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1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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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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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4.2019 내 고향 남쪽바다
    이민자! 이 말처럼 외롭게 들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여행을 다니다보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레임과 호기심이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기도 하지만, 고향을 떠나서 삶의 뿌리를 뽑아서 낯선 땅으로 이민을 와서 겪는 그 수많은 story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요. 각자가 가진 인생의 두께만큼 수많은 사연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라고 성경이 지적했던 것처럼 나그네처럼 사는 것이 이민자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가끔씩 나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은 아니지만 고향땅을 향한 우리의 향수가 아련하게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얼마전, 교회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보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착륙을 준비하는 비행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덩치가 큰 것이 여느 비행기처럼 느껴지지 않아 하늘을 주목하고 있는데, 시계를 보니 4:50입니다. ‘아, 대한항공이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바라보는데 역시 대한항공 비행기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위로 지나가는 비행기 꼬리에서 태극마크를 선명하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십 수년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인 일인지, 내가 태어난 곳, 내 나라를 향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멀스멀 가락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이 잔잔한 고향바다…’ 고향 생각이 나던 시간이었습니다.그 시간, 그 비행기, 그 마크를 보는 순간에 어찌 하필이면 ‘고향’이었을까. 아마도 사람의 마음에는 본능같은, 귀소본능(歸巢本能, 낳은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연어처럼 말이지요)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한 본능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또다른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에 대한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잊으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심성안에는 우리가 이땅의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고향이 아닌, 본향(本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돌아가셨다. 소천하셨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그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사셨습니다. 사랑의 원자탄라는 별명을 가지셨던 손양원 목사님은 그런 찬송시를 지어 불렀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먼-하늘 이상은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우리의 본향을 바라보며 가슴절절하게 사모함을 드러냈던 것입니다.마음에 본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삶이 다릅니다.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는 사람은 그 본향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희망하고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거기엔 한숨과 아픔이 있다해도 본향이라는 소중한 청량제가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해줍니다. 그러나 본향이 없는 사람은 객기, 호기 다 부리다가 허무로 끝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구름만 봐도, 비행기만 봐도, 문득 고향생각에 옷깃을 여미듯, 우리의 삶에 문득 하나님의 손대시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거든 생각날 수 있는 본향이 있다면 행복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믿음과 기회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나를 힘있게 끌고가는 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행복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능력이 끌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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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8.2019 21세기에 박해받을 그리스도인들…
    지금 미국 의회에서는 Equality Act(H.R.5)라는 법안이 민주당의 발의로 하원을 통과하여 상원에 상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법안은 성평등을 주창하는 법안인데 이 법안은 ‘ 성,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바탕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입니다. 민주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제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의 행위와 정체성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거나, 기독교안에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법으로 제약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전통적인 결혼관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결혼은 그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전환이나, 동성애등을 죄라고 단정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성경적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이 법이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에서 통과가 되고, 미국의 대통령이 서명을 하면 이 법은 그대로 발효가 되어 이후에 일어날 후폭풍은 누구도 예측을 할 수가 없을정도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21세기에 박해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누가 진행하는 것일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 우리 앞에 다가서 있습니다.그런데 정작 앞으로 박해를 눈앞에 둔, 교회와 기독교안에서는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웃 California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 가까이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잠잠합니다. 우리들 도처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내 일이 아니니 별로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별 관심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설마 일어나랴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척에 있고,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도록 강요하는 미국이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 단순히 걱정이 앞서는 기우(杞憂)일까요?그동안 기독교는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가급적 외면하려는 자세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그렇게해도 거의 모두가 보편적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편적 가치와 사회적 통념이 변화되었습니다. 빨간 것도 많은 사람들이 검정색이라고 하면 그렇게 될 확률이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연 아직도 교회가 정교분리라는 이유로 입을 다고 있어야 할까요? 적극적으로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해야 할까요?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 감옥에 가야되고, 불이익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는 세상을 우리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요? 막대한 순교자와 희생자를 강요하는 21세기의 박해시대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을 그냥 외면해야 할까요? 만일 이러한 시대를 맞이한다면 1세기의 순교자들보다 21세기에는 교회가 망하든지, 막대한 희생자(순교자)를 양산하든지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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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1.2019 지금은 기도할 때
    기독교 역사상, 언제가 기도할 때가 아닌적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자다가 깰때가 되었다’고 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으며,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요청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 분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가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십니다. 즉, 우리의 도움없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영광스러운 일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동참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에 미약하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그 영광에 동참할 기회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동참할 기회가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노동과 같은 힘들어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은 아닙니다. 기도는 편할 때는 쉬었다가 어려울 때 불지피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이, 숨쉬는 것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역사 가운데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기도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특권같은 기도는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배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전혀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우리의 기도라는 통로를 열어주셔서 우리로 그 영광의 능력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특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을 안다고 해서 다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리새인, 율법사들은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가장 예수님의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이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을 알았지만, 왜 그 말씀이 주어졌는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사를 많이 드렸지만, 제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위대하고, 살아있고, 능력있는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기도’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으면 교만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말씀의 보화를 캐내는 연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이곳 라스베가스에 살게 하셨습니다. 시대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시대를 본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이곳 베가스를 위험한 땅으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이곳에서 우리가 부르짖는 이 기도로 베가스와 세계 열방에 영적 에너지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영적 발전소가 되는 것에 우리와 우리 교회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해야할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던 말씀(엡6:18/개역) 말씀을 순종하며 산다면, 1세기에 로마를 점령했던 복음이, 우리들의 기도로 세계 관광의 중심지라는 이곳 라스베가스도 점령하게 될 것은 확신합니다. 우리 교회에 점점 더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 은혜를 날마다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복음과 기도의 선순환이 일어나 우리 주변이 기도하는 능력자들로 채워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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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4.2019 교회 문을 닫으며 낸 ‘백서’
    한국의 어느 교회 이야기입니다. “청년이 행복한 교회”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가나안 교인이 200만이라고 하고, 교회 안에서 청년이 떠나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위기라 불리운 시점에, 청년 마인드를 가지고, 청년들을 위한, 청년에 의한 교회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어느 목사님이 그야말로 청년을 위한 교회를 창립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아는 몇몇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2016년에 의기있게 창립되었습니다. 모든 의사결정은 목사가 하지 않고, 청년들이 했습니다. 늘 교회 사역에 소외당하거나 주변에 머물러있었던 청년들은 자신들이 주체 혹은 주인공이 되어 의사결정을 하고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의기양양하게 진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2019년 봄, 교회의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점점 모이기가 힘들어지고, 동력이 떨어지며, 재정도 어려워지고, 사람들도 떠나는 바람에 교회를 접은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닫으며, 이 목회자와 몇몇의 성도들은 교회 청산을 하며 ‘백서’를 발간하고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이유는 좋은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출발은 했지만, 이것이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어도 한국 교회가 청년들을 위해 나아갈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이 후에 이런 실패를 본받아 더 나은 청년 교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도 담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용기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대체로 실패하면 부끄러워서 소리 소문없이 문을 닫는데, 이 목회자는 자신들의 민낯과 실체를 그대로 공중에 드러낸 것입니다. 그 백서에서 지적을 했듯이, 결국 원인은 하나로 보여집니다. 아무리 동기가 좋고, 목적이 선하여도, 공동체에서는 말 잘하는 달변가들에 의해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실패했다고 인정한 것이 바로 그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의견도 내고, 정체성을 세우기도 하고, 주인의식도 가졌지만, 아무도 자기 행동이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거나, 예배시간을 지키지 않고, 재정적 헌신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아닌 누군가가 할 것이라는 기대감속에서 자기 책임과 헌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교회는 문을 닫게 된 것이지요. 남의 일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같은 현상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여러 의견을 말합니다. 당위성, 정의, 성경적 본질 등에 대해서 거룩한 발언들을 쏟아 내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 말을 이루어 가도록 책임을 회피하거나, 그 일이 되어가기까지 스스로 헌신하지 않으면 교회는 위의 교회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비판과 비평이 있다할지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교회는 말하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생명력있게 자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말없이, 죽을힘을 다해서, 자신의 힘에 지나도록 수고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 한 가지 그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글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지만), 교회는 일을 만들어내는 의사 결정이 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공동체여서 본질인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영혼구원의 회심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면 교회는 변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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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07.2019 우리가 경험해야 할 지진
    지난 7월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가운데 갑작스런 지진 소식은 독립의 감격으로 들뜬 미국 서부뿐만 아니라 전 미주에 두려움을 드리우게 했습니다. 강도 6.4의 강력한 지진이 20년만에 일어났고, 하루가 지난 지난 5일에는 연이어 강도 7.1의 더 강한 지진이 미 서부와 멕시코를 흔들었습니다. 베가스와 가까운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기에, 충분히 강한 흔들림이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도 10초가량 느껴지는 일은 베가스 생활에서 처음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지진의 흔들림을 느낀 것이지요. 90년대 초에 미국 유학 중, 주일날에 잠깐 느꼈던 지진, 그땐 예배중에 느껴서 ‘어? 이거 진동의 은사가 오는 것 아냐?’싶을 정도였는데, 어제 느낀 지진은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만한 강진이었습니다. 집을 정말 튼튼하게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성경에 의하면, 지진은 마지막 시대의 증거로 불리워집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바로는 시대의 마지막 징조중의 하나로 처처에 기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24:7 막13:8). 일본은 지진을 밥먹듯이 경험합니다. 그냥 흔들린 정도가 아니라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등 막대한 피해를 바로 곁의 나라에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안전하지~ 하면서 안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California주가 지진으로 고통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 곁에 사는 Las Vegas가 안전지대라고 살짝 소문도 내보았습니다만, 사실은 여기도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세상에 안전지대라는 곳이 따로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안전하다는 동네나 지역이라고 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한번 흔들면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을 연약한 인생을 산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그것이 인생의 본질인데, 우리는 참으로 많이 자신만만하게 삽니다.우리를 두렵게 하고 근심케 하는 땅의 지진은 어떻게 하든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었기에 자주 경험하는 지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땅의 지진도 두려운 것인데 땅의 기초만 흔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초, 인격과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지진은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구름과 지진 그리고 빛이라는 어떤 현상과 함께 일어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일어나는 지진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땅의 지진은 우리로 두렵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진은 땅의 지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만 이 지진의 결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실존을 깨닫게 하며, 정직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 사람을 새롭게 하고, 인생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진도 같은 지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야 할 지진은 그런 지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전앞에서 겸손하게 하고, 경외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며, 그로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임재의 지진이 일어나야 참된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됩니다. 땅의 바닥이 아닌, 내 마음 바닥을 흔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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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30.2019 희망을 붙잡으라
    갈수록 신앙환경이 어려워져간다고 아우성입니다. 한국 교회를 돌아봐도, 미국 교회를 돌아봐도, 그리고 이민 교회들을 바라보아도 변하지 않는, 아니 어쩌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여건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분들이 늘어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의 시대들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시대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틀어막는 세력은 늘 있어왔고, 어떻게 보면 그 어려움의 방해세력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에서 울창한 숲으로 자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비관적인 상황들이 계속해서 우리의 귓전을 울릴 것이고,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이미 익숙하게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인권, 성차별등의 이름으로 우리 곁을 파고 들 것입니다.그런데 가만히 보면, 성경의 인물들, 우리 주변의 믿음의 인물들은 나름대로 불편한 상황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불행해 하지도 않고, 의연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희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환경이 장밋빛깔이어서가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희망을 놓치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제나 불평이 앞섰습니다.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고, 뒤로 물러가고, 남들을 탓하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상황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가나안 정탐을 했던 12명중에 10:2의 싸움을 벌였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에게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불행이란 없습니다. 아니, 불행도 희망의 종류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희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돌아오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할 때도 그랬고, 이곳으로 이주할 때도 그랬습니다. 언제나 부정적인 사람은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것대로 되지 않았고, 희망하는 것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상황만 보고 낙심하거나 불행해하거나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불평, 불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동호 목사님이 폐암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나에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그것을 바꾸었답니다. ‘나에게는 왜 안되어야 하는데? 나도 암에 걸릴 수 있어!’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승리해 나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의 것이냐면 ‘희망하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안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마음 먹거나, 그렇게 내 뱉으면 진짜 안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희망을 붙잡으십시오. 설혹 실패할지라도 희망을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희망을 붙잡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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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3.2019 섬기라고 보내심 받은 인생
    지난 선교주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인 선교의 마음을 고취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특별히 Atlanta에서 이곳까지 선교여행을 온 KCCC 학생들의 섬김이 세미한 감동을 남깁니다. 해마다 여러 지역에서 선교를 위한 여행을 오는 팀들이 있었는데, 이번 온 학생들의 규모가 제일 크기도 했고, 잘 준비가 된 팀이라는 것을 이들이 체류하며 보낸 3박4일간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시간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귀한 마음들을 읽을 수 있어서 흐뭇했습니다. 이들이 남기고 간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늘 이런 편지를 남기고 가는 편지들이기에 의례에 익숙한 글이라고 받아보곤 했는데, 이번 학생들의 편지속에는 섬김을 받은 것에 대한 마음의 감사를 진심으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섬김에도 감사할 줄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들에게 정성스럽게 따듯하게 최대한 맞아주려고 했던 여러 분들의 배려와 관심이 여행중에 있던 나그네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섬김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한 영혼을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원받게 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은혜롭게 부르던 이 복음송이 어느 날인가 불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는 기독교인들의 애창곡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래이기도 합니다. 간혹 이 노래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 불편해지는 것은, 항상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줄로만 착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섬기라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런데 초신자 때에 확실하게 각인된 이 어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믿음의 진보로 이어져야 하는데, 교회만 오면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줄 알고, 도무지 섬기고 사랑하는 데에는 인색한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조금만이라도 사랑받는 것이 소홀해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신앙의 궤도를 이탈하는 이상한 존재로 바뀌어 버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섬기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섬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됩니다. 법과 정의가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드뭅니다. 그러나 사랑과 섬김으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경우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는 하는 그 일에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만을 위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남들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살고, 노년에 편안한 노후를 살다가 주님께 오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랑하고 섬기며, 영광스럽게 주님 앞에 서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앙이 깊어갈수록 섬기는 삶을 사신 예수님을 닮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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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16.2019 다른 가치관으로 산다는 것
    그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하던 선교주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관심과 협력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주간 일을 바쁘게 하는 삶을 살면서도 쉬는 날이 돌아오면 몸의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을 나오는 분들, 바쁜 일정이 짜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예약을 뒤로하고 잠시 틈을 내어서 봉사하러 나오는 분들, 봉사하는 만큼 나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손해가 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봉사의 일에 시간을 드리는 분들, 남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쓰는 분들, 섬길 기회가 오면 시간이든, 물질이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주님, 저요!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손을 드는 분들의 고귀한 헌신으로 인해서 주님의 나라는 절대로 왜소해지지 않을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은 분명 다른 보이지 않는, 아니 세상이 가는 그런 가치관이 아닌, 하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이기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아프리카 선교를 25년간 성령님께 사용되었다고 고백하시는 강사 선교사님의 고백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분을 사용하시고, 그분의 사역을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돕는 수많은 헌신자들의 협력으로 그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과정을 들으면서,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내 것을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손해보지 않고 살겠다는 자아중심의 삶)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이번에 하나님의 인도하셔서 이곳에 온 KCCC Vision Tour를 하는 젊은이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대학생 선교회 소속의 학생들입니다. 자신들의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미국에 와서 Campus에 머물며, 영혼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자비량으로 들어와 훈련과 전도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젊은이들도 왜 남들처럼 아르바이트 해서 돈을 모으고 싶지 않겠습니까? 좀더 편하고 유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을까요? 남들보다 한 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식으로 보면 손해나는 일을 택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들을 움직이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손해보지 않고 남들을 섬기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는 사랑의 수고를 해야하고, 물질과 시간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지 않고 생색내는 길을 찾습니다. 기도만 하고 수고는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기도가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구원의 은총을 말하고, 받은 은혜를 말하지만, 받은 은혜만 있을 뿐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나눠주는 삶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를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배의 감격이 가슴에 적시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손과 발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나누면 손해날 것 같습니다. 지금 모으지 않으면 평생 못 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시기를 놓칩니다. 놓친 시간을 후회하며 생을 마감하기 보다는, 베풀고 나누며 헌신한 삶으로 감사와 기쁨을 풍성하게 하며, 즐거이 하늘의 가치관을 이 땅에서 실현하며 사는 실력있는 크리스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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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09.2019 쓰는 돈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고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모든 생물과 자연에는 그 나름대로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베가스의 사막/광야에 살고 있어서 삭막함 때문에 푸른 물과 숲을 보면 너무나 시원합니다. 반대로 맑은 물과 푸른 숲의 환경에 살다가 온 사람들은 사막의 삭막함을 경이로워합니다. 결국, 숲은 숲대로, 물은 물대로, 사막과 광야는 그것대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다릅니다. 인공으로 세워진 아름다움에는 투자한 것에 비례하는 미(美)가 있습니다. SNS에서 보는 정말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노라면 정말 탄복하게 되는 장면들이 정말 많습니다. 잘 꾸며진 조경의 Layout과 함께 심겨진 나무며, 각종 시설물 그리고 그들이 각자가 이뤄내는 조화로움의 미학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머무르고 싶은 느낌을 갖도록 해줍니다. 우리 교회도 작년에 앞, 뒷마당의 잔디를 드러내고 Desert Landscaping Layout으로 바꾸는 공사를 했습니다. 보통은 카운티 보조금을 가지고 공사를 하면 실 공사비의 1/3-1/2정도만 지급되기에 자기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한 경비를 절약하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오히려 보조금을 남겨서 다른 공사에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재료등도 저렴한 것들만 사용하고, 모든 것을 최소화하였기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은 돈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좋은 정원, 아름다운 환경, 모두가 감탄할 그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그만큼 투자를 해야합니다. 부러워 보이는 그런 경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한다는 결론인 셈입니다. 세상에는 돈없이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돈을 썼다는 말입니다. 인공적인 조경에서는 돈을 쓴만큼 아름답다는 공식이 통용된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훈련’이라는 ‘투자’가 필요합니다. 자기를 깎아내는 고통스러운 훈련이 없이는 고품격의 신앙자태가 형성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투자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신앙자태를 유지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넓은 문은 쉬운 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문이기도 하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에 가까운 길입니다. 우리가 택하야 하는 길은 넓고 쉬운 길이 아닌 좁지만 생명의 길을 택하여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분명히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댓가없이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그것을 방치하는 것 같습니다. 감동스러운 음악이 흐르고,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격동의 찬양을 드릴지라도, 교회밖을 벗어나면 너무나 쉽사리 조금전의 눈물과 감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마치 잠옷과 외출복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크리스찬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능력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말대로 살아내느냐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원하면 투자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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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
    아름다운교회 Jun 02.2019 수요예배가 달라집니다
    목사에게서 예배는 생명과 같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고 만나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어느 목회의 활동보다도 가장 긴장되고,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부분이 바로 예배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예배는 어쩌면 초대 교회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친구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생명에 대해서 그야말로 목숨 걸고 모였습니다. 예수가 아니면 모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곧 그 사회로부터의 격리나, 어쩌면 생명의 위협마저도 느끼며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과 깊은 교제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모여들 뿐입니다. 구태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않고도 그저 자기 취미생활이나 이민 생활의 도움의 한 단면만으로도 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는 그저 통과의례에 불과하게 전락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배의 자리매김이 희미해졌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한 장식품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예배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습니다. 빨리 예배를 끝나야 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어떤 분은 1시간 안에 예배가 끝마쳐져야 매력적인 예배이고, 좋은 예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현대인의 구미에 맞다고 생각합니다.이러한 시대에, 이민 교회로서 우리 교회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교회가 모든 프로그램을 다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베가스에서의 목회생활을 돌이켜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고, 신앙생활을 회복하게 되는 경험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수박 겉핥기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일입니다. 그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서 서서 아브라함같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을 회복하고, 신앙의 능력을 재발견하고, 그냥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알게 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치료받을 사람이 치료받아야 합니다. 회복해야 할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에서 뜨거운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무섭도록 무엇인가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요예배입니다. 누구나 나오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구경하러 오라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사모하는 분들, 기도가 사명이라고 믿는 분들만 오십시오. 우리가 아브라함과 아모스처럼 부르짖어야 할 사명을 아는 사람이 오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열정에 나의 미지근함은 태우기를 원하는, 예배를 사모하는 분들이 오면 좋겠습니다. 기도로 승부를 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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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7
    아름다운교회 May 26.2019 Memorial Day에 드리는 감사
    이번 주간은 월요일이 Memorial day와 함께 Long weekend를 맞이하면서 많은 분들이 멀고 가까운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간혹 캘리에 출타하다가 베가스로 돌아오는 길에서 보는 차량행렬을 바라보며, 그 많은 차량들의 번호판이 캘리 번호판임을 알게 되면서, 간혹 캘리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거의 모든 차량이 타주 차량보다는 캘리 차량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long weekend라고 여행 계획을 세우며 기분좋은 휴가를 떠나지만,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한국에 있을 때에 현충일을 통하여 그런 마음을 고양해왔지만, 이민의 나라에 살면서는 그나마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Memorial day,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초개와 같이 아끼지 않고 버려야 했던 우리의 선조와 동료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아마도 모든 나라들이 이와 비슷한 날을 만들어 기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Washington에 있는 한국 참전기념비가 있는 곳을 본 적이 있습니다. 판초우의를 뒤집어 쓴 몇 병사들이 행군하는 장면을 담은 동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이렇게 씌여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과 글귀였습니다. 자유는 Free라는 것인데, 그것도 공짜(자유)가 아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념적인 행동들은 단지 대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베가스에도 Laughlin을 가는 도로에 참전용사를 기리는 도로라는 이름으로 ‘한국전, 베트남전, 세계1,2차대전등’의 전쟁용사들을 기리는 도로 표지판을 아주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군인들을 ‘군바리’라고 부릅니다. 이는 군인을 비하해서 부르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영웅들을 기리며, 그 마을 출신 군인들의 초상화를 시내 가로등에 걸어놓고 기리는 Arizona Kingman이라는 곳도 있습니다. 군인으로 국가에 헌신했다는 자부심도 대단하고, 군인들을 대하는 시민들의 긍지와 배려, 칭찬과 격려가 아끼지 않는 미국 시민들을 바라보며 정말 부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무엇이 다르게 만들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그렇지 않은 것은 이 시대에 참된 감사가 사라져가는 문화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딤후3:2). 마지막 시대에는 감사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의례적으로 지나치며 내뱉는 “감사(Thank you)”와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여는 “감사”는 정말 다릅니다. 목회를 하면서 늘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그마한 누림이나 섬김에도 과분한 감사를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왜 더할 수 있는데 왜 그것밖에 못하나…’ 하면서 자신이 받은 섬김에 대해서 감사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이 쑥스러워서 그럴까요? ‘감사하다고만 해도 고맙죠’라는 말이 뇌리에 떠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감사에 인색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수많은 감사의 일들이 쌓여져 있습니다. 메모리얼 데이에 의례적 감사보다, 마음의 깊은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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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
    아름다운교회 May 19.2019 제자가 제자를 만듭니다
    졸업 시즌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며 준비했고, 세상을 향하여 씩씩한 걸음을 가는 우리의 지체들을 마음으로부터 축복합니다. 졸업을 바라보는 두 문화의 시각이 사뭇 다릅니다. 한국에선 졸업(卒業)이라는 단어는 마칠 졸에 업업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업(일)을 다 마쳤다는 말이지요. 끝이라는 의미가 강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졸업식을 commencement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마쳤다는 말보다는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개념이지요. 그렇게 시작하는 졸업생들에게 각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며 Walking을 하면서 축하해줍니다. 참 인상깊은 장면이지요. 그렇게 졸업하는 사람들을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제자들인 셈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간다는 것을 자랑스럽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스승들이 눈에 선합니다.교회에서는 어떻게 제자들이 만들어질까요? 물론 신앙생활에는 졸업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죽음으로 개인의 삶을 끝내거나 우주적 종말이 임할 때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제자들을 만들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제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예배시간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귀에 달콤한 설교듣는다고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은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받은 감동을 삶으로 옮겨서 제자의 삶을 살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공동체(그룹)안에 제자의 삶을 사는 한 사람의 제자가 있을 때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력이 있습니다. 수술하는 외과의사가 수술실 실습이 없이 교실의 지적 배움만으로 능숙한 수술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는 스승이나 선배의 도움으로 한 땀 한 땀 자르고, 끊고, 꿰매는 연습을 반복하고, 현장에서 실습을 통해서 경험해 보아야 비로소 수술이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정말 제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는 우리 곁에 진짜 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제자가 제자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제자의 삶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제자의 삶을 사는 제자가 없으면 헛된 것입니다. 제 성장 과정을 봐도 그렇습니다. 한참 은혜받을 때에 누군가가 그 은혜의 길을, 제자의 길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분들이 곁에 있었다면 훨씬 더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은혜를 후배들과 나누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된 제자를 만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실 수업을 통해서 배운 것, 예배의 현장속에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삶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하고 가르쳐주어야할 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레디컬이라는 책을 많은 분들이 접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가슴쓰린 도전에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격려그룹, 제자그룹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제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곁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같은 제자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내가 먼저 제자가 되어보십시다. 세상은 그를 바보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보같이 우직하게 가는 제자, 그가 제자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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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5
    아름다운교회 May 12.2019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는 은혜
    오늘은 Mother’s day이자, 우리 교회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주신 자연속에서 온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전교인 야외예배’로 드리게 됩니다. 해 마다 이 시기에 드려지는 야외예배를 통해서 툭 틔여진 시원한 자연속에서 마음껏 몸과 마음을 부딪히는 시간들을 통하여 성도됨의 기쁨, 관계의 감사, 하나됨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들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과 물질로 헌신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분들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 일하시는 분들은 많은 부담을 갖습니다. 수고하고도 때로는 좋은 말을 듣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의 크고 작은 일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주님이 발을 씻겨주시는 수고를 하신 것은 수고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하여 서로 발을 씻겨주는 수고를 서로 하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수고하지 않으면 주님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누군가의 수고를 우리는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주는 것을 넘어서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수고의 길을 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수고하신 분들이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야외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하는 축복은 ‘성도의 하나됨’입니다. 늘 예배만 드리고 가는 분들은 같은 성도됨을 잘 누리지 못합니다. 관계도 서먹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방인처럼 느껴집니다. 밖으로만 맴돌다가 깊은 성도의 교제를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특권과 영광을 놓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에는 멀리있는 형제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give and take정신이 강화되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 있어야 남에게 주려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은 받은 것이 없어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도 외로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형제애는 세상의 어느 우정보다도 진하고 강합니다. 그것이 성도됨입니다. 어려울 때가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하나됨을 깨트립니다. 깨져야 하나님의 나라가 바르게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교회를 깨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분란, 분규, 다툼’입니다. 일단 싸우면 관계가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다툼은 나쁜 것 가지고 싸우지만은 않습니다. 선하고 좋은 것, 명분과 의로움과 진실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다툼이 일어납니다. 안타까운 것은 좋은 명분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교회의 하나됨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명령합니다. 이 야외예배를 통해서 우리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하나되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깨질 수 없는 하나됨을 위해서 노력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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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05.2019 은혜를 아는 사람
    어느 인터넷 영상에서 본 장면입니다. 어느 가게 앞에서 개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지나자, 주인이 개에게 요리한 음식을 던져주었습니다. 이 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물고 어딘가로 갑니다. 카메라가 따라갑니다. 그런데 개가 머무른 곳은 어느 으슥한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새끼 강아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는 그 먹을 것을 자신의 강아지들에게 내려놓고 먹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자기도 먹고 싶었을텐데, 그것이 개의 본성일텐데 그것을 이기고 자기 새끼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그 개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욕망을 절제하고 새끼를 먹였는데 나중에 새끼는 어미에게 보답하며 살까요? 제가 기르고 있는 교회에 있는 개들 사이에 저런 모성과 배려를 찾을 수 없고, 먹을 것을 두고 엄마도 새끼도 상관없이 으르렁거리는 것일까요? 아마도 저 어미개는 그냥 개가 아닌 듯 싶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감동을 주는 미물(微物)들인 짐승의 이야기가 번번히 나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만도 못하다거나,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인간 세상에도 많이 나옵니다. 영화 ‘가버나움’에는 부모의 무지와 학대, 그리고 그 부모를 고소한 아들의 기구한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이 달라져서일까요? 세월이 지나고 문화가 바뀌고, 삶의 방식이 바뀌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바뀔 수 없고, 바뀌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부모에게 심각한 상처가 있는 어느 유명 배우가 아버지의 행동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한 시기에 아버지의 저 상처주는 말들이 ‘번역’이 되어 들리는데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언어로 들리더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듣기 싫던 언어들이 자기 안에서 번역되어 들리는 음성은 꼭 그 낱말 그대로가 아니라, 거기에 뜻이 담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때로는 깊은 상처를 받은 것들, 잔소리로 들렸던 것들, 나의 상황을 못알아 주는 것들에 대한 서운함등이 평생 아픔의 상처로 남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상처의 소리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를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그분들의 독특한 표현방식이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내가 달라져서, 어느 날 내 안에서 나의 것들이 달라져서 들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애증의 아픔을 사랑의 관계로 회복하게 된 분의 이야기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관계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도 거스릴 수 없는 법칙 하나는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개인적이어서, 자기가 받은 사랑과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고, 자기가 받지 않은 것만 서운하게 마음에 각인되어서 늘 쉽지 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됨됨이는 바로 여기에서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 빚을 갚으며 사는 것이 성경의 권면입니다. 제게도 노모님이 살아계십니다. 더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분의 사랑을 갚으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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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28.2019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앞마당 화단에 선인장 꽃이 활짝 피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게 많은 꽃을 피워낸 것은 처음 봅니다. 시간의 결과일까요? 하지만 세월이 왜 이렇게 빠른지, 뒤돌아서면, 한 주, 한 달이 훌쩍 훌쩍 징검다리를 건너듯 뛰어다닙니다. 겨울과 짧은 봄맛을 내고는 어느 새, 여름으로 들어선 듯한 날씨가 더욱 세월을 빠르게 지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일까요?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우리의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는 것의 의미일까요? 그것은 허무한 인생관을 대변하는 것 밖에는 안됩니다. 그것은 성경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가고, 또 가면 영원히 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끝이 있다고 말합니다. 세월이 간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종말을 향하여 가는 열차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열차의 끝은 낭떠러지라고 한다면 더욱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살면 아무 생각없이 현실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끝을 예견한 사람들은 그 끝을 준비하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그렇다면 지혜롭게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혜롭게 준비한다는 것은 오늘의 삶을 보람있게 살아야 하고, 의미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유의미한 것을 찾으려면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삶의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삶을 사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러 왔노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섬기는 삶을 사셨고, 또 우리에게 섬기라고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섬기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섬기는 대상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섬깁니다. 열심히 자기를 위하여 섬기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은 그런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의 섬김은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릇은 제한이 되어있습니다. 무한 용량으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배분의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전부를 나를 위해서 섬길 것이냐, 남을 위해서 섬길 것이냐를 지혜롭게 가려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가 남을 섬기지 않으면 그것은 전부 자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섬기는만큼 나를 섬길 분량이 줄어들게 됩니다. 나를 섬기는 만큼 남을 섬기는 분량이 작아지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나를 섬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남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섬기지 않으면 분명히 우리는 자기만을 섬기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 자신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 반대의 삶을 사는 것은 바보입니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받은 교육은 내가 먼저 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것을 채워야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남이 들어오기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섬겨야 할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섬길 ‘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섬김이 쉬워집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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