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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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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9.2019 표류인생
    벌써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시간은 어김없이 바위에 붙들어 매두어도 어떤 정점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갑니다. 누가 소리를 치거나 왜 그리 빠르냐고 불평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 정점은 ‘심판’이라는 정점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가 서야할 심판의 정점을 향해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019년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때도, 주님의 날도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날을 계수할 지혜를 얻게 하소서”(시90:12).생각해보면 지난 한 해가 번개와 같이 번쩍이듯 사라졌지만, 개미같은 짧은 시간을 살면서 정말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지나갔습니다. 큰 일에서부터 작은 일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에서부터 영원히 기억할 일까지 많은 일을 겪으며 한 해를 지나왔습니다. 때로는 고통과 아픔의 시간앞에서 한숨과 원망의 숨을 쉴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은혜와 풍성한 격려로 위로를 받고 감사한 때도 있었습니다. 참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과 생각의 관점앞에서 울고 웃는 일들이 많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느 cartoon에 이런 그림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자그마한 무인도에 한 사람이 표류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날마다 지나가는 배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마침내 작은 배가 다가옵니다. 그 사람은 ‘야!! 배다!!’ 기쁜 마음으로 구조될 것을 바라며 기대에 차 있습니다. 반면에 다가오는 배에는 지난 폭풍우로 인해서 파선되어 표류하는 배였습니다. 이 배에의 사람은 땅이 그립습니다. 땅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며 떠내려 온 것입니다. 마침내 한 사람이 살고 있는 무인도를 발견하고서 소리를 지릅니다. “야!! 뭍이다!! 땅이다!!” 이것이 관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둘다 표류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표류 인생이 어느 관점에서 보든 달라지지 않습니다. 절망이라는 것 말이지요. 아, 혹시 모르지요, 표류하는 인생 둘이 만나서 지금까지 겪은 어려움보다 더 잘 견딜 수 있을지도 말입니다.우리의 인생이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든지 어쩌면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쁜 것만 곱씹으며 산다는 것은 지옥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기주의에 쉽게 빠집니다만, 표류하는 것이 인생이고, 이래 가든 저래가든 무인도의 사람이나 난파선의 사람이나 한 인생을 사는 것인데, 거기에 진짜 구원선인 예수를 만난 기분은 어떨까요? 한 해를 달려왔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무인도나 표류선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피조물’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마치 신혼부부처럼 그런 믿음의 행복을 만나며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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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2.2019 복음이면 다입니다.
    성탄절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늘 영광과 능력을 버리고 오신 귀한 사랑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감사와 사랑의 카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나름대로 예쁘다고 생각해서 만들었는데, 지인들로부터 받은 성탄 트리들은 내가 가진 트리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하고 멋있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내 트리가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성탄 트리가 얼마나 크고 멋있고 화려하느냐에 의해서 성탄절이 더도 덜도 빛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안의 내용인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단 한가지 목적은 죄에 묶인 인생에게 자유함이라는 복음을 주시기 위하여입니다. 지옥으로 향하던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여러 가지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단 하나 ‘복음’ 그리고 ‘영혼구원’입니다. LA의 대표적인 부흥하는 한 교회가 있습니다. 단 기간에 괄목할 성장을 이룬 교회라고 해서 저 역시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예배 시설과 친절한 사람들의 봉사 그리고 깔끔한 예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의 관심에 오르내리고 보니 이런 저런 소문도 많이 들렸습니다. 이번에 어느 목사님에게 들은 소식은 그 교회의 규모가 아무리 늘어나도 재정규모가 늘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치원을 운영하니 젊은 부부들의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교인의 증가로 이어지나 여전히 재정과 일꾼의 부족으로 허덕인다고 합니다. 모든 교회의 고민이라고 보여집니다.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회자로서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인데 오늘 우리의 시대는 복음은 하나의 달콤한 이야기로 남겨지고, 무슨 편의 시설의 극대화 혹은 교회의 서비스업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좋으니 괜찮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당연히 시설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편하게 예배드리고 갈 수 있는가에 고민들을 많이 하변서 각종 부대 시설이나 편의 시설을 앞다투어 들여놓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야 복음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음의 본질은 없어지고, 사람만나는 것이 좋고, 편의시설과 인간세상의 관계가 좋아서 교회를 다니고, 그 안에 생명처럼 자라는 복음은 뒷전에 밀린다면, 그래서 주님은 복음 때문에 오셨는데, 교회가 그 복음의 본질은 잃어버렸다면 정말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복음의 본질도 잃지 않고, 편한 신앙생활도 잃어버리지 않느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마치 그럴 수 있는 기적이라도 있다고 믿지만) 삶의 편안함과 신앙은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성탄절을 어김없이 보내면서, 왜 오셨는지를 묵상해 보지 않고서 우리의 즐거운 기분만이 가슴에 남는다면 무엇인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즐거움이 예수님의 생명 때문인지, Merry Christmas의 기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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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15.2019 가난해야만 들리는 소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 땅에 완벽한 인간의 옷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 여러 가지입니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일에까지 소소하게 누릴 수 있는 행복, 아마도 그것은 주어지는 여건보다는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주님이 주신 생명수와 같은 것이지 싶습니다. 비교하다보면 한없이 초라해지고 비참해지는 것이 사람인데, 그런 비교없이 현재 내가 가진 상황자체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누리는 감사한 작은 행복하나는 McDonald Senior coffee한잔을 마실 때입니다. 사무실에 손님접대용 coffee machine이 있어서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려마실수도 있지만, 맥다방 커피는 이것보다 저렴하다가 보니, 손님이 올라올 때 외에는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물론 비싼 커피를 먹는 즐거움도 남다르겠지만, 작은 돈, 60cent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마실 수 있어서 좋습니다. 맛이 좋아서일까요? 사실 그것보다는 저렴해서 마음이 편한 것이 행복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커피 한잔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감격의 눈물이 나오려하기도 합니다. 참 바보같을 수 있지만, 이 따뜻한 커피도 못먹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보았고, 정말 가난해서 커피 마시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할 시기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걱정없이 1불 하나 가지고 작은 커피를 사고도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가장 은혜를 받았습니다.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가난한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도무지 불가능한 방법으로, 말도 되지 않는 방법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화려한 인생이 아니라,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53:2)고 하였습니다.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머리둘 것도 정해지지 않는 비천한 삶을 살고,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짧은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양을 잡아 각을 뜨고 제사드리듯이 자신의 몸으로 완벽한 제사를 드리시고 이 땅의 삶을 마쳤습니다. 항상 죄인과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의 주변에서 안식과 달콤함과 평안을 누렸고, 희망과 생명의 빛을 보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오신 곳으로 가실 때조차도 가난한 자를 부탁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왜 그러하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가난한 자만이 예수님 편이라서 그럴까요?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가난은 단지 물질적 가난만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한 자라야만이 들을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전혀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해야 합니다. 부유해서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정말 우리 영혼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성탄(聖誕)의 시간에 돌아보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행복해하고 있는가? 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살아보고자 마음의 원하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자 아웅다웅 삶을 살지 않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없이는 살 수 없어서 가난해질대로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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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3
    아름다운교회 Dec 08.2019 사병 훈련소와 장교 훈련소
    목회를 하는 목사의 입장에서 목회가 쉽다고는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목회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것과 같아서 단순한 산술 계산이 힘든 것이 목회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탄식처럼 외치게 됩니다. 왜 그럴까,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그런 답을 이런 비교에서 찾는다면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병 훈련소는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드시 가야 하는 강제 징집입니다. 본인의 의사없이 강제적 수용이기에 모든 훈련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고, 본인의 참여를 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차피 주어진 복무 기간만 채우고 나가면 된다는 것이 지배적이기에 거기에 희생이나 헌신을 기대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물론 전우애와 애국정신이 가끔 그런 것을 뛰어넘기도 하지만 대체로 피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교 훈련소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원해서 들어왔고, 숱한 경쟁을 통해서 진급과 진출에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진취적이고, 주어진 것만을 하기보다는 더 큰 일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릅니다.사회주의와 민주주의도 그렇습니다. 사회주의는 개인재산을 엄격히 제한을 하기 때문에 구태여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지부진합니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경쟁구도속에서 일하면 일한만큼의 보상이 주어지기에 누가 뭐라고해도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일에 뛰어듭니다. 그래서 다릅니다.교회는 어떨까요? 여기에는 두가지 요소가 다 작용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수동적이고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발적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앞장서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한쪽은 되도록 일은 하지 않고, 종교적 안정을 찾으려 하고, 한쪽은 누가 뭐라해도 뜨거운 열정으로 사역에 뛰어듭니다. 그래서 목회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사병을 장교로 양성할 수 있는냐 때문입니다.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목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동기부여를 해서 그 사역을 이끌어가야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지지부진할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고, 각종 어려운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모두가 사병도 필요하지만, 장교 양성도 해야 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 나라를 위해 충정을 다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투력을 강화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모든 일이 억지에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발적인 사랑으로 감당합니다. 그때에는 기쁨이 있고, 감동이 있고, 지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충성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모두가 사병훈련소에 있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누군가를 사관학교로 보내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이 목회자이겠습니까? 그것이 선교사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위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있는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관학교같은 훈련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새해가 옵니다.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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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2
    아름다운교회 Dec 01.2019 리더(leader)를 위해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오래 전부터 교회의 건강함을 돕는 단체인 자연적 교회성장(NCD)라는 단체에서 벌이는 운동이 교회의 건강운동이었습니다. 그들 사역중의 하나가 신청하는 교회의 건강함을 진단해주고, 그 처방을 통해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돕는 단체이기도 합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우리 교회가 건강한가를 묻고는 하는데, 막상 그런 진단을 받아보려고 하는데 여간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교회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약점이 드러날 때, 교회가 아프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오는 파장이 두렵기도 한 것이어서 쉽지않습니다. 그분들이 염려하는 것들이 이것입니다. “교회는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건강한가, 아픈가의 문제이다. 큰 교회가 더 건강할 것이라는 기대도 버리고, 작은 교회가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도 버리자. 교회가 아프면 세상이 걱정한다.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다”(Steven Kim).그렇습니다. 어느 순간에, 우리는 교회의 크기나 웅장함 그리고 교인들의 많고적음에 의해서 교회가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척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회피 대상입니다. 더구나 개척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왜냐면 가면 벌써 시설과 서비스면에서 너무나 열악합니다. 예배드리는 맛도 없고, 분위기도 썰렁하고, 말씀도 박합니다. 그러니 무슨 열망이 있습니까? 그리고 작은 교회는 내가 헌신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야말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작은 교회는 문제투성이라는 말일까요? 반대로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좋은 시설에, 현대인의 구미에 맞는 설교 그리고 편안한 시스템, 적당하게 pay하고 적당한 tension을 즐기고, 행복은 최고치를 누릴 수 있는 큰 교회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늘, 목사의 가르침에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라고 해서 그런 줄은 알겠는데, 막상 그 안에 들어가보면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건물처럼 되어야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현대 신앙인이 아닌지 되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건물의 화려함과 멋을 자랑하지만,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성전에는 관심이 적거나 엉망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왜일까요? 생각과 행동이 따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건물로서의 성전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너희가 성전이다’라고 합니다.교회가 건강하려면 리더인 목자와 따르는 양들이 바라보는 지향점이 같아야 합니다. 서로가 바라보는 것이 다르면 서로에게 만족을 줄 수 없고, 있는 것조차도 감사하지 못하고 못가진 것만 불평하기 쉽습니다. 마치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와 메추라기에 질려있을 때에 ‘왜 우리에게는 파, 마늘, 부추는 없느냐’고 투덜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주인되신 하나님과 리더인 모세의 생각을 그들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건강이 바로 그것과 같다고 봅니다. 내가 바라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바라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각자가 원하는 것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리더에게 그 꿈이 주님과 다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 리더들에게 복음의 비전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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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1
    아름다운교회 Nov 24.2019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옛말에 ‘형만한 아우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어머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입니다. 졸지에 제가 막둥이 아들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사랑하는 아우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입니다. 막내 아들이 가장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세상을 먼저 떠나면서 그래도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아들이고, 갑자기 막둥이가 된 저에게 부여된 임무여서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항상 연로하신 어머님을 되도록 자주 뵙고 돌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목회한다는 핑계로 그러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모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가짐에도 항상 뒤로 밀리는 것은 형님 때문입니다. 형님이 얼마나 자상하게 어머니의 필요한 부분을 긁어 주는지, 제가 아무리 발 벗고 따라가려고 해도 그 마음계산은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을 배운 후에야, 그 옛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를 지난번에 가서 뵙게 되었는데, 커피를 마신다고 빵집에 갔었는데 어머니가 어떤 빵에 관심을 가지시고 얼마인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지나가려는데 며느리인 제 아내가 그 마음을 아시고 왜 필요하시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머뭇거리시면서 며느리와 어머니의 대화의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복지관에 다니고 있는데 일하는 직원들에게 감사선물을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까짓것 해드리지 뭐, 그러고 있는데 며느리가 그 의중을 파악하고 직원들이 몇 명이나 되냐, 빵 값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저희가 해드리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무려 4-50명이라는 말에 순간 제가 그럼 얼마야? 몇백불은 되겠네? 그리고선 얼마를 드리고서 드는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순간적으로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내외에게 해달라고는 말을 못하고 당신이 하겠다고 빵값을 알아보는 것이지만, 며느리는 이내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래서 드린 것이었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다하시는 것을 드리고 오는데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야, 너 참 치사하다. 네 어머니가 너를 위해서 해주신 것이 무엇인데, 그까짓 빵값 몇백불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 한방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맞습니다. 그 어머니는 평생을 저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을 주셨는데 내 주머니의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불효자이지 않습니까?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심지어 독생자 자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주신 분이 무엇을 더 아끼겠냐고 말씀합니다(롬8:21).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우리의 주머니가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인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감사하다고 하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인색한 것은 감사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더 받을 것이 없을 만큼 받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더 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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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7.2019 무엇으로 보답할까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추수를 끝낸 농부들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추수감사절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집앞의 텃밭에서 뒤엄을 섞어 정성스럽게 기르던 무, 배추, 파가 있었는데, 얼마나 튼실하게 자랐는지, 그중에 제일 크고 좋은 것을 골라두었다가 추수 감사주일에 강단에 쌓아두었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농사를 크고 작게 했던 시대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금은 서비스 산업이 주가 된 세상을 살기 때문에 농사의 개념이 희박해서 일년에 무엇이 지나갔고, 무엇을 수확했는지가 불분명하게 지나갑니다. 경계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추수 감사의 의미가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12월 마지막에 연봉을 다 누리고 나서야 결산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천만한 계산법이 아닌가 싶습니다.인간은 먹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衣食住)는 사람의 기본에 속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하고 덜하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먹고 사는 것을 통해서 기본적인 생명을 연명하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필수 아미노산(essential amino acid)처럼 체내(體內)에서는 만들어지지 않고 (만들어진다해도 미미해서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음) 반드시 외부에서 즉, 먹는 것에서 섭취해야 하는 아미노산이 어른에게는 8가지, 아이들에게는 2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필수 아미노산이 없으면 발육이 안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사람에게 그러한 물질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존재인 사람에게도 육의 것만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이 감사입니다.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감사가 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있음에도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당연한 누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얼마전에 제게 치아가 문제가 되어서 이를 뺐습니다. 한번도 치아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것은 ‘아, 60평생을 아무 생각없이 누리고 산 이빨 2개가 그렇게 귀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늘 있었을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음식물을 자르고, 으깨어 갈아주던 그 이빨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빼고 나니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60여년을 수고해 준 그 이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빠지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느날 사라질 때에 그것의 소중함을 느끼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번 감사의 계절에는 내가 누리고 있음에도 존재감이 없었던 많은 것들, 혹은 사람들까지 감사의 조건들이 되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누릴 때에는 모릅니다. 누릴 수 없을 때에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주님이 주신 내 몸, 내 가정, 배우자, 자녀, 친구, 교우들, 그리고 교회까지… 너무나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음에도 그저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눈을 돌려봅시다. 그리고 시편의 기자처럼 ‘주님의 그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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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0.2019 이제는 말씀입니다.
    긴박하고, 갈증과 갈망이 있는 특.새가 끝났습니다. 11년째 지속된 특.새는 우리 교회가 지탱하는 샘물과 같은 믿음의 산실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특.새를 사용하셔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자아와 삶의 잘못된 습관들이 깨지는 것들을 경험하는데 귀한 산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역사앞에서 우리는 겸손히 순종할 수 밖에 없었고, 누구의 능력이 아닌 그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게 예수님을 알아가는 복을 감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아닌가 합니다. 삶에 지쳐있고, 강퍅해진 우리의 심령에 물을 붓고, 밭을 기경하는 일을 목이 터져라 했습니다. 그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능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각 사람을 이리 저리 만져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예년과 다르게 몇 분만의 간증을 들었지만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머리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신앙생활의 귀함을 제 체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체험적인 신앙생활이 있기를 저는 바라고 또 바랐는데, 그것을 이룬 분들의 생생한 눈물어린 간증이었습니다. 일방적 회복이 아닌 쌍방적 회복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사님 말대로 ‘이제야 반쪽 복음에서 눈이 떠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이제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새를 통해서는 우리의 감성과 체험이 강조되고 그 뜨거워진 감성은 우리를 다시 자극해서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귀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이내 식어 버릴 수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러한 감성은 딱딱한 상처만 남고 사라지는 것을 그동안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특.새는 우리를 깨우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온전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체험이 온전한 말씀을 만날 때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체험을 이끌어 내어 그 체험을 통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즉, 성령체험의 궁극적 목적은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없는 체험은 신비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체험없는 말씀은 교조주의(율법주의)로 머물 수 있습니다. 서로 보완이 되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바탕으로 말씀이 들어가면서 예수님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그렇게 딱딱하게 보이던 말씀이 눈에 들어오고 가슴에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지겨운 것에서 사모하고 감동이 있는 기쁨의 예배가 됩니다. 지겨운 설교 말씀이 내 삶을 쪼개내는 능력으로 다가오게 됩니다.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남의 이야기로 흘려듣거나, 남의 사건으로 여기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생활은 남의 이야기로 끝내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말씀이신 예수님이 능력으로 내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남이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믿음의 복은 내가 받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속에서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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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
    아름다운교회 Nov 03.2019 영적인 눈,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금 제11차 다니엘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가 은혜중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는 어떤 은혜를 누구에게 주실까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지만, 이러한 강제적(?) 행사를 통해서 제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우리 성도들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알게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7-19)그렇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합니다. 왜냐면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밖에는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도들이 알아야 하는 것 중의 가장 첫 번째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을 받아야 하고,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지부진합니까? 교회를 다녀도 왜 그리 미지근합니까? 왜 나에게는 그 감동과 느낌이 안오는 것입니까? 속고 있기 때문이거나,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운동에 재미를 느낍니다. 삶은 피곤한데 운동하러 가자 하면 힘이 펄펄납니다. 어쩐 분은 샤핑에 희열을 느낍니다. 다른 것은 피곤한데, 샤핑하러 가자면 눈이 반짝거립니다. 왜냐면 그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그것과 같습니다. 알아야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대충 알아서는 안됩니다. 대충 알면 대충 대충 끝납니다. 정말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그렇게 대충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다메섹에서 바울의 눈을 여셔서 비늘같은 것들이 벗어져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을 만날 때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결국 이러한 특.새를 통하여 제가 원하고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한 눈이 열려져서 하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은혜의 샘이 터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덩어리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속적 기독교로 전락하여 아무 재미도 없고, 그저 의무감 때문에 질식하게 되어 ‘영적 침체’니 ‘Burn out’이니 하면서 무미건조한 신앙생활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신앙생활 자체가 회의가 생깁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그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나를 깨트리고, 자아가 깨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힘입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 자신을 버리고 주님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나를 위로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충 내가 교회와서 위로나 받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을 알 수없습니다. 내가 깨지고, 십자가에서 나의 아집과 교만과 욕심이 깨지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분을 알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베푸십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삶에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 은혜를 위해 지금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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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7
    아름다운교회 Oct 27.2019 은혜의 두 모습
    지난 해 다니엘 특.새때에 어느 권사님이 이런 특별한 은혜를 체험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런 간증을 이야기했습니다. 평상시에 코가 막혀서 냄새를 잘 맡지를 못하는 단점(?)이 있고, 항상 코에서 찝찝한 느낌의 냄새만 있었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막힌 코를 시원하게 뚫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회개가 터져나오는 동시에 향기가 진동을 하면서 누런 콧물이 코피같이 터져나오는데 이상하게 시원하게 코가 터지더니 모든 냄새를 잘 맡게되었다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권사님 말씀이 모든 냄새를 맡게 되어서 감사하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화장실 냄새가 아무리 독해도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그동안은 괜찮았는데 코가 뚫리면서 지독한 화장실 냄새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고쳐주신 것은 감사한데 그동안 맡을 수 없었던 악취까지 맡게 되어서 고역이라는 이 말을 들으며, ‘아, 그것이 바로 은혜받은 사람의 두 모습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쳐주셔서 좋은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고쳐주셔서 이제는 나쁜 악취까지 맡게 되는 어려움도 겪더라는 것입니다.우리가 은혜받을 때에는 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 콧물 쏟으며 그 사랑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정말 시원한 은혜의 생수 때문에 날아갈 것 같은 기쁨도 찾아옵니다. 세상이 달리보입니다. 사람이 달리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과 사람은 그대로일 뿐입니다.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변하니 세상이 달라보이는 것이지요. 그 은혜 때문에, 그 기쁨 때문에 신앙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이것이 예수믿는 기쁨임을 깨닫고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몰랐던 말씀이 깨달아지고, 고역인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에 재미가 있어지고 교회생활이 즐거워집니다. 마치 술취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자랑할 마음에 들뜨기도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악취를 맡게 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세상의 악취 말입니다. 잘못된 습관에 의해서 그동안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그동안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향기인줄 알고 마음껏 맡았던 죄의 모습에서 나오는 그런 악취말입니다. 코가 뚫리지 않을 때에는 은혜의 향수도 맡을 수 없었고, 세상의 더러운 악취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코가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게 되기에 그리스도의 향기도 맡게 되지만 세상의 악취도 맡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안맡을 수가 없습니다. 향기도 맡고, 악취도 맡아야 합니다.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나를 버리고 주님의 길을 택하며 가는 제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세상의 악취, 이것은 죄의 악취인데 이것의 냄새가 강렬해야 죄의 세상을 떠나는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코는 어떻습니까? 막혀서 아무것도 맡을 수 없습니까? 뚫려서 양쪽의 냄새를 다 맡을 수 있습니까? 악취도 맡을 수 있어야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두 모습입니다. 향기만 맡을 수 없습니다. 악취도 맡아집니다. 그래서 향기를 좇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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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
    아름다운교회 Oct 20.2019 제11차 다니엘 특.새를 준비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올 해의 다니엘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준비합니다.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부담도 되고, 염려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난 2018년도에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과연 이번에도 크게 임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두렵습니다. 둘째는 영적 분위기입니다.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과 형편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앞에 달려드는지에 대한 영적 갈망이 얼마나 뜨거운지에 대한 의구심입니다. 셋째는 이 집회를 끌고 가야하는 목사로서 건강이 예년과 같지 않은 상황에 접했다는 두려움입니다. 영적 싸움을 치열하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육신의 건강, 영적인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제게 근래의 최악의 체력에 근근히 버티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저질체력을 가지고는 아무래도 버텨나갈 힘이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담감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느끼게 하신 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의 복’에 대한 주제를 정한 것도 평소 저답지 않은 주제여서 마음의 부담감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부담감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제 안에 빠져나갈 수 있는 빛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의 마음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위로와 믿음의 약속으로 제 안에 새로운 은혜를 갈망하는 힘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이번 집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하셨습니다.말(馬, horse)을 물가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결국 물을 먹어야 하는 것은 말 자신입니다. 그런데 비관은 어디에 있느냐면 말이 물을 먹지 않으려하는 것입니다. 물을 필요로 해야 하는데 물을 먹지 않으려 하는 말이라면 아무리 물가에 데려다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물이 생수(生水, living water)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찾는 갈급한 것이 생수가 아닌 짜릿한 탄산수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 생수인데 사람들은 생수가 아닌 탄산음료를 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생수이지, 탄산수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탄산음료를 선호하는 것과 같습니다.하나님의 복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눈이 떠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절대적 소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들어가도 나가도 복이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마음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서 하나님의 복을 소원하는 것이 기복사상(祈福思想) 기복주의 (祈福主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을 배우고 깨닫고 힘을 모으는 것이 이번 집회입니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복을 우리에게 어떻게 주실지, 어떤 깨들을 주실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알게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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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5
    아름다운교회 Oct 13.2019 가정과 교회 사이에서…
    한 해가 가물가물하게 그 끝이 보입니다. 강렬하게 베가스를 달구던 뜨거운 태양도 가을이라는 자연의 섭리앞에 순응하여 이젠 새벽기도 나오는 옷차림에도 변화를 주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예년에 비해서 더위가 늦게 오고 빨리 물러간 듯하여 여름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그곳에서도 더위가 한풀 꺽였던 시기라고 했습니다. 화씨 9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였지만 우기철을 맞아서 비가 시원하게 내리기도 했지만 습도가 100%인지라 방문기간동안에는 스킨로션을 바를 생각도 나지 않을만큼이어서 베가스의 건조함속에 살던 저에겐 헉헉거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곳이나 그곳이나 사람들은 불평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의 적응력도 참 대단하다 보였습니다.오늘 아침 큐티의 내용은 대제사장에 관한 하나님의 규례였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일반 제사장들과는 달리 직계가족의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형제, 아내나 자식들의 죽음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자신을 더럽혀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슬픔을 표현할 길도 없었고, 사명의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가족을 희생해야 했던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서 오늘 목회현장이나 교회현장에서 가장 우선의 가치가 가정(family)가 되었습니다. 핵가족의 영향이기도 하고, 서구 문화에 안착한 덕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나 국가 그리고 모든 공동체에서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녹아서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국가도 바보같이 가정을 미루어놓는 선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이 불가능했습니다. 교회도 바보같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오늘 우리의 가정위주 가치관으로 인해 매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베가스의 어느 교회에 부임했을 때에 주일학교도, 중,고등부도 전멸인 상태였습니다. 교회의 중직자 자녀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중고등학생들을 자녀로 둔 가정들은 미국교회로 다 보내고 어쩔 수 없이 한국교회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만 교회에 오는 형편이었습니다. 영어를 하는 자녀들이어서 한국말을 잘 못하기에 이해도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보다 교육환경과 시스템이 좋은 교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은 그런 곳에 보내고, 주일학교가 부흥하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나와 내 자녀의 희생이 없이 교회가 잘되기를 어떻게 바랍니까? 부모들의 고통과 아이들의 호소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의 섬김이 있었기에 오늘의 주일학교가 존재할 것입니다. 내 아이만큼은 다른 곳에서 좋은 환경속에서 있게 하려는 부모의 바램은 누구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일학교는 어디서부터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반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때론 우리가 나의 형편, 나의 행복을 위해서 진력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사명이 부여되었을 때에 우리의 생복도 주님앞에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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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4
    아름다운교회 Oct 06.2019 독수리 날개를 펴고…
    캄보디아 선교를 마치고 피곤하여 지친 육체와 함께 그동안 건강검진을 받은 후 약해진 부분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한국에 한 주간 머무는 동안에, 한국은 몇 가지 Key words로 대변되는 사회적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국사태, 태풍, 북한 SLBM미사일 발사”라는 대표적 관심사로 사회가 들썩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영 가라안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가슴을 강하게 할퀴고 지나갑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적 문제이지만 개인의 문제 또한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삶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새롭게 나를 사로잡은 것은 Monitor에 보여지는 비행정보였습니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이 비행기가 가는 위치, 빠르기, 높이 등이 시시각각 펼쳐지는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뜨는 원리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양력’이라는 현상 때문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위로 뜨는 원리가 ‘양력’인데, 이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비행기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비행기는 위로 뜨는 힘이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국을 오갈 때에 이러한 편서풍(Jet stream)으로 인하여 약 2시간 반의 차이가 나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맞바람(Head wind)를 타고 가는 것과 뒷바람(Tail wind)을 타고 가는 것으로 인해 걸리는 시간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으로 오는 정보를 보니 빠를 때에는 시속 636마일(시속 1026킬로)로 날며 높이도 37000피트(11277미터)를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맞바람을 받으며 날던 한국행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속도였습니다.결국 바람을 활용하면서 비행을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바람(편서풍)을 잘 이용하면 어렵지만 쉽게 오갈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맞바람을 받을 때에는 이처럼 고통스러울 때가 없습니다. 삶의 무게, 마음의 무게, 고통의 무게로 인하여 짓눌림을 받아 느리게 그리고 힘들게 비행하는 시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편서풍을 타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마치 찬송가에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는 우리의 아픔과 어려운 문제들을 잘 이용하는 유능한 파일럿이나 선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독수리처럼 날개짓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강한 바람이 우리를 짓누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력을 발생하는 기류처럼 우리를 높게 뜨게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움츠러듭니다. 바람 때문에 폭풍우 때문에 기가 죽어서 감히 둥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러할수록 믿음의 날개를 펴고 폭풍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날개를 좌악~ 폅니다. 그러면 그 폭풍은 독수리로 하여금 높이 날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날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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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5.2019 서로 용납하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를 구태여 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모여서 사는 존재로, 의지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록 사람의 기질에 따라서 차이가 있어서 혼자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무인도에서 혼자 살라하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역시 사회적 동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규약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안전하고 질서있게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그런 법규나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작용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적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 새로 전입된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나름대로 고유한 전통과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을 잘 배우고 익혀야 공동체 생활에 무리가 없습니다.이미 소문이 퍼질대로 퍼져서 모르는 분들이 없기에 이즈음에서 정리를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 작은 풍파하나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라는 공동체를 혼란하게 한 것이 사실은 누구 한 두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일들을 살펴보고야 깨닫게 된 것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실수나 잘못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당사자들이 당한 문제도 그렇지만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이런 문제를 경험해 보았고, 비록 아프기는 했지만 이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은 그나마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서툴렀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당사자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주변인들도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명한 이해와 성경적 방식이 정립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저 ‘내 편이냐, 남의 편이냐’는 것에 둘러서서 바라보았기에 소란이 더 커졌다고 저는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감정을 가졌기에 자기감정이 너무나 소중해서 이것을 공동체, ‘예수님의 교회’라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생길지라도 내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보다는 이 주의 피로 세워진 이 교회를 욕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영광스럽게 보호할 것인가에 생각이 먼저 가야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문제는 그 문제를 넘어 더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제가 배운 한 가지는, 용서와 용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의인이라 칭함을 받아 감사함으로 사는 것이 이 교회 생활입니다. 그렇기에 이 공동체가 죄가 계속해서 침투해서 이 공동체를 상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회개한 죄인들을 받아주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용서와 용납’이라는 이 관계회복의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용서받은 죄인을 용납(받아들이는 사랑)하지 않으면 이 공동체에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받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처럼, 우리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공동체 안에 돌아오게 될 때에, 정말 주님의 사랑으로 그를 참되게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 원상복귀하여 받아들이는 용납이 있지 않으면 이 공동체가 바른 공동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용납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권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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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8.2019 용서한다는 것
    “용서란 남이 우리에게 진 빚을 마음이나 장부에서 떼내어 멀리 보내버리는 일을 뜻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가 용서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보았더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신약에서 용서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피에미’라는 단어인데, ‘히에미(보내다)’라는 단어에 접두어 ‘아포 (여기로부터 떨어진 곳으로)’라는 단어를 부여서 ‘멀리 보내다. 놓아주다. 허락하다’라는 뜻이되어 신약에서 주로 ‘용서하다’라는 말로 쓰였다. 용서하다는 영어단어인 forgive라는 단어는 그래서 give(주다/내놓다)라는 말앞에 for(떨어져, 반대로, 완전히)를 붙여서 용서하다, 탕감하다는 말이 디었다”우리는 흔히 용서라는 행동을 ‘생각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받을 빚을 탕감해주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용서라는 것을 그렇게 보지 않고, 남이 나에게 남긴 빚을 마음으로부터 떼내어 멀리 보내는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미 멀리 떼내어 보냈기에 지금 내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내 마음 어느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 상황이 재현되거나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마치 트라우마처럼 다시 살아나서 우리를 괴롭히게 되거나, 용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그 용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일 것입니다. 인간의 용서는 그래서 불완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그래서 완전한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고 하였고, 시편의 기자도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103:11)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살아온 삶만큼이나 상처받은 것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만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니 이제는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남에게 받을 빚은 죽어도 잊지 않고, 남에게 줄 빚은 쉽게 잊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 받은 상처 때문에 치를 떨기도 했을만큼 아파했고, 또 남에게 준 상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간 일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서게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오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남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과 반대의 개념입니다. 사랑은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고 하셨지만, 용서는 내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에 용서는 먼 훗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다고 생각하니 용서하고 싶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떠나 보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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