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권순혁목사)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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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권순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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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0.2025 웃으며 즐기며 삽시다
    여러분의 기도와 관심과 협력 덕분에 저희 가정이 재충전의 시간을 잘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잠시 쉬는 시간을 보내면서 뜻깊은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바로 라스베가스에서 북쪽으로 차로 10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옐로우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입니다. 저희 아이들은 그곳에 있는 여러 가지 풍경들과 들판을 뛰노는 사슴과 바이슨 떼를 보며 감탄했지만 제게는 특별히 다가온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그곳은 오랜 세월동안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지하의 돌들이 깨져 여러 갈래로 틈이 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 틈새로 용암의 열기가 땅 위로 올라오고 그 열기를 만난 지하수들이 증발되어 증기와 뜨거운 물로 폭발하는 기이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현상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계속된 지진으로 인해 땅은 계속 갈라지고 뜨거운 물과 증기가 폭발하는 장소들이 계속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울창하고 쭉쭉 뻗어있는 나무 숲들 사이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린 장소들이 곳곳마다 등장합니다. 그곳의 지표면은 회색으로 뒤덮혀 있고, 나무들은 다 죽어서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던지 아니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 것이 이것입니다. 죽음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구나. 죽음이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구나. 지금도 땅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 뜨거운 물이 솟아올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죽음으로 몰아갈지 아무도 알 수 없구나. 그렇게 그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해 있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 소천하신 고 이어령박사님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임을 삶으로 잘 보여준 분이십니다. 죽음이 우리 인생에 결코 오지 말아야 할, 우리 인생을 끝내 버리는 그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의 영원한 삶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암말기 판정을 받고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전혀 어색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용기있게 받아들이셨죠. 그리고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을 멋있게 사시다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우리도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청년이라고 더 오래 살까요? 노년이라고 더 빨리 죽는 것일까요? 그건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저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우리네 인생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암울한 사실이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알려주는 멋진 진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요즘 시니어와이즈 성경공부에서 시니어 분들과 매주 나누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분들이 이러한 진실을 마주 대하며 하루하루 즐기며 기뻐하며 사시려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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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
    아름다운교회 Jul 06.2025 나와보니 알았습니다
    ​지난 주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수련회가 말리부가 보이는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있었습니다. LA에 있는 한 교회에서 주최한 수련회에 조인하여 함께 은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학생들을 데리고 이 수련회에 참석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라스베가스의 지역적 특성상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없는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라스베가스는 세계 최대의 도시입니다. 그곳에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풍성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기에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더 많은 세계들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캘리포니아에서 살아가는 또래 친구들과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우주이고, 더 많은 사람을 경험하는 것이 더 넓은 우주를 경험하는 것일테니까요.  수련회장으로 5시간을 운전하여 도착했습니다. 시작부터 학생들이 잘 적응하여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저도 흐뭇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인가를 배워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나와보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족애였습니다. 나와서 보니 학생들이 그저 남의 집 자식이 아닌 내 자식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이 잘 적응하고 있는지, 어려워하는 부분은 없는지, 지쳐보이는 아이는 없는지, 불안해 보이는 아이는 없는지 계속 살피며 이들을 보살피고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학생들끼리도 그것을 느꼈나봅니다.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해 주고 더 돈독하게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와보니 학생들도 느끼는 것이 있었나 봅니다. 마지막 날에는 학생들이 준비한 퍼포먼스를 발표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 학생들이 퍼포먼스를 한가지 준비했습니다. 출발하기 전부터 교회에 모여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했지요. 막상 이곳에 와서 연습을 하는데 다른 교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잘 해보려고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제일 잘 하는 것 같다고 자부심을 함께 느끼기도 했지요. 나와보니 가족애가 저절로 생겨났나 봅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앞으로가 더욱 기대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세워주며 이해해주며 용납해주고 도와주고 희생하고 격려하며 공동체를 함께 세워나가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를 조금이나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는 우리를, 나보다는 교회를, 나보다는 사회를 위하는 마음을 배웠기를 바래봅니다. 학생들이 이기적인 모습을 벗어버리고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낀 이번 수련회,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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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9.2025 마음 중심
    우리의 마음에는 마음의 소원한 것들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되도록 일찍 이루어졌으면 하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도서에서 솔로몬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좌를 보니 다음 달 렌트비가 나갈 돈보다 적은 돈이 들어있을 때, 신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을 때, 아픈 몸이 빨리 낫지 않을 때 등등.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들 앞에서 마음이 조마조마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는 저도 목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실제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 믿음이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지 한순간에 두려워하고 초조해 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도대체 왜 하나님은 한번에 좀 주시지, 한번에 좀 해결해 주시지, 주실 거면 빨리 좀 주시지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하소연도 해 봅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너의 마음 중심에 도대체 뭐가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도대체 마음 중심에 뭐가 있느냐고 대뜸 물으셨습니다. 이제 이 질문과 씨름을 합니다. 이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몰라서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현실 사이에 있었던 커다란 갭을 발견하고 난 뒤 이 갭을 좁히기 위한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중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실 그 무언가였는지.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은 선물에 약합니다. 선물을 사서, 때론 먹을 것을 사서 집에 들어갈 때면 이 아이들을 나를 기다렸는지, 아니면 제 두 손에 들려있는 것을 기다렸는데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미성숙한 아이들은 매일매일 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아빠보다 아빠의 두 손에 들려있는 당장의 선물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목을 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다가 드디어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확신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 내가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이전에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았지만 현실의 문제 앞에서 이제 더 진실한 고백을 확신 가운데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 내 마음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니 흔들렸던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제 삶에 다시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가 우리에게 전한 말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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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
    아름다운교회 Jun 22.2025 생명이 있다면
    몇 주 전 NV Energy에서 노티스를 하나 받았습니다. 교회에 있는 소나무 중에 하나가 전기줄에 침범을 해서 가지를 정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업체에 견적을 받아보았는데 요즘 시국이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습니다. 그래서 견적만 여기저기 받다가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지요. 그러다 한 성도님의 결단과 헌신으로 우리가 자르자고 하고 지난 주에 가지치기를 진행했습니다. 하필이면 가장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나무를 올라가자니 땅에 그냥 서 있는데도 휘청휘청할 정도의 바람에 겁이 났습니다. 어찌 됐건 그 성도님께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가지들을 쳐내 가면서 결국 깔끔하게 가지들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마무리 될 무렵 제 눈에 이상한 것이 한가지 들어왔습니다. 잘려나간 가지에서 갈색빛의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나무의 진액이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계속 보았습니다. 진액이 점점 흘러나오더니 잘려나간 부분 전체를 덮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나무가 왜 진액을 내는지. 그것도 잘려나간 부분에 왜 진액이 흘러나왔는지. 모든 나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처가 나거나 곤충의 유충이 침투할 때 진액을 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진액을 내어서 외부 상처에 세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하네요. 꼭 이것은 잘려나간 부분이 너무나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도 짠해졌습니다. 꼭 나무가 아프다고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프지만 아픈만큼 진액이 나와서 자신을 보호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또 잘려나간 가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에서는 진액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가지는 죽은 가지였을 것입니다. 죽은 것에는 가지가 잘려도 진액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두 가지를 한 화면에 담아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생명이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생명이 공급되고 있는 가지였습니다. 한 가지는 생명이 차단된 죽은 가지였습니다. 둘 다 잘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진액이 나온 반면, 또 다른 하나는 전혀 진액을 내지 않았습니다. 순간 저는 생명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잘려나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경험하곤 합니다. 상처를 경험하곤 하지요. 그것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가졌느냐, 생명을 가지지 못했느냐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피투성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보호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언제가 다시 자라날 소망이 있습니다. 완전히 회복될 그 날이 오게 되겠지요. 하지만 생명이 없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회복될 가능성도 없지요. 그냥 툭 치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런 가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지는 불에 태워져 사라져 버리겠죠.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엄청난 고통과 아픔과 시련이 내 마음을 괴롭게 할지라도 생명이신 주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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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
    아름다운교회 Jun 15.2025 사랑으로 자라납니다
    우리 교회 까페로 가는 길에 행운목이 한그루 화분에 심겨져 있습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잎이 무성하고 멋진 자태를 보였던 나무였는데 어느 날 저의 실수로 햇빛에 계속 노출시켰다가 나무가 시들시들해져 버렸고 급기야 나무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께서 줄기를 다 잘라놓으신 것을 보고 저는 더 이상 이 나무는 희망이 없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 나무에 잎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신기하게 잎이 나는지 줄기 하나에 양쪽으로 잎이 올라오더니 지금은 제법 많아졌습니다. 죽은 것만 같은 나무가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니 다시 살아난 것이죠.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세상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자라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과 관심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북한의 침략으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온 나라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무슨 학교가 있고, 그때 무슨 배움이 있었겠습니까. 그 시간을 지나온 분들은 대부분이 배우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훌륭하신 분들이 사회에 많이 배출되었고, 그분들을 통해 사회는 매우 건강하고 힘있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훌륭한 사람은 반드시 학교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리어 학교 교육은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들고 사회를 불안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전문가들의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사랑과 관심, 그리고 희생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헌신적인 희생을 통해 다시 살아났던 것처럼 그러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희생이 우리 사회,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더 높은 곳을 차지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려는 목적도, 권력을 가지려는 목적도, 좋은 차, 좋은 집을 가지려는 목적도 속을 들어가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며,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돈과 권력,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가치는 중립적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선하게 쓰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돈을 사용해 보십시오. 희생하는 일에 권력을 사용해 보십시오. 건강하고자 하는 목적이 누군가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기 위한 것이 되면 어떨까요? 칼럼을 계속 쓰다보니 내용이 늘 이상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하나라도, 누군가 한사람이라도 실천한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에 기적은 일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으로 자랍니다. 소망없는 인생들이 우리의 사랑과 관심과 희생을 통해 생명을 얻는 복음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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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
    아름다운교회 Jun 08.2025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지난 주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제21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번만큼 관심이 많았던 선거가 역사상 또 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이번 대통령 선거의 투표율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1997년 대선 이후 28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온 국민의 관심 가운데 진행된 투표였기에 당선 결과에도 많은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저는 여러 사회적, 개인적 반응들을 살펴보며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희망을 걸고 있는지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이번 선거는 교회가 정치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지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하고, 선거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되어진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쳔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교만해서도 안 될 것이며, 원치 않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해서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바벨론, 그리고 로마. 이 두 제국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강대국들로 손꼽히는 국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국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쓰임 받았고, 그 일을 다한 후에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 것이죠. 그 중에서도 바벨론은 정말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강대국이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고, 영원히 그 영광과 권력을 누리며 세계를 통치할 것만 같은 나라였죠. 누가 그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위대한 바벨론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정확히 남유다를 멸망시킨 후 70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때문에 세계 속에서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손을 놓으시면 아무 것도 아닌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열방의 통치자가 되시고 온 나라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정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 개인이나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 교육, 문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색이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육 수준이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맙시다. 우리의 소망은 정치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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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아름다운교회 Jun 01.2025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저녁, 함께 모여 예배 드리면서 다윗이 어떻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윗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의 노력이나 성품, 성공, 승리가 아닌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을 성경에서 자세히 살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수록 하나님께 여쭈었다는 사실을 적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의 기도의 삶을 살펴보면서 오랜만에 예전에 들었던 문구를 하나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하고자 하신 일은 다윗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윗에게 가장 요구되었던 것은 바로 무릎을 꿇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도만 하고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다윗,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다윗입니다. 하지만 그는 기도 없이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고, 기도 없이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빼앗아 왔던 일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기도하지 않으면 천하의 다윗이라 할지라도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쯤되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러분들도 마음에 생각하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을 시작할 때가 많고,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고 헌신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일조차도 나를 위하여 하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죠. 어떤 점에서는 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일하지 않고 기도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 훨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기도가 항상 먼저여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낼 아무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는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 나의 업적과 나의 성과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칭송하며 높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름 VBS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기도를 선포하고 새벽마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 정해놓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일하심이 VBS를 통해 드러나도록 기도했습니다. 역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아이들 마음에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셨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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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
    아름다운교회 May 25.2025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인도의 기차는 대부분 시간을 맞춰서 도착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기차가 3시간씩, 5시간씩 연착을 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루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있다고도 하는데 그래도 어느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살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나의 친구라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아마도 그 사람과 약속시간을 정해도 제시간에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인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느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도에 살아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처리가 늦어서 고생한 경험들을 하나같이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느림의 생활 문화는 다름 아닌 인도인의 시간관념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서구인들처럼 아침과 저녁을 하루로 생각하거나 삶과 죽음을 시작과 끝으로 보는 직선적 시간관념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 혹은 이생과 내생을 연속으로 바라보는 순환적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늘 안 되면 내일 될 것이고, 내일 안 되면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이라는 사람은 문화권에 따라 단일시간(monochronic time)과 복합시간(polychronic time)을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단일시간을 선호하는 유럽과 미국 같은 경우, 사람들은 한번에 한가지 일만을 처리하면서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복합시간을 선호하는 동남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상황에 맡게 처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 말은 이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는 효율성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욱 중요시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시간을 맞추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남미에 가보면 사람들이 관공서에 일처리를 하기 위해 줄을 서는데 몇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그곳을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하나만 보더라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지구상에 많이 존재합니다. 만약 우리가 친구와 약속을 했는데 10분, 20분 정도가 아니라 2시간을 늦게 나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그것에 대해 굉장히 심한 비판을 가할 것입니다. 그것은 틀렸다고 말하면서요. 그런데 한발자국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틀려서가 아니라 달라서 생기는 문제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물론 틀린 문제라면 이야기는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들이 틀려서라기보다 달라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틀린 것이 아니라 달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문화 차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셋째로,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틀렸다고 하기 이전에 달라서 그런 것은 없는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생각보다 많은 문제와 갈등이 해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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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18.2025 모두가 꿈꾸는 파라다이스
    여러분은 파라다이스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대개 사람들은 파라다이스하면 에머랄드 빛을 띄는 바다가 펼쳐진 몰디브 같은 곳을 떠올립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곳에 손꼽히는 곳이죠.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성경에도 나온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파라데이소스에서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죠. 이 단어는 성경에 세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에 달려 있던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죠.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파라데이소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영적 신비를 체험했던 삼층천(파라데이소스)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마지막은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파라데이소스)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세 곳에서 사용된 의미들을 토대로 이 파라다이스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파라다이스는 하나님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파라다이스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분명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외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그런 곳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파라다이스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의 현장을 통해서이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는 곳, 그곳이 바로 파라다이스라는 말입니다. 그곳은 특정 사람들만 있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모든 민족과 열방과 방언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파라다이스가 임할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광경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함께 지낼 수 있는 곳,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곳, 누구나 하나님이 펼쳐놓으신 세계에서 동일하게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곳. 누구나 기회를 부여받고 누구나 마음껏 사역의 장을 펼져나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파라다이스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파라다이스를 찾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교회가 파라다이스라는 생각을 해 보진 않으셨습니까? 혹여나 다른 곳에서 파라다이스를 찾고 헤매고 계시진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파라다이스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함을 받고 차별없이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게 할 때 이곳은 하나님의 파라다이스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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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
    아름다운교회 May 11.2025 1세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
    미국에 처음 정착하셨던 우리의 1세대 분들은 참 고생 많이 하며 사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에서 내놓으라는 대학도 나오시고, 남들 앞에 부끄럽지 않는 직장도 다니셨는데 이 먼 미국 땅에 오셔서 밑바닥에서 고생고생하며 사셨습니다. 어찌보면 힘들 법도 하고, 억울할 법도 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럽기도 했을텐데 꾸역꾸역 참아 오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만들어낸 주름들이 얼굴에 생겨나고, 여기저기 아픈 곳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에도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상처 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드러내는 것조차도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봐 티를 내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수많은 세월 동안 산전수전 공중전까지도 다 겪으면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작은 어려움이 찾아오면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는지.. 강한 척을 해보지만 정작 연약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게 됩니다. 요즘 새벽마다 민수기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그들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불평이 끊이지를 않는지. 왜 원망이 사라지지를 않는지. 도대체 하나님께 대하여까지 불신을 드러내는지. 꼭 그래야만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한 것으로 인해 한 사람도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것도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 원망과 불평을 멈추었다면 그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원망하고 불평할까.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컸으면 저런 반응을 보일까. 오히려 강한 사람은 티를 내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습니다. 강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오히려 티가 나는 법이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있던 상처와 아픔들로 인해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갔습니다. 이 구약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누구보다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아끼시고 돌보셨습니다. 반역에도 그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가 천국에 들어가고 안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강력한 주제가 무엇이냐? 그것은 광야의 훈련을 잘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훈련 받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훈련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도, 세상도, 물질도, 건강도,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 정도 당해보고 상처 입어 보았으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나만 의지하라고 나만 바라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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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
    아름다운교회 May 04.2025 인생의 겨울이라는 길목에서
    최근 마더와이즈라는 프로그램을 저희 교회에서 처음으로 시행했습니다. 5명의 어머니들과 매주 목요일 오전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여성으로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였지만 제게도 뜻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처음 마더와이즈로 모이자고 했을 때 여성들, 그리고 어머니들만을 위한 내용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큰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내용이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낳고 열매를 생산하기 위해 십자가에 날마다 죽어져야 함과 주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에겐 아무런 기대와 소망을 발견할 수 없음이 복음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세상이 던지는 메시지와는 정반대의 메시지이죠. 세상은 우리 안에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답게 살면 그게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그리도 스스로 목숨을 끝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의 메시지는 완전하지 않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 안에 아무런 기대와 소망을 발견할 수 없기에 주님이 더욱 빛이 나고, 주님의 생명이 더욱 역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마치 가장 어두울 때 빛은 가장 밝을 수 있음과 같은 원리이겠지요. 이렇게 마더와이즈 첫 번째 책을 마치고(총 3권의 책을 끝내야 함)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하기 때문에 마더와이즈 모임도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 듯 하여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 기도하던 중에 시니어와이즈에 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책도 만나게 하셨습니다. 바로 드니스 글렌(마더와이즈 책 저자)이 쓴 “동행”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녀 또한 나이로 볼 때 인생의 겨울에 들어섰고, 여러 삶의 위기과 어려움들은 겨울처럼 춥고 힘들고 아픈 시간을 그녀로 하여금 보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전도서를 연구하며 묵상하면서 인생의 겨울을 어떻게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바로 “동행”이라는 책입니다. 젊은 청년들과 젊은 부부들도 우리가 잘 양육해야 할 대상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중년과 노년에 계신 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야 할 분들임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전도서는 그런 우리에게 눈물과 회환과 후회,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과 생각들을 던져 줄 것입니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 나오면 그 뒤에 찾아오는 평안과 감격과 감동과 환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겨울은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 말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오뎅 국물 한 잔이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겨울을 그렇게 녹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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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아름다운교회 Apr 27.2025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관대함
    우리 교회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신앙의 선배들이 유산으로 남겨주신 신앙 서적들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쓰신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Leap Over a Wall)”이라는 책을 다루고 있는데요, 이 책은 구약에서 예수님의 삶의 그림자로 등장하는 다윗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인생에서 단 한번의 기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소개되는 다윗은 크리스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공해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세상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니, 사랑이니, 은혜니, 신실함이니 이런 단어들을 늘 사용하지만 삶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러한 단어들 중 지난 주 수요일에는 관대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600명의 사람들이 전쟁에 나간 사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가축들을 아말렉 군대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이들은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빼앗긴 것들을 찾으러 갑니다. 가는 길에 200명의 사람들이 브솔 시내에 지쳐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낙오자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400명의 군사들과 다윗만 떠납니다. 그리고 술파티를 벌이고 있던 아말렉 군대로부터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되찾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브솔 시내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곳에 낙오되었던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우리가 찾아온 것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아내와 자식들만 돌려주자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만큼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빼앗겼던 것들을 다시 찾게 하셨으니 우리 모두가 동등하게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반응을 보자마자 ‘어, 뭔가 잘못 됐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불편함이 밀어오지는 않으셨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 또한 차갑고 냉랭한 세상을 좀 더 차갑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건을 따져 가며 줄만큼을 정해서 주는 세상.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줄 가치도 느끼지 않는 세상.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세상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윗은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관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해서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우리 중 누구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관대함으로 자격 없는 우리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 따뜻한 정을 경험한 우리가 삶에서 관대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관대함을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따뜻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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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
    아름다운교회 Apr 20.2025 조금은 이상한 부활절
    부활절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시나요? 하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가 부활절 예배를 드리던 어린 시절이 저는 떠오릅니다. 부활절은 승리의 날이었고, 기쁨의 날이었고, 환희의 날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래야만 하는 날이었습니다. 지금 저에게 드는 생각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날인지는 알겠는데 부활이 도대체 나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냥 하루 기뻐하는 날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실제로 복음서마다 부활의 소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기쁘고 환희가 넘치는 소식으로 처음에는 다가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는 단 8절만으로 부활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 gar로 마가복음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는 “여인들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이라는 여운을 남기고 이야기를 마칩니다. 이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부활의 이야기가 혼란스러움으로 마치고 있는 것이죠. 마태는 부활의 이야기를 마가보다 두 절 더 보태서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두려움 속에 침묵하던 여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음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다리를 붙잡고 경배 드린 여인은 기쁨과 환희가 아닌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장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누가는 마태보다 두 절 더 보탰습니다. 마가보다는 네 절을 더 보탠 것이죠. 누가가 전한 부활의 이야기에서도 처음 소식을 들은 이들의 반응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회의적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 이야기를 허튼 소리로 치부했습니다. 베드로는 흥미가 생겨 무덤에 가보지만, 정돈된 수의만 확인한 뒤 의아해하며 돌아갑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 믿었다면 그는 무덤을 확인한 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요한은 부활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부활절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가장 길게 전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조차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 기뻐했던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기대했던 부활절의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상 밖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부활절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애써 우리식으로 바꾸어야만 할까요? 여인들과 제자들의 반응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네명의 복음서 저자는 왜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만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굳이 성경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해석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상식에 맞게 왜곡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관점과 마음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 해석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하겠지요. 아! 한가지 힌트는 드리겠습니다. ‘승리의 이야기’를 ‘승리답지 않게’ 전하는 아이러니가 조금은 이상한 부활절 아침을 해석하는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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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
    아름다운교회 Apr 13.2025 좋은 습관의 중요성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았던 광경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어떤 차가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 유턴을 하는데 경찰이 있는지 모르고 불법 유턴을 한 것입니다.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차를 따라가서 티켓을 발부했답니다. 그러던 사이 다른 차 서너대가 똑같이 유턴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경찰이 한 차를 잡고 있느라 그 차들은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죠. 어떤 차는 걸리고, 어떤 차는 똑같은 잘못을 했는데도 안 걸렸으니 말이죠. 우리는 이런 걸 보면서 걸린 차는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예전에 예비군 훈련장에서 운전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비군 훈련에서 이런 것도 다 가르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의 교육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강사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는 것은 재수가 없어서 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 녹화된 영상자료를 보여주시면서 그 사고가 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똑같은 운전 습관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것이 잘못된 습관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저는 그때 그 강의를 들으면서 운전하면서 핸드폰을 보던 습관을 버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게 습관이 되면 반복하게 되고, 그것이 어느 순간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에게 잡힌 그 차의 운전자는 모르긴 몰라도 그날만 불법 유턴을 한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일까요? 걸릴 때가 되어서 걸린 것이죠. 그날 운 좋게 걸리지 않은 차들은 그럼 재수가 좋아서 안 걸린 것일까요? 인식하지 않고 계속 하다가는 언젠가 그것에 대한 댓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할지 모릅니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특히 잘못된 습관은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습관은 언젠가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날이 있습니다. 그때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소연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행동해 오던 잘못된 습관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지 객관적으로 따져보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잘못 해오던 삶의 방식이 보이고, 그래야 우리는 변화의 출발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벽마다 성전에 나와 아침을 기도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습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잘못된 습관들을 낱낱이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죠.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하루 빨리 고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습관을 길러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아침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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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아름다운교회 Apr 06.2025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우리는 주변에서 흔치 않게 십자가를 볼 기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 그림, 십자가 간판, 때때로 차 안 백미러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십자가가 흔하다 보니 십자가를 보는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사라진지 오래 되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봐도 별 감흥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저만 해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에 제 마음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처형 당하는 자를 벌거벗겨 눈에 띄는 장소, 네거리, 극장 안, 높은 언덕, 범행 장소에 공개적으로 진열시켰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죽음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 뿐만 아닙니다. 십자가는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처형방법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유대인 사가인 요세푸스는 십자가형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사지를 뻗고서 처벌을 받을 때, 그들은 사형틀을 그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포박을 당하여 가장 뼈 아픈 고통을 받으며, 못 박힌다. 그들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개들은 모질게 씹어 먹는다.” 아마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체를 새들과 개들이 달려들어 뜯어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네로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또한 십자가형을 직접 목도하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십자가들을 보았다. 단번에 숨을 거두기보다 방울방울 피를 흘리며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며, 고통 가운데서 서서히 죽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저주 받은 나무에 묶여 오랜 고통에 시달리고, 몰골은 흉악해졌고, 채찍을 맞은 자국이 어깨와 가슴에 부풀어 오르고 단말마의 고통 가운데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기를 원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살려달라고 수없이 애원하였을 것이다.” 이런 기록들을 볼 때 십자가형은 정말 끔찍한 처형방식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목과 손에 매고, 차에 걸어놓는다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이렇게 끔찍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나를 꾸미고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악세사리로 하고 다닐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이런 의미들을 묵상하면서 저야 말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마음이 다시 회복되게 해달라고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죽으셔야만 했는지, 왜 예수님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아무 말도 없이 견디셔야만 했는지, 왜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겨져 수치를 당하셔야만 했는지, 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지. 지금은 이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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