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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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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13.2021 아직도 소망이 있사오니...
    어렸을 적에 송대관이라는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불러서 유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쨍하고 볕들날 돌아온단다~~” 이후의 가사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한때 사회의 빅 히트곡이 되어서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지구촌 모든 사회에는 이렇게 ‘희망’을 노래하는 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에도 소망/희망은 우리의 삶에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침체되고 어려운 시기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제공해 줍니다. 희망의 모든 인류의 공통분모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서둘러 죽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희망/소망은 우리 삶의 필수 아미노산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레미야의 삶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누군들 자기 민족과 가족 그리고 부모 형제들이 전쟁포로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자신의 희망과 바램을 뒤로하고, 비참한 미래를 자기 민족에게 선포해야했습니다. 국가로부터 배신의 딱지를 받습니다. 친지와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나라는 망해갑니다. 회개해야할 백성은 강퍅해서 목을 곧게 합니다. 사공은 많아 어디로 갈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는 응답조차 없습니다. 생각만해도 많은 낙심과 절망이 양식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이 와중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애3:21). 모든 것이 막혔다고 생각하던 그에게 한 가지 섬광같이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것 같아서 절망이고 죽음이고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깊이 묵상해 보니 오히려 소망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많은 상황이 절망적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심지어 이제는 교회 시대는 끝났다고 탄식하는 일도 지겹도록 듣습니다. 앞뒤를 둘러보아도 그래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망할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소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서 교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은데 망하면 망할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커지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나는 망해도 망할 수 없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애3:22). 바로 그것입니다. 약해질 수 있습니다.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해도 완전히 망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올 백성이 마지막 그루터기 같이 남아만 있어도, 그 그루터기가 회개할 때에 새싹이 나고 자라는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약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탄식하며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때에 약함은 더 이상 약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주님께 진정으로 돌아가려는 심령에 부어져서 마침내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것 같아도,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것 같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이 가정에 산적해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 때문입니다. 그분만 붙잡으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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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
    아름다운교회 Jun 06.2021 변화와 변질
    목사님들끼리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달라졌다고 합니다. 변화의 물결이 갑자기 이루어지다보니 사회 곳곳에서 그 변화에 적응하려는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급진적인 사회의 변화속에 갑자기 한방 먹은 것과 같은 어려움이 교회들을 휩쓸고 지나갔고, 이 변화의 물결에 적응하려는 몸짓 또한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자원과 기술이 집약된 사회는 그 변화속에서도 제대로 대응을 해내기도 하지만 교회는 대다수가 개척교회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그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이나 언론들에서는 이 변화의 물결속에서 상당한 교회들이 이미 문을 닫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에서만, 일년에 3500개 교회가 개척을 해마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1/3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팬테믹 기간동안에는 오히려 개척한 숫자보다는 문을 닫은 숫자가 훨씬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젊은 층이 얇아졌음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내리막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여온 현상입니다. 다만 이번 팬데믹으로 인해서 급강하된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가슴쓰리는 분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들만 아니라 관심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위기는 어쩌면 훨씬 더 강하고 심각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교회는 ‘성장’이 공식화된 도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급작스러운 기독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을 보고, 그것이 교회 성장이라는 달콤함을 던져주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성장 속에서 무엇인가 변질되는 자각하지 못하는 자가면역 상실증에 걸린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퇴보나 깨트려지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신앙과 교회를 이루는데 큰 자양분을 형성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시편4:7에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부끄러움이 일어났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두신 기쁨’보다는 ‘곡식과 새 포도주가 넘칠 때의 기쁨’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확이 많아지고, 곡식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하게 부어지는 축복이, 내가 주님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그들의 ....기쁨’이라고 부릅니다. 나의 기쁨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기쁨입니다. 그들은 곡식이 많고, 새 포도주가 넘쳐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그것은 ‘변질’입니다. 변화되는 세상에 살다가 보니, 살아남기 위하며 몸부림치는 과정속에서 진짜 가져야 할 ‘주님의 기쁨’은 온데 간 데 없고, 세상에서 얻는 기쁨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심각한 변질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은 뒷전에 밀려납니다. 왜냐면 세상이 주는 그 기쁨은 정말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주신 기쁨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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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30.2021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
    미국은 코로나 백신의 접종율이 50%를 넘어서면서 정부에서는 백신접종 완료자들은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도록 하였습니다. 각 호텔들에서도 오는 6월부터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유독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적인 색채를 가진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이 무슨 수치인양 거부감이 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스크가 바이러스 방역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그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쓰라고 쓰라고 강제를 해도 잘 착용하지 않던 미국인들이 마스크를 벗으라고 하면 제일 먼저 반기고 벗어던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은 마스크를 벗으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마스크를 안 벗으려고 한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기이한 일입니다. 이유인 즉은 그동안 마스크를 써봤는데 나름대로 유익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마스크가 단지 방역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방어기재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면, 내 표정에서 각종 감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싫은 사람앞에서 싫다는 표정을 지을 수 없는데 마스크로 가리지 모든 감정이 가려져서 애쓰게 내 감정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마스크를 씌워놓았더니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감정 노출의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사람들이 배운 것입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사실 이젠 거의 모든 교우들이 백신접종을 했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어도 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마스크를 벗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이유일까요? 억지로 좋아하고 웃는 표정을 낼 필요가 없어서 너무나 편리하다는 사람들의 논리처럼, 마스크 쓰고 있으면 말씀에 공감하는지, 싫다고 표현하는 것인지, 내 감정을 안드러내도 되고, 찬양을 할 때나, 통성 기도를 할 때에라도 입이 보이지 않으면 찬양을 하고 있는지 안하는지 노출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입을 가리고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나를 노출시킬 기회가 없으니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기에 마스크를 벗으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한층 강화된 방역을 위해서 그리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보이지 않음 속에서 숨고 싶은 우리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면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라틴어에서 인간이라는 단어, person 이는 말은 ‘가면’을 뜻하는 말에서 기인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가면쓴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면을 써야 되는 존재이라는 말이겠지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속에서 각자가 포장된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 불편해서 또 다른 마스크 가면을 써야 한다고 하면 이중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앞에 숨길 수 없는, 발가벗은 것 같이 드러날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가면도 통하지 않고, 얼굴의 마스크 가면도 통할리 없습니다. 마스크라는 가면속에서 우리의 편리함들, 화장 안해도 되고, 남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되고, 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라면 마스크 벗는 것을 고려해 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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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8
    아름다운교회 May 23.2021 냉장고에 넣어둔 신앙
    지난 팬데믹으로 인하여 성도들 만나기도 어렵고, 만나는 장소도 안전하지 못하여 택한 심방의 방법으로 교회에서 음식을 해서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음식하는 것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서 괜찮은 반응을 보이며 성공적인 정착방법이 되었습니다. 음식을 만들다가 보니, 냉장고에 남은 음식재료등을 보관해야 하는 경우들이 생겼습니다. 요즘 음식하는 횟수가 줄어들다가 보니 냉장고에 보관하는 기간이 길어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음식을 냉장고에 저장하는 것이 능사인줄 알았습니다. 냉장고가 음식을 아주 효과적으로 잘 보호해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냉장고가 나의 믿음을 배반했다는 것을 느끼는데 걸리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쓰려고 보니, 상한 것, 변질된 것,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음식을 다루는 주부도 아닌 제가 그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냉장고가 만능인 줄 알았습니다. 언제까지나 신선도를 지켜줄 줄 알았는데 상하는 것의 시간만 늘어났을 뿐, 반드시 마르고, 상하고, 변질, 변색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냉장고가 만능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과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디가도, 어떤 상황이 와도 내 신앙은 변질되지 않을거야,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영상으로 예배를 드려도, 놀러가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지 하는 사람들로 가득찼습니다. 마치 일정기간동안 냉장고에 보관하는 음식처럼, 자신들의 신앙도 냉장고에 보관했으니 괜찮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팬데믹이 끝나가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와서도 빗장을 풀지 않고 지난 1년 넘는 시간동안 쌓여진 습성대로 그저 ‘편안한 예배’에 도취되어 냉장고에 저장한 음식처럼 꺼낼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보는 시각은 다릅니다. 이미 그 냉장고에서 음식이 썩어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이미 신선도를 잃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니 안상하겠지... 안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예배자로 살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무엇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아서 그 길을 순종함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난 예배 드렸으니 다 했어!’라고 말하는 듯,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거기서 얻은 에너지를 가지고 여기저기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니 저장하기만 하여 온갖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압니다. 들어가는 에너지와 나오는 에너지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불균형인 셈입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뜻이 무언지를 찾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냉장고에 넣고서 언제나 썩지 않을 것처럼 쓰지 않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쉼 없이 달려갑니다. 냉장고에서 꺼내십시오. 언제나 썩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유효기간이 다하기 전에 냉장에서 꺼내서 사용하십시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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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7
    아름다운교회 May 16.2021 포기하지 않는 사랑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최초 기관은 가정이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핵가족의 시대를 맞아 가정의 의미와 중요성이 훨씬 강조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만큼 중요한 것도 교회입니다. 왜냐면 교회는 영적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정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참 많은 생각과 배움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세미나를 온 가족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도 커집니다. 지난 가정 세미나에서 우리가 배운 한 가지는 우리의 잘못된 개념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성격차이가 가정의 불화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성격차는 극복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격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나도 내 성격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 배경이 확연히 다른 부부가 성격이 같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결혼 전에는 그 차이를 알았음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그 다름(차이)를 보듬을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그 힘을 잃어버리고 포기해 버린 탓이 원인입니다. 때로 우리는 절대적 절망이나 실망앞에서 포기하는 것을 반복해 왔습니다. 내 노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반응이 없을 때, 기대에 어긋날 때, 실망이 클 때에는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 닭보듯’ 그렇게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이해해 보면, 그 속 사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어느 시점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어느날 그 포기를 포기하게 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실 그러지 않나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실망시키던가요. 요즘 새벽 기도회에 출애굽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원망할 조건과 환경이 되면 언제라도 뒤돌아서서 돌을 던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반역하는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십니다. 본보기를 보이실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해놓고도 하나님은 다시 찾아와서 관계를 회복하자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지만, 그러한 우리를 주님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미 끝나도 진즉 끝날 관계입니다만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나같은 사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잡아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천국 가도록 우리에게 향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도무지 바뀔 수 없다고 포기한 사람, 아무리 뭐라해도 듣지 않는 사람, 늘 마이웨이의 삶을 사는 사람, 고집불통이라고 내 놓은 사람, 구제 불능이라고 내 놓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아낸다는 것은 자존심도 상하고, 속도 상하고, 분노조절 장애처럼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법대로 하면 다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한 손이 범죄하면 잘라버리라, 두 손 성하고 지옥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시는 말씀이 훨씬 가슴에 더 다가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사랑이든 인내이든, 명령이든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영혼구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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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6
    아름다운교회 May 09.2021 어머니, 그 아름다운 이름
    백신 접종이 어느 정도 원활해 지면서 눈물겨운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양로원에 계시는 부모님을 코로나 때문에 보지도 못하던 안타까운 가정이 가슴을 아프게 했는데, 이제 백신접종으로 인해 드디어 만나보게 되었다고 눈물겨운 상봉을 하게 된 가정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이름입니다. 불러도 지침이 없고 다 써도 마름이 없는 이름입니다. 오늘이 ‘어머니 날’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어버이(아버지. 어머니)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했습니다.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김장도 하고, 내일 음식을 준비하고, 오랜만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스크를 벗고 하하 호호 웃으면서 즐거이 봉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믓한 마음을 한껏 누렸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닫혔던 문들이 열리는 듯하여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모두의 사랑과 정성이었습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복을 받는 길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으로도 선명하게 밝힌 부모공경,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해야할 본분이며 사명이기에 이를 위해 생명을 다하여 그 길을 걷는 이가 있는 반면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하여 쉽지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자기 이기앞에서기만 하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 공존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부모자식간의 소통과 관계가 원활하지 않는 가정은 무엇인지 모르게 불행한 냄새가 납니다. 어디가 삐걱거려도 삐걱거립니다. 하지만 부모공경이 원활한 가정은 늘 행복의 향기가 가득하게 퍼져있습니다. 제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과 효도’였습니다. 효도를 배운 가정, 효를 마음에 둔 사람의 심성이 절대로 악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잘 얻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효도’가 쉽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부모님들을 인터뷰하였는데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쉽고 서운한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나는 일들도 많았을 법한데, 그래서 그 서운함을 토로할만도 한데도 어느 부모도 그렇게 하지 않고 한결같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안함’이었습니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도와주지 못해서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더 안준다고, 더 못해준다고 아우성을 치는 젊은 자녀들을 볼 때마다, 마치 부모에게 빚받아내려는 듯 부모를 대하는 자녀들을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부모에게 손벌리며 사는 자녀들을 볼 때도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부모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사랑을 주었고, 우리를 길러주신 사랑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으시고, 오직 양육의 책임을 평생을 져 오셨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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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
    아름다운교회 May 02.2021 Communication error
    어느 새 5월이 되었습니다. 꽃피는 춘삼월이 언제 왔나싶은데, 벌써 여름은 가까이서 손짓을 합니다. 시간앞에만 서면 언제나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임을 알게 됩니다. 이 5월에는 우리가 그동안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가정 세미나’를 가지려고 합니다. 왜 진즉 이러한 모임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 이면에는 제 자신 속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스스로가 좋은 남편, 좋은 아들, 좋은 아빠라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전히 그런 자신감은 없지만 자그마하게 깨달은 것들이 있고, 필요성을 깨닫기 때문에 용기를 내게 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세미나를 안해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고 있다’는 사람이라면 그 가정은 참 좋은, 행복한 가정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체면 때문에 그저 남들에게 웃는 모습,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일까요? 그래서 속을 남에게 내려놓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아마도 무슨 일을 해도 행복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나의 잘못된 모습이 드러나면 괜히 창피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가정은 저절로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에게는 교묘하게도 ‘커뮤니케이션 에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누리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중의 하나가 McDonald에서 65센트짜리 senior coffee를 먹을 때입니다. 우선 좋은 것은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1불도 안되는 돈으로 아무 때나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는 만족감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어느 날, 그 senior coffee를 주문하는데 평상시 같지 않게 cream & sugar를 처음으로 order에 삽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니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cream & sugar는 어디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물끄러미 한 참을 바라보다가 작은 bag에 cream & sugar를 한보따리 넣어줍니다. 순간 살짝 불쾌감이 들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거야?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고 오는데 커피를 마시려고 뚜껑을 여는 순간 아, 그 커피에 이미 크림과 설탕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 아가씨는 ‘거기에 다 있는데 왜 또 설탕을 달라고해? 손님이라고 갑질하는거야?’ 반대로 나는 그런 주문을 처음해봐서 이미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그 아가씨의 행동이 무례한 것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Communication error(잘못된 소통)에서 오는 오해이지요. 서로가 가진 전제가 각각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서로가 이미 알았더라면 좀더 유쾌한 거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에서 가진 서운함이 있을 법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오해와 이해부족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편함이 가정의 불화와 불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그렇게 지냅니다. 남편이니까, 아내이니까, 자식이니까, 부모이니까 당연히 이래야지 하는 마음이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알수록 에러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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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25.2021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어느 딸이 엄마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엄마, 만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주세요. 그러면 제가 엄마에게 받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줄게요” 윤회설을 떠나서 딸이 엄마의 사랑을 이렇게 갚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정말 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만큼 엄마의 사랑을 깊게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랬을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주고 싶은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죽음에 내모는 비정한 엄마도 있다고 가끔 회자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보다는 한없는 사랑을 퍼 부은 엄마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그런 사랑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일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심성에 깊이 잘 박혀있는 사랑의 모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진보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 경제, 정치, 사상, 종교, 교육, 군사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이보다 진보한 세상은 없습니다. 퇴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변질이라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그런 분야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이런 세상은 없었습니다. 시공간(時空間)적으로도 그렇지만 사상의 발전이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초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더 까칠해졌고 더 선명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목회자로서 자꾸만 제 마음에 밀려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고 변질이 가능한 세상, 우리가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앞으로 어떤 패턴으로 변하게 될지 생각해보면 두렵기가 한이 없습니다. 두 가지 현상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같습니다. Main stream은 세상이 끌고가는 방향입니다. 세상에 동조하고, 세상이 원하는 것들을 우리가 원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인기를 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방향을 ‘넓은 문’처럼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와중에서 ‘흰 옷 입은 신부’처럼 ‘남은 그루터기’가 되어서 ‘좁은 문’을 지키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향을 생각해 보면 정말 앞으로 오는 세상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남은 그루터기처럼 가지는 꺽이고, 잎은 떨어져나가서 그야말로 겨우 밑둥만 남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절규가까운 신음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백신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급될지라도 그 안에 여전히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코로나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두려움의 종노릇을 하는 노예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세상이 오든, 우리는 우리 안에 갖가지 종류의 두려움을 주는 세상의 간계를 파악하고 그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이 그것을 이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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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18.2021 벼락 부자, 벼락 거지, 개근 거지
    낙뢰(落雷)를 벼락이라고 합니다. 벼락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급격한 방전현상을 말하지요. 벼락맞았다. 그럽니다. 급작스러움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벼락맞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이야기입니다. 얼마전에 한국의 어느 지인과 통화를 했습니다. 요즘 부동산이 갑자가 올라서 자기 사는 집이 갑자기 ‘따따블’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부자되셨네요? 축하합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 ‘저는 좋은데 제 딸이 울상입니다. 우리 딸이 졸지에 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하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잠시 혼돈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을 한국에서는 ‘벼락 부자, 벼락 거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조어를 듣다가 보면, 이런 용어들이 사실은 좋은 용어가 아닙니다. 자조섞이거나 비하, 비판의 어조가 더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류의 신조어중에 ‘개근 거지’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에는 개근상도 줄정도로 개근이 큰 상입니다. 우등상은 못받아도 개근상은 타야합니다. 상(償)이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이런 개근은 ‘거지’같은 삶이라는 비하용어라고 합니다. 왜냐면 일년 열 두달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학교를 출석했다는 말은 성실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들은 해외여행이다, 현장실습이다 해서 일년에 몇 번씩 번지르하게 해외를 오가는데 오죽 가난하면 체험학습도 못가서 학교에만 하루도 거르지않을 정도로 ‘가난한 학생’이라는 의미가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울어야 할까요, 웃어야 할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를 성경은 뭐라고 할까요? 비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뭐, 이런 류가 아닐까 비슷하게 껴맞추어 보았습니다. ‘벼락 구원’을 받은 사람은 벼락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이 달렸던 한 강도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날벼락 맞은 사람처럼 그렇게 구원의 은총을 벼락같이 받은 사람은 그나마 나은 것이겠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열심히 믿고 있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예수님 따라다닌다고 해도 갑자기 버린 받은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 바리새인 같은 신앙인이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두렵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부자가 되고, 어쩌다가 거지가 되는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모두가 공감하고, 공평한 공정은 이 세상에서는 어차피 완벽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공정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공정/공평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의 공평은 상대적이지만, 그분의 공평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공평,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세상은 자그마한 불편함과 손해에도 민감하다고 합니다. 너그러움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 중심의 시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공의와 공평’은 언제나 자기 중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공평이 기대가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병든 마음과 사회가 속히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벼락 부자/거지, 개근거지의 정의가 아닌 완벽한 하나님의 공의아래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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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2
    아름다운교회 Apr 11.2021 선줄로 생각하거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 세계의 지난 1년은 도둑맞은 집과 같다고 한다면 해괴한 논리일까 싶지만, 지구상 모든 나라에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으로 인해 모두가 혼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미국은 오는 19일부터는 모든 성인들이 조건없이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어느 정도 바이러스로부터 자유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예견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로 인하여 참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한창 창궐할 때에 미국은 ‘이게 선진국이냐’는 비아냥을 들으며 날마다 바이러스 확신의 신기록을 갈아치면서 위험한 국가의 오명을 쓰고 살았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K-방역’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내며 방역우수국가로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안았고, 많은 나라들이 한국의 방역을 모방하려는 일들까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오히려 걱정스러운 전화를 받기도 했고, 이곳의 사람들은 한국으로 피난(?)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전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미국이 선진국이 맞다’는 감탄사를 한국의 지인들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한국은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그야말로 ‘국민을 죄인취급하듯 때려잡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한국에 방문한 지인은 격리기간의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는 한국가기 싫다고 합니다. 인권은 방역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도 그러한 불편은 ‘이웃을 위하여 담보’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백신 개발이나 확보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세계의 강대국답게 백신개발과 확보 그리고 접종은 남들이 부러워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K방역만 자랑하고 백신확보에는 등한시하다가 백신접종으로보면 세계 최빈국에 속할 정도로 답답한 현실을 맞고 있습니다. 오직 국민들을 쥐어짜서 어기면 벌을 주는 일벌백계의 후진적 방법으로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K방역이 성공하려면 이후 백신과 함께 완성해야 하는데 방역에만 신경썼지 치료와 예방에는 게을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일한 상황판단이었지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바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조금만 나아지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신앙의 금자탑들 말입니다. 지금은 망하지 않아 보입니다. 망할 일도 없어 보입니다. 잘 돌아가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잘나가던 이스라엘도 결국은 망했습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 사도의 경고를 우리는 정말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늘 ‘안심’을 강조합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위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인생을 돌아보면 서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넘어지기 쉬운 지점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배부른 포만감을 느낄 때 사고가 나기 쉽상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푯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라는 푯대라면 여기서 만족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푯대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곳을 향하여 오늘도 달려가야 합니다. 선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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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04.2021 뼛속까지 죄인인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부활의 아침입니다. 한 겨울의 추위에 말라서 얼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나뭇가지에 생명의 옷을 달기 시작하면서 봄이 왔음을 알아채갑니다. 생명은 정말 죄의 근본만큼, 아니 그보다도 끈질긴 힘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에스라 성경을 읽으면서 그토록 불순종의 죄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걸었던 이스라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백성이 죽거나 포로 잡혀가야만 했던 그 비참함을 잊어버리는데 70년은 오히려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에스라 9장에 보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불순종의 길을 걷는 것을 보면서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아 회개기도하는 에스라를 봅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작정한 그야말로 ‘뼛속까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낯이 부끄러워 견딜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이러한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의 형틀에 그 ‘뼛속까지 죄인’인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 때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없이는 드릴 수 없는 예배와 기도 그리고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평생을 이 길을 걸어오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으로 내 죄를 용서하신 것도 큰 사랑인데, 부활하심으로 나로 부활의 영광에 동참시키신 일은 도무지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없었으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의 부활도 없고, 믿음도 헛것이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부활하시기도 하셨지만, 그 부활은 또한 나의 부활을 위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 또한 뼛속까지 죄인을 죄의 권세에서 붙잡아 놓지 못하게 하시고, 그 죄인을 다시 하늘의 영광으로 올리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은 도대체 어떤 사랑입니까? 세상의 다른 종교는 자신이 노력해야 가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업보가 있으면 그 업보를 해결해야 합니다. 자신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총, 칼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하여 억지 신앙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굴복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심으로, 자기를 버리시고, 십자가라는 수치를 당하시면서까지, 자신의 있는 모든 것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분을 따라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그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지한 가운데 죽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온 몸을 드러내어 ‘나 여기있다! 여기 있으니 찾아라!’ 무모한(?) 숨바꼭질을 하시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그 사랑이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에서 불타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나머지의 삶은 이제 그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이 땅에 부활의 증인으로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활증인이 되어 주님 오실 때까지 평생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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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
    아름다운교회 Mar 28.2021 철새 정치인, 철새 신앙인
    한국의 어느 사관생도가 청와대의 국민청원을 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지난 주에 천안함 추모행사에 야당정치인을 참석시키지 않은 정부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는데,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일에 여당과 야당이 어디있느냐며, 정당을 뛰어넘어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들으며 미국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미국 군인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존경을 받는 것은 말할 것이 없고, 의료, 학업, 재정에 대해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나라도 군대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군인들을 존대하는 것을 보고 삽니다. 그들에게는 군생활이 썩은 시간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시간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정부와 국민이 철저하게 존중을 해줍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수치스러운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일은 잘못된 의식을 가진,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아니라 자기 안위와 편익을 위한 이기적 정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국가라는 거창한 말을 하지만 사실은 자기 이익에 혈안이 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표(vote)’일 뿐입니다. 표가 되는 곳으로 이동하는 철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거할 때에만 국민이 있고, 선거가 끝나면 국민은 그들을 섬겨줄 노예에 불과할 뿐입니다. 표만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합니다. 피아(彼我)가 없고, 명분과 자존감도 없습니다. 표만 되면 자기 주장도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습니다. 인생철학도 표앞에서는 아무 힘도 못씁니다. 그냥 표만 달랍니다. 국민은 섬겨야할 주인이 아니라 표만 주는 종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염치도 없습니다. 잘못했다는 사과도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줄도 모릅니다. 오직 표에만 관심있는 철새들입니다. 역겨운 정치인들이 한국과 미국에 널려있습니다. 거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철새도 있습니다. 오늘 이곳, 내일은 저곳을 기웃거리며 자신을 높여주고, 인정해주고, 편안한 신앙생활을 위해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사람들입니다. 팬더믹 시대에 우리는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핍박으로 인해 교회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그들에서부터 퍼져나갔습니다.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날 교회가 뿔뿔이 흩어졌는데 과연 더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졌을까요? 의심이 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였을 때 가장 주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였을 때 가장 나약해졌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내일부터 우리는 21년도 ‘겟세마네 특별 새벽기도회’를 엽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만져보고, 따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바라보지도, 만져보려고도 더더구나 따르려고 하지 않는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신앙 철새처럼 정함이 없이 오직 표에만 관심있는 정치인처럼, 오직 일생의 편안한 ‘복’에만 관심있는 철새 신앙인의 모습을 벗어나려면, 십자가아래서 다시 거듭나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에 된 것처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곳이 바로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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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3.2021 예배자인가, 시청자인가
    어린아이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자란다는 것의 하나는 아무래도 자기책임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 않습니다. 의존적이고, 미숙하고, 실수와 실패가 많으며, 자기통제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은 자기 삶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통제력도 큽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어른 아이가 많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성인을 넘어 장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독립도 하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는 독립하고 싶지 않을만큼 의존적 삶을 삽니다) 부모에게 얹쳐사는 경우가 코로나 팬더믹 시대에 더 늘었다는 보고도 들려옵니다. 그래서 부모는 평생 허리가 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탄도 합니다. 아마도 장수(長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생활에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비대면(Untact)시대가 되다 보니, 어느 시대보다도 자기 책임의 영역이 더욱 넓어졌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성숙한 모습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지 시험대에 선 것이 요즘 상황입니다. 어느 교회 연구 전문가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성숙한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나름대로 대처를 잘 해나가서 어려움을 잘 극복했지만, 미성숙한 교인들이 대부분인 교회는 어려움을 엄청 겪는다’는 분석이었습니다. 나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석입니다. 미성숙한 이들이 모인 교회는 우왕좌왕하다가 이 코로나 시대에 교회 해체라는 위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만, 나름대로 잘 훈련되고 성숙한 교회는 이 어려움의 시대 가운데서도 고통은 똑같이 있지만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 코로나 1년의 시기를 그냥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음의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요. 내가 비록 교회에 나가지는 못한다고 해도 나를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큰 소리를 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그 존재는 교회를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도 발견합니다.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슴아픈 부분이 이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회개도 합니다. 잔소리하는 것 같아서, 알아서 잘 하겠거니 그냥 놔두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혼이라도 내고, 보채기라도 하고, 채근이라도 할 결 그랬습니다. 잘 알아서 성장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비대면 예배를 드린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예배하는 성도들로서 누가 성숙한가, 미성숙한가를 가름하는 한 단어가 이것입니다. ‘나는 시청자인가, 예배자인가?’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며 맘에 드는 예배를 찾거나,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예배를 ‘시청’하는 사람은 자기 책임이 없는 미성숙한 사람이 아닐까요? 비록 컴퓨터나 TV앞에 서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시청자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하나님앞에 서서 예배자로 예배하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목회자로서 가슴졸이는 것은 행여나 지난 1년의 비대면 예배를 경험해 오면서 우리 성도들이 혹시나 ‘시청자’가 되어있으면 어쩌나 싶은 것입니다. 예배자입니다. 시청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숙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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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4.2021 은혜도 불평도 전염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에 큰 변화의 쓰나미를 겪은지 1년이 되어갑니다. 이번 바이러스는 그 감염력이 너무나 커서 WHO에서 Pandemic(대유행)이라는 용어를 쓸만큼 감염이 빠르고 위험합니다. 미국에서만 해도 수십만명이 사망을 했을 정도로 피해가 컸고, 이로 인하여 경제, 정치, 종교지형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패턴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중에 어떤 결론으로 이 사태를 정리하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스크 쓰기를 싫어하는 미국인들도 마스크를 쓰기 시작해서 이제는 마스크도 생활의 일부가 될만큼 자연스러워졌던 것은 ‘감염’이라는 전염병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염병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끊거나 넓혔습니다. 전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가기 전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염병(전염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살아있기에 감염(?)이 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전염력이 강했습니다. 이 복음에 노출되거나 한번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데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핵폭탄급’의 변화입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하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놀라운 힘이었기에 이것은 전염병보다더 어쩌면 더 강력한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의 전염병’에 걸릴 것을 염려했습니다. 아니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빛에 나오지 않으려했습니다. 복음의 빛에 비치면 자신의 어두움이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복음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은혜받는 것도, 불평하는 것도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받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은혜에 전염이 됩니다. 선한 일이고 선한 영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염성이 강하듯,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 역시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받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 복입니다. 그 은혜의 삶을 모방해보고 따라가다가 보면 그 은혜가 어느 덧 나의 것이 됩니다. 그러려면 부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은혜안에 거하고 싶다, 나도 기도하는 자리에 앉고 싶다, 나도 그런 분을 닮고 싶다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남의 일처럼 여기고 지나가면 전염되지 않습니다. 은혜받으려면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불평도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내 입의 불평이 있으면 어느 새 내 마음 전체로 불평이 자리잡습니다. 매사에 불평입니다. 이것도 불편해지고, 저것도 편하지 않아서 늘 불평입니다. 그런 사람 곁에 가면 나도 모르게 그 불평이 바이러스처럼 전염됩니다. 그러다 둘 다 파멸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나는 안 그래야지 하는데도 자꾸만 그래지는 것은 내 주변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목회하면서 성도들을 볼 때마다 그런 마음이 듭니다. 은혜받는 사람 곁에 다가가는 사람들은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사람들 곁에 가는 사람들은 불안해집니다. 왜냐면 은혜와 불평이 똑같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 은혜에 전염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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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07.2021 당신이 교회입니다
    오늘은 교회가 창립되어 12년을 지내온 것을 감사하는 의미있는 주일을 맞이합니다. 12년의 역사 전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립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담임목사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음을 생각할 때 감사하고 또 감사하지만, 지난 12년의 세월 가운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가슴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으로 인해서 명맥만 유지하거나 이름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교회도 있는 요즘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정말 교회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촛불을 끄지 않고 흔들거리며 켜져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변의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눈물날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유대인들은 복음 전파자들에게 악감을 품게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왔습니다(행14:2). 온갖 그럴 듯한 이유를 가지고 복음 전파자들의 복음을 흐트러트리려고 ‘악감(악한 감정)’을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 일으켜 반대를 일삼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살아있었기에 그 반대 속에서도 아름답게 복음의 꽃이 피었던 것처럼, 교회가 12년의 세월을 지켜오는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이르게 하신 것은 우리의 노력과 힘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12년전, 주변의 반대와 염려 그리고 리먼 금융사태로 인해 유래없는 극한의 어려움속에서 교회의 첫 번째 불이 켜졌습니다. 생각만 해도 뭉클한 감격스러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4년반만에 새로운 터전으로 옮기는 기적적인 역사 가운데서도 ‘망한다...’는 분들의 훼방과 온갖 종류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나름대로 역할을 하면서 복음의 산실, 은혜의 방죽의 역할을 묵묵하게 지금까지 해 오고 있었고, 코로나 시대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해 오는 특별한 은혜를 입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미소짓게 해드리는 교회’가 한동안 우리 교회의 표어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속의 똑같은 다른 교회가 아니라 세상속에서 전혀 다른 교회를 표방하면서 시작한 교회는 지금 어떤 교회입니까? 시스템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는 그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교인이 될 것이냐, 예수인이 될 것이냐, 우리의 과제입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의 변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교회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극히 험난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제가 우리 앞에 남아있음을 생각할 때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목회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인 우리 자신 모두가 함께 마음을 맞추어야만 가능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교회를 거쳐간 수많은 성도들도 나름대로 자기 사역에 충실하고 가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도 감사하고, 더더욱 감사할 것은 지금까지 묵묵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헌신하는 분들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교회이기에 우리가 교회를 이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교회를 세워갈 기둥들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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