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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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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26.2021 기본으로 돌아가자
    운동 선수를 비롯한 예쳬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피땀어린 노력으로 좋은 열매들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눈물이 담겨져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UN을 방문했던 BTS의 멤버들을 보면 온 세상이 좋아하는 K-pop을 만들어 낼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명성은 온 세상의 사람들을 열광에 빠지게 합니다. 연예계든 체육계이든 그들의 성공의 뒷면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피땀어린 노력과 눈물의 결정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노력없는 결과는 참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성공을 거둔 이들도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가령 운동선수도 그러합니다. 평상시대로 움직이고 하는데 갑자기 감각이 무너지고, 뭐하나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프로라해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분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 기본 훈련으로 다시 시작하자’ 그렇습니다. 무너져 내릴 때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하는 것은 바로 ‘기본’입니다 이 기본만 잘 다져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버팀목입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그 버팀목이 무너져내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운동선수들처럼 기본으로 가서 다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어디서 잘못되었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잠시는 늦게 갈 수 있지만 멀리 그리고 힘차게 제대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제공해줍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 감정은 다양한 환경앞에서만 서면 자신의 이성과 훈련조차 무기력하게 만드는 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앞에 어김없이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다윗도 광야에서 고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성숙해져 갑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나발’이라는 어리석은 사람을 통해서 자기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무너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만일 그에게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없었다면 다윗은 아마도 거기서 끝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기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기본이 뭐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습니다. 거창한 영적 거인에게는 너무나 쉬워서 기본으로 가기에는 수치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얼마나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겨우 유치원 수준으로 다시 내려가라고? 그러면 안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쉬운 것이지만, 너무나 쉬워서 자존심 상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대학원을 나온 박사가 유치원으로 들어가 다시 배운다는 것은 분명 수치이기는 하지만 그 기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에 있습니다.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려 예수님께 책망받은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도 ‘어디서 떨어졌는지 돌아보라’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워졌습니까? 내 뜻대로 잘 안됩니까? 늘 아쉬움이 남습니까? 기본으로 돌아가십시오. Basic은 쉽지만 다시 살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면 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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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9.2021 뿌리는 것이 헛되지 않기에
    지난 주간에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지역에 사신다는 이분은 교회의 정보를 묻고 조만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화중에 참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오래 전에 주일 설교를 CD에 담아서 전도사역을 했었는데, 이분은 그 CD를 들으면서 은혜 생활을 대신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 입장에서는 설교 시디사역을 오랜 동안 하면서 때로는 지치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무용론을 입에 거론할 정도로 그 노력에 비해 효과가 좋지 않다는 논리로 그만하자고 하던 분들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D Media가 세상에서 인기가 시들해지고, 인터넷 문화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몇 년 전에 그 사역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디를 들었던 분이 교회를 찾는다고 하니, 정말 감회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울림이 내 안에 일어났습니다. ‘아, 우리의 작은 사역이 헛된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는 사역이 너무나 초라하고, 보이는 열매가 없고, 그냥 지쳐만가는 듯한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가 하는 일이 하도 적어..’ 그냥 무너져 내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감도 없고, 자괴감에 휩싸여 우리의 사역에 물러서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로 인하여 몇 번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나서는 다시 그런 사역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시편의 기자는 ‘울며 씨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시126:6)’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고전15:58)’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향은 어렵고 힘들고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도망가고 싶어합니다. 함께 망할 수 없다고 함께 타고 있는 배에서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렇게 도망하면, 그 도망이 자신의 습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내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지금의 아픔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그 고통을 견디면 그 사람은 ‘성장과 성숙’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고난을 먹고 자랍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처럼 우리의 자람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진면목은 인생이 행복할 때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어둠의 고통속에서 보여집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아마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업과 삶에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뜻하지 않은 아픔속을 지나고 있을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역을 내려놓고,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내려놓고, 조금 더 편한 곳에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자그마한 수고와 헌신 그리고 우리의 핏땀흘린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실망시킬 때도 있습니다. 욕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진면목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며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작아도 우리가 주님을 위해 뿌리는 것이 있다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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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2.2021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하니라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가면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동화시간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철가면’이라는 동화였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재미있게 들려주시는지 이야기 재미 홀짝 반해서 주일학교 예배시간이 기다려졌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삼손’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삼손은 위대했고, 힘이 장사고, 영화까지 나올정도니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야기로 듣던 성경에서, 내 눈으로 읽는 성경 그리고 설교자로서 다루는 삼손 이야기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새벽기도회 본문으로 다루고 있는데 삼손을 다루는 본문앞에서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영웅 삼손이 아니라 부끄러운 신앙인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출생의 예고 때부터 세례요한과 예수님처럼 기적적인 은혜를 타고 난 하나님께 바쳐지고 성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나실인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삶 자체가 방탕한 삶이었습니다. 사람은 친구와 노는 곳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듯이, 삼손은 항상 ‘거룩’과는 상관이 없는 곳인 블레셋 주변에 머물고 그들과 교분을 쌓으며 삽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인생이 한 순간에 들릴자라는 여인을 만나서 털려버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자신도 자기가 ‘나실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도 그렇게 살다니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실이 없이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속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절망의 한숨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눈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맷돌을 돌리고 있던 그에게 성경은 이런 말을 씨앗처럼 심어 놓았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16:22). 삼손의 삶이 거기서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절망의 비극으로 인생이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함을 암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소망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털에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징이 머리털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삼손의 머리털이 자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새싹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싹은 삼손이 마지막 기도에서 응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마지막으로 이번 한번만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교회들마다 위축이 되었다고 한숨을 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됩니다. 그 교차지점에 우리의 믿음과 신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우리를 다듬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에게는 그에 맞도록 쓰시고, 하나님께 절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에 상응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권능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함을 봅니다.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사슴의 발처럼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믿음으로 붙잡고 일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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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
    아름다운교회 Sep 05.2021 곱게 나이드는 연습
       베가스에 올 때에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어느덧 20년 가까이 되어가는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알아왔습니다. 처음만날 때엔 아이였는데 어느 새 청년이나 어른이 된 사람들, 어른으로 만나서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 그나마 그동안 한참였던 분들이 곁에 남아 있어도 모두들 하는 말, ‘나이앞에 장사없다’며 늘 한숨을 짓고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들 세월만 간 것이 아니라 내 세월도 갔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요즘입니다. 힘이 쇠퇴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각과 굳어지는 기억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아이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고, 인간의 본질인 흙으로 돌아갈 때에 어른 역시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무한한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는 능력있는 존재이지만, 그 마지막의 길은 초라한 성적표를 가지고 창조주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을 향하여 가는 노중(路中)에서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자극을 받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수요일부터 지성과 영성을 갖춘 믿음의 사람들의 저술을 통해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영성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려는 우리들의 노력입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 중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지식의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나 자신만의 세계’속에 갇혀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정관념’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정관념은 잘 깨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내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아의 세계가 깊고 높을수록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요즘 제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만의 세계, 내 안의 지식과 경험, 그래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면서(다른 세계도 있음을 알았음에도 여전히 갇혀살 수도 있는 세상) 자기만의 잣대로 세상을 살려는 게으름(?)이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성채를 쌓아올리고 있는 사람들,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현상이 너무나 많은 보게 되었습니다. 변화도 두렵고, 변화할 수도 없고, 그저 자기 만의 세상속에 갇혀 살면서 더 이상 발전도 하기를 기대하지도 못한 채, 고집스러운 늙은이로 전락해 버리기 딱 쉬운 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지요. 때론 나의 지혜보다 남의 지혜가 뛰어날 수 있음을 보게 되고, 내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축복일 때도 있습니다. 남의 것을 볼 수 있는 지혜 때문입니다. 그냥 인생의 재미를 위해서 사는 사람과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이 다릅니다. 어느 100세 철학자가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늙어가면서도 늙지 않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구는 그러러면 부지런히 머리를 써야합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인생으로는 가질 수 없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앞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해서 부지런히 발전과 변화를 시도해야겠습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일 나이가 된 것도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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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
    아름다운교회 Aug 29.2021 유익한 인생
    세상일을 돌아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면서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게 했습니다. 특별히 신앙인들에게는 이 혼란의 시간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시고, 그들의 백성을 돌아보고 계신지에 대해서 지속적인 질문을 꺼내고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들이 사냥꾼의 총에 반항 한번도 못하고 쓰러져가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당연한 보호도 없이 죽음으로 몰리고,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며 그 분의 주권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이러한 문제는 단지 아프가니스탄의 백성들 뿐만 아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은 빈 손이거나 빡빡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효율적인 면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걸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삶을 꾸려가기 보다는 남의 도움에 의지해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건장한 삶을 가지고서도 정부나 다른 이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도움 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남의 필요에는 눈과 마음을 닫습니다. 오로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삽니다. 뭐,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겠지요.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의 필요를 채우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물질이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넘쳐나도 내것은 아깝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는 인색해도, 남을 위해서는 아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삶이 더 보람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폐가 되는 인생이나, 자기만을 위한 인생으로 우릴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남은 것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채우고, 그들의 남은 것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고후8장). 그리고 우리는 남은 것이 있도록 열심히 일하여 남을 돕도록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영적인 가난외에는 우리를 삶의 가난한 가운데 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가 넉넉한 것으로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수고하라고 말씀하신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엡4:28).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남을 위하여 살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 중의 하나도 역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요하심으로 가난한 자들을 불러야 합니다. 선교주일입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우리를 도우라’는 목소리는 온 천지를 울립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것을 나누어 필요한 이웃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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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
    아름다운교회 Aug 22.2021 아름다운 인생
    2020 도쿄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아픔속에서 치루어진 올림픽이 막을 내리면서 여러 이야기들이 훈훈하게도 하고 가슴 아프게도 합니다. 지난 올림픽에서 창던지기 분야에서 은메달을 딴 폴란드의 마리아 선수는 그녀가 자신의 생애 처음으로 목에 건 은메달을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이유인즉,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 수술을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 어린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그녀의 결정에 폴란드 대형슈퍼체인에서는 12만 5천불에 낙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돈을 지불하고서는 낙찰받은 그 은메달을 다시 그 선수에게 돌려줬다고 합니다. 한쪽의 승자가 아니라, 모두의 승자로 기억하게 만드는, 참으로 가슴훈훈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가 금메달을 딴 사람들입니다. 올림픽 선수들은 매 4년마다 경기를 치루는데요, 그 경기를 위해서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그 하나의 대회를 위하여 희생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대회를 기다리고 준비한다고 합니다. 각자가 받을 상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뼈를 깍아내는 인내와 고통의 훈련을 기다리는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상’입니다. 그 상을 받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지난 2020 도쿄 올림픽이 연기되거나 취소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선수들이 절망에 가까운 탄식을 쏟아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기다려온 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이 없다면 운동 선수로서의 존재의미를 잃는 것으로 생각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떨까요? 우리 역시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빌4:19).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영원한 인내와 고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을 상급이 있고, 고생의 끝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이거나 세상에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이 먼저일지는 모릅니다만, 분명 우리 역시 올림픽 운동선수들처럼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 목표가 없다면 정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힘들게 유지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전15:19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달려갈 분명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갖고 앞을 향하여 달려갈 것이지만,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다만 이 땅의 행복만을 위하여 살 뿐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정말 눈에 불이 튈정도로 바쁜 삶을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가 바쁘게 밥먹을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하루를 지나다보면 세월이 1년 10년 20년을 훌쩍 지나고 맙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보면 어느날 갑자기 인생을 왜 이리 살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때가 있습니다. 때론 목표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인생은 목표와 삶의 이유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신 일들을 성실하게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앞에 서는 날에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서겠지만, 주앞에서 부끄럽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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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
    아름다운교회 Aug 15.2021 이게 뭐지?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식재료에 원산지 표기가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7년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상당히 강력한 법을 만든 것이지요. ‘한국산’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기호에 편승하여 돈을 벌 목적으로 중국산이나 기타 저렴한 곳에서 들여온 싸구려 상품을 ‘한국산’으로 둔갑시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을 범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한국의 의정부시에서 ‘흑산도 홍어가 아니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광고를 써붙이고도 사실은 일본산 냉장 홍어를 써왔다가 사법당국에 적발이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런 곳, 즉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판 곳이 경기도 일정지역에서만 57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차라리 그런 광고를 하지나 말지, 자신있게 광고를 써붙이고도 거짓을 일삼아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비양심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현상이 왜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정치인들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자기가 한 말을 떡먹듯 뒤집기도 합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도 도무지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항변을 하기도 하고, 기가막힌 논리로 호도를 합니다. 정말 역겹기 그지 없습니다. 경제인들, 법조인들, 교육계, 종교계 할 것 없이 총체적으로 이렇게 만연된 거짓을 일삼는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실험실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쥐의 뇌에서 ‘두려워하는 DNA’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쥐가 고양이를 만나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들고 까불어댑니다. 두려워하는 DNA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마치 그런 것일까요? 누가 인간의 뇌나 마음에서 ‘부끄러움아는 DNA’를 빼낸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수치심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DNA가 인간의 삶에서 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생각나는 것이 ‘감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남에게 준 것만 생각하지 자기가 어떤 것을 받은 것은 다 잊어버린 채, 지금 당장 서운한 것 하나만 가지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인간이 처참해지는 것은 수치심과 감사의 DNA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라고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에 대해서 묻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든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부끄러움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나면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내면의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보다는 하나님앞에서 정직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주변에 신하들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자, 그는 변명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왕의 지위를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뻔뻔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요즘 시대에 이런 다윗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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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8.2021 올림픽과 신앙인
       지금 도쿄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2020 올림픽이 치루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 작년에 치루어야 할 올림픽이 올 해로 연기되었고, 끝나지 않은 팬데믹으로 관중없이 올림픽이 막을 올려 종반으로 다다르고 있습니다. 체육을 통해서 세계가 하나가 되고, 진정한 sportsmanship을 통해 우정과 기량을 뽐내는 세계인의 잔치가 반쪽의 행사로 끝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수들은 이 때를 위하여 각고의 시간을 다듬어 온만큼 마음껏 기량을 뽐내고 있고, 여기 저기서 훈훈한 소식들이 들려지고 있어서 기운을 잃은 지구에 조그마한 숨통을 열어주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올림픽이 치루어지는 동안에 예수를 믿는 체육인들이 나름대로 자기의 신앙을 피력하면서 복음을 세계에 전하고 있는 것은 정말 감동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육상선수는 메달을 따고 한 손에 자신의 국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은 사뭇 경의롭기도 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 현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심심치 않게 보아오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내가 알고, 내가 믿던 예수 그리스도를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그들의 신앙이 정말 위대하고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방향이고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올림픽 선수들은 자신의 몸을 잘 만들고 갈고 닦은 실력을 가지고 세계의 정상에 우뚝섭니다. 우리 한국은 양궁으로 유명합니다. 세계의 양궁인인들은 한국의 양궁을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쉽사리 그 위업을 물려줄 기회도 주지 않을만큼 양궁강국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바람, 소음, 긴장,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를만큼의 심박수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원인들을 맞서 이기는 훈련을 다양하게 경험하면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1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 분야에서 세계의 정상에 우뚝서기 위해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것들과 우리의 신앙생활을 견주어 보는 것이 무의미할까요? 무엇인가 쉽게 얻으려고 해도 얻어질 수 없습니다. 땀과 피 그리고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진주가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난의 시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입니다. 고난 없이, 기도없이 축복을 받는 것이 오히려 저주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과정이 없는 사람은 ‘싸구려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쉽게 만들어서, 싸게 팔아 먹으면 그만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숱한 고난을 격습니다. 어쩌면 남들보다 더 뜨거운 풀무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신앙의 영성(작품)은 잔치속 풍악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고된 비바람의 폭풍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마치 땅속의 다이어몬드가 엄청난 기압의 압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듯이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래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요즘 우리들은 훈련을 귀찮아합니다. 그것을 option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는 눈물/고통의 훈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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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
    아름다운교회 Aug 01.2021 물 (Water)
    라스베가스 답지 않게 요즘 잦은 비소식을 접합니다. 그래서인지 8월에 100도를 밑도는 날씨는 거의 이변에 가까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날씨를 즐기고 있습니다. 비가 자주오다 보니, 습도 때문인지, 문이 빡빡하게 늘어나는 현상도 피할 수 없습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반가운 현상입니다. 베가스의 마른 목을 축이게 하는 단비이지만 그것도 그저 지표만 식힐 뿐인 듯, 가뭄해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요. 하여간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이 있기에, 라스베가스라는 도시가 지탱해갈 수 있습니다. 지구의 2/3이상이 물로 덮혀있는데 이 물 때문에 우주에서 보는 지구가 푸른 색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도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물이 60%로 떨어지면 노화가 일어나고, 50%에 이르면 사망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과 생물이 살아가기에는 이 ‘물’이 절대적인 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의 날’을 만들어 그 중요성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은 인간의 삶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데, 건강학을 다루는 사람들에게서도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짜릿한 음료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탄산음료이지요. 하지만 이런 음료는 잠시의 갈증을 풀어줄 수는 있어도 궁극적 방법은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이런 탄산음료를 마시지 못하게 규제하는 곳도 허다하지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탄산음료등이 점점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마시고 나면 화확인공 맛이 나는 듯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물보다 좋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은 맹숭합니다. 맛도 별로입니다. 그런데 그런 물이 실제로 내 몸에 활기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짜릿한 맛은 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 물은 맛도 별로고, 톡 쏘는 것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물이야말로 생명인데 그동안 그것을 무시했단 말이지요. 예수님과 만났던 수가성 여인이 그랬습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물가에 그 물을 길으려고 나왔습니다. 그녀를 만난 예수님은 ‘생명의 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우물물을 먹는 자는 먹고난 후에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 주는 생명의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었습니다. 그 물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지금까지 여인은 우물물이 영원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물을 뜨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목마름이 없는 생명의 물이라니요? 이것을 깨달은 여인은 동네에 물동이 버려두고 뛰어들어가 이 생명의 물인 예수님을 전합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물받아 놓은 물동이 버려두고 갔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물은 물이고, 생명의 물은 예수’라고 믿으면 되었지 물동이를 왜 버리고 가노~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여인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은혜이었기에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물! 늘 마시는 물이지만 그냥 물맛입니다. 거기에 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은 생명을 주는 물입니다. 늘 다니던 교회, 늘 드리던 예배, 뭐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처럼 새롭습니다. 생명의 생수이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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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
    아름다운교회 Jul 25.2021 가난한 부자의 삶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증오하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도 가난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1945-1960년대,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의 폐허속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해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산업화를 이루어 경제적 부를 이루어낸 것이 대한민국입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대한민국이 세계 최부국의 하나의 대열에 참여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 즈음의 사람들에게는 ‘가난’은 정말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가난을 싫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 생활역시 가난이 주는 설움과 고통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낯선 외국땅에서 내 나라 말로도 아닌 수많은 제약을 가지고 주류사회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온갖 설움의 세월을 보내며, 당장 한달 먹을 것을 저울질해야 하는 삶을 사는 가난의 압박은 정말 해보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가난하게 살고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 상식입니다. 나무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여기 한 예를 다윗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16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역경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5-6절)’ 만일 다윗이 당하고 있는 지금 어려운 곳이 ‘하나님이 줄로 재어 준 구역’이라면 이곳이 아름답다 할 수 있습니까? 환경이 나쁘고, 역경과 고통의 삶을 사는 그곳이 우리의 눈에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 ‘구역’ 하나님께서 허락한 그 상황(구역)이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환경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기업과 분깃’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바로 하나님 때문에 ‘가난하지만, 부유한 인생’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바울 사도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10)는 이 놀라운 고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세상은 소유의 정도에 의해서 평가하지만, 성경은 가진 것이 아닌, 하나님/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속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던 신혼살림에서는 아내와 남편만 있어도 행복했습니다. 고기부페, 고급진 식당에 갈 형편이 아니어도, 된장국, 콩나물 한 그릇만 있어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참 몹쓸 짓을 했습니다. 아우슈비치 수용소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등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때,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굶주림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음식을 내어주면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다움일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여유로움이겠지요. 가난하다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부요함을 선언하며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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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
    아름다운교회 Jul 18.2021 참 아름다운 세상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동계에서는 서울대와 미화담당 팀장이 갑질을 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한 것으로  주장하며 공세를 펼칩니다. 이 경우에 양쪽의 이야기가 각각 다릅니다. 직원들의 증언도 각각 다릅니다. 갑질의 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팀장은 팀원들에게 정장을 입으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작업복을 하는 것이 편하고 나은데 정장을 왜 하느냐, 이것이  갑질이 아니고 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팀장은 회의 때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비록 미화 일을 하시지만, 작업복만 입지 마시고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멋지게 입고 오세요”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미화원의 처지에서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한 배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갑질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갑질인 셈이고, 이해하는 입장에서 보면 배려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너무나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보는것’은 어디에 달려있을까요?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내가 보고 싶어하고, 평소 신념처럼 가지고있는 것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마음의 결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요즘 인터넷을 보십시오. facebook이든, youtube든, instagram이든 수많은 정보와 사연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정말 은혜롭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려고 노력합니다. 비판적이고, 자극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되도록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인가요?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일들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수없이 아름다운 사연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인 것이든 아니든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감동적인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자신의 삶과 신앙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살만한 것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되도록 은혜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채워야 합니다. 0의 눈에는 0만 보인다고 말하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점으로만 보면세상과 교회와 교우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질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을 보기를 원하느냐에 따라서그것이 보입니다. 남의 잘못만을 보는 사람은 그런 습관이 이미 몸에 배어짔는지도 모릅니다. 남의 장점을 보는 사람도 그런 습관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우리 심령에 무엇으로 물들어 있는지를 한번쯤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스님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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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5
    아름다운교회 Jul 11.2021 독재자를 위한 변명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이상한 광경이 목격되었습니다. 말 한 마리를 세워놓고 경품이 붙었습니다. 아무나 이 말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나서서 이 말을 움직여 보려고 온갖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달래도 보고, 맛있는 것으로 유혹도 해보고, 때려도 보고, 별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은 말을 보고있던 어느 목사님이 내가 해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이 말에게 다가가 귀에다가 뭐라 뭐라 소곤거리며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상품을 챙겼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기에 말이 쏜살같이 일어나 움직이냐고... 그러자 목사님이 비결을 이야기했습니다. ‘말에게, 너 이민목회 할래, 아니면 움직일래?’ 그렇게   물었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말이 이민목회를 알겠습니까? 단지 이 우스개는 이민목회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비유한 농담일 뿐이지요. 한국의 전통적 교회는 수십년간 교회를 섬겨온 일명 ‘토박이 성도’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교회를 떠나보지 않는 교인들이 굳건히 교회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문제는 잘 이겨냅니다. 그런데 이민 교회는 그렇지 못합니다. 모두가 교회 다닌지 얼마되지 못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를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그냥 교회를 떠납니다.  우리 교회의 내규가운데, ‘부목사의 임면(任免/임명과 면직)은 전적으로 담임목사의 권한’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문구 자체로만 보면 독재시대의 발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담임목사가 전권을 잡고 칼자루를 들고 휘두른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담임목사가 신실하지 않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목회자라면 그럴 염려가 없고 그것을 교회가 신뢰하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규정은 담임목사의 독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담임목사의 신앙인격과 영적 리더십을 인정하고 보면 이것은 ‘건강한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이민교회들이 이문제 때문에 아파하고, 교회가 무너지는 일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부교역자들이 들어와 담임목사의 목회를 돕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 성도들에게 친분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런 부교역자들이 결국 자신의 이익분기점에 서면 여지없이 자신의 세워진 영향력을 바탕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의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심지어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러면 고스란히 피해는 교회가 받습니다. 평안하던 교회가 갑자기 내편, 네편으로 갈리고, 마음이 나누어지고, 진실게임등으로 인해 결국 교회 불화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에는 성도들의 신뢰와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규정은 담임목사의 기득권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지만, 감정에 치우치다가 보면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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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4
    아름다운교회 Jul 04.2021 변죽만 울리는 인생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1992년 다미 선교회의 이장림이 주창한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하여 한국의 기독교와 사회는 술렁임이 컸습니다. 그해 10월 28일 자정에 휴거라 일어난다고 하여 그 추종자들이 서울의 어느 장소에 흰옷입고 예수님을 맞이한다고 하여 언론, 방송사들의 중계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경찰의 배치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헛발로 그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그것이 이단적 주장이라고 말했던 기성교회 교인들도 ‘혹시 진짜 예수님 오시면 어쩌나...’ 걱정도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기의 이 사기극이 끝났을 때, 거기에 몸담고 온 재산 팔아서 헌물하고 휴거를 기다렸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를 바라보았던 믿지 않은 사회에 ‘부활신앙’ ‘재림신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게 되고, 이 폐해는 고스란히 한국 교회에 안겨졌습니다. 이 후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부활과 재림신앙이 큰 타격을 입었고 강단에서 부활과 재림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폐혜가 이단 종교인에 의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세상이 과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정말 부지불식간에 망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꺼진 불도 다시보듯’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신자의 본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말도 안되는 주장들을 유튜브에 올려놓고 온갖 감언이설로 자신들의 주장을 ‘믿도록’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전달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파고드는 생각이나 주창들을 가감없이 받아들여, 마치 1992년의 휴거를 믿었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될 확률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감이 매년 유행합니다. 그리고 그 독감 때문에 많은 생명이 사라져갑니다. 그런데 독감 주사를 맞아도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백신 때문에 설사 몇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백신을 맞아서 위험을 피한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백신 맞으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무슨 의사, 박사들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더 신뢰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작은 ‘사고’나 ‘우연’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또한 신봉하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main stream속에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람들은 곁가지, 예외적인 것, 가능성이 적은 것들에 집중을 하고 그것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나 위험을 대비하는 것은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만, 그곳에 너무 치심한 나머지 본류에서 벗어나는 생각과 삶을 산다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본류안에서 살면서 만일에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처를 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지, 본류가 아닌 지류의 말을 듣고 따라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변죽만 울린다’라는 것으로 설명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방향성을 정하고 나가야 하는데, 사소한 위험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마땅히 나가야 할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 불만만으로 교회가 새로운 길로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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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7.2021 델타 바이러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력이 오는 7월4일 독립기념일에 ‘바이러스 독립선언’을 하려는 계획이 어렵게 되면서 주변의 염려들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추키는 하나는 Covid 19의 변이 바이러스인 ‘델타 바이러스 혹은 델타 플러스 바이러스’의 위협이 만만치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스크를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벗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문을 열었던 영국이 다시 봉쇄에 들어가는 등, 점차 또 다시 팬데믹의 재발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겨우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펼만하니 다시 또다른 문제로 우리의 마음을 얽매어 놓으려는 불안한 시도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대 역병들이 번져서 인류를 위협했던 적들이 많았습니다. 현대사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2003년에 SARS, 2009년에 Swine Flu, 2014년에 Ebola, 2016년에 Zika, 2019년에 Covid 19등이 몇 년을 간격으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해 온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제 이 코비드가 좀 갈까 싶었는데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덮쳐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이렇게 지축을 흔들 전염병들이 생길 때마다 두려워 숨고, 떨고, 마음의 빗장, 삶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이 목숨을 유지하려는 것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을 피해다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다가오는 채널은 바이러스 뿐만이 아닙니다. 교통사고, 각종 질병, 스트레스등 여길 피하면 저 문제로 걸려들어 고통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의 삶의 구조적 운명입니다. 설혹 그렇게 잘 피해서 수십년을 산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은 죽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요 운명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는 것보다는 죽음을 대면하며 사는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이 주후 251년경 대 역병이 퍼져가고 있을 때에 쓴 글이 인터넷에 회자되었습니다. “공포스럽고 치명적인 이 역병과 흑사병이 각 사람의 공의를 검증하고 인류정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니 얼마나 시의적절하고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건강한 자는 병든 자를 돌보는지, 친족끼리 서로 사랑할 도리를 다하는지, 주인이 병든 노예에게 자비를 베푸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이 대 사망이 별다르게 공헌한 바가 없더라도, 특별히 기독교인과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훈련을 하며 기꺼이 순교를 갈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죽음이 아니라 힘겨운 훈련이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훈련이 죽음을 멸시함으로써 면류관을 예비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영광이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먼저 놓임을 받은 우리의 형제들은 애곡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잃어버린게 아니라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애곡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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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0.2021 아직 가슴에 불이 남아있는지...
    1997년 7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하와이를 거쳐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학 4년동안을 정말 하나님이 간섭하셨고, 그 기간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학비를 보내준 성도들을 비롯하여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마치고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역할 임지가 정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돌아갈 날은 다가오고, 갈 곳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하나가 큰 빛처럼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시고, 유학까지 마칠 수 있게 하신 것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것’이라는 소명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때 결심이 섰습니다. 그래, 돌아가자, 오라는 곳이 없으면 서울역 광장에 나가서 예수를 전하면 되지 않은가? 복음 전하라고 부르셨으니 어디든 전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불이 솟아올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전혀 엉뚱한 길로 인도하셨고,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저를 인도해 오셨음을 고백하지 앟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단의 통계에 의하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교인의 수는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 장로의 수는 예년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교단의 공통 현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줄어가는데 목회자는 늘어갈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 참 목자를 어떻게 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일 필요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 이후에 더욱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의 목표는 ‘교회성장’이 아닙니다. 교회의 성장은 영혼구원의 열정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외칠 복음과 관심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할 때입니다. 왜냐면 이 시대가 가는 길이 무엇인가 편안한 마음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오히려 방치된 영혼들이 많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며, 그것은 그 열매가 지독한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개인적 견해와 주관이라면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이 시대는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자연스레 영혼에 관심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불(fire)은 불(fire)일 수 밖에 없는 성질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불도 큰 불을 만들어 냅니다. 불이 꺼져있기에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불도 살아만 있다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작은 ‘불씨’입니다. 우리 심령에 불이 살아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불이 있을 때에 일을 내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장에, 전도회에, 교육부에 성령의 불이 살아있는 한 두 사람만 있어도 불씨는 살아나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 심령안에 불을 붙여야 살 수 있습니다. 불이 꺼진 심령은 쉽게 원망과 불평에 빠집니다. 그리고 열심과 사모함도 살아집니다. 그리고 비판할 것만 남습니다. 불씨가 살아있는 심령은 주를 사모함이 많습니다. 감격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열심과 배려 그리고 섬세한 사랑과 헌신이 있습니다. 교회에 불씨가 살아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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