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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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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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19.2021 다른 것일까, 틀린 것일까?
    "다르다 (different)"와 "틀리다 (Wrong)"은 그야말로 전혀 다른 개념이고 단어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삶에서는 자주 혼동하고 또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자주 그런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목회자로서 갖는 생각은 성도들이 갖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격하는 사람들은 '틀리다 (wrong)'고 말합니다. 목사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격을 받을 때마다 진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같은 집안의 한 피를 받아 한 날 나온 쌍둥이도 다르다고 하지 틀리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맞고 안 맞고가 없습니다. 다를 뿐입니다. 함부로 말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틀리다는 말을 때론 다르다고 하기도 하고, 때론 틀리다는 말로도 써먹습니다.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인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에는 더 성경적으로 성숙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뒷마당을 청소하다가 든 생각입니다. 한 주에 한번은 개 0을 치웁니다. 어떤때는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이 녀석들이 왜 여기에다가 볼 일을 보는거야? 일정한 장소에 가서 보고, 지들이 잘치우면 안되나? 뭐, 이런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개라는 동물은 쌀줄만 알지 치울 줄을 모르는 짐승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예, 정리정돈과 치운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냥 먹으면 싸야합니다. 그것도 아무 곳이나 하고 싶은 곳에 합니다. 완전히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가 볼 일을 보고나서 치우거나 덮거나 (하긴, 덮는 개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 짐승은 자기가 벌인 일을 수습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그래서 짐승이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벌인 일은 반드시 자기가 처리합니다. 아무 말끔하게 위생적으로 처리합니다. 그래서 사람입니다. 사람이면서도 그것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직 갓난 아이일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는 아직 그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만큼 반드시 잘 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지요.그런데 가만히 보면 저 자신을 포함에서 자기 벌인 일들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런데 처리를 잘 못합니다. 아니 왜 뒤처리를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아직 인간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00만도 못하다'고 비냥댑니다.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소망이 있는 것은,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철들 때입니다. 철이 들어야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고, 우리가 벌인 여러 문제들을 잘 수습하면서 인간답고, 그리스도인 답게 인정받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 갈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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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5.2021 이름 값은 얼마일까?
    세상에는 이름 값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값은 천차만별입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들을 살펴보면 물론 재료가 좋고 비싼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광고비와 인건비 그리고 재료비를 합하여 가격이 설정되지만 거기에 Name brand 라는 부가적인 가치가 더해져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갑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입니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비쌀수록 더 사려는 소비심리가 강합니다. 그래서 이 코로나 시대에 샤넬/에르메스 같은 명품들은 가격을 오히려 더 올렸다고 합니다. 나같은 사람은 감히 올려다 보지 못할 정도로 비쌉니다. 관심도 별로 없지만요. 어느 명품회사는 재고가 남아도 땡처리 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특별할인행사도 안합니다. 이름값이 떨어진다고 해서입니다. 남아 돌아서 쓰레기 장에서 태워없앨망정 헐값에 팔지 않을 정도입니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Brand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기막힌 아이디어가 창궐하기도 합니다. 이름 값이 생명이니까요. 사람에게도 이름값이 있습니다. 유명 강사를 부르려고 하면 그 이름값에 알맞은 강사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지난번 엘에이에서 BTS가 공연하고 어느 식당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식당은 장사진을 칩니다. 그러니 이름값이 만만하겠습니까? 교회의 강사를 불러도 그렇습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은 스케쥴이 바빠서 (바쁜만큼 몸값이 비싸지겠지요?) 웬만한 곳에서 부를 수도 없고, 불러올 기회가 된다고 해도 헐값에는 절대로 안옵니다. 사명감외에는 말이지요. 유명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 교육가들 이름값이 안매겨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성도들에게도 이름값이 있을까요? 황송하게도 이름값이 0값일 때가 있습니다. 그냥 무료봉사가 대부분입니다. 세상에서는 잘나가더라도 교회에서만큼은 이름값을 못 받습니다. 오히려 돈을 내가며 봉사합니다. 회사 사장님도 교회만 오면 주차장 봉사에, 주일학교 봉사, 주방봉사에 무료로, 아니 어떤 때에는 자기 돈을 들여서 봉사합니다. 해괴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제가 아는 히스패닉 사람의 이름은 문자로 'Jesus'입니다. 영어로는 지저스이지만 그들의 발음으로는 '헤수스'입니다. 제가 아는 이 사람은 영업사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욕을 먹을 지경입니다. 차라리 이름을 '헤수스/예수'라 하지 말고 '가룟 유다'라고 하라고 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 이름 때문에 공연히 우리 예수님이 욕을 먹는 것 같아 속상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게 신앙생활하는 저 신앙인을 보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교회가  붙인 이름이 아니라, 세상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불리워집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지 뒤돌아 보는 시간입니다. 냄새나는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책에 기록하여 구원해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해서, '불러만 줘도 감사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세상에서는 몸값이 비싼 분들이, 교회안에서 헐값(?)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주님의 이름값이 우리의 값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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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
    아름다운교회 Nov 28.2021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감사의 계절을 은혜롭게 보냈습니다. 가족들의 반가운 만남과 교우들과의 친밀한 교제들은 서로를 따뜻하게 묶어주는 은혜의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설혹 외롭게 맞이한 감사절은 그냥 외로움이 아닌,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고마운 시간도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LA에 계신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오는 복을 누렸습니다. 제가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제 마음속에 부모님께 대한 감사를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아직까지 제곁에 계신 어머니가 계셔서 얼마나 감사하고 왔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배를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만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환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들이 감사의 조건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감사하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귀한 복을 배우는 길입니다. 상처도, 원망거리도 감사라는 것을 이번에 배우게 되었습니다.어느 목사님이 암으로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암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증상이 느껴져서 병원을 갔는데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의원에 갔습니다. 한의사가 증상을 듣더니 대침을 가지고 환부를 푹~ 쑤셨는데 그만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몸이 더 아프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엉터리 한의사를 고발하고 소송을 걸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그럴 수 없어서 치료를 잘해 주기로 하고 지냈는데, 침을 잘못 맞아서 아픈 몸을 가지고 병원을 가서 다시 진단을 받는데 이상없다던 몸이 '암'으로 판정을 받았고, 급기야 3기와 4기를 오가는 중증의 암환자가 되었습니다. 주변에 급히 기도요청을 하고 얼마전에 수술을 받았는데 더 이상의 전이가 없이 깨끗하게 치료가 되었다고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제 입에서 갑자기 떨어진 말이, '목사님, 그 한의사의 잘못된 치료가 은혜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네요. 오히려 감사해야겠네요!'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만일 그 한의사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몸이 자연스럽게 암의 발전을 모르게 되고 4기로 넘어갔을 것인데, 그 난리를 치루는 것 때문에 재검사를 하면서 암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한의사의 잘못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실수마저도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전율을 느낄만큼 하나님의 오묘하신 일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8:28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 역사가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실험실 개구리처럼 운영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창조를 가지고 농담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에 진흙으로 만들었는데 너무 구워서 흑인이 나왔고, 덜 구워서 백인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노릇하게 잘 구워서 '황인'이 나왔다고 하는 말처럼 하나님이 장난하거나 실수하여서 우리 삶이 엉망이 되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사람이 실수를 할지라도 분명히 하나님은 그것에서조차도 우리가 배울 수 있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목사님의 한의사는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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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
    아름다운교회 Nov 21.2021 감사는 신앙생활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13차 다니엘 특.새가 은혜중에 잘 마쳤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은 시간들입니다. 예년에 비해서 따뜻한 날씨를 주셔서 춥지 않게 특.새를 진핼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힘을 다하여 마음을 같이해서 호흡하고, 섬기고, 앞장서며 최선을 다하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만져주고 계신다는 마음이 들어서 포근하고 안정된 기도집회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염려가 되었지만 큰 무리없이, 어느 때보다 더 바쁘고 힘든 여정을 잘 마치게 된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찾아보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늘을 종이로, 바닷물을 잉크로 사용한들 모자랄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축복이 아닙니다. 오직 깨닫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감사를 모르고 사는 분들이 참 많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이 미리 예고한 이 시대에 있을 징조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2). 어쩌면 그대로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것을 받아도 천하를 받은 것처럼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리 큰 것을 받아도 사소한 것을 받은 양 귀히 여기지도 않고 말의 감사에 그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아예 감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제 나름대로 배우자의 기준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효도하는 사람치고 심성이 나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제가 배반할 확률이 많은 사람입니다.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언젠가는 상처를 주고 관계를 망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작은 것을 받아도 감사를 크게 하는 사람은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던 10명의 문둥병자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렸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주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유가 있다고 베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있어야 베풀게 됩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억지로 한다면 못합니다. 마음에 없는 일은 몇 번 하다가 지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말한마디라도 베풀며 삽니다. 우리는 지난 코로나 시대를 2년 가까이 살면서 어떤 감사를 하고 사십니까? 자기가 방역을 잘해서 국가도 개인도 건강하게 무탈하여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늘 감사하몀 살아야 하겠지만, 특별히 올해의 감사는 남달라야 싶습니다. 감사야말로 믿음의 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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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
    아름다운교회 Nov 14.2021 이럴 때가 아쉽더라
      요즘 특.새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3주간의 일정가운데 벌써 2주가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마지막 한 주를 남기고 있는데 이번 특.새는 ‘영적 부흥’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하고 있는데, 시간마다 주시는 은혜가 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특.새는 제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힘들고 바쁜 집회입니다. 수십년 목회를 했어도 이번처럼 반주자가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에 반주자 부족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동안 제 목회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반주자를 풍성하게 동역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사례비를 주면서까지 반주자를 모셔야 했는데, 제가 있었던 교회는 반주자들을 자비량으로 풍족하게 보내주셔서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반주자가 없습니다. 반주기로 반주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아쉬움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옛날에 배워둔 피아노 실력을 직접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바이엘’이라는 교본이 기초 교과서입니다. 그 후에 ‘체르니’를 배우게 되는데, 저는 미안하게도 바이엘도 다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찬송이 좋아서 찬송가를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래서 찬송가는 눈감고도 외울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데, 아, 복음성가는 장르가 너무 달라서 바이엘도 못뗀 솜씨를 가지고는 언감생시였습니다. 한계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때 배운 바이엘도 못뗀 솜씨를 수십년을 묶혀 두었지 뭡니까? 그런데 정말 감사한 것은 수십년 묵힌 피아노 건반을, 마치 자전거 타는 것을 한번 배우면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어느 정도 반주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너무나 한계가 많았습니다. 찬양 싱어가 있으면 그냥 반주만 집중하면 되는데, 싱어를 하랴, 서툰 반주를 하랴, 피아노 악보와 코드를 볼랴,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어느 날, 핀잔을 줍니다. ‘찬송가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복음성가는 한정없이 늘어져서 은혜가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 나이가 들어서 그래. 악보보랴, 노래하랴, 피아노 건반 보랴, 정신이 없다” 이렇게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실력이 모자란 것입니다. 반주를 잘하는 분들은 건반에서 손가락이 춤을 춥니다. 어떻게 변조, 변곡이 되어도 피아노가 머릿속에 있고, 손가락과 건반이 일체가 되어서 자유자재로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기본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서툴고 틀리고, 느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낀 것입니다. ‘아, 기본기를 잘 익혔더라면...’ 이런 아쉬움이 큰 요즘 날들입니다. 운동도, 예술도, 공부도, 인생의 어떤 것들에도 기본기가 있어야 합니다. 기본이 잘 안되어있으면 성장이 어느 시점에 멈춰버립니다. 더 이상의 발전은 없습니다. 그럴 때 아쉬운 것이 기본기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본기가 잘 갖춰진 사람은 다릅니다. 그런데 기본이 잘 안되어있으니 바람만 불면 흔들거립니다. 사람들의 말에 현혹이 잘되어 갈대와 같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기본이 잘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주워들은 것이 전부여서 사실은 기본기도 없는 신앙인이 많습니다. 우리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 이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의 기본기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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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07.2021 행복한 성도의 모습
    교회가 행복한 공동체인지를 보려면 성도가 교회에 머무는 시간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가 13년 전에 첫 출발을 할 때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예배 처소가 없을 때에도 모이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만나는 것이 그리워졌습니다. 한번 만나면 헤어지기가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 같았습니다. 초대 교회가 그랬습니다. 모이라고 한 적이 없지만, 교회가 태생되면 주일이면 반드시 모여서 모이라는 규정을 예수님이 만들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일 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모여서 은혜를 나누고 성장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들은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행복한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모임의 시간이 줄어듭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합니다. 섬기는 사람도 하나 둘 끊어집니다. 그러니 더욱더 차가운 공동체가 되어져 갑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행복한지를 측정하려면 성도들이 머무는 공간을 보면 알 수가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어제 하루 종일 교회가 들썩였습니다. 마치 잔치집처럼 느껴졌습니다. 특.새 기간이기도 하지만, 새벽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모여서 김치를 담그고, 교회 공사를 하면서 서로 서로 돕는 모습이 정말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침체한 듯한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달라보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도우니 일의 효율도 빨라졌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만 하다가 돕는 사람들이 생기니 일하는 사람도 보람과 사랑을 느낍니다. 어느 권사님과 집사님은 일하는 분들의 수고를 생각하여 자원하여 음식을 사다가 먹이고, 만들어 먹이고 서로를 배려하고 챙기고 돕는 모습, 교회 물건을 사는데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앞장서 물건 구입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모처럼 따듯하고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니 더욱 더 신이 납니다. 이러한 일은 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나를 희생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는 말씀의 은혜, 기도의 은혜, 사랑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이많고 문제가 많다고 싫어합니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이 불때마다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가지가 없는 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죽은 나무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없이 구경꾼만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하다가 보니까 서로 생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니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문제가 대두될 때에 어떻게 성숙한 모습으로 그 문제를 다루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안다니면 먼지도 없습니다. 청소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면 청소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부흥하기를 원하면서 청소하려고 하지 않으면 모순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문제있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문제를 잘 다룰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행복은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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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31.2021 입맛을 점검하면 건강이 보입니다.
      과거의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2003년, 베가스로 목회하러 교회에 부임했을 때부터 지난 10여년의 시간의 메모리를 가끔씩 facebook에서 보여줍니다. 그때 제 모습을 보면서 정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과거에 얼마나 살이 많이 쪘었는지 보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그 살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에서 최고로 살이 빠졌습니다. 입던 옷들이 맞지 않아 다시 사야할 때가 많았습니다. 허리 사이즈 36에서 30이 되도록 빠졌으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많이 빠졌습니다. 그럴 때의 특징은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습니다. 집에서 해주는 일상의 밥도 맛이 없습니다. 하도 맛이 없어서 아내가 밥을 맛있게 안해준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정말 먹고 싶은 것이 없고, 식사 시간만 되면 힘들었습니다. 점점 말라가는 저를 바라보면서 가족들과 교우들의 염려도 커졌습니다. 어떤 권사님, 집사님은 한약, 보약, 음식으로 제 건강을 살펴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밥이 왜 이리 꿀맛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지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음식이 나온 것도 아니고, 아내의 정성스러운 평상의 식사 그대로였습니다. 무척 맛있게 식사를 한 후에 샤워를 하고서 몸무게를 달아보니 5파운드가 늘어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지?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이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제 입맛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의 건강을 살피는 척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식사를 얼마나 잘하느냐는 것입니다. 확실히 식사를 잘 못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식사를 잘 하시면 얼굴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옛말이 틀린 것이 없습니다. ‘밥이 보약이다’ 그것은 바로 ‘입맛’에 달려있습니다. 입맛이 좋아지니 저절로 음식을 더 먹게 되고 그만큼 살이붙고 건강해졌습니다. 음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입맛’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음식 탓을 합니다. 음식이 짜다, 달다, 싱겁다, 왜 같은 재료를 가지고 이렇게 밖에 못하냐, 별 투정을 다 부립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겪어 보니 진짜 문제는 제 입맛이었습니다. 내 입맛이 살아나니까 모든 것이 맛이 있습니다. 그게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남 탓을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지지부진하거나 영적 침체를 겪을 때면 항상 하는 이야기는 말씀에 은혜가 없다에서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이 불만과 불평으로 다가옵니다. 영적 입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입맛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모든 것에 불평이 따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불평에 물론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영적 입맛’을 이미 잃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음식 탓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빼빼 말라버려서 깍쟁이가 되어버립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항상 감사합니다. 스스로 이겨나가는 법을 배웁니다. 맛이 없는 음식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입맛을 어떠합니까? 밥맛이 없으면 입맛으로 이겨냅시다. 빨리 입맛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이요, 건강해지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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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24.2021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
    지난 주간에 우리는 두 분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분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의 보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에배였고, 다른 한 분은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신 분의 훈훈한 예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당하는 유족의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준비도 없이 맞이한 당황스럽고 슬픔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런 기회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무슨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생각보다는 많은 분들이 예배에 참석해서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금요일에 드린 환송예배는 우리 교회에서 진행이 되다고 보니, 마침 전도의 기회가 되고,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유족들에게 자그마한 힘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이 되어서 긴급하게 목장에 광고를 하여 참석하도록 안내를 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몇 분들이 열 일을 제쳐두고 참석해서 유족들에게 따듯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들은 ‘품앗이’라는 제도아래서 농경사회속에서 서로 서로가 일손을 도와서 농사도 짓고, 작은 마을 공동체의 애경사를 서로 서로 도운 미덕을 가진 사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계모임’등이 발달되어 있고, 적금제도가 잘 형성되어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제법 큰 규모의 교회를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다녔는데 제법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받아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다니게 되고,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이렇게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다니면서 뿌려놓은 부조금이 얼마인지 아느냐? 나도 내 애경사에 그동안 투자한 것을 챙기기까지는 교회를 못옮긴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교회 공동체가 어느 새 ‘품앗이’ 공동체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네가 이만큼 나를 도왔으니 너도 나를 이만큼은 해주어야 하지?’ 그런 마음입니다. 교회안에서도 서로 서로 돕는다고 할 때에 내가 받은 도움만큼 남에게 도움을 주고 또 그것을 기대하는 사회적 관습이 어느새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정말 교회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일까요?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받은 것은 없고, 도움받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댓가없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면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도움받은 사람이 아니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어서 사랑과 위로를 나누는 마음을 자제한다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기 힘든 전도의 기회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열고, 따뜻한 교회의 모습에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 먹은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을 먹기까지가 어렵습니다. 품앗이 공동체, 안면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이 세상을 사는 제자들의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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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17.2021 평생 습관 바꾼다는 것
      학창시절에 테니스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몇 번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때마다 포기를 했습니다. 이유는 나는 테니스를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공을 치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치는 것 이전에 폼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빈 스윙을 하고, 폼을 따라서 해보라고 하는데 끝도 없는 빈 스윙연습의 폼을 만드는 것이 귀찮아서 결국은 테니스 배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선 오랜 시간 후에 유학을 할 때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보고서 치고 싶은 욕심이 나서 운동을 했는데, 폼을 배우지도 않고 감각으로 공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테니스가 재미있어서 제법 오랜 시간을 테니스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력이 늘지가 않는 것입니다. 좀 더 잘 쳐보고 싶어서 유튜브를 보고 흉내를 내보는데 결국은 폼이 문제였습니다. 기본기를 배우지 않고 내 나름대로 감각으로 치는 테니스는 기본을 무시하고 배운 것이라서 이미 몸이 내 나름대로의 스윙에 익숙해져서 기본기대로 따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미 내 모든 근육이 잘못된 스윙에 익숙해져서 아무리 배워도 과거의 잘못된 스윙방식으로 따라 갑니다. 왜냐면 이미 내 몸이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잘 배웠더라면 이런 고생하지 않아도 될텐데 잘못 배운 스윙을 고치기에는 너무 큰 고생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운동을 조금만 잘해보려고 해도 잘못된 것들, 이미 습관이 배고, 잘못된 방식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그것을 고친다는 것은 피눈물나는 훈련을 통해 몸이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몸의 모든 근육이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수십년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신앙생활이 잘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수십년동안 세상에서 배우고 익히고, 습관에 배인 옛 사람의 생활방식이 나도 모르는 가운데 남아있습니다. 큰 틀은 바뀌어도 작은 것들에서 바뀌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활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을 때에 얼마나 많은 잘못된 습관이 많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어느 정도 틀이 바뀌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과거에 익숙했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에 다닙니다. 내 속에 ‘옛 사람’이 살던 세상의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새 사람’의 방식으로 바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도 안 바꾸고, 남도 안 바꿉니다. 그러니 적당하게 신앙생활하고,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도 바뀌지 않는 사람의 삶의 방식을 답습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습니다. 운동의 잘못된 습관하나 바꾼다는 것도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데, 영적인 삶에서 잘못된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사니, 내가 그렇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모습이 ‘반인반수(반은 사람, 반은 짐승인 희랍의 신화)’처럼 반은 신앙인의 모습과 반은 세속인의 삶을 섞어 삽니다. 옛 사람의 몸에 익은 생활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처절한 영적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새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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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
    아름다운교회 Oct 10.2021 영적 리모델링
       세상의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집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사도 시간이 가면 헌 집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타도 시간이 가면 고장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래서 새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새것이 낡아지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유행에 따라서 감각을 새롭게 하기위하여 나름대로 헌 것을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늘 새것만을 사용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집은 리모델링을 통해서 분위기를 바꿔보기도 하고, 헌 집을 새 것처럼 바꾸어 보려는 노력을 합니다. 돈을 들여서 리모델링을 하면 정말 감쪽 같습니다. 겉은 낡아있어도 리모델링을 해놓으면 새 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리모델링을 합니다. 사람도 리모델링을 합니다. 성형입니다.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늘어집니다. 나이가 들어서뿐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도 좀더 예뻐지기 위하여 리모델링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리모델링에 익숙해져 있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리모델링이 사치인 것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리모델링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생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발전하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가변적인 세상에서 그저 과거의 전통이 좋다고 머물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이 담겨지는 그릇은 변하기에 그 변화에 맞추는 것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도 리모델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십년간을 살면서 우리의 집을 리모델링할 마음이 생기는데, 우리의 영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으면 안됩니다. 과거에는 찬송가만 ‘찬송’이었습니다. 복음성가는 ‘찬송’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복음성가는 흘러간 유행가처럼 받아들여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기타와 드럼을 치는 것은 경건치 못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뀌어 지금은 복음 성가를 부르지 않은 곳이 없고, 기타와 드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찬송가만 부르면 1세대 성도들은 익숙한 찬송이니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은 그런 류의 찬송가는 ‘진부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도 세대간의 갈등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리모델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전해야 하는 세상은 자꾸만 변합니다. 나만 변지 않는다고 세상이 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한 영혼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바꾸겠다는 결단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육신의 삶에 리모델링에는 관심을 갖지만, 영적 생활에는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충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기도하고, 다시 주님앞에서 ‘다시 성령충만’했던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번 받은 은혜를 수십년간 리모델링없이 써먹다가 마르고 닳아서 삐걱대며 신앙생활합니다. 우리의 영적 리모델링은 항상 이루어져야 합니다. 11월부터 우리는 ‘제13차 다니엘 특.새’를 진행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어떤 부들은 그 변화를 싫어합니다. 왜 같은 것을 십수년을 반복하냐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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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
    아름다운교회 Oct 03.2021 향기가 그립다
    미국에서는 좀처럼 꽃에서 향기를 맡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저 혼자만의 느낌일까요? 물론 어느 꽃들은 나름대로 향기를 은은하게 뿜어내는 것들을 보았습니다만 대체적으로는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과일의 향기도 그렇습니다. 맛있는 과일을 고르기 위하여 코의 감각을 의지할 때가 있는데 이 과일마저도 향을 좀처럼 의지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다가 보니, 복걸 복이라는 요행수에 맡길 수 밖에 없지요. 꽃도 과일도 겉은 화려하지만 향기없고 맛없는 과일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세상사람들과도 그런 구분점도 없어서 향기도 없는 화려한 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구분하기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시간외에는 세상 사람과 믿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존재들 앞에서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욥을 신뢰하셨습니다. 욥이 끝까지 시험에서 이겨낼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향내나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 혹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편지는 글로써 마음을 전달합니다. 향기는 냄새로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사람들은 편지와 향기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항상 ‘자기’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자신의 본질의 냄새를 풍깁니다. 자신의 편지, 자신의 향기이기 때문에 거기엔 자신의 자랑, 자신의 역겨운 냄새를 풍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냄새는 그런 냄새가 아닙니다. 크리스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독특한 냄새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냄새는 그리스도의 냄새입니다. 내가 사는 삶에 나의 냄새가 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읽어집니다. 정치가는 정치를 해야하고, 경제가는 경제를 합니다. 운동선수는 운동을 합니다. 배우는 배우의 역할과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운동이든 하는 것은 각자의 역할이지만, 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향기’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제 가슴을 두드렸던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인데, 이 책이 신학적으로는 맞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사는 신앙인에게는 정말 두려운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정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영화배우 허준호씨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배우 허장강, 나이드신 분들은 다 아시는 분입니다. 유명 배우의 아들도 유명 배우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불교를 신봉했습니다. 삶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부르는 찬양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온 마음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며 그에게서 예수님의 열정을 느꼈습니다. 노래는 그 사람이 부르는데 느끼는 것은 예수님이라면 그것이 향기입니다. 요즘 세상에 향기를 품은 꽃이 없듯이 향기를 내는 그리스도인도 별로 없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온갖 화려한 꽃들이 많이 있지만 냄새가 없는 꽃이 많은 것처럼, 화려한 신앙인은 많은데 정작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문제이지 싶어 반성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의 걸음에 주님의 향기를 풍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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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
    아름다운교회 Sep 26.2021 기본으로 돌아가자
    운동 선수를 비롯한 예쳬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피땀어린 노력으로 좋은 열매들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눈물이 담겨져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UN을 방문했던 BTS의 멤버들을 보면 온 세상이 좋아하는 K-pop을 만들어 낼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명성은 온 세상의 사람들을 열광에 빠지게 합니다. 연예계든 체육계이든 그들의 성공의 뒷면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피땀어린 노력과 눈물의 결정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노력없는 결과는 참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성공을 거둔 이들도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가령 운동선수도 그러합니다. 평상시대로 움직이고 하는데 갑자기 감각이 무너지고, 뭐하나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프로라해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분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 기본 훈련으로 다시 시작하자’ 그렇습니다. 무너져 내릴 때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하는 것은 바로 ‘기본’입니다 이 기본만 잘 다져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버팀목입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그 버팀목이 무너져내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운동선수들처럼 기본으로 가서 다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어디서 잘못되었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잠시는 늦게 갈 수 있지만 멀리 그리고 힘차게 제대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제공해줍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 감정은 다양한 환경앞에서만 서면 자신의 이성과 훈련조차 무기력하게 만드는 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앞에 어김없이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다윗도 광야에서 고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성숙해져 갑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나발’이라는 어리석은 사람을 통해서 자기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무너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만일 그에게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없었다면 다윗은 아마도 거기서 끝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기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기본이 뭐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습니다. 거창한 영적 거인에게는 너무나 쉬워서 기본으로 가기에는 수치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얼마나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겨우 유치원 수준으로 다시 내려가라고? 그러면 안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쉬운 것이지만, 너무나 쉬워서 자존심 상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대학원을 나온 박사가 유치원으로 들어가 다시 배운다는 것은 분명 수치이기는 하지만 그 기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에 있습니다.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려 예수님께 책망받은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도 ‘어디서 떨어졌는지 돌아보라’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워졌습니까? 내 뜻대로 잘 안됩니까? 늘 아쉬움이 남습니까? 기본으로 돌아가십시오. Basic은 쉽지만 다시 살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면 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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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
    아름다운교회 Sep 19.2021 뿌리는 것이 헛되지 않기에
    지난 주간에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지역에 사신다는 이분은 교회의 정보를 묻고 조만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화중에 참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오래 전에 주일 설교를 CD에 담아서 전도사역을 했었는데, 이분은 그 CD를 들으면서 은혜 생활을 대신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 입장에서는 설교 시디사역을 오랜 동안 하면서 때로는 지치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무용론을 입에 거론할 정도로 그 노력에 비해 효과가 좋지 않다는 논리로 그만하자고 하던 분들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D Media가 세상에서 인기가 시들해지고, 인터넷 문화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몇 년 전에 그 사역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디를 들었던 분이 교회를 찾는다고 하니, 정말 감회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울림이 내 안에 일어났습니다. ‘아, 우리의 작은 사역이 헛된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는 사역이 너무나 초라하고, 보이는 열매가 없고, 그냥 지쳐만가는 듯한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가 하는 일이 하도 적어..’ 그냥 무너져 내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감도 없고, 자괴감에 휩싸여 우리의 사역에 물러서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로 인하여 몇 번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나서는 다시 그런 사역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시편의 기자는 ‘울며 씨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시126:6)’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고전15:58)’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향은 어렵고 힘들고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도망가고 싶어합니다. 함께 망할 수 없다고 함께 타고 있는 배에서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렇게 도망하면, 그 도망이 자신의 습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내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지금의 아픔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그 고통을 견디면 그 사람은 ‘성장과 성숙’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고난을 먹고 자랍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처럼 우리의 자람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진면목은 인생이 행복할 때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어둠의 고통속에서 보여집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아마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업과 삶에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뜻하지 않은 아픔속을 지나고 있을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역을 내려놓고,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내려놓고, 조금 더 편한 곳에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자그마한 수고와 헌신 그리고 우리의 핏땀흘린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실망시킬 때도 있습니다. 욕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진면목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며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작아도 우리가 주님을 위해 뿌리는 것이 있다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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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2.2021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하니라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가면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동화시간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철가면’이라는 동화였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재미있게 들려주시는지 이야기 재미 홀짝 반해서 주일학교 예배시간이 기다려졌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삼손’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삼손은 위대했고, 힘이 장사고, 영화까지 나올정도니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야기로 듣던 성경에서, 내 눈으로 읽는 성경 그리고 설교자로서 다루는 삼손 이야기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새벽기도회 본문으로 다루고 있는데 삼손을 다루는 본문앞에서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영웅 삼손이 아니라 부끄러운 신앙인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출생의 예고 때부터 세례요한과 예수님처럼 기적적인 은혜를 타고 난 하나님께 바쳐지고 성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나실인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삶 자체가 방탕한 삶이었습니다. 사람은 친구와 노는 곳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듯이, 삼손은 항상 ‘거룩’과는 상관이 없는 곳인 블레셋 주변에 머물고 그들과 교분을 쌓으며 삽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인생이 한 순간에 들릴자라는 여인을 만나서 털려버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자신도 자기가 ‘나실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도 그렇게 살다니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실이 없이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속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절망의 한숨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눈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맷돌을 돌리고 있던 그에게 성경은 이런 말을 씨앗처럼 심어 놓았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16:22). 삼손의 삶이 거기서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절망의 비극으로 인생이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함을 암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소망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털에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징이 머리털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삼손의 머리털이 자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새싹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싹은 삼손이 마지막 기도에서 응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마지막으로 이번 한번만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교회들마다 위축이 되었다고 한숨을 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됩니다. 그 교차지점에 우리의 믿음과 신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우리를 다듬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에게는 그에 맞도록 쓰시고, 하나님께 절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에 상응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권능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함을 봅니다.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사슴의 발처럼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믿음으로 붙잡고 일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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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5.2021 곱게 나이드는 연습
       베가스에 올 때에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어느덧 20년 가까이 되어가는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알아왔습니다. 처음만날 때엔 아이였는데 어느 새 청년이나 어른이 된 사람들, 어른으로 만나서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 그나마 그동안 한참였던 분들이 곁에 남아 있어도 모두들 하는 말, ‘나이앞에 장사없다’며 늘 한숨을 짓고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들 세월만 간 것이 아니라 내 세월도 갔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요즘입니다. 힘이 쇠퇴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각과 굳어지는 기억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아이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고, 인간의 본질인 흙으로 돌아갈 때에 어른 역시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무한한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는 능력있는 존재이지만, 그 마지막의 길은 초라한 성적표를 가지고 창조주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을 향하여 가는 노중(路中)에서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자극을 받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수요일부터 지성과 영성을 갖춘 믿음의 사람들의 저술을 통해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영성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려는 우리들의 노력입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 중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지식의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나 자신만의 세계’속에 갇혀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정관념’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정관념은 잘 깨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내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아의 세계가 깊고 높을수록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요즘 제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만의 세계, 내 안의 지식과 경험, 그래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면서(다른 세계도 있음을 알았음에도 여전히 갇혀살 수도 있는 세상) 자기만의 잣대로 세상을 살려는 게으름(?)이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성채를 쌓아올리고 있는 사람들,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현상이 너무나 많은 보게 되었습니다. 변화도 두렵고, 변화할 수도 없고, 그저 자기 만의 세상속에 갇혀 살면서 더 이상 발전도 하기를 기대하지도 못한 채, 고집스러운 늙은이로 전락해 버리기 딱 쉬운 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지요. 때론 나의 지혜보다 남의 지혜가 뛰어날 수 있음을 보게 되고, 내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축복일 때도 있습니다. 남의 것을 볼 수 있는 지혜 때문입니다. 그냥 인생의 재미를 위해서 사는 사람과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이 다릅니다. 어느 100세 철학자가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늙어가면서도 늙지 않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구는 그러러면 부지런히 머리를 써야합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인생으로는 가질 수 없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앞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해서 부지런히 발전과 변화를 시도해야겠습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일 나이가 된 것도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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