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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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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8.2021 쇼핑
    가끔 산에 올라가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이킹이나 등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용한 곳에 앉아서 묵상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것이 목적이어서 잠시 가까운 산에 올라가는 것이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시간을 위해서도 준비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여 자질 구레한 물품들을 수용한 가방을 하나 장만하여야겠기에, 전문용 등산가방이 아닌 그저 수납용 가방을 구입하였는데 사전 지식도 없었기에 그저 가장 저렴한 가방을 인터넷에서 구입을 했습니다. 20불 안팎으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그림이 보기 좋아서 구입한 등산 가방은 우선 커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것 저것 챙겨넣은 가방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지 들을 때마다 이번에는 여기서 툭~ 터지고, 다음엔 저기서 와삭~ 깨집니다. 그래서 바늘로 깁기도하고 끈으로 잡아매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형제의 소개로 전문 등산용품 가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좋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를 연발하게 되었는데 가격이 300불정도입니다. 가방하나에...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가히 넘볼 수 없는 산이어서 눈요기만 즐겁게 하고 나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싼 것을 구입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싸구려이기에 쉽게 망가지기도 하고, 쉽게 질리기도 하며, 실효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살아온 삶의 습성이 ‘싼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어려웠던 삶에서 배운 습성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그리 지혜롭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싼 것을 싸게 사는 것’ 이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비싼 것을 싸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싼 것은 누구나 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싼 것을 싸게 사는 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도 배웠습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이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저비용을 투자해서 고효율을 내는 것이 ‘경제적’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물건은 바겐세일이 있어서 비싼 물건도 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저비용 고효율의 기회가 쉽지 않습니다. 되도록 편하게 신앙생활하면서도 은혜도 많이 받는 방법도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수지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연히 참석한 집회에 큰 은혜를 받아 평생 주님의 사람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단 한번의 기회로 인생의 전환점을 이룬 분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 한번의 기회를 위하여 얼마나 많이 주님의 인내와 기다림과 사랑과 희생이 큰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공짜는 아닙니다. ‘은혜’라 함은 ‘거저 주시는 것’ ‘공짜’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공짜는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이 없어서 공짜같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아끼지 않은 ‘희생’의 결과가 우리 입장에서는 ‘공짜’가 된 것이지요. 비싼 것을 싸게 사는 것을 누리고 싶다면 그만큼 발품을 팔아야 하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알아봐야합니다. 그러니 그것도 공짜가 아닙니다. 은혜받고 싶습니까? 발품팔아야 합니다. 공짜로 싸게 사는 법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말씀, 기도와 더불어 사모하고 발품파는 열심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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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5
    아름다운교회 Feb 21.2021 Texas 한파와 교회
    지난 한 주에는 기후의 변화로 인하여 미국이 몸살을 앓았던 주간이었습니다. 미국 본토 48개주 중에서 73%가 눈으로 덮이며 한파가 몰아쳤는데 특별히 중, 남부지역에 피해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단전, 단수가 이루어지고 사망자만 30여명에 이르고, 피해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전기가 끊기는 것은 물론, 산업용 연료와 가정용 난방까지 중단이 되면서 그 고통이 이루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환자들이 사용하는 의료용품에 제공되는 것까지 포함하면 생각지도 않은 피해가 많아 큰 고통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텍사스 주의  경우에 전기 발전량이 미국에서 1위라고 합니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등의 매장량이 미국 1위이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41%, 천연가스의 25%, 풍력 발전량의 28%가 텍사스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한파에 모두가 얼어붙어서 가장 넉넉한 자원과 인프라를 가지고 가장 혹한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고 합니다. 이러 저러한 원인분석이 지적되었지만 어느 신문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고립’입니다.  너무 풍성한 자원과 실력을 가졌기에 다른 주들과 연결이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다른 주들을 캐나다와 멕시코를 잇고, 로키 산맥을 중심으로 동, 서로 나뉘는 권역이 있는데 이 주들은 서로가 서로 전력 연결망이 형성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는 서로가 전기를 사고 팔수 있는 연결망이  형성되어 있어서 타주나 다른 나라의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텍사스 주는 자체적으로 소화가 가능하고 다른 곳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타 주로부터 들어올 전기 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100년만에 찾아온 한파로 인해서 톡톡한 댓가를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자만하다가 위기 한방에 모두가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서 교회가 성도됨의 ‘단절’이 일어났습니다. 구태여 교회에  안나가도 되는 온라인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구태여 성도의 교제를 잊어버릴   만큼의 ‘고립’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코로나가 끝나면 정상적으로  회복될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이 고립이 계속된다면 문제입니다. 텍사스의 경우처럼 재난에 대비하지 않은 자만심(?)이 불러온 불행스러운 일을 겪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로를 묶어내는 ‘성도의 교제’가 살아나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지 즐겁게 먹고 마시는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잘 엮어지고, 고난의 시기에도 그 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버팀목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한 교통은 필요가 사라지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의 교통은 영적인 성장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잠시의 유익이 아닌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코로나 시대로 인하여 이 교제의 폭이 좁아지거나  단절된 것들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필요한’   연결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의 연합은 아론의 수염에 흐르는 기름으로 표현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관계에서 영적 고갈의  시대에 서로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연결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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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4
    아름다운교회 Feb 14.2021 수건 한 장도 그냥 보내시지 않는 하나님
    코로나의 위험이 많이 진정되어 보입니다. 위험수위가 높아질 때만해도 하루에 2000명이 넘던 확진자 숫자가 어제(13일) 통계를 보면 500명대로 낮아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많이 상황이 좋아진 듯 보입니다. 그래서 네바다 주정부에서는 50명이내 혹은 25%에서 100명이내 혹은 35%이내라는 기준이 많이 완화된 조치를 내놓았습니다.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가 싶은 희망을 품어보기도 합니다. 교회도 머지않아 정상적으로 예배를 회복하게 될 날이 가깝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사실 코로나의 거친 파도는 많은 상처를 내고서 우리 곁에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를 그나마 이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섬세하게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의 고백처럼,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을 배우게 하신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척박하고 고통이 따르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 광야가 있기에 하나님만 볼 수 있는 믿음을 기르는 현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Yeshua Servants라는 기관에서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목회자 선교사들의 사정을 알고, 추천해 달라고 하셔서 몇 분들을 추천해서 작은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지난 주에 기적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16년에 우리 교회에서는 시무권사 두 분이 취임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기념으로 수건을 만들어 나누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잊었습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드렸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진행하시는 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후원을 부탁드렸던 한 분의 이름을 들으시고,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했더니 그 수건을 받으셨고 그 수건에 적혀진 교회이름과 두분의 권사님의 이름을 보면서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해 오셨노라고 반색을 하면서 그 형편을 들으시고 지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건 한 장의 나눔도 하나님은 허투루 받으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1-42).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수건 한 장을 나누었는데 그곳에 쓰인 이름을 기억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그 이름을 기억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수건 한 장으로 더 값진 보상을 주님은 마련해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어려움의 시기에 많은 사람이 필요를 호소합니다. 그 필요에 반응하여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요즘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셈을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으로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이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십니다. 진실하게 주님앞에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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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3
    아름다운교회 Feb 07.2021 처음부터 잘 배워야겠습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상황에서 목회의 패턴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비대면 예배도 그렇지만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직접 대면하기도 어려운 점도 있지만, 코로나에 감염되는 분들, 각종 사고로 인하여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돌보는 일이 그전처럼 일상적으로 되는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먼저는 목회자가 감염되지 않아야 성도들과 교회가 안전합니다. 최대한 조심하면서 일을 하고 다니기도 하고, 식당출입은 아예 금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성도들 심방은 직접 음식을 해서 나르는 필요를 느껴서 이것 저것도 시도를 해보면서 음식을 만들어 섬기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 일을 하다가 보니 자연적으로 음식하는 유튜브를 보게 되고, 주방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이 늘었습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음식을 하려니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하는 분들에게 들어보니 중요한 것이 칼입니다. 칼의 중요성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냥 썰면 되지 뭐 유별날까 싶었는데 일을 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칼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칼 값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또 이것 저것 유튜브를 둘러보니, 칼을 다루는 방법, 칼 가는 방법, 야채를 써는 방법 등등 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음식을 다루는 분들이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구나. 칼을 구하고, 다루고, 보관하는 것에서부터 그야말로 차근차근 하나씩 기초부터 잘 배워야 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전문가가 되는구나’라는 것을 정말 가슴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신앙생활은 어떨까요? 식당을 내는 음식전문가들도 기초에서부터 차근차근 실력과 배움을 통해서 전문가가 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에 비해서 우리들은 교회에 나와서 그냥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다가 세월을 보냅니다. 약간의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 집사도 되고, 권사도 장로도 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신앙생활의 전문가가 될까요? 그런 경우는 마치 봉사 문고리 잡는 것과 같아서 정말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변화도 되고, 성숙하게 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기초도 없이 ‘기복적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알지도 못하고 아는 척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초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예배 열심히 나오고, 헌금생활, 봉사 생활 잘하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칼을 고르는 방법에서, 다루는 방법, 칼 갈아 쓰는 방법, 보관하고 관리하는 방법 등 무수한 기초를 쌓듯이 그렇게 우리 신앙생활이 탄탄한 기초를 닦아 놓았을까요?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요? 음식 전문가만 되려고 해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데 심지어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한번 쯤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훈련의 과정이 없이 어쩌다가 벼락부자가 된 사람처럼, 은혜받아서 날뛰다가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경우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초가 튼튼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교회에 처음 발을 디뎌 놓았다면 그냥 교회만 다니지 말고,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기초부터 다져놓아야 합니다. 어쩌다 은혜받아 위대한 신앙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하나씩 기초를 다져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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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
    아름다운교회 Jan 31.2021 당신의 잠자리는 편하십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근래에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잠자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자고 난 이후에 느낌도 불편합니다. 그럴 이유야 있겠지만 오늘 새벽에 교회에 오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 자리가 편해야 하루가 힘이 나겠다는 것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한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을 못자면 성경 읽고 기도하면 되지…’ 그런데 잠을 못자 보니까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잠을 못 드는 고통도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고 나도 만족하거나 편안함이 없다면 그것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잠을 잤는데 그 느낌이 편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그만큼 하루가 편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내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영원한 잠, 영면(永眠)하게 될 때에 그때의 나의 잠 자리는 어떠할까?’ 그 영원한 잠, 죽음의 잠 자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지옥일 것이고, 편하다는 것은 천국일 것이 분명합니다. 현재의 삶에서 잠 자리가 불편해도 하루, 아니 삶이 불편해지는데 영원한 우리의 잠자리가 불편하다면 이것처럼 큰 불행이 어디에 있을까요?사람들은 하루의 편안한 잠 자리를 위하여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집이 있어야 합니다. 보통 값의 지불이 아닙니다. 수입의 1/3이상을 투자합니다. 침대가 편안해야합니다. 그래서 수천불의 값비싼 온갖 종류의 침대를 구입합니다. 그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분위기 또한 아늑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돈을 들여서 Decoration을 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그 관계가 나쁘면 아무리 편안하고 거대한 집도 한 순간에 지옥으로 돌변합니다. 그러니 이 행복한 잠자리 하나를 위하여 우리는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하고 평안한 잠자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냥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노력과 투자를 해서 평안한 잠자리를 만들었는데 얼마 살지 못하고 끝이 납니다. 그리 오래 누리지 못합니다. ‘아, 이제는 살만하다’ 싶으면 덜컥 질병이 찾아오고, 삶을 마무리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짧은 인생의 잠자리를 위하여 수많은 투자와 노력과 마음을 기울여 찾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원한 잠을 자야 되는 잠자리는 그리 많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루의 잠자리가 불편하면 신경을 쓰이는데, 영원한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어찌 그냥 묵과하고 지나 갈 수 있을까요?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는 하나님의 말씀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잠자리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하루의 잠자리에 신경을 쓰면서 영원한 잠자리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 평안한 영원의 잠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나 교회 나온다고 예수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좁디 좁은 문, 제자의 길’을 걷지 않으면 멸망으로 인도된 문곁에 있다가 함께 멸망합니다. 여러분의 잠자리는 어떠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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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
    아름다운교회 Jan 24.2021 답을 알 수 없을 때
    우연한 기회에 제가 한국인 목회자인 것을 알게된 K라는 동아시안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세상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복음 전할 기회인지라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K라는 사람처럼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은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게 하느냐는 것일까요? 기업이 무너지고, 소상공인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기업과 가게들이 어려워지니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겪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업이 망했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교인감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에 따라서 자연히 재정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영적 흐름과 성도의 교제가 막힌지가 오래입니다. 어떤 교회는 문을 닫아야했고, 어떤 목회자는 교회로부터 해고를 통고 받기도 합니다. 한 두가지 고통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기에 자연히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28)는 말씀을 믿지만 그 선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과연 이러한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정말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찾기 위하여 정말 고통스러운 질문과 해답을 찾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코로나를 겪은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코로나는 제게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제 인생의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정말 나를 많이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라는 정말 견고한 믿음의 고백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ㅁ낳은 사람들은 그 목적과 답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요?어느 글에 이런 제안을 했는데 아주 묘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답이 아닌 것을 찾는다’ 비록 정답을 알 수 없지만, 왜라는 것에 대한 충분한 답을 줄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답이 아닌 것을 찾아서 그것을 피하면 답을 오해하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미워해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기 때문에” 등등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답을 피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답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신앙적 연단을 이루게 되는 유익함으로 답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라는 것들이 잡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망각하게 하는 요소를 제거하다가 보면, 어느 새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경륜(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고통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그리고 다시 이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죽도록 처절한 싸움을 싸우면서도 우리가 답을 찾지만 알지 못할 때, 적어도 우리는 답이 아닌 것을 비켜감으로써 정답에 조금 가까이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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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
    아름다운교회 Jan 17.2021 코로나 시대와 행.통 140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그저 예배하는 곳으로만 생각하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과 착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우리의 상식입니다. 교회를 예배 공동체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렸느냐 안드렸느냐, 대면 예배를 했느냐 비 대면 예배를 했느냐에 중점을 둡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되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 등등의 논쟁이 바로 교회를 예배 공동체로만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배는 호흡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에 의식하면서 호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의식이 된다면 그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호흡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에 호흡을 의식하면서 숨을 쉬는 것이지요.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자기가 일분에 몇 번 숨을 쉬는지, 산소량이 얼마인지 계산하지도 않고 그냥 생각없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냥 숨을 쉽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기본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숨쉬기 만큼이나 너무나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것으로 당연히 예배를 해야만 하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이 전능자를 섬기는 길이 됩니다.교회가 예배공동체로만 남으면 무속적, 기복적 신앙으로 흐를 확률이 높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기본으로 하면서 가르치고 보여주고 살아내야 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나타내는 공동체’라고 하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예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내기 위하여 훈련, 양육(돌봄), 선교,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어우러져서 ‘전인격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하는 종합예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비입니다. 교회가 그저 예배 공동체로만 남으면 안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들이 잘못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렸느냐에 방점을 찍으면, “아, 나는 예배드렸어!(온라인이나 오프라인으로) 그러니 할 일을 다 했어”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마무리해 버립니다. 종합예술로서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connect’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지금은 성도의 교제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 잠깐이면, 이 바이러스 시대가 지나고 나면 옛날로 돌아갈건데 뭐 그리 조바심을 내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너진 생활pattern이 짧으면 그럴 수 있는데 이미 우리는 1년 가까이를 성도의 교제가 무너진 채로 살았고, 올 해도 그렇게 살 확률이 많으며, 내년에도 그 후유증을 앓으면 3년입니다. 이 시간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체질을 충분히 바꾸고도 남습니다. 그나마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관계가 단절되어가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젠 그 시계가 10년 이상은 더 빠르게 진전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행.통 140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하게 성도들을 귀찮게 하면서까지 보채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안착하지 않도록 깨우기 위함입니다. 흔들어 깨우고 싶습니다. 혼자 눈속에 있으면 그냥 죽습니다. 흔들어 뺨을 때리면서 깨라고 해야 합니다. 서로 연결고리를 다시 매야합니다 혼자 남지 마십시다. 영적으로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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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10.2021 지금도 전도가 가능한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교회와 동떨어진 세상이 아닙니다. 어차피 교회는 세상속에 존재합니다. 세상에서 동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듯, 교회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존재입니다. 왜냐면 세상에서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현장에서의 느낌은 다소 부정적인 느낌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면서 언제까지 교회가 부정적 미래만 예측하며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교회는 정말 미래에 필요치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의 시대에 무엇을 해야할까요? 코로나 시대에 성도의 교제에 벽이 생겼고, 더 한층 깊어진 개인주의 환경속에서 대면할 수 없는 이 이상한(?) 세상속에서 교회는 그저 reducing을 숙명처럼 받아만 들여야 할까요? 더 이상 확장과 전도는 꿈같은 기적에 지나지 않을까요? 저는 그 해답을 SNS에서 찾고 싶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일이 Big Data를 중시하는 인공지능의 세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뉴스나 각종 관심사들, 쇼핑, 책, 취미생활등의 모든 것들이 자의적인 선택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선택해서 본 것이지만 그렇게 보이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인공지능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물건에 관심이 있어서 클릭을 해서 봤는데, 이후에 그런 정보들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자꾸 보여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Big data를 이용해서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천해주며 그 세계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좋은 점도 있지만 위험성도 있습니다. 자기 정보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으며 많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학습’되어 버리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 지식의 세상에 우리가 가진 위험성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복음을 알리고, 교회의 성장을 도모하도록 우리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교회를 알리고 싶고,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그런 류의 인터넷 정보에 접속을 하고 그것을 Click하여 ‘좋아요’를 누르거나 ‘구독(subscription)’을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아름다운 교회의 예배나 동영상을 보다가 ‘좋아요, 구독’ 버튼을 누르고, 혹은 나누기(share) 버튼을 누르면 나와 연관된 직간접의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알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앉아서 손가락 하나로 교회를 알리게 되는 효과가 있고, 복음을 전하는 효과를 백번 얻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만날 수 없으니 전도는 물건너 갔다고 그냥 넘기면 안됩니다.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그렇게 해도 되지만 방법을 계발하면 얼마든지 손가락 하나의 수고로 우리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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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8
    아름다운교회 Jan 03.2021 행복하 소~!, 신축년(辛丑年), 소의 해
    한 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는 언제나 같지만, 인간의 시간인 크로노스는 맺음과 시작이 분명합니다. 어제 이어서 오늘을 사는 것이 늘 일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어제와 오늘의 구분이 명확해서 우리는 어제의 시간을 긋고 오늘의 시간을 다시 새롭다며 사는 것입니다. 올 해 2021년은 소의 해라고 합니다. 돼지, 쥐, 그리고 올해 소, 그 짐승이 왜 늘 흰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흰 소라고 하여 좋다고 합니다. 쥐도 희고, 돼지도 희고, 모든 것이 희면 좋은가 봅니다. 그런 시간은 의미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동양인은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하튼 소의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소~자를 붙여서 행복하소~라는 식으로 인사하는 재미가 솔솔합니다.지난 한 해에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명암(明暗)의 법칙에 의해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바이러스 하나가 가져온 수많은 변화와 충격으로 고통을 겪었던 한 해였고, 올 한 해에도 같은 아픔이 연속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상되는 어려움을 그대로 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비록 어려움이 앞길을 막는다 할지라도 그 어려움이 우리의 앞을 침식하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에 선포된 말씀처럼, ‘약한 자가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우리는 그 약함속에서 강함을 보아야 하는 운명적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 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능력으로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마냥 현실로 받아 살 수 없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파랑새를 좇으라는 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주시는 자가 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망상가와 신앙가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올 한 해에 기도하면서 교회의 표어를 내놓았습니다. 올 한 해에 우리가 붙들고 가야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소망의 이유인 예수로 살아내는 순례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가치가 재정립되는 시대를 맞아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소망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라는 가치를 재조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가 아닌 것은 홍수가 나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 홍수의 시대입니다. 바이러스라는 홍수에 모든 기존의 가치가 떠내려갔습니다. 그 두려움 하나에 우리가 가졌던 모든 행동양식이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되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다’는 것을 다시 심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으면 많은 것들이 변화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망이 유일하지 않다고 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소망이라고 고백하고 순교적 삶을 살아냈습니다. 우리도 그 믿음을 유산으로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적당하게~로는 안됩니다. 그것이 되면 이제는 ‘예수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준점, 가치관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순례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이 땅에 살지만 여기에 영원한 거처가 아닌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임을 인식하고 소망의 이유를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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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아름다운교회 Dec 27.2020 저무는 2020년을 바라보며…
    2020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당황과 혼돈, 가치관의 혼란과 New normal을 향한 새로운 변화로 인하여 사회와 교회 모두가 깊은 혼란에 빠진채 한 해를 정리해야 하는 이 아쉬움과 함께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큰 염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한 소식들이 우리 주변을 밝히고 있지만, 지금까지 함께 해 오셨던 주님이 오는 한 해에도 그분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지난 한 해를 돌아 보건데, 코로나 시기임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 위한 몸부림을 다 했던 한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모여서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성경읽기, 시편묵상, 큐티활동, 성탄묵상 그리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모이기를 힘써서 주일 예배와 새벽기도회 그리고 다니엘 특.새등은 우리가 우리 구주 예수님께 붙어 있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행여 우리 성도들이 이 코로나에 침잠되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는 않을까 염려함이 많았기에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신앙생명을 유지해 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목사님이 너무 많은 일을 만들어 지치게 한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힘으로 위로와 은혜를 누리며 살았기에 그것을 마음에 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목사의 성격이나 치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 한분 한분이 주님께 향한 그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것에 따르며 나름대로 주님 앞에 서려는 열심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큰 힘이 됩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묵상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우리의 신앙 걸음을 함께 하는 분들로 인하여 교회는 오늘도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감을 느낍니다. 그러한 분들이 있기에 감사함으로 또 한 해를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어떤 젊은 집사님 내외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서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는 얼마나 힘들까 걱정하며 미루어 놓은 십일조를 모아서 드리며 교회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내가 드리는 것보다 너무 커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분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어렵다는 시기를 우리는 은혜로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에 붙들린 성도님들의 헌신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더 풍성한 재정과 교회의 성장을 맛보고 있다는 어느 목사님의 고백을 들으며 역시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 싶습니다. 내년도에는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많은 염려와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사도 바울처럼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또 내 디뎌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것을 그냥 꿈 혹은 개꿈으로 여겨, ‘어? 이상한 꿈도 다있네?’ 그러면서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 그대로 실천해 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삽니다. 그 믿음으로 또 다시 오는 한 해를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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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6
    아름다운교회 Dec 20.2020 Merry Christmas!
    예수님의 생일에 예수님은 없고, 축하객만 있더라! 어떤 귀인이 생일을 맞이해서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잔치에 와서 선물을 주고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유명 연예인이 오게 되었는데, 생일맞은 귀인에게 인사만하고 온통 관심과 대화의 중심은 그 유명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날 그 잔치를 차린 주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우리 집에는 자그마한 성탄트리도 없습니다. 문밖에 반짝이는 불빛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에 반짝이는 성탄트리들이 어두운 밤을 밝히는 집들이 삭막한 사막동네에 눈요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오가면서 생각해 봅니다. 가장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우리집에는 아무 축하도구도 없는데, 예수님을 모르는 저 집에는 무슨 일로 축하도구들이 넘치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 모순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기뻐해야 할 내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예수님의 탄생과는 전혀 관계없는 저 집에는 잔치가 벌어지는 이 해괴한 일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마치 생일의 주인공은 빠진 채, 잔치만 즐기는 사람들로 즐비한 세상이 오늘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씁쓸해집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예언을 했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이고, 그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9:6)이라 불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것도 없게 보일 것이라(사53:2)고 하였습니다.코로나로 인해서 온 세상의 표준이 바뀌어진 이 시대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New normal로 불리워지는 이 시대에 과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문이 닫혔고, 오가는 발 걸음도 뜸해졌습니다. 그러나 내년 여행객 모집에는 차고 넘칩니다. 스키장, 썰매장, 유흥장소에는 사람이 넘치지만, 교회는 점점 썰렁해져갑니다. 때로는 여기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까 곱씹어보게 합니다. 가장 밝은 Spot light를 받으셔야할 주인공 예수님은 내 삶에서 어떤 light을 받게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성탄절이라는 절기를 축하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성탄의 분위기가 좋은 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죄인의 옷’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좋아지고,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성탄 찬송도 들리지 않고, 어린 아이들의 재롱섞인 연극도 없으며, 세상의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는 여전히 ‘예수님’ 소리만 들어도 설레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과는 상관없이 저마다 각자의 삶을 즐기고 살아갈 때조차도,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이 연구한 결과를 신뢰하며 그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유대땅까지 찾고 찾아와 그 아기 예수께 가장 귀한 예물을 올리고 갔습니다. 천사들의 찬양과 예고를 그냥 신기한 것으로 흘려듣지 않고, ‘가보자!’는 결단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베들레헴의 목자들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시선을 빼아사 갈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한발자국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점점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을 가르칠 때에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만큼은 자기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이 원하신 삶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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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5
    아름다운교회 Dec 13.2020 하이브리드 교회와 하이브리드 신앙 (Hybrid Church & Faith)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선지자였는데, 전문 목회자 출신의 사람이 아니면서, 고위급 관리라는 세상적 지위를 가지고 이방땅 바벨론에서 메대와 바사의 정권 교체기에도 믿음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요셉과 더불어서 성도가 세상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소중한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주 선명하게 깨달았던 선지자였던 다니엘도 자신이 받은 환상에 대해서 늘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언제가 그 끝입니다?’ 참 답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코로나 상황이 지속되어 온지가 벌써 일년이 다가오는데, 이제는 처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마주서고 있는 각종 지표가 온 세상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영국에서 백신이 개발되고 접종이 이루어진 이래, 미국에서도 FDA의 승인이 나서 얼마있지 않으면 일반 접종이 시작되려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마다 신기록을 갈아치우듯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어서 다니엘의 탄식처럼 ‘언제가 그 끝입니까’라는 물음을 요즘에 탄식처럼 뱉어야 할 시기인 것이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흔히 요즘의 교회를 ‘하이브리드 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대면예배, 교회에 나와서 드려야만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으로 여겼는데, 인터넷의 발달과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것을 핑계삼아 게으름을 포장하려는 이유등으로 인해 교회에 나오려는 인원이 줄어들면서 이제는 비대면 예배,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교회로 바뀌어지는 교회라 불러 ‘하이브리드 교회’라고 명명하는 것 같습니다. 하이브리드(Hybrid)란 혼용(混用), 복합적 기능을 하는 것의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양쪽 형태를 혼용하는 것과 같은 용어들이 이제는 교회관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런 신조어가 생겨난 것입니다.이제 이것이 더 넘어가면 ‘하이브리드 신앙’이 대세를 이어가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편의성을 강조한 실용적인 신앙, 이것이 정말 가능한 시대일까요? 신앙에 있어서 정말 하이브리드가 가능하고,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변질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자기 편의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달라진다면, 마지막 시대에 다니엘이 예언했던 것처럼, ‘지혜있는 사람들’(단11:32)이 몰락했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만일 하이브리드 신앙이 가능하다면 한편은 ‘성결한 신앙’에 다른 한쪽은 인간의 편의성을 중심한 ‘좀더 복잡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는 신앙생활’ 사이를 오가면서 ‘사람들이 빠르게 왕래하고, 지식(악)이 더해지는’ (단12:4) 이 세상에서 성도의 자리매김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생각해보면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변화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건전한 변화를 넘어서 ‘변질’이 오면 그때는 겉잡을 수 없을만큼 배교와 배반과 편의에 기초한 하이브리드 신앙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정말로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별해 내지 않고, 그저 세상이 주는 낚싯밥만 먹는다면 분명 우리도 초대 교회에 책망을 받았던, 사데, 라오디게아,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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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4
    아름다운교회 Dec 06.2020 내게 믿음은 어떻게 작용하나요?
    지난 주에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코로나 양성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기도해주세요’ 다급함도 없이 담담하고 평온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참 답답한 생각이 쏟아졌습니다. 교회 출석이 어려운 분이기에 교회에서 전파가 된 것은 아니었고, 지병 때문에 외출도 안하는 분인데 아마도 가족간의 감염으로 전파가 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분은 코로나에 걸리면 안되는 중증의 기저질환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참 많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어려움이 생기면 안되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고, 절대로 그 코로나가 집사님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니 믿음으로 일어서자고 용기를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기도회에 상황을 알리고 기도하는 분들과 함께 정말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주시라고… 그리고는 다음 날에 다시 그 집사님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밝은 목소리였습니다. ‘목사님, 저 퇴원합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무 일없이 집으로 퇴원해도 된다고 해서 나간다면서 전화를 하신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 코로나 검사가 잘못되었던거야? 오류가 있었던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할렐루야!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이 이렇게 기적을 보여주셔서 치료하시고 퇴원시키셨습니다!’ 이랬을까요? 사도행전 12장의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는 잡혀 투옥되었고,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적적으로 베드로가 풀려나왔지만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않고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마치 그 상황이 주마등처럼 제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실 것을 믿었다면 ‘거봐라, 하나님이 하셨다!’ 그럴 것인데, 마냥 신기하게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목사의 믿음보다는 그 집사님의 믿음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위대해 보였습니다.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 자기의 이 기가 막힌 답답한 상황에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었기에 곧바로 목사에게 전화로 기도를 요청 했고, 자기가 이렇게 빨리 퇴원하게 된 것은 바로 기도의 힘이었다는 것을 믿었기에 기도해 줘서 감사하다고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기도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까요? 어떤 분은 코로나에서 회복되었어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그렇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코로나 상황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는 긴박한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백신의 소식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만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백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그 분 집사님의 일을 통해 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과연 내게서 믿음이라는 시스템이 작동은 하고 있는가? 나는 이 시기, 이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내 믿음은 살아서 작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쓰려고 해도 더 이상 쓸 수 없을정도로 노쇠해져 있는가? 우리가 정작 보아야 하는 것은 못보고, 보지 않아도 되는 것에 믿음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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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보고싶은 것만 보고싶은 유혹
    가끔 아내에게 물건 좀 가져다 달라고 심부름을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거기에 있어’ 그래도 아무리 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답한 제가 찾으러 갑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 거기에 있는데 나는 보고 아내는 못보는 것일까요? 숙제입니다. 같은 물건을 두고서 누구는 보고, 누구는 못보는 현상이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고향 대한민국도 너무나 같은 면이 있습니다. 좌우, 진보와 보수가 그러합니다. 한 쪽은 다른 한 쪽이 전혀 안보이는 모양입니다. 오직 내 편만 진리이고 상대방은 뽑아내야할 적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민주주의냐는 생각이 저절로 나는 현실이 오늘 미국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로가 돌을 던집니다. 차이가 왜 이리도 큰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부동산 정책으로 인해 나라가 들썩입니다. 부동산 가격이 왜 올라가냐고 물으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한 쪽은 부자들이 사재기 해서 그런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는 서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통계도 자기의 주장에 이로운 것들만 끌어다 씁니다.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프레임’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남의 소리가 안들립니다. 틀리다고 하는 사람도, 맞다고 하는 사람도 각자가 자기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디모데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속에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가 ‘자기의 귀를 가려줄 많은 스승을 두는 것’(딤후4:3)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나를 비판하는 소리에는 귀를 닫고, 자기 주장에 힘을 실어줄 사람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회의를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 주장을 옳다고 말하기 위해서 흔히 ‘다들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all)’가 정말 모두는 아닙니다. 자기 주변의 몇 사람일 뿐일 때가 더 많습니다.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프레임의 덫에 걸리면 ‘나는 안보이고, 남만 보입니다’. 내 눈의 대들보는 안보이고 남의 눈의 티만 대들보처럼 보입니다. 무엇인가 가려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안약을 사서 발라야’합니다. 시각 보정 안경이라도 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 가까이를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에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누가 옳은 말을 하는지도 모를 수많은 정보와 주장과 예측이 우리 주변에 일어납니다. 두려움의 커튼을 스스로 쳐 놓고, 도무지 그 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으려고도 합니다. 세중(世中)의 판단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교회는 모여서는 안됩니다. 예배도 기도회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문닫고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코로나로 인해서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이러스 때문이아니라 먹고 살 것이 없어져 죽습니다. 이러한 시대에서도 우리는 가야할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고싶은 것만 봐서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해서 마귀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워도 교회의 사명, 선교와 예배, 꼭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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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어떻게 보답하리요
    교회가 개척되어 온 지난 12년을 되짚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게 된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가 있게 된 그 힘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끼칠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납니다. 햇 수로 12년이고, 이 교회를 거쳐간 성도들의 숫자가 600명이 넘는데, 아직 이 교회에 남아 주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존재하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싶었는데, 이 세 가지가 마음에 잡힙니다. 하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이곳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힘이요 능력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힘’입니다. 우리 교회가 출발하면서 빼놓지 않고 잘 한 것이 하나있다면, 이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썼다는 것에 있습니다. 일년에 3차례의 특.새 중, 특별히 가을에 하는 다니엘 세이레 특.새는 우리 교회를 지탱해가는 가장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만일 이 기도의 힘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는 이미 공중분해되어도 벌쩌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의 깊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열정과 사랑보다도 더 깊은 사랑으로 교회를 돌보는 분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이제 올 해의 다니엘 특.새를 어제로 마무리했습니다. 특별히 2020년도에 행해진 제12차 다니엘 특.새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기도회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염의 위험과 두려움이 있었고, 이러한 시대에 만일 확진자 한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교회의 존폐까지 몰릴 위험이 있는 환경속에서 결정된 기도회였기에 목사로서는 정말로 중압감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 말대로 ‘그냥 집에 머무르는 길이, 세상을 위하고 사랑하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 차라리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는 염려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특.새 뿐만 아니라, 지난 3월부터 모든 교회가 문을 닫을 때에도 우리는 활짝 열어두었고, 주변의 염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지난 1년 동안 그리고 이번 3주의 특별한 위험속에 진행된 특.새 기간동안 하나님은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주제처럼 ‘새 영, 새 마음, 새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뭐지?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올 한 해가 다 가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온통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시시각각 두더지처럼 올라왔습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자인지 의시하게 하는 환경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1620년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 102명이 63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미 동부 해안에 도착했는데, 그 해 겨울에 절반의 사람들이 죽으면서도 하나님께 드린 감사, 이것이 추수감사절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대목입니다. 이 위험한 시대에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느냐고 되물을 수 없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산 자의 감사이며, 견딘 자의 감사이고, 은혜받은 자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지요. 감사의 예배로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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