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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권순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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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8.2026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없애거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삶입니다. 세상은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맞추어 가는 여정입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힘든 일을 견디거나 어려움을 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난이 곧 십자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기꺼이 감당하는 희생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정직하게 살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것,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세상의 성공보다 하나님 나라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한 성도가 직장에서 중요한 승진 기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상사는 실적을 조금만 과장하면 충분히 승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직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승진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승진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실패자라고 평가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진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애쓴다고 해서 온전히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여전히 내 뜻과 욕심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새롭게 하시고,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순종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순종을 기쁨으로 여기게 되고, 손해처럼 보였던 길에서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삶도, 십자가를 지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일 한 시간 예배를 드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매일의 선택 속에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욕심보다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작은 순종이 쌓여 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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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1.2026 진리 안에 거하는 교회, 미혹을 이기는 성도
    최근까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새벽마다 묵상하면서 초대 교회 안에도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단이 침투한다면 그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단이 교회를 공격하고 이단 사상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려 할 때, 성도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성도는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서 지속적으로 훈련할 때 자라납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유가 있습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 매일같이 수많은 지폐를 세다 보면, 진짜 지폐의 질감과 무게, 인쇄의 특징이 손에 익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가짜 지폐 한 장이 섞여 들어오면, 그것을 자세히 비교하지 않아도 이상함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진리를 묵상하며 살아갈 때, 무엇이 참된 복음이고 무엇이 왜곡된 가르침인지 자연스럽게 분별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형성됩니다. 반대로 말씀에 익숙하지 않은 신앙은 쉽게 혼합된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나 흥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개인의 느낌이나 인기 있는 주장, 혹은 공동체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 자신의 기준을 세울 때, 비로소 진리와 왜곡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자라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건강한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단 사상은 대개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나만 아는 특별한 진리”, “교회는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계시”라는 말로 접근할 때, 사람은 공동체의 검증에서 벗어나 쉽게 미혹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지도자들과 열린 대화를 지속하며, 신앙을 개인의 판단으로만 끌고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에게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교회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이단을 분별하는 일은 단지 외부를 향한 판단이 아니라, 내 안의 믿음이 과연 복음 위에 굳게 서 있는지를 돌아보는 과정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언하는 참된 주님이신지, 아니면 내가 편하게 만들어 놓은 예수는 아닌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결국 이단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응은 과도한 논쟁이나 공격이 아니라, 더욱 깊은 말씀 묵상과 더욱 견고한 복음 중심의 삶입니다. 진리는 스스로를 지키는 능력이 있으며, 빛은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결국 그것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 빛 안에 거함으로써 미혹을 이기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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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14.2026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치참여
    선거철이 되면 사회 전체가 뜨거워집니다. 최근 한국에서 있었던 선거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고, 선거 결과를 두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치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부분에 대해 한번은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외면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국가의 권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 안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롬 13:1).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무관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투표는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회적 책임이며, 우리는 양심과 믿음 안에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선거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지 후보가 반드시 승리해야만 나라가 살아날 것처럼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정권도 완전할 수 없으며, 어떤 정치 지도자도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정치적 갈등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복음을 믿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판단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이 제자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내가 지지했던 사람뿐 아니라 내가 지지하지 않았던 지도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공의를 주시고, 이 나라가 평안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선거는 끝났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역사는 계속됩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왔든 그렇지 않든, 세상의 주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책임 있게 참여하되 정치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시민으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시대와 어떤 정부 아래에서도 교회의 사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특정 진영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정치가 아니라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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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07.2026 누가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인생의 운전대는 내가 잡고 살아가려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업이 잘될 때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했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계산과 경험을 더 신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왔고,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능력을 더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기도 가운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주님께 도와 달라고는 했지만, 정작 주님께 제 삶을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제 계획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신기하게도 문제가 즉시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에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평안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환경은 그대로였지만,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을 켜 놓고도 운전자가 계속 자신의 길만 고집하면 결국 길을 잃게 됩니다. 내비게이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안내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내 생각과 내 뜻만 고집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일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히 살아가되,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삶입니다. 성공보다 순종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삶입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긴 시간 동안 베드로를 다루시며 결국 그 고백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입술뿐 아니라 삶으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제 삶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제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운전대를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안전한 길을 걷게 됩니다. 비록 그 길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그 길의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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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31.2026 주님의 방식과 시간을 신뢰하는 믿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해 주시기를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맡긴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이로가 기대했던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혈루증 앓던 여인을 만나 시간을 지체하셨고, 결국 야이로의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 늦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죽음을 통해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느 간증자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는 오랫동안 선교사로 헌신하기를 꿈꾸며 준비했습니다. 신학교를 마치고 선교지로 나갈 날만 기다렸지만, 예상치 못한 건강 문제로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 치료를 받으며 그는 하나님께 수없이 물었다고 합니다. "왜 지금입니까? 왜 저를 막으십니까?" 시간이 지나 건강이 회복된 후 그는 선교지 대신 난민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아픔과 상실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내 길을 막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하나님은 내 계획을 무너뜨리신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길로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계획했던 일이 무산되고, 기다림이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쉽게 낙심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모든 상황이 이해될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에도 "왜 이렇게 늦으십니까?"라고 묻게 되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보다 느린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식은 언제나 가장 선하며, 주님의 시간은 언제나 가장 정확합니다. 오늘도 나의 계획보다 크신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나의 시간표보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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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24.2026 AI 시대,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요즘 우리는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를 지나, AI 없이는 일상이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번역을 하고, 정보를 찾고, 그림을 만들고, 상담까지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분명 AI는 우리 삶에 큰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하게 해 주고,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 주며, 때로는 인간의 한계를 보완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AI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지고 있는가?” 최근 저도 AI를 여러모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용하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AI는 참 친절합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쉽게 화내지 않고, 언제든 대답해 주며,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심지어 AI가 잘못된 정보를 주었을 때 야단을 치면 AI는 금방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얼마나 쿨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AI를 아무 생각없이 계속 사용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오해도 생기며, 감정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AI는 그런 피곤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창 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편리함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고, 부딪히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AI는 우리의 일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외로움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정보를 줄 수는 있어도 진심 어린 손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감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함께 눈물 흘리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점점 사람보다 AI와의 관계를 더 편하게 여기게 된다면, 인간 사회는 점점 더 고립되고 차가워질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그런 시대 속에서 더욱 중요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식사하며, 서로를 품어 주는 공동체 말입니다. 기술은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관계를 잃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더 사랑하고, 더 만나고, 더 대화해야 합니다. AI 시대에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똑똑한 기술을 가지느냐”보다 “얼마나 따뜻한 인간으로 살아가느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기계처럼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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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17.2026 하나 됨을 지키는 교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너희”라는 표현이 복수형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성도 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그 공동체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단순히 같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인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린도교회는 분열과 갈등이 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아볼로를 따른다며 서로 편을 나누었습니다. 은사는 풍성했지만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여기서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공동체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의를 앞세울 때 교회는 세워지기보다 무너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분열을 그토록 싫어하실까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완전한 하나 됨 가운데 존재하십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거룩함의 표지가 됩니다. 세상도 이익을 위해서는 하나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익이 사라지면 관계도 쉽게 무너집니다. 반면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에 그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 됨도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지혜 있다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참된 지혜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서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부족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 은혜 안에 머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전에 들은 한 목사님 부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재정과 생활의 모든 부분을 직접 관리하셨고, 사모님은 운전조차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목사님이 먼저 돌아가시면 사모님은 어떻게 사시나”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목사님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사모님은 주변을 섬기고 베풀며 평안하게 너무나도 잘 살아가셨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을 붙드는 것은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모습도 바로 이것입니다. “나만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품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완벽함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힘써 지켜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함께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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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10.2026 여전히 유효한 부모공경에 대한 명령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의를 지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 공경을 관계의 깊은 연합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에서 룻은 모든 것을 잃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해 “붙좇았더라”고 기록됩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다바크(dabaq)”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곁에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접착제로 붙은 것처럼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결속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 단어를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관계를 설명할 때에도 사용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삶과 자신의 삶을 하나로 묶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사실 룻의 선택은 현실적으로 보면 손해처럼 보이는 선택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가난한 과부였고, 룻은 이방 여인이었기에 베들레헴으로 간다 해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별과 가난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룻의 다바크의 삶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헌신과 사랑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고, 결국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들어가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관계를 계산적으로 바라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는 붙잡고, 손해가 될 것 같은 관계는 쉽게 멀어지려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부모님께서 건강하시고 강하실 때는 괜찮지만, 연약해지시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하면 어느새 부담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다바크가 필요한 때입니다. 룻처럼 가장 연약한 순간에도 끝까지 곁을 지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자 부모 공경입니다. 부모 공경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돕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 담긴 외로움과 자부심을 이해해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께 의존하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이제는 부모님을 나의 든든한 울타리 안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부모 공경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시며 약속도 함께 주셨습니다.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룻의 다바크의 삶처럼, 부모를 향한 사랑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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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03.2026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
    창세기 36장과 37장은 나란히 읽으면 독특한 대비를 이룹니다. 같은 “족보”를 다루고 있지만, 형식과 강조점은 분명히 다릅니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족보를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나열하는 반면, 37장은 야곱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곧바로 요셉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문학적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의도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36장의 에서 족보는 매우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손들의 이름, 족장들, 왕들의 계보까지 상세히 나열되며, 한 민족의 형성과 번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들”이라는 표현은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강조합니다. 이는 에서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이미 강력한 국가 체계를 이루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에서의 족보는 “이미 완성된 역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과의 언약이나 신앙의 흐름이 중심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면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되는 야곱의 족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는 선언 뒤에 곧바로 요셉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단순한 이름 나열이 아닌 사건 중심의 서사로 확장됩니다. 이것은 야곱의 가문이 아직 “진행 중인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 즉 언약의 계보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가 이야기로 바뀐다는 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혈통을 기록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차이는 결국 선택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해 있지만, 언약의 계승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빠르게 번성하고 안정된 체계를 이루었지만, 성경은 그들을 중심 이야기로 이어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야곱의 족보는 아직 부족하고 갈등과 고난이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중심 통로로 계속해서 조명됩니다. 결국 창세기 36장과 37장의 차이는 “무엇이 중요한 역사인가”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눈에는 에서의 족보가 더 성공적이고 완성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려하게 완성된 역사보다,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야곱의 족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이 대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성공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아직 미완성일지라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 속에 머물기를 원하는가. 창세기의 두 족보는 우리 삶의 방향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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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4
    아름다운교회 Apr 26.2026 십자가를 살아낸다는 것
    십자가를 살아낸다는 것은 단순히 고난을 감수하거나 종교적인 상징을 마음에 두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믿는다”는 차원에서 이해하지만, 성경은 믿음을 “따른다”는 차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십자가를 살아내야 할까요? 첫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외면한 신앙은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참된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방향이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는,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삶에서 살아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삶에서 드러내고, 참된 제자의 길을 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얻는 길로 날마다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를 살아낼 수 있을까요? 첫째는, 매일의 결단 속에서 나를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상의 선택—말 한마디, 반응 하나, 양보하는 태도—속에서 “내가 옳다”는 고집을 내려놓는 것이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동기를 드러내고,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다시 정렬시킵니다. 셋째는, 관계 속에서 용서와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뿐 아니라, 깨어진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고난을 피하지 않고 의미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단순한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가시는 자리로 바라볼 때 십자가는 실제가 되는 것이죠. 십자가를 살아낸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날마다 무너지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다시 세우는 과정입니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와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얼핏 우리에게 너무나 부담스럽고 무거운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 길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그 길을 걸어가다보면 이상하리만큼 가볍게 해 주시는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라고 말씀해 주신 주님의 말씀처럼 말이죠. 십자가를 살아냄으로 그 속에 담긴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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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
    아름다운교회 Apr 19.2026 전쟁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빛
    중동 지역은 오랜 시간 동안 전쟁과 갈등, 그리고 긴장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이어지는 분쟁과 위기의 소식들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는 놀라운 영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슬람권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즉 무슬림 배경 신자(MBB, Muslim Background Believers)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교 전문가들은 지난 수십 년간 일어난 개종자보다, 최근 전쟁과 혼란의 10년 사이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무슬림의 수가 훨씬 더 많다고 보고합니다.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전쟁은 절망과 파괴만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혼란 가운데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시고, 참된 소망을 찾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많은 간증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꿈과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밤을 지새우던 이들이 꿈속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복음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기존의 신념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참된 평안은 어디에 있는가?”-을 던지게 되고, 그 질문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공동체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그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며 작은 교회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핍박과 위험 속에서도 그들은 더욱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며, 오히려 초대교회의 모습과 같은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들으며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절망으로 가득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구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둘째,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땅에 직접 갈 수는 없을지라도, 기도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중동의 땅에 복음의 빛이 더욱 밝히 비추어지도록, 그리고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이들이 믿음 안에서 굳게 서도록 중보해야 합니다. 전쟁의 소식만이 들려오는 그 땅에서, 사실은 생명의 복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며, 우리 역시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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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
    아름다운교회 Apr 12.2026 증인의 삶을 실천하는 방법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으로, 단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 사건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드러내라는 것이죠. 우리는 흔히 ‘증인’이라는 단어를 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로 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증인은 삶 전체로 진실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법정에서의 증인이 자신이 본 것을 사실 그대로 증언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변화의 이야기를 삶으로 증언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을 오늘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본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둘째, 변화된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증인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건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하며 살고,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을 흘려보냅니다. 우리의 말보다 더 강력한 증언은 우리의 태도와 선택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작은 변화들이 바로 살아있는 증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셋째,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관계 속에서 긴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증인은 침묵보다 진실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넷째, 일상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특별한 순간’이나 ‘준비된 자리’에서만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각자의 자리로 보내셨습니다. 가정, 직장, 학교, 친구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거창한 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한 마디, 따뜻한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증인의 삶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성령을 받은 후에야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부담이 아니라 초대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에 우리의 삶을 참여시키시는 부르심인 것이죠. 오늘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말과 삶으로 그 이야기를 이어가는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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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
    아름다운교회 Apr 05.2026 부활을 "지금" 살아낸다는 것
    부활은 단지 2,000년 전의 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활을 기념일이나 교리로만 머물게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야 할 실제입니다. 그렇기에 부활 신앙은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선언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부활의 능력은 단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와 두려움, 절망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현재 살아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새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하고, 절망 대신 소망을 붙들며, 두려움 대신 믿음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삶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고통과 불확실함으로 가득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 현실 속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환경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을 현재 살아낸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해를 이루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외면하지 않고,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그것이 부활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부활은 또한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을 얻은 자로서, 그 생명을 나누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작은 친절, 우리의 진실한 사랑, 우리의 섬김은 이 세상 속에 부활의 흔적을 남깁니다. 결국 부활을 현재 살아낸다는 것은 특별한 순간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 속에서 드러나는 선택입니다. 오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어떤 태도로 문제를 마주하는지가 곧 부활 신앙의 표현입니다.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삶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선택을 통해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오늘도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부활을 살아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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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
    아름다운교회 Mar 29.2026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기념일'을 맞이합니다. 누군가의 생일이나 소중한 약속이 있었던 날을 기념할 때, 우리는 대개 과거의 한 지점을 추억하며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과의 성찬(Lord’s Supper)에서 하셨던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라는 권유 그 이상의 신비로운 초대입니다. 헬라어에서 “기념”을 뜻하는 “아남네시스(Anamnesis)”는 우리말의 “추억”과는 결이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과거에 일어났던 단회적인 사건을 오늘 나의 삶의 자리로 고스란히 불러와 “재현(Representation)”한다는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성찬은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를 살리는 “현재 진행형의 사랑”임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시간인 것이죠. 우리가 건네받는 작은 떡 한 조각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는 우리 죄를 씻기 위해 흘리신 새 언약의 피입니다. 주님은 왜 "나를 생각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굳이 "먹고 마시며 기념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머릿속 지식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음식이 우리 몸의 영양분이 되어 우리를 살게 하듯, 주님의 희생이 내 영혼의 실제적인 양식이 되어 나를 존재하게 함을 고백하는 전인격적인 연합의 선포인 것입니다. 또한, “아남네시스”의 신비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습니다. 같은 떡을 나누고 같은 잔을 마시는 곁의 성도들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공유한 “거룩한 혈연 공동체”입니다.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과 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 자리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열릴 영원한 잔치를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기쁨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성찬을 대할 때마다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깊이 주님을 대면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 손에 쥐어진 작은 떡 조각 위로, 나를 향해 쏟으셨던 주님의 그 뜨거운 눈물을 느껴보십시오. "내가 너를 결코 잊지 않았고, 지금도 너와 함께 먹고 마신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아남네시스”의 은혜를 통해 여러분의 영혼에 선명하게 새겨질 것입니다. 성찬의 자리를 떠나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때, 우리 몸에 새겨진 그 사랑의 흔적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위해 기꺼이 찢기신 그 생명을 모셨기에, 이제 우리도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살아있는 성찬”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살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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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2.2026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
    전쟁과 갈등, 그리고 끊임없는 분열의 소식이 가득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갈등이 쉽게 일어나고,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판단하고 나누는 모습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태복음 5:9). 이 말씀은 단순히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화평을 이루는 삶입니다. 성경을 보면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갈등 속에서 다투기보다 먼저 양보하며 관계의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참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에베소서 2:14)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화평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 속에서 화평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속한 모든 자리에서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갈등 속에서 한 걸음 먼저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오해를 풀기 위해 대화를 시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누군가의 아픔을 들어 주고 품어 주는 것만으로도 화평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화평을 이루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고, 먼저 용서해야 할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공동체를 회복시키시고,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 한 명이 있을 때 가정이 살아나고, 공동체가 따뜻해지며, 교회가 더욱 건강해집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화평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랑과 이해, 그리고 화해가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조금 더 이해하려 하고, 먼저 사랑하려 할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평을 누릴 뿐 아니라, 그 화평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조금씩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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