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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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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1.2019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소문은 정말 빠릅니다. 지구촌 구석구석이 SNS 발달이라는 인터넷망으로 뒤덮인 현대인의 삶에서는 이것은 과거의 어떤 형태보다 더욱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홍콩에서는 홍콩과 중국의 충돌로 인해 긴장관계가 연일 News보다 더 빠른 소식으로 Facebook이라는 도구를 타고 급속도로 세상에 실시간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소식도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민주사회를 받쳐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만큼이나 더 색다른 단점도 심각해서 가짜뉴스 등으로 무엇인 진실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혼란스러워져 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 후 현대주의의 결말인 절대진리와 권위를 부정하는 세상으로 가는 것임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식당에 갔습니다. 아는 분을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깜짝 놀란 것은 그 사람이 우리 교회의 일을 너무나 소상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불과 1-2주 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우리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리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 사람들에게 전화도 안하신다면서요?’라고 묻는 말 앞에서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목사가 심방을 안 하는 것까지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를 나간 사람들은 목사가 모셔가기를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니 섭섭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심방을 안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이 아직도 못 깨닫는 것이지요. 누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즉흥적으로 교회를 나가겠다고 선언하고 나가서 이제는 안 모셔 가냐고 성질내는 것과 같습니다. 안 나간다는 소문, 심방 안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교회 밖의 사람들도 알 정도가 된 것은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알게 된 것이겠지요. 누가 그랬을까요?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말을 했기 때문이겠지요.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는 이런 소문쯤이야~~하고 지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내가 그 말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도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기다림의 고통도 느껴보지 못하고, 자기감정에 호떡 뒤집듯 뒤집고 가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 궁금해집니다. 아픔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우리를 더 깊이 있게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 사도의 책망을 받고 속이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받은 책망을 통해서 더 깊은 사랑과 신뢰로 관계를 회복해 나갔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누구나가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자기편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라면 이렇게 했을까?’ 물어야 합니다. 거기에 기다림이 필요하고, 아픔이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소문을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발도 없는 소문이 천리만리를 가는구나.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덕을 끼칠 수 있을까를 깊이 반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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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25.2019 강남 좌파, 신앙 좌파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은 어느 덧,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용어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씁쓰름하기도 하지만, 근래에는 강남좌파라는 새로운 개념이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는 그렇지만, 종북좌파라는 용어를 쓰는 보수층의 입장에서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을 뜻하는 말로, 정치적 대척점에 선 사람들을 공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과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학습에 몸담았던 사람들이어서 더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용어들을 뛰어넘어 이제는 ‘강남 좌파’라는 용어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용어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뜻하는 강남과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가진 좌파의 이질적 결합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훌륭한 목표지향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공평과 정의 그리고 평등을 외치지만 그래서 개혁을 통해서 기존 불평등과 사회부정의를 외치지만,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삶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모습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폐청산을 사회정의처럼 외치던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 사람들을 따라서 산, 그래서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실망을 넘어서 또 다른 분노를 사고 있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자사고, 외고를 없애자면서 이미 그들의 자녀는 그곳을 나왔고, 모든 혜택을 이미 다 누리고, 부동산, 병역, 특혜를 공격했던 사람들이 이미 누릴 것은 이미 다 알아서 누린 것입니다.우리 신앙인도 강남좌파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신앙좌파’로 부르고 싶습니다. 신앙좌파는 신앙이 자유주의적 성경신학을 바탕으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성경적 사고나 풍성한 성경지식이 있고, 오랜 신앙생활로 인해서 교회의 사역에서는 꿰뚫어보는 선구적 지식이 있지만, 생활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적폐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이 타락한 보수주의에 분노하면서도 자신들도 어쩔 수 없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고 살고, 반칙으로 사는 불공정의 세상을 탄식하고 지탄하면서도 막상 뒤를 뚫어보면 자신들도 온갖 반칙과 불공평의 세상에서 물타기 줄타기를 서슴지 않았던, 정말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과 삶이 같은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다르면 ‘외식’ ‘바리새인’등의 낙인이 찍혀버립니다. 근래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아니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가장 신앙이 좋고, 기도도 많이하고, 말씀도 많이 알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막상 삶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삶의 내용으로 산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좌파가 아니겠습니까? 생각따로, 믿음따로, 삶의 내용따로!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통렬하게 지적해 내셨던 바리새인입니다. 그러한 삶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신행일차(信行一致)하는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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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8.2019 하늘이 부럽다
    베가스에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자연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손타지 않은 자연을 몇 시간을 투자하면 아름답게 즐길 수 있는 자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것은 거짓이 없는 자연중의 하나가 하늘입니다.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찬란함과 뜨거운 기운, 낮에는 맑은 하늘에 시절마다 새롭게 그려지는 구름 그림들, 정말 잠깐의 시간이지만 지는 해가 그려내는 시시각각의 현란한 색의 잔치를 카메라에 담기에도 아쉬운 그런 하늘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자연은 거짓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래도, 입은 그대로를 보여 줄 뿐입니다. 인간이 그려내는 인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그림을 보다가 자연을 보는 그 맛은 정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거짓을 말하지만, 자연은 진실만을 말할 뿐입니다.이민주씨의 에세이 ‘그래도 오늘은 좋았다’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온갖 먹구름이 달려들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의 아름다운 색을 전부 끌어다 자신을 물들이던 하늘. 저러다 하늘이 산산조각 나는 건 아닐까 싶은 강력한 천둥 번개에도 다음 날이 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히 털어버리는 하늘. 면역력이 얼마나 좋은 건지 항상 고요를 되찾는 하늘, 그날, 하늘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우리의 마음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은 늘 삶의 고단함에 노출되고, 이민자의 외로운 삶을 살다가 보니 실패와 좌절,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얽힌 관계속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들이 뭉쳐져서 나름대로 자신 안에 트라우마를 갖고 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그려져야 할 마음의 그림들이 엉켜진채로 풀 수 없는 실타래의 모습처럼 피카소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는 자화상이 우리 안의 하늘이 아닌가 싶습니다.아무리 다른 그림을 그려도 바람한번 불고 지나가면 다시 그릴 수 있는 깨끗한 하늘처럼, 휘휘~ 멋진 그림은 아니더라도 멋대로 그려놓은 그림일지라도 시간이 가면 다시 원래의 하늘처럼, 우리 마음에 그렇게 상처입지 않은 그런 마음의 하늘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들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한번 마음에 새겨놓은 상처는 두고두고 곱씹는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있어서, 틀어진 그림틀을 만들고, 어떤 그림을 누군가 그리고 나면 거기 또 다른 그림을 덧입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그림이 나올 리가 만무합니다. 어떤 분은 그리 이야기합니다. ‘나는 걸레가 되어야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엎질러놓은 것들을 닦아주고, 깨끗하게 해주는 걸레가 좋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걸레의 입장으로 돌아가 막상 무엇인가를 닦아 주어야 할 즈음에서는 자신이 걸레임을 속상해 하는 것을 봅니다. 걸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더러워짐을 피할 수가 없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더러워지지 않으면 걸레가 되지 못합니다. 자신이 더러워지면 바닥을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늘이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묵묵히 주님의 길을 걸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받아낼 수 있는 그런 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기회가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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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1.2019 말(言)과 공동체
    빌립보서를 묵상하는 지난 한 주간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라는 여인을 필두로, 감옥의 간수들과 함께 교회를 이룬 유럽의 첫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기쁨, 자랑, 면류관’이라고 자랑스러워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바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물질로 돕고,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서 도왔습니다. 그런 교회에 사울은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며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옥에 티라고 할까요?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서인지 그 교회에 루디아 외에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성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지도자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에 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때론 심각한 분란과 다툼으로 이어지고, 교회가 갈라지는 경우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도 그런 전조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라고 권하고, 성도들에게는 그들을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후가 궁금합니다. 그들이 합했을까요?교회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생각도, 습관도, 방법도, 목표도,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죽고 못살게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한 부부도 막상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보면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호불호(好不好:좋아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끼리 끼리, 자기 관심사나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그런 것은 세상적으로 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단 예수를 믿는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되면 이것은 다릅니다.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을 가진 사람들이 사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것이 아닌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렇게도 다른 우리를 하나로 되게 하시는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나가 되어가는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바울 사도는 그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하나되게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해야 합니다. 아니, 이를 악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됨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을 깨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뒷담화’입니다. 사람들의 문화는 뒷담화를 즐거워합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때론 가슴이 시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됨을 깨는 ‘원수같은 일’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뒷담화는 때론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소문을 바탕으로도 합니다. 진실일 수가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뒷담화를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입니다. 사실일 때도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됨을 깨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일지라도 덕이 되지 않으면 입을 다물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입이 가벼우면 공동체를 깰 확률이 많아집니다. 우리의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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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7
    아름다운교회 Aug 04.2019 내 고향 남쪽바다
    이민자! 이 말처럼 외롭게 들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여행을 다니다보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레임과 호기심이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기도 하지만, 고향을 떠나서 삶의 뿌리를 뽑아서 낯선 땅으로 이민을 와서 겪는 그 수많은 story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요. 각자가 가진 인생의 두께만큼 수많은 사연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라고 성경이 지적했던 것처럼 나그네처럼 사는 것이 이민자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가끔씩 나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은 아니지만 고향땅을 향한 우리의 향수가 아련하게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얼마전, 교회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보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착륙을 준비하는 비행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덩치가 큰 것이 여느 비행기처럼 느껴지지 않아 하늘을 주목하고 있는데, 시계를 보니 4:50입니다. ‘아, 대한항공이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바라보는데 역시 대한항공 비행기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위로 지나가는 비행기 꼬리에서 태극마크를 선명하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십 수년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인 일인지, 내가 태어난 곳, 내 나라를 향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멀스멀 가락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이 잔잔한 고향바다…’ 고향 생각이 나던 시간이었습니다.그 시간, 그 비행기, 그 마크를 보는 순간에 어찌 하필이면 ‘고향’이었을까. 아마도 사람의 마음에는 본능같은, 귀소본능(歸巢本能, 낳은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연어처럼 말이지요)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한 본능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또다른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에 대한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잊으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심성안에는 우리가 이땅의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고향이 아닌, 본향(本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돌아가셨다. 소천하셨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그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사셨습니다. 사랑의 원자탄라는 별명을 가지셨던 손양원 목사님은 그런 찬송시를 지어 불렀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먼-하늘 이상은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우리의 본향을 바라보며 가슴절절하게 사모함을 드러냈던 것입니다.마음에 본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삶이 다릅니다.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는 사람은 그 본향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희망하고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거기엔 한숨과 아픔이 있다해도 본향이라는 소중한 청량제가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해줍니다. 그러나 본향이 없는 사람은 객기, 호기 다 부리다가 허무로 끝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구름만 봐도, 비행기만 봐도, 문득 고향생각에 옷깃을 여미듯, 우리의 삶에 문득 하나님의 손대시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거든 생각날 수 있는 본향이 있다면 행복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믿음과 기회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나를 힘있게 끌고가는 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행복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능력이 끌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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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8.2019 21세기에 박해받을 그리스도인들…
    지금 미국 의회에서는 Equality Act(H.R.5)라는 법안이 민주당의 발의로 하원을 통과하여 상원에 상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법안은 성평등을 주창하는 법안인데 이 법안은 ‘ 성,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바탕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입니다. 민주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제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의 행위와 정체성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거나, 기독교안에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법으로 제약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전통적인 결혼관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결혼은 그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전환이나, 동성애등을 죄라고 단정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성경적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이 법이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에서 통과가 되고, 미국의 대통령이 서명을 하면 이 법은 그대로 발효가 되어 이후에 일어날 후폭풍은 누구도 예측을 할 수가 없을정도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21세기에 박해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누가 진행하는 것일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 우리 앞에 다가서 있습니다.그런데 정작 앞으로 박해를 눈앞에 둔, 교회와 기독교안에서는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웃 California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 가까이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잠잠합니다. 우리들 도처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내 일이 아니니 별로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별 관심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설마 일어나랴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척에 있고,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도록 강요하는 미국이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 단순히 걱정이 앞서는 기우(杞憂)일까요?그동안 기독교는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가급적 외면하려는 자세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그렇게해도 거의 모두가 보편적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편적 가치와 사회적 통념이 변화되었습니다. 빨간 것도 많은 사람들이 검정색이라고 하면 그렇게 될 확률이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연 아직도 교회가 정교분리라는 이유로 입을 다고 있어야 할까요? 적극적으로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해야 할까요?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 감옥에 가야되고, 불이익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는 세상을 우리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요? 막대한 순교자와 희생자를 강요하는 21세기의 박해시대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을 그냥 외면해야 할까요? 만일 이러한 시대를 맞이한다면 1세기의 순교자들보다 21세기에는 교회가 망하든지, 막대한 희생자(순교자)를 양산하든지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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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1.2019 지금은 기도할 때
    기독교 역사상, 언제가 기도할 때가 아닌적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자다가 깰때가 되었다’고 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으며,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요청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 분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가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십니다. 즉, 우리의 도움없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영광스러운 일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동참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에 미약하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그 영광에 동참할 기회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동참할 기회가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노동과 같은 힘들어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은 아닙니다. 기도는 편할 때는 쉬었다가 어려울 때 불지피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이, 숨쉬는 것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역사 가운데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기도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특권같은 기도는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배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전혀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우리의 기도라는 통로를 열어주셔서 우리로 그 영광의 능력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특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을 안다고 해서 다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리새인, 율법사들은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가장 예수님의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이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을 알았지만, 왜 그 말씀이 주어졌는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사를 많이 드렸지만, 제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위대하고, 살아있고, 능력있는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기도’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으면 교만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말씀의 보화를 캐내는 연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이곳 라스베가스에 살게 하셨습니다. 시대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시대를 본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이곳 베가스를 위험한 땅으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이곳에서 우리가 부르짖는 이 기도로 베가스와 세계 열방에 영적 에너지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영적 발전소가 되는 것에 우리와 우리 교회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해야할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던 말씀(엡6:18/개역) 말씀을 순종하며 산다면, 1세기에 로마를 점령했던 복음이, 우리들의 기도로 세계 관광의 중심지라는 이곳 라스베가스도 점령하게 될 것은 확신합니다. 우리 교회에 점점 더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 은혜를 날마다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복음과 기도의 선순환이 일어나 우리 주변이 기도하는 능력자들로 채워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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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4.2019 교회 문을 닫으며 낸 ‘백서’
    한국의 어느 교회 이야기입니다. “청년이 행복한 교회”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가나안 교인이 200만이라고 하고, 교회 안에서 청년이 떠나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위기라 불리운 시점에, 청년 마인드를 가지고, 청년들을 위한, 청년에 의한 교회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어느 목사님이 그야말로 청년을 위한 교회를 창립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아는 몇몇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2016년에 의기있게 창립되었습니다. 모든 의사결정은 목사가 하지 않고, 청년들이 했습니다. 늘 교회 사역에 소외당하거나 주변에 머물러있었던 청년들은 자신들이 주체 혹은 주인공이 되어 의사결정을 하고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의기양양하게 진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2019년 봄, 교회의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점점 모이기가 힘들어지고, 동력이 떨어지며, 재정도 어려워지고, 사람들도 떠나는 바람에 교회를 접은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닫으며, 이 목회자와 몇몇의 성도들은 교회 청산을 하며 ‘백서’를 발간하고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이유는 좋은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출발은 했지만, 이것이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어도 한국 교회가 청년들을 위해 나아갈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이 후에 이런 실패를 본받아 더 나은 청년 교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도 담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용기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대체로 실패하면 부끄러워서 소리 소문없이 문을 닫는데, 이 목회자는 자신들의 민낯과 실체를 그대로 공중에 드러낸 것입니다. 그 백서에서 지적을 했듯이, 결국 원인은 하나로 보여집니다. 아무리 동기가 좋고, 목적이 선하여도, 공동체에서는 말 잘하는 달변가들에 의해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실패했다고 인정한 것이 바로 그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의견도 내고, 정체성을 세우기도 하고, 주인의식도 가졌지만, 아무도 자기 행동이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거나, 예배시간을 지키지 않고, 재정적 헌신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아닌 누군가가 할 것이라는 기대감속에서 자기 책임과 헌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교회는 문을 닫게 된 것이지요. 남의 일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같은 현상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여러 의견을 말합니다. 당위성, 정의, 성경적 본질 등에 대해서 거룩한 발언들을 쏟아 내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 말을 이루어 가도록 책임을 회피하거나, 그 일이 되어가기까지 스스로 헌신하지 않으면 교회는 위의 교회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비판과 비평이 있다할지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교회는 말하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생명력있게 자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말없이, 죽을힘을 다해서, 자신의 힘에 지나도록 수고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 한 가지 그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글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지만), 교회는 일을 만들어내는 의사 결정이 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공동체여서 본질인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영혼구원의 회심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면 교회는 변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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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
    아름다운교회 Jul 07.2019 우리가 경험해야 할 지진
    지난 7월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가운데 갑작스런 지진 소식은 독립의 감격으로 들뜬 미국 서부뿐만 아니라 전 미주에 두려움을 드리우게 했습니다. 강도 6.4의 강력한 지진이 20년만에 일어났고, 하루가 지난 지난 5일에는 연이어 강도 7.1의 더 강한 지진이 미 서부와 멕시코를 흔들었습니다. 베가스와 가까운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기에, 충분히 강한 흔들림이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도 10초가량 느껴지는 일은 베가스 생활에서 처음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지진의 흔들림을 느낀 것이지요. 90년대 초에 미국 유학 중, 주일날에 잠깐 느꼈던 지진, 그땐 예배중에 느껴서 ‘어? 이거 진동의 은사가 오는 것 아냐?’싶을 정도였는데, 어제 느낀 지진은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만한 강진이었습니다. 집을 정말 튼튼하게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성경에 의하면, 지진은 마지막 시대의 증거로 불리워집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바로는 시대의 마지막 징조중의 하나로 처처에 기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24:7 막13:8). 일본은 지진을 밥먹듯이 경험합니다. 그냥 흔들린 정도가 아니라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등 막대한 피해를 바로 곁의 나라에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안전하지~ 하면서 안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California주가 지진으로 고통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 곁에 사는 Las Vegas가 안전지대라고 살짝 소문도 내보았습니다만, 사실은 여기도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세상에 안전지대라는 곳이 따로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안전하다는 동네나 지역이라고 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한번 흔들면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을 연약한 인생을 산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그것이 인생의 본질인데, 우리는 참으로 많이 자신만만하게 삽니다.우리를 두렵게 하고 근심케 하는 땅의 지진은 어떻게 하든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었기에 자주 경험하는 지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땅의 지진도 두려운 것인데 땅의 기초만 흔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초, 인격과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지진은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구름과 지진 그리고 빛이라는 어떤 현상과 함께 일어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일어나는 지진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땅의 지진은 우리로 두렵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진은 땅의 지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만 이 지진의 결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실존을 깨닫게 하며, 정직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 사람을 새롭게 하고, 인생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진도 같은 지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야 할 지진은 그런 지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전앞에서 겸손하게 하고, 경외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며, 그로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임재의 지진이 일어나야 참된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됩니다. 땅의 바닥이 아닌, 내 마음 바닥을 흔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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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
    아름다운교회 Jun 30.2019 희망을 붙잡으라
    갈수록 신앙환경이 어려워져간다고 아우성입니다. 한국 교회를 돌아봐도, 미국 교회를 돌아봐도, 그리고 이민 교회들을 바라보아도 변하지 않는, 아니 어쩌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여건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분들이 늘어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의 시대들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시대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틀어막는 세력은 늘 있어왔고, 어떻게 보면 그 어려움의 방해세력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에서 울창한 숲으로 자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비관적인 상황들이 계속해서 우리의 귓전을 울릴 것이고,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이미 익숙하게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인권, 성차별등의 이름으로 우리 곁을 파고 들 것입니다.그런데 가만히 보면, 성경의 인물들, 우리 주변의 믿음의 인물들은 나름대로 불편한 상황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불행해 하지도 않고, 의연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희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환경이 장밋빛깔이어서가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희망을 놓치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제나 불평이 앞섰습니다.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고, 뒤로 물러가고, 남들을 탓하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상황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가나안 정탐을 했던 12명중에 10:2의 싸움을 벌였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에게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불행이란 없습니다. 아니, 불행도 희망의 종류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희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돌아오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할 때도 그랬고, 이곳으로 이주할 때도 그랬습니다. 언제나 부정적인 사람은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것대로 되지 않았고, 희망하는 것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상황만 보고 낙심하거나 불행해하거나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불평, 불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동호 목사님이 폐암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나에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그것을 바꾸었답니다. ‘나에게는 왜 안되어야 하는데? 나도 암에 걸릴 수 있어!’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승리해 나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의 것이냐면 ‘희망하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안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마음 먹거나, 그렇게 내 뱉으면 진짜 안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희망을 붙잡으십시오. 설혹 실패할지라도 희망을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희망을 붙잡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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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
    아름다운교회 Jun 23.2019 섬기라고 보내심 받은 인생
    지난 선교주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인 선교의 마음을 고취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특별히 Atlanta에서 이곳까지 선교여행을 온 KCCC 학생들의 섬김이 세미한 감동을 남깁니다. 해마다 여러 지역에서 선교를 위한 여행을 오는 팀들이 있었는데, 이번 온 학생들의 규모가 제일 크기도 했고, 잘 준비가 된 팀이라는 것을 이들이 체류하며 보낸 3박4일간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시간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귀한 마음들을 읽을 수 있어서 흐뭇했습니다. 이들이 남기고 간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늘 이런 편지를 남기고 가는 편지들이기에 의례에 익숙한 글이라고 받아보곤 했는데, 이번 학생들의 편지속에는 섬김을 받은 것에 대한 마음의 감사를 진심으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섬김에도 감사할 줄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들에게 정성스럽게 따듯하게 최대한 맞아주려고 했던 여러 분들의 배려와 관심이 여행중에 있던 나그네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섬김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한 영혼을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원받게 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은혜롭게 부르던 이 복음송이 어느 날인가 불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는 기독교인들의 애창곡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래이기도 합니다. 간혹 이 노래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 불편해지는 것은, 항상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줄로만 착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섬기라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런데 초신자 때에 확실하게 각인된 이 어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믿음의 진보로 이어져야 하는데, 교회만 오면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줄 알고, 도무지 섬기고 사랑하는 데에는 인색한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조금만이라도 사랑받는 것이 소홀해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신앙의 궤도를 이탈하는 이상한 존재로 바뀌어 버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섬기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섬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됩니다. 법과 정의가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드뭅니다. 그러나 사랑과 섬김으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경우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는 하는 그 일에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만을 위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남들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살고, 노년에 편안한 노후를 살다가 주님께 오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랑하고 섬기며, 영광스럽게 주님 앞에 서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앙이 깊어갈수록 섬기는 삶을 사신 예수님을 닮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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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
    아름다운교회 Jun 16.2019 다른 가치관으로 산다는 것
    그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하던 선교주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관심과 협력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주간 일을 바쁘게 하는 삶을 살면서도 쉬는 날이 돌아오면 몸의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을 나오는 분들, 바쁜 일정이 짜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예약을 뒤로하고 잠시 틈을 내어서 봉사하러 나오는 분들, 봉사하는 만큼 나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손해가 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봉사의 일에 시간을 드리는 분들, 남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쓰는 분들, 섬길 기회가 오면 시간이든, 물질이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주님, 저요!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손을 드는 분들의 고귀한 헌신으로 인해서 주님의 나라는 절대로 왜소해지지 않을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은 분명 다른 보이지 않는, 아니 세상이 가는 그런 가치관이 아닌, 하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이기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아프리카 선교를 25년간 성령님께 사용되었다고 고백하시는 강사 선교사님의 고백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분을 사용하시고, 그분의 사역을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돕는 수많은 헌신자들의 협력으로 그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과정을 들으면서,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내 것을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손해보지 않고 살겠다는 자아중심의 삶)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이번에 하나님의 인도하셔서 이곳에 온 KCCC Vision Tour를 하는 젊은이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대학생 선교회 소속의 학생들입니다. 자신들의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미국에 와서 Campus에 머물며, 영혼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자비량으로 들어와 훈련과 전도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젊은이들도 왜 남들처럼 아르바이트 해서 돈을 모으고 싶지 않겠습니까? 좀더 편하고 유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을까요? 남들보다 한 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식으로 보면 손해나는 일을 택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들을 움직이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손해보지 않고 남들을 섬기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는 사랑의 수고를 해야하고, 물질과 시간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지 않고 생색내는 길을 찾습니다. 기도만 하고 수고는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기도가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구원의 은총을 말하고, 받은 은혜를 말하지만, 받은 은혜만 있을 뿐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나눠주는 삶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를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배의 감격이 가슴에 적시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손과 발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나누면 손해날 것 같습니다. 지금 모으지 않으면 평생 못 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시기를 놓칩니다. 놓친 시간을 후회하며 생을 마감하기 보다는, 베풀고 나누며 헌신한 삶으로 감사와 기쁨을 풍성하게 하며, 즐거이 하늘의 가치관을 이 땅에서 실현하며 사는 실력있는 크리스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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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09.2019 쓰는 돈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고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모든 생물과 자연에는 그 나름대로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베가스의 사막/광야에 살고 있어서 삭막함 때문에 푸른 물과 숲을 보면 너무나 시원합니다. 반대로 맑은 물과 푸른 숲의 환경에 살다가 온 사람들은 사막의 삭막함을 경이로워합니다. 결국, 숲은 숲대로, 물은 물대로, 사막과 광야는 그것대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다릅니다. 인공으로 세워진 아름다움에는 투자한 것에 비례하는 미(美)가 있습니다. SNS에서 보는 정말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노라면 정말 탄복하게 되는 장면들이 정말 많습니다. 잘 꾸며진 조경의 Layout과 함께 심겨진 나무며, 각종 시설물 그리고 그들이 각자가 이뤄내는 조화로움의 미학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머무르고 싶은 느낌을 갖도록 해줍니다. 우리 교회도 작년에 앞, 뒷마당의 잔디를 드러내고 Desert Landscaping Layout으로 바꾸는 공사를 했습니다. 보통은 카운티 보조금을 가지고 공사를 하면 실 공사비의 1/3-1/2정도만 지급되기에 자기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한 경비를 절약하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오히려 보조금을 남겨서 다른 공사에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재료등도 저렴한 것들만 사용하고, 모든 것을 최소화하였기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은 돈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좋은 정원, 아름다운 환경, 모두가 감탄할 그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그만큼 투자를 해야합니다. 부러워 보이는 그런 경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한다는 결론인 셈입니다. 세상에는 돈없이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돈을 썼다는 말입니다. 인공적인 조경에서는 돈을 쓴만큼 아름답다는 공식이 통용된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훈련’이라는 ‘투자’가 필요합니다. 자기를 깎아내는 고통스러운 훈련이 없이는 고품격의 신앙자태가 형성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투자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신앙자태를 유지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넓은 문은 쉬운 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문이기도 하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에 가까운 길입니다. 우리가 택하야 하는 길은 넓고 쉬운 길이 아닌 좁지만 생명의 길을 택하여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분명히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댓가없이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그것을 방치하는 것 같습니다. 감동스러운 음악이 흐르고,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격동의 찬양을 드릴지라도, 교회밖을 벗어나면 너무나 쉽사리 조금전의 눈물과 감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마치 잠옷과 외출복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크리스찬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능력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말대로 살아내느냐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원하면 투자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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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02.2019 수요예배가 달라집니다
    목사에게서 예배는 생명과 같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고 만나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어느 목회의 활동보다도 가장 긴장되고,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부분이 바로 예배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예배는 어쩌면 초대 교회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친구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생명에 대해서 그야말로 목숨 걸고 모였습니다. 예수가 아니면 모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곧 그 사회로부터의 격리나, 어쩌면 생명의 위협마저도 느끼며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과 깊은 교제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모여들 뿐입니다. 구태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않고도 그저 자기 취미생활이나 이민 생활의 도움의 한 단면만으로도 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는 그저 통과의례에 불과하게 전락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배의 자리매김이 희미해졌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한 장식품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예배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습니다. 빨리 예배를 끝나야 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어떤 분은 1시간 안에 예배가 끝마쳐져야 매력적인 예배이고, 좋은 예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현대인의 구미에 맞다고 생각합니다.이러한 시대에, 이민 교회로서 우리 교회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교회가 모든 프로그램을 다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베가스에서의 목회생활을 돌이켜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고, 신앙생활을 회복하게 되는 경험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수박 겉핥기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일입니다. 그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서 서서 아브라함같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을 회복하고, 신앙의 능력을 재발견하고, 그냥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알게 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치료받을 사람이 치료받아야 합니다. 회복해야 할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에서 뜨거운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무섭도록 무엇인가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요예배입니다. 누구나 나오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구경하러 오라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사모하는 분들, 기도가 사명이라고 믿는 분들만 오십시오. 우리가 아브라함과 아모스처럼 부르짖어야 할 사명을 아는 사람이 오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열정에 나의 미지근함은 태우기를 원하는, 예배를 사모하는 분들이 오면 좋겠습니다. 기도로 승부를 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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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26.2019 Memorial Day에 드리는 감사
    이번 주간은 월요일이 Memorial day와 함께 Long weekend를 맞이하면서 많은 분들이 멀고 가까운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간혹 캘리에 출타하다가 베가스로 돌아오는 길에서 보는 차량행렬을 바라보며, 그 많은 차량들의 번호판이 캘리 번호판임을 알게 되면서, 간혹 캘리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거의 모든 차량이 타주 차량보다는 캘리 차량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long weekend라고 여행 계획을 세우며 기분좋은 휴가를 떠나지만,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한국에 있을 때에 현충일을 통하여 그런 마음을 고양해왔지만, 이민의 나라에 살면서는 그나마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Memorial day,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초개와 같이 아끼지 않고 버려야 했던 우리의 선조와 동료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아마도 모든 나라들이 이와 비슷한 날을 만들어 기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Washington에 있는 한국 참전기념비가 있는 곳을 본 적이 있습니다. 판초우의를 뒤집어 쓴 몇 병사들이 행군하는 장면을 담은 동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이렇게 씌여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과 글귀였습니다. 자유는 Free라는 것인데, 그것도 공짜(자유)가 아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념적인 행동들은 단지 대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베가스에도 Laughlin을 가는 도로에 참전용사를 기리는 도로라는 이름으로 ‘한국전, 베트남전, 세계1,2차대전등’의 전쟁용사들을 기리는 도로 표지판을 아주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군인들을 ‘군바리’라고 부릅니다. 이는 군인을 비하해서 부르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영웅들을 기리며, 그 마을 출신 군인들의 초상화를 시내 가로등에 걸어놓고 기리는 Arizona Kingman이라는 곳도 있습니다. 군인으로 국가에 헌신했다는 자부심도 대단하고, 군인들을 대하는 시민들의 긍지와 배려, 칭찬과 격려가 아끼지 않는 미국 시민들을 바라보며 정말 부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무엇이 다르게 만들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그렇지 않은 것은 이 시대에 참된 감사가 사라져가는 문화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딤후3:2). 마지막 시대에는 감사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의례적으로 지나치며 내뱉는 “감사(Thank you)”와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여는 “감사”는 정말 다릅니다. 목회를 하면서 늘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그마한 누림이나 섬김에도 과분한 감사를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왜 더할 수 있는데 왜 그것밖에 못하나…’ 하면서 자신이 받은 섬김에 대해서 감사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이 쑥스러워서 그럴까요? ‘감사하다고만 해도 고맙죠’라는 말이 뇌리에 떠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감사에 인색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수많은 감사의 일들이 쌓여져 있습니다. 메모리얼 데이에 의례적 감사보다, 마음의 깊은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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