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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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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우리가 Focusing 해야 할 것은…
    지금 다니엘 특.새가 진행되고 있고, 이제 마지막 3주차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과연 이러한 집회를 해야하는지,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참여하게 될지 등으로 여러 생각에 잠겼었는데 벌써 마지막 주를 맞게 됩니다.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사명을 따라 잘 따라가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쓰실 것이라는 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시간마다 하나님께 떼를 쓰듯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어리석고 위험하게 보이는 이러한 집회가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잡혀서 사람의 생각과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도록, 그래서 안전하고 기쁨과 감사 그리고 능력으로 이 집회가 이루어지기를 말이지요. 분명히 우리 아름다운 교회를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실 줄 믿습니다.하지만 저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 3차 펜더믹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입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 겨울에 접어드니 코로나가 점점 기승을 부려 각종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그 위험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백신이 나온다고 하는데 갈수록 위험성은 높아지면서 각 주마다 긴장감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봉쇄가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소리도 들립니다. 우리 둘째 아이가 이번 추수감사 절기에 집에 오는 것도 만류를 해야 할 정도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California주를 비롯한 서부 3개 주에서는 여행등의 비필수적 필요에 의해 주간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고, 넘을 시에는 2주간의 자가격리를 권고할 정도입니다. 엊그제에는 네바다 주지사도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고 공고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인 대통령도, 주지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병원, 식당, 상가, 관공서, 학교, 교회등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바라보면 볼수록 두려움이 전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한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신문기사를 보고, 사람들의 두려움의 소리를 듣고, 방송이나 각종 SNS에서 듣는 소식은 정말로 나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지구가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꾸만 그것을 보고 들으니까요. 매일 신문/방송에 나오는 확진자 숫자만 보고, 세고, 그것의 크기에 따라서 ‘마음’을 싣고 있으니 항상 두려운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입니다. 무엇을 듣느냐입니다. 사람들은 요즘 정말로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습니다. 다른 소리는 절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에 공조해줄 ‘동조자’를 구합니다. 그래서 그 길로 갑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듣고 집중해야 할 것은 세상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혼란을 줄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께 집중할 때에 우리는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며 나갈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실 은혜만 사모하면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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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얼마나 더 착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가끔 인간이 선한 존재이고, 선하게 태어난다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뭘 보면 아냐면, 태어날 때에 아기들을 보면 된다고 합니다. 그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무슨 악한 것이 있느냐는 것을 예로 들곤 합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어릴 때, 천진난만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몰라도 너무 인간에 대해서 모릅니다. 아니 착각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자주 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갓난 아이들은 천사같지만, 그래서 그 모습이 너무나 천사같아서 악을 모를 존재같지만, 사실은 악을 표현할 수 있는 힘과 방법을 모르고 태어날 뿐입니다. 그런 아기들도 얼마나 악할 수 있는 지를 아는 것은 1년도 채 안 걸립니다.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때론 부모를 놀래키기도 합니다. 시기, 질투, 떼쓰기, 자기주장등이 점점 강해지면서 가르치지도 않은 거짓말까지 합니다. 언제 배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 안에 ‘악’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과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악이 점점 자라서 방법이 더 치밀해지고 더 나빠지는 것뿐입니다.며칠 전에 샘스에 물건 살 일이 있어서 갔습니다. 여러 가지 물건을 사는데, 손에 든 것이 많아서 좀 복잡했습니다. 저는 카운터에서 계산하지 않고 App으로 찍어서 결재를 하기 때문에 그냥 나오면 됩니다. 그날도 그렇게 전화기 속의 앱으로 계산을 하고, 정문의 검사하는 사람의 확인까지 받아서 차에까지 왔습니다. 물건을 하나 하나 차에 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맨 밑에 스캔하지 않은 물건이 두 개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격으로 보면 30여불 되는 물건입니다. 자, 이미 정문을 통과했고, 그냥 물건만 싣고 가면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모른 채하고 집으로 오면 아무도 모릅니다. 잠시 그 물건을 차에 싣지 못하고 1분정도 생각하고 망설인 것 같습니다. 그냥 갈까? 에이, 아무도 모르는데… 아니야, 30불정도로 네 양심을 팔래? 이런 싸움을 잠깐 하고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니엘 특.새를 하고 있는데, 제 양심에 이것을 그냥 넘기면 말씀 전하는 데에 큰 방해를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들고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이만저만 해서 그냥 나왔노라고, 다시 계산하겠다고.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러면 저는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 된 것인가요? 착한 일 하나 한 것일까요? 그래서 내 양심은 더럽힘에서 깨끗해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 홈디포에 가서 물건을 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10센트 정도 물건이 얹혀질 때도 있습니다. 그냥 몰라서이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못 하나를 그냥 들고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건 미미한 것이라서 양심을 팔아도 되는 것일까요? 이런 식으로 따지다가 보니, 정말 저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악한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착한 것 하나로 우리의 양심에 위로를 받아서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이 악한 존재가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특.새가 한 주 지나고, 두 번째 주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선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을 향한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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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제12차 다니엘 특.새를 시작하며
    매년 이맘때에 다니엘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는데 벌써 아름다운 교회에서만 12년째, 그리고 제가 베가스 와서 시작한 사역이니 제법 오래된 사역중의 하나가 특별 새벽기도회입니다.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억지로, 체면 때문에, 강요에 못이겨, 자발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등등, 수많은 이유로 이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왔습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런 행사를 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회를 통해서 그저 행사처럼 지낸 사람도 있었지만, 그중의 누군가는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와 만져주심을 체험했던 아주 소중한 기도 모임이었습니다. 이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제가 고백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은혜받는 것은 설교자나 참여자의 열심과 실력도 아닌 오직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올 해도 그것을 믿으며 쉽지는 않지만 어려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려고 길을 나서고 있습니다.어떤 분들은 코로나가 재차 번지고 있는 위험한 시점에 더 자중하고 모임을 피해야하는데 왜 무모하게 이런 집회를 하느냐고 염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염려앞에는 저도 동감하고 있으며, 저 역시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만일에 하나 확진자가 나오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은 두려움과 감염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집회를 하는 것은 ‘겁대가리가 없는 무모함’ 때문이 아니고, 기도하는 사람은 바이러스도 피해간다는 오만함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감염의 위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신앙생활의 나태와 잘못된 세태의 조류에 휩싸이는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코로나 시대를 맞아 엄벙덤벙 벌써 11월을 맞이했습니다. 1년 가까이 코로나로 인해서 세월이 이렇게 의미없이 허송세월한 것만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허송이라는 것은 없겠지요. 모두가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이 길을 당황하면서 지난 1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뒤에, 신앙인으로서 도둑맞은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도 감염된다. 예수를 믿는 나도 감염된다. 하나님이 이런 시기에 뭘 하시겠냐,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최고다, 뭐 이런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가슴에 잘박힌 못처럼 박혀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기도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패배주의가 신자들의 마음속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우리들에게 쥐어준 미소입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렇게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안에 불신앙의 불을 끄고,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불 지피고, 왜소하게 보이게끔 만드는 사탄의 전략에 맞서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기도입니다. 저는 다시금 기대해봅니다. 이번 제12차 특.새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에 대한 기대입니다. 주여, 일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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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
    코로나 시대를 걸어가면서 여기 저기에서 예측했던 어려움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연관되어 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코로나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움은 약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염려는 신앙생활하는 우리 신자들의 좋은 습관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습관, 예배하는 습관, 서로 섬기며 나누는 습관, 말씀에 순종하는 습관등등의 기저 습관이 무너진다면 누가 그것들을 기뻐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자의 목회자들은 모이기 보다는 흩어짐에 초점을 맞추고,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 답이 될 수 없는 ‘현실적 허점’이 있습니다. 이론은 좋아보이는데 성도의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는 그저 보기 좋은 ‘이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의 삶을 파고 들어가다보면 이론과 실제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몰라서 안합니까? 알아도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그리스도인의 좋은 습관은 헌신 혹은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Committment입니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자세에서부터 그 신앙생활이 시작되는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committment보다는 Convenience(편의성)에 의해서 우리 신앙생활이 맞추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되도록 간편하게, 간략하게, 편하게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너무나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두려움에서 시작된 비대면 예배가 이제는 좀 귀찮거나, 힘들면 그냥 주저앉아 버리려는 편의성이 강조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자신의 헌신과 열정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지난 주에 어느 집사님이 갑자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을 한 가정이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목장 식구들이 마음을 다해서 함께 아파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혼자 감당해야 될 아픔과 당황스러움을 여러 사람이 함께 짐으로 인해서 서로가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하는 가족들의 얼굴에 고마움과 따뜻한 안위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위로는 받는 입장에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위로하는 입장에서는 이 코로나의 상황 속에서 수술받는 그 시간에 현장으로 달려가 위로한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제2차 유행으로 인해서 더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자신들의 감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에 달려간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 혼자만, 우리 가족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설 것입니다. 왜 그런 위험한 곳에 가느냐 타박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행동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 예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시간이 가면서 코로나 시대는 인간은 더더욱 ‘개인과 개인주의’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고립되게 할 것입니다. 공동체의 삶, ‘함께 함의 삶’을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가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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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7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허둥지둥 하다 말 것인가?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고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며, 어떤 결과로 언제 우리가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보람있고 건강한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우리 삶에 대해서 예측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미혹하는 영’인 귀신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가에 가면 ‘타로 점’을 보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시절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50%가 그런 류를 경험해 보았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이고, 그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있다고 합니다. ‘기천불 신자(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독교. 천주교.불교를 다 믿는 신자)’가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결국 아무 것도 앞을 볼 수 없으니 생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못보니 보고싶어서 보인다고 하는 모든 것을 다 믿고 싶은 인간의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겠지요.코로나를 6개월이상을 지나오면서 우리의 걸음을 생각해 봅니다. 처음 당하는 일이기에 초창기에는 쉽게 끝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과 초조함 염려와 두려움이 증가하고, 급기야 삶의 모든 패턴을 바꾸어 버리는 일앞에 망연자실하며 서 있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더더욱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두려움의 시간들(개인적으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주어 영원히 어떤 것에 종속되게 만드는 치밀한 공작이 진행중이라고 봅니다)앞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일들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몰라서 그야말로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난 6-7개월을 보내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이제 우리는 약간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 작은 교훈들을 얻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이렇게 ‘허둥대는 삶’을 그치고, 뭔가 그 안에서 창조적 거듭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허물을 벗어내고 진정한 영광으로 변하는 호랑나비처럼 말입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이제 지난 6개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이상 ‘허둥대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허둥대는 모습을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자리를 정돈하고 이 혼돈의 세상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앞을 향하여 준비된 사람을 끌고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이후에 얼마나 많은 혼돈을 겪었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혼란스러운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부탁하셨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능력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뛰쳐 나갔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제자들이 주저 앉아 있었다면 따르는 표적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가 두루 전파할 새’그 때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혼란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그저 허둥지둥하다가 주신 기회도, 시간도, 은혜도 다 놓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니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갈 때에 주님이 함께 역사합니다. 허둥지둥 보내지 말고, 믿음으로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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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6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서예가 한석봉과 그 어머니의 일화를 어려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글을 배워서 쓰는 것에 자신감이 있던 아들 한석봉에게 어머니가 불을 끄고 당신은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썼는데 어머니의 썬 떡은 일정하게 되어있는 반면에 아들의 자랑스런 글씨는 형편이 없어서 부끄러워했고, 이를 교훈의 계기로 삼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아들은 한껏 자신이 글씨 쓰는 것에 자신감을 가졌지만 평생 어머니가 떡을 썬 그 솜씨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인데, 한가지 일을 해도 전문적인 일을 했던 어머니의 교훈이 두고 두고 가슴에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요즘 유튜브를 통해 음식하는 것을 배우면서입니다. 초보자이기에 아무리 솜씨가 있다고 해도 서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만들다가 보니까 아이러니 한 것은, 음식을 만들 때마다 맛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번엔 잘되었다가도 다음엔 엉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수십년, 수없는 반복과 실패 그리고 훈련과 계발을 통해서 자신있는 전문가로 태어납니다. 그들의 음식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도 일정합니다. 자신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문가와 초보자가 다른 것입니다. 나름 맛집이라고 소개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아도 그냥 쉽게 돈버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어쩌다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없고, 그야말로 피땀어린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결과였습니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까요?이런 과정 속에서 배운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실패없이는 성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수많은 실패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배웠는데 그 말이 진리였습니다. 인생도 그러지 않을까요?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실패와 패배가 있기에 성공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패와 패배속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으려면 실패를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게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몇 번 실패하다가 지쳐서 그만둡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의 과정을 거치고, 실패를 거치고, 연습에 연습, 훈련에 훈련을 통해서만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태어납니다. 그냥 쉽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유튜브로 돈을 번다고 뛰어듭니다. 구독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진기명기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유튜브를 볼 때마다 ‘좋아요, 구독을 눌러주세요’라는 것은 구독자를 늘려서 수익을 얻겠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그냥 취미생활로 했을 법한데, 이것들이 이제는 돈을 벌겠다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상업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점입니다. 그렇지만 성공하는 유튜버들도 우연한 일이 없습니다. 노력과 수고와 땀 그리고 피나는 싸움을 해야합니다. 그래야 ‘쬐~끔’ 전문가 소리를 듣습니다. 노력없이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겠지요. 이러한 것이 정석(?)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우연을 기대하면서 노력하지도 않고 신앙생활 잘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건 신앙의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는 자기 실패와 훈련을 통해 참된 제자로(전문가) 거듭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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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5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서툰 걸음마를 보는 마음
    추석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예년과 다르게 모두에게 긴장과 씁쓰름한 느낌만을 안긴 채 순식간에 우리 곁을 지나간 것 같습니다. 하늘을 들여다보니 보름달은 왜 그리 밝게 빛나는지요! 달빛이 우리 집 앞에 서있는 가로등의 불빛보다도 밝았습니다. 그렇게 변함없이 비치는 추석 보름달도 이제는 기울어질 것입니다. 저마다 추석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지난해에 우리 교회에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는데, 이제 모두 1살이 되었습니다. 이번 추석 인사에 엄마들이 이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혀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매주 엄마따라 예배에 나오는 엔엘이를 비롯한 귀여운 어린 아이들의 청명한 보름달같은 얼굴들을 보면서 한껏 기분 좋은 추석을 보내게 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못 보는 사이에 부쩍 커서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모두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인생은 모두가 ‘서툰 걸음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뒤뚱 뒤뚱, 한 두발자국 걷다가 넘어지는 일을 반복하면서 아이들의 부모는 박수치며 좋아합니다. 말을 배워가는 과정도 신기해서 깨물어 주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걸음마를 지켜보면서 어느 누구도 ‘왜 저것밖에는 못하지?’ ‘야, 좀 더 잘해봐!’ 질책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며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의 마음, 그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정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교회라는 가정의 울타리에서는 잘 적용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어떤 ‘착각’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나오는 모두를 동일한 ‘성숙인’으로 보는 것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사람, 조금 빨리 걸을 수 있는 사람, 뛰는 사람, 공중곡예를 하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레벨의 크리스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레벨로 착각하고, ‘왜 저 사람은 그렇게 밖에 안되나, 왜 이렇게 못하나’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거기에는 장애자들도 있습니다. 성숙해져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걸음마를 하는, 그야말로 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수십년을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 말입니다. 교회에 나가면 모두가 예수님처럼 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실수하거나 범죄하면 도매금으로 교회와 성도가 매도를 당합니다. 억울하기도 합니다.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성숙한 자리에로 나가야 하는데 아직도 젖을 먹고 있는 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의 정죄(?)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자라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주기도 하지만, 영~ 그런 싹이 안보일 때에는 좌절과 배신 그리고 분노와 아픔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도를 볼 때에 인간적인 나이에 의한 성숙도가 아니라, 영적 나이에 의한 성숙도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미 성숙해져 있어야 할 사람을 권면하기도 해야겠지만, 아직 걸음마를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는 충분한 격려와 위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박수쳐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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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나는 보호를 받고 있는가?
    지난 주에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 NLL을 넘어서 북한지역으로 갔다가 총살당하고 시신을 훼손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진실은 우리가 다 알수가 없지만, 해상에서 표류하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 국제법이 규정이고, 전시에도 민간인은 보호한다는 제네바 협정도 있습니다. 좌, 우 진영논리를 떠나서라도 자국민(민간인)은 반드시 보호해야 합니다. 1년전에는 한국이 북한표류 함정을 보호하고 송환해 준 일도 있는데, 북한은 6시간이나 물속에 넣어둔채 방치하다가 총살을 한 것입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나 군에서는 구출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살인자들을 감싸고 돕니다. 북한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이 정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속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으려고 그러는 모양입니다.참담한 것은 그 문제가 정작 내 문제로 다가왔을 때, 나는 정말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인데, 대한민국 국민이면 그럴 가치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눈앞에서 총살당하는데도 ‘설마 그럴 줄 몰랐다’는 군인들의 한심한 태도는 자괴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그럴 줄 모르고 어떻게 나라를 지킵니까? 별 짓을 하고도 남는 것이 적인데 말입니다. 나도 과연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가끔 미국의 시민권을 가진 것이 다행이고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몇 가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미국은 자국민을 적어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할수만 있다면 적지에서도 구출해내옵니다. 그러니 미국의 국민임을 누가 서러워하겠습니까?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자신감과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지요.우린 대한민국 혹은 미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처럼 보호를 못받을 수도 있고, 미국민처럼 보호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간혹 그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빌3:20).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하늘의 시민권자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말인데, 그 사람은 정말 보호받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요10:28-29). ‘불 가운데 걸어갈지라도 그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며, 물가운데 걸어갈지라도 그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리라’(사43:2). 하나님은 철저하게 당신의 나라의 시민권자인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고난속에 들어가는 이유는 우리가 버려진 자식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생이 청청한 바다같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뭘 두려워하십니까? 정말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두려워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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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3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사랑과 섬김
    언제가 이런 예화를 설교중에 든 적이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가난한 동네의 집집에 하루에 1불씩 돌리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1불을 받아든 사람들이 기분나쁜 표현을 했지요. 왜 이런 돈을 주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1불씩을 돌렸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오늘도 오는 1불을 기다렸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어느 날 1불이 오지 않거나 늦게 오면 화를 내며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마치 사람들은 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린 양 1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이러한 예가 단지 우화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고 있는 섬김이나 사랑이 너무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작은 섬김이나 사랑 혹은 그것이 작은 배려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내가 당연이 누려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운전을 하면서 차선을 지키고, 제한속도를 지키는 것도 사실은 ‘법규’이기도 하지만 그 법규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우리가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포르세를 몰던 40대 남자가 환각상태로 과속을 하다가 오토바이와 차량등을 들이받아 구속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킬 것을 지키지 않으니 남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것이지요.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지킬 것을 지키면 남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배려이기도 합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코로나 팬더믹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혼자 존재할 수 없는 의지(依持)적 존재이기 때문이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런 상황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 일을 우리의 사명처럼 알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우리 교회, 우리 목장 식구들이라는 작은 공동체만은 사랑할 수 있는 작은 능력은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돕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늘 리마인드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우리가 받은 그러한 사랑과 섬김 혹은 작은 배려는 누군가의 작은 헌신과 희생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들어서면 말끔하게 단장된 화단과 뽑힌 풀들, 자라고 있는 나무와 꽃들 그리고 예배실의 예쁜 꽃들, 상쾌한 실내 분위기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는 김치 한쪽마저도 그저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헌신이 있었고, 마리아의 옥합처럼 깨트려진 물질이 있었고 흘려진 시간과 땀 그리고 마음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마치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쯤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과 배려없이 불쑥 한 마디씩 던지는 말들이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왜 꽃은 그런 것만 하느냐, 나라면 저렇게는 안한다, 다른 풀은 왜 안뽑냐… 헌신하고 수고한 분들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내가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내가 하면 더 잘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러지도 못합니다. 내가 받고 누리는 사랑은 누군가의 수고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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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2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코로나 시대 이후를 염려하며
    중국의 우한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신 코로나 바이러스 (Covid 19)’는 사실상 지난 해 12월부터였고, 한국에서는 올해 1월 그리고 미국에서는 3월부터 본격적인 문제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도 지난 3월부터 Shut down을 선포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돌입했으나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지켜보는 수준과 소극적 방역인 ‘거.마.손 운동’정도가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자그마한 바이러스에 무기력하게 찬란한 문화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코로나로 인하여 전전긍긍하며 지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초기만 해도 ‘2-3개월이면 끝나겠지… 이러다가 그냥 지나갈거야…’ 고된 인생살이에 잠시 쉬어가는 것 같은 생각에 그리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기회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최상의 행복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3개월, 6개월, 시간이 가면서 점점 초조와 불안이 찾아오게 되고, 근자에는 해고열풍에 너도 나도 걱정과 근심이 삶을 짓누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핑크빛 전망도 내놓았지만 여전히 회색빛 전망 또한 팽팽한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경제의 문제이겠지요. 수많은 기업이 도산을 하고,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의 소상인에 이르기까지 문을 닫거나 정리해고를 통해 자구책을 마련하는 데에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어려움의 끝이 될지 아무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입니다.교회는 어떤가요? 목회자로서 미래 교회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다면 인간의 편의성을 파고든 ‘온라인 예배’의 위험성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 내면의 죄성과의 싸움, 어떻게든 요령껏 신앙생활을 하도록 부추키는 영적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과거엔 인터넷 환경이 없었으니 현장예배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온라인 예배라는 수단이 생겼고, 사람들은 가장 ‘편안하게 예배할 수 있는 인터넷 예배’를 예배라고 생각하는 ‘믿음(경험)’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젠 과거처럼 아침부터 부산하게 화장을 하거나, 아이들을 챙기거나, 어떤 차림을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조금만 아프거나, 귀찮은 등의 핑계(?) 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그냥 편하게 소파나 의자에 반쯤 기울이고 앉아서 그야말로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예배를 보는 것’에 익숙해져서, 교회의 공동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교회관에 상처를 입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비록 감염의 두려움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그 길을 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편안함(편의성)’이라는 보너스를 받아보고 나니 그 장점을 누가 마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 시대에 편안하고픈 이기주의를 사탄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피곤한 가운데서도 기도 골방을 찾으셨습니다. 습관이 될 정도로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왜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고통의 자리로 가셨을까요? 코로나 시대 이후의 우리의 모습이 이 편안함의 극치를 가져다 주고, 나 중심, 내 가족 중심이라는 이기적 삶을 살게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절정에 편승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움직이도록 우리 자신을 채찍질 해야 합니다. 영성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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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1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초보자와 전문가 차이
    유튜브는 현대 문명에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역할과 동시에 온갖 쓰레기도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유튜브를 어느 날부터인지 ‘유선생’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정말 많은 정보를 잘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유튜브에서 얻는 삶의 정보들의 혜택을 많이 누린 사람입니다. 운동, 교회 공사, 요리, 기독교 정보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만물상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경험하면서 환자들이나 접촉이 어려운 분들을 위하여 저는 요즘 유튜브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리’입니다. 열심히 적어놓고 따라 해봅니다. 어떤 것들은 제법 맛을 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만드는 음식의 맛이 요리할 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 음식과 내일 한 음식의 맛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초보자라는 말입니다. 전문가는 오늘과 내일의 요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맛이 일정합니다. 요리책을 다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일정하고, 같은 맛을 냅니다. 그것이 전문가입니다. 그러면 그 전문가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옛 말에도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노력’이라고 한 말처럼 그것은 적어도 요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있어서 진리라고 느껴집니다. 전문가는 날 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끼’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99%의 노력이 없는 한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는 수없이 많은 노력과 연습(실습)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웠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만의 맛을 위해서는 전문가가 되어서도 노력해야합니다. 계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문가는 연습없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연습을 위해서는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칼로 손을 베기도 합니다. 온 몸에 상처투성입니다. 발레리나 강수지의 발을 본적이 있습니다. 축구 선수 박지성의 발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발은 눈뜨고 보기 힘들정도로 험악한 발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연습했다는 말입니다.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 한 시간 참여하고 가는 것으로는 우리 신앙의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초보자에 불과합니다. 전문가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딤후4:7~8). 영어성경은 연단하라는 말을 Train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연습입니다. 훈련입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의 훈련, 기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왕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이 길을 따라갑니다. 대충해서 초보자의 자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문가는 아니어도 주님의 모습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요즘 교회에서 QT chain을 만들어 말씀 나누는 훈련을 하고자 합니다. 훈련없이 되지 못합니다. 혼자 잘 할 수 있는 분들은 혼자 잘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다른 분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유선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유선생이 있기에 초보자에서 전문가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나를 훈련시킨 성령의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귐이 있도록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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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0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질병 방역, 신앙방역, 관리 방역
    세상은 아이러니할까요? 코로나가 시작된 1월에 한국의 감염소식은 미국에까지 전해져서 우리는 한국의 국민을 걱정 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3월부터 본격적인 감염이 시작된 미국은 이제 한국이 미국을 걱정해주는 처지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미국은 세계 1위 감염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조금씩 내리막길을 내딛게 될 즈음에 요즘 8월의 끝자락에서는 한국이 다시 걱정스러운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래서 아이러니한 것일까요? 돌고 도는 것이어서 전염병이기 때문일까요? 미국과 한국의 확진자를 대하는 자세도 다릅니다. 한국은 개인신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얼마든지 제한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개인 인격권이 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한국에서 확진자가 되었다는 것은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습니다. 개인의 동선이 밝혀지고 나면 필요이상의 상상이 덧칠해져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고 한 사람을 바보 혹은 패륜자로 몰아버립니다. 그런 세상에 살다가 보니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두려워서 점점 숨게 됩니다. 그러자 광주에서 신원을 익명처리하는 조건으로 검사를 유도하니 검사자가 2배로 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확진자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매장까지 각오해야 하는 이 ‘방역방식’에는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한번 낙인이 찍히니 사업을 접어야 하는 사람들, 개인의 사적인 문제들이 노출되고, 이로 인해서 우울증, 공황장애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심각한 후유증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 대해야 하는데, 거기에 무슨 좌파, 우파를 구분하거나, 교회를 특정해서 적대감을 과도하게 심어주는 등의 정치화를 하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답답하게 합니다. 사실 감염은 누구나 다 대상자가 될 수 있으며, 때와 장소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되는데 확진 사실만으로 무슨 몹쓸 범죄자 취급하는 이런 문화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시점에세간의 이야기처럼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코로나를 감기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확진되었다고 해서, 다 죽도록 고생하는 것도 아니며, 더 많은 사람은 그냥 왔다가 사라지는 감기처럼 그냥 지나가기도 합니다. 만일 그러한 시대가 된다고 하면 우리는 현재,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거마손 운동’(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쓰고, 손세정을 잘하는 것)을 철저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방역이 정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지킴으로서 우리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감염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감염의 기회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병 방역도 중요하지만 영적 방역도 중요합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적 가치관에 감염되어 신앙적 가치관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코로나 시대의 사각지대를 틈타서 교회 관리에도 코로나처럼 방역의 비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코로나 때문에 교회를 못나오고 있는 줄 알았더니 마음이 멀어져서 교회를 이미 옮긴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는 교인관리도 방역처럼 힘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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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9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산속의 아침
    복잡하고 분주한 도시를 떠나서 Sierra 산맥의 깊은 산속으로 하룻 밤 휴식을 떠났습니다. 이번 캠핑을 선택한 것은 코로나로 인해서 숙박도 안전한 시설이 아니기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었지만, 사실 캠핑은 꼭 한번 해 보고싶은 것이었습니다. 20년 가까운 시절, 미국에 이민 보따리를 꾸밀때에, 아이들과 함께 캠핑을 해야할 것 같은 마음에 텐트를 하나 새것을 준비해서 이민 짐에 쓸어넣어 가져온 이래, 한번도 뜯어 본적이 없는 텐트! 아내는 그 오랜 시간에 거라지에 있었으니 삮아서 못쓸 것이라 버리자고 했는데, 나는 빛을 보지 않았으니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버티면서, 버려야 해도 펴보지도 않고 버릴 수는 없어서 근 20년만에 어둠의 상자속에서 꺼내 펼치는 순간, 아~ 멀쩡한 텐트에 감탄을 쏟아 냈습니다. 이미 아이들은 커서 독립해 나갔으니 부부가 난생 처음으로 텐트를 가지고 길을 나선 것입니다. 깊은 산속에 펼치진 텐트는 나름 아담하게 (두 사람이 넉넉히 거할 수 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일찍 저녁을 라면으로 해결하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 둘씩 나타나는 반짝이는 별들을 세면서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황홀한 자연앞에서 깊은 정막으로 맞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도 일찍 일어나 모닥불을 다시 지피고 나와서 별들과 대화를 시작하며 아침을 맞이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내가 이곳 깊은 산속에 홀로 남았다면… 불도 없고, 도구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입을 옷도 없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음식은 토끼를 잡아야 하고, 풀을 뜯어야 하고, 옷은 곰을 잡아서 가죽으로 덮었을까? 불은 어떻게 구했을까? 부시맨처럼 막대기를 마른 나뭇잎에 비벼서 불을 얻고, 그 불을 꺼트리지 않게 잘 관리해야 했을 것이고… 등등 여러 생각이 미쳤습니다. 산속의 아침을 맞이하면서 어렴풋이 윤곽이 드러나는 나무와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별들을 보면서 한 가지 스며오는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나는 내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처럼 살았구나! 입고 있는 옷, 쉽게 얻을 수 있는 의식주, 함께 누리고 있는 인간관계들…. 이런 것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였구나!’라는 생각이 깊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도시 생활 가운데서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움과 편안함은 당연히 누리는 권리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을 특별한 은총으로 누리고 살고 있을 뿐, 그러하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이 하루가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바이러스가 앗아간 우리의 일상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안겨주거나,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 하는 강한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얻었고, 누렸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소중한 발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의 호흡하나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연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코로나가 그것을 일깨워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우리 것인 양 누리고자 하는 교만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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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8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염치가 없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답답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누군가는 정부 지원금으로 편한 세상 산다고 하지만 답답한 가슴은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인은 기업인대로, 소상공인은 그들대로, 종업원은 종업원대로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잘 나가는 사람이나 직업군이 있다고 해도, 이 사회가 아우성치는 것은 답답함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나라가 돌아가는 꼴이라도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미국이나 한국 할 것없이 답답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이러한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육을 가진(sinful nature) 인간’의 죄성에서 찾아야겠지만, 근시적으로는 우리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닌 ‘염치를 모르는 지도자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겉과 속이 같지 않은 위선)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적어도 과거에는 염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염치(廉恥)라는 말의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체면을 차릴 줄 알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알려졌을 때에는 적어도 부끄럽게 생각을 하고 반성하거나 체면을 차리는 것이 선비정신이었고, 그것이 그 시대의 최소한의 양식(良識)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서는 미국이나 한국 할 것 없이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 시대의 정신인양 외쳐대고 있으니 그야말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한 말을 뒤집는 것은 구멍가게 호떡 뒤집기보다 쉽게 뒤집는데, 더 속상한 것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싸가지 없게’ 대변하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반성도 없습니다. 궤변도 잘하면 진리가 되는 시대에 사는 것이 우리를 뒤집어 놓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자기만이 옳은 정의’라는 것 말이지요. 공의와 공평 그리고 정의는 이미 퇴색되어서 ‘오직 자기편만이 유일한 공의와 정의’라고 믿는 독선에 빠진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오류를 막아설 방법이 없습니다. 한쪽의 공평과 정의는 바른 공평의 의미가 아닙니다. 누구나 같아야 합니다.이것이 중요함은 성경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집사의 자격을 말하는 디모데전서 2:9에서 ‘염치와 정절’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염치라는 말은 ‘(사람에 대한)수줍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고, 부끄러움이나 명예, 겸손을 말할 때 쓰는 단어였습니다. 교회의 직분인 집사의 자격만 되어도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라’고 하는데, 나라의 지도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과거에는 자기가 기준에 미달하면 부끄러울 줄 아는 ‘염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왜 나를 부끄럽게 하느냐?’고 항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염치가 없어진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염치없는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이, 공동체가 피곤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염치없이 대드는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가 고통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끌어내리지 말고, 나를 말씀에 끌어 올려야 합니다. 시대가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가치를 끌어내리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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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4.2021 끊어진 로프
    지금 중국과 한국에는 긴 장마가 이어져 수많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한국에서는 불어난 지리산 피아골의 계곡물에 고립된 사람을 구출하다가 20대 젊은 소방관이 대상자와 함께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아직 미혼인 이 젊은이가 이렇게 어이없이 희생된 이유가 몸에 감았던 로프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풀린 것이라고도 함). 안전을 책임지는 분야의 전문가인 셈인데, 그 로프하나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급류에 뛰어들어 구조작없을 했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로프가 끊어지거나 풀렸다? 그래서 결국 아까운 생명이 명을 달리했다는 말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기본인, 생명과 같은 로프가 왜 끊어졌거나 풀려졌을까요? 사전에 점검을 제대로 못해놓은 것인지, 급한 마음에 제대로 로프를 묶지 못한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이것 역시 인재(人災)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전에 생명을 다루는 소중한 로프 관리를 잘못했거나, 잘못 매듭을 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고 그 로프에 자신의 생명을 의지했던 이 소방관은 허망하게도 안전하지 못하게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생명선인 로프를 점검해야겠습니다우리 인간이 붙잡고 있는 생명줄, 로프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강력한 로프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살아온 로프입니다. 내 자존심, 자긍심, 믿었던 경력과 화려한 스펙들, 물질이나 명예등, 나를 떠받쳐줄 긍지와 힘이 생명줄 로프처럼 붙잡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의지하고, 믿었고, 생명을 걸었던 그것이 배반할 때입니다. 그때에는 정말 모든 것이 절망의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집니다. 살고싶지 않을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그동안 우리는 믿었던 모든 시스템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직은 피부에 느껴지지 않은 분들도 있지만, 이미 그 의지했던 생명줄과 같은 것들이 끊어진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보다는 고용주나 사업자들에게서 두드러지고 있고, 이 기반이 무너지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도 전해지며, 사회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악순환을 겪게 될것이 자명합니다. 어떤 분들은 건강 하나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한방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우리가 믿었던 생명줄과 같은 로프는 안전한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로프는 진짜 나를 위기의 순간에 안전하게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인생은 한번 살다가 갑니다.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 가서 정말 안전하고 튼튼한 생명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있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그 밧줄은 썩은 동앗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생명의 밧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생명줄입니다. 믿음의 생명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안전한 생명줄입니다. 우리를 ‘안전지대’(시12:5)에 두시는 하나님으로 소망을 삼는자는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지금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은 정말 나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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