떤 정치 지도자도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정치적 갈등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복음을 믿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판단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이 제자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내가 지지했던 사람뿐 아니라 내가 지지하지 않았던 지도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공의를 주시고, 이 나라가 평안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선거는 끝났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역사는 계속됩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왔든 그렇지 않든, 세상의 주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책임 있게 참여하되 정치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시민으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시대와 어떤 정부 아래에서도 교회의 사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특정 진영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정치가 아니라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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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07.2026 누가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인생의 운전대는 내가 잡고 살아가려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업이 잘될 때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했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계산과 경험을 더 신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왔고,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능력을 더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기도 가운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주님께 도와 달라고는 했지만, 정작 주님께 제 삶을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제 계획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신기하게도 문제가 즉시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에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평안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환경은 그대로였지만,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을 켜 놓고도 운전자가 계속 자신의 길만 고집하면 결국 길을 잃게 됩니다. 내비게이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안내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내 생각과 내 뜻만 고집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일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히 살아가되,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삶입니다. 성공보다 순종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삶입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긴 시간 동안 베드로를 다루시며 결국 그 고백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입술뿐 아니라 삶으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제 삶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제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운전대를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안전한 길을 걷게 됩니다. 비록 그 길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그 길의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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