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권순혁목사)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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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권순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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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5.2026 사순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교회력에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신앙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살아가지만, 사순절은 우리의 시선을 다시 십자가로 향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조롱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결국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고난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기억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사순절은 단지 예수님의 고난을 지식적으로 아는 시간이 아니라, 그 고난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죄를 가볍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자주 하나님보다 우리의 욕심과 계획을 앞세우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의 교만함은 낮아지고, 우리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또한 사순절은 회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십자가는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 용서와 회복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작은 실천을 통해 주님의 고난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더 깊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의 시간을 늘리고, 우리의 욕심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통해, 어떤 사람은 섬김과 나눔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사순절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를 통과할 때 더 깊이 이해됩니다. 그렇기에 사순절은 슬픔의 시간이 아니라 소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이 사순절 동안 우리 모두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십자가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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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08.2026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각보다 쉽게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곳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보고도 우리는 금세 평가하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말과 정보가 빠르게 퍼지는 시대에는 비판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정죄의 언어는 더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의 거리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 사회에서 손가락질받던 사람들 곁에 앉으셨고 그들을 향해 정죄의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긍휼의 눈길을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등을 돌렸지만 예수님은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었습니다. 긍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비판이 당연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정죄가 쉽게 나오는 순간에 한 번 더 상대의 아픔을 생각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실수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기보다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긍휼의 삶입니다. 사실 긍휼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만,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품어 주는 것은 훨씬 더 큰 사랑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 때,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긍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긍휼을 통해 세상은 구원의 길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 그리고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판과 정죄의 말이 가득한 곳에서는 누구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긍휼이 흐르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숨을 쉬듯 편안함을 느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비판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긍휼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긍휼은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결국 긍휼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선택할 때, 우리는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문화를 이 땅에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비판과 정죄가 넘치는 세상 속에서 긍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품어 주고, 조금 더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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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01.2026 창립 기념 주일을 맞아
    우리 교회가 한인교회로 라스베가스에 세워진 지도 어느덧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신앙을 지켜내고, 다음 세대에게 믿음을 전수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헌신해 온 앞서간 성도님들의 수고 위에 오늘의 교회가 서 있습니다.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일을 기대하게 됩니다. 특별히 최근 우리 교회 안에 나타난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학교를 통해 교회에 발걸음을 하게 된 가정들입니다. 처음에는 단지 자녀들에게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으로 등록했던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부모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2주 전에는 한국학교에 나오던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겠다고 주일에도 교회를 나왔습니다. 아이들을 라이드 하기 위해 오셨던 부모님은 평소에도 잘 알고 지내던 분들입니다. 부모님은 언제 오실 거냐고 묻자 조만간 오지 않을까 한다고 스스로 웃으시면서 대답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세대를 향한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셔서 한 영혼, 한 가정을 교회로 이끄시는 은혜의 통로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품으셨습니다. 우리는 교실 문을 열어 주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문을 여셨습니다. 한인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공간이 아닙니다. 이민자의 외로움과 수고를 함께 나누는 가족 공동체이며, 다음 세대를 믿음 안에서 세우는 영적 터전입니다. 창립 기념 주일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 번 꿈을 꾸어 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가정이 여러 루트를 통해 교회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특별히 더 많은 아이들이 교회 뒷마당을 뛰어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또 다른 부모들의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지역 사회를 향한 축복의 통로로 계속 사용하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작은 헌신 하나, 아이들을 향한 한마디 격려, 주차장에서의 따뜻한 인사, 가정들을 위한 기도 한 번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심겨진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우리를 통해 이루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기대합시다. 다음 세대를 통해, 그리고 가정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기쁨을 함께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창립의 은혜를 기억하며,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다시 한 번 힘있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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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2.202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배부른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함 없이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갈망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깊은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반드시 배부름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배고픔의 의미를 잘 압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다가 식사를 하지 못하면 점점 힘이 빠지고 결국 무엇보다 먼저 음식이 생각납니다. 그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으면 몸과 마음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에서도 ‘배고픔’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좋은 직장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교회에서 말씀을 듣다가 “내가 정말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조금씩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환경이 갑자기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평안과 기쁨이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전보다 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내 삶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때로는 영적인 배고픔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로 마음을 채우려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은 잠시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나는 지금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는가?나는 정말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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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15.2026 하나님의 나라는 작고 연약한 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작고 연약한 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주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강함, 능력, 영향력을 통해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작은 존재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는 화려한 궁전이나 강력한 군사력 속에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오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음”과 “낮아짐”의 길이었고, 그 길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일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힘이나 공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연약한 자를 통해 일하실 때, 영광은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또한 연약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충분한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형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았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미미해 보였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이미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순종에 머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작게 여기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런 우리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 또한 크기나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가에 의해 정의됩니다. 작은 섬김, 보이지 않는 헌신, 묵묵한 기도가 모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작고 연약한 자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크고 놀라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작음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자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이루어 가기 위한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줄 수 있는 질서와 평안을 누리기 위한 여정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우리를 무질서하게 하고, 파괴합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계속 하여 샬롬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작은 실천들을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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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08.2026 십자가의 길, 기쁨의 길, 영광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청년 때에 신학교를 가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주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놓겠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왜 그런 고백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실제가 되어보니 그때 그런 고백을 안 했다면 이 길을 안 걷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요즘 마태복음의 말씀들을 새벽마다 전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절대로 고난의 길이나 슬픔의 길이 아니라 기쁨의 길이고,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요 12:23).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의 순간은 사람들이 환호하던 예루살렘 입성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가장 비참해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가장 찬란한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고난 자체를 즐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고난 당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너머에 있는 기쁨을 분명히 바라보셨습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과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기쁨이었고, 죄로 묶여 있던 사람들이 자유케 되는 기쁨이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십자가의 길은 종종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양보해야 하고, 내려놓아야 하며, 이해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헛된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기쁨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이죠.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갈 때, 우리의 영혼은 쉼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죽음으로 보였던 자리가 부활의 문이 되었고, 패배처럼 보였던 순간이 승리의 선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길은 어둠으로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듯,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고 있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을 슬픔의 상징으로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언제나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빛이 오늘 우리의 발걸음을 밝히 비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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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
    아름다운교회 Feb 01.2026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 종종 능력과 승리, 회복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애통함은 하나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애통은 연약함의 표시 같고, 실패의 흔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전혀 다른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단순히 슬픔을 위로받는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방식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나 완전한 자에게 먼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울 수밖에 없는 자에게 다가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단순한 감정의 슬픔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죄와 깨어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며 아파하는 영적 반응입니다. 애통은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서 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종종 애통을 숨기려 합니다. 신앙인답게 괜찮은 모습으로 살아가려 하고,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억누르고 현실을 외면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깊이를 경험하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실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애통하신 분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눈물과 함께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위로는 단순한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네 곁에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물을 없애기 전에, 먼저 그 눈물 곁에 머무르십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애통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아직 마음이 굳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애통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애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깊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마음이 무겁고, 세상과 자신을 생각할수록 눈물이 나십니까? 그렇다면 그 자리를 실패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자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애통하는 자에게 다가오셔서, 위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함께 있어 주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용기내라고 말씀해 주시고, 박수쳐 주십니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우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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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25.2026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위선적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시대에 뒤처졌다고 평가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를 자신들의 삶과는 무관한, 종교적인 공간으로만 인식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선 앞에서 교회는 때로 억울함을 느끼고, 때로는 방어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보다, 그 평가 속에 담긴 ‘기대’를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은 교회에 완전함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함을 기대합니다. 말과 삶이 다르지 않기를, 높은 기준을 말하기보다 그 기준 아래에서 함께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도덕적 우월감의 자리에 서기보다, 상처 입은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와 함께 울고 함께 고민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를 향한 비판 속에는 여전히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주목하는 지점은 주일 예배의 화려함이나 건물의 크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가 교회의 이미지를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며, 교회의 평판은 강단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형성됩니다. 특히 세상은 교회가 고통받는 이웃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유심히 지켜봅니다. 약자의 편에 서는지,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와 사랑을 선택하는지를 바라봅니다. 교회가 세상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은 세상과 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이 쉽게 포기해 버린 가치를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라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의 모든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복음 때문에 오해를 받고, 때로는 진리 때문에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가 사랑 때문에, 섬김 때문에, 겸손 때문에 비판받는 일은 줄어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이 교회를 향해 품는 최소한의 기대는 ‘말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시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박수를 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의 말과 행동이 복음을 가리지 않도록,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삶의 증거입니다. 그 기대 앞에서 교회는 오늘도 질문받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삶 속에서 어떤 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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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18.2026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함께 찬양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배우며, 서로를 격려합니다. 교회는 안전한 피난처이자, 신앙을 회복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교회 안에서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당 안에서만 마음이 뜨겁고 사랑이 느껴진다면, 우리 믿음은 과연 세상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듯이, 우리도 교회 밖으로 나와 세상 속에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골목과 광장, 집과 시장으로 흩어져 복음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도 일상 속 작은 자리에서부터 복음을 살아내야 합니다. 작은 친절, 진심 어린 관심,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길입니다.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 교회는 겉으로는 건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정돈되어 있고, 프로그램이 풍성하며, 서로의 관계가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따뜻함이 교회 안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은 복음의 목적을 잃은 따뜻함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열매는 교회 문을 나서서 세상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때로 무겁고, 복잡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단순히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작은 손길이라도 내밀어 주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삶입니다. 교회 문을 나서기 전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내 삶 속에서, 나의 말과 행동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가? 친구, 이웃, 직장 동료, 혹은 가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 배운 사랑과 섬김이 일상의 자리에서 실천되고 있는가? 작은 관심과 사랑으로 시작되는 변화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됩니다. 한 사람의 진심 어린 배려가, 한 번의 친절한 말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발걸음을 통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조금씩 펼쳐지길 기도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 세상 속으로 흘러가는 사랑,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입니다. “하나님 나라: ON”의 사명은 계속해서 우리를 통해 지속되어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하나님 나라를 자꾸만 OFF 시키려 하지만 성령으로 무장한 성도의 힘은 그들의 힘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성실하게 이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침투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세상으로 우리 함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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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
    아름다운교회 Jan 11.2026 하나님 나라는 섬김으로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힘과 권위로 세워지는 나라로 생각합니다. 더 큰 영향력과 더 많은 성취, 눈에 보이는 성과를 통해 확장되는 나라라고 여기는 것이죠. 세상은 위에 서는 것을 성공이라 말하고, 더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을 능력이라 평가합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기준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배와 통제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을 통해 이 땅에 임하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는 일은 가장 낮은 종의 역할이었고, 누구도 자원하려 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더 위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사랑으로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섬김은 종종 손해처럼 보입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도 결과가 바로 보이지 않고, 때로는 오해를 받거나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김 앞에서 쉽게 주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크기를 섬김으로 판단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와 정반대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섬김은 마치 땅속에 묻힌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흙 속에 묻힐 때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자체로는 작고 연약하며,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씨앗이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생명이 시작됩니다. 섬김도 이와 같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흘린 땀과 눈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헌신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즉시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섬김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창한 선언이나 대단한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세워지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작은 손길, 교회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섬김, 세상 속에서 약자를 향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을 통해 확장됩니다. 이런 섬김을 통해 사람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는 작은 섬김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미래의 나라가 아니라, 섬김을 선택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섬김이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갑니다. 우리 교회가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 실현해 나가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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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
    아름다운교회 Jan 04.2026 하나님 나라: ON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그것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흔히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교회 안에서만 경험하는 영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훨씬 더 넓고, 현재적이며,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이 땅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라기보다 통치이며, 개념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곳, 그리고 그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리,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일터에서 정직과 성실을 선택하는 순간 속에서, 갈등의 현장에서 보복 대신 용서를 택하는 결단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드러납니다. 세상의 방식이 힘과 경쟁, 이익을 기준으로 움직일 때, 하나님 나라는 섬김과 사랑, 자기 비움으로 확장됩니다. 이는 세상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바로 그 역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완벽한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돌아오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그분의 나라를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듯, 하나님 나라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라갑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알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것이지만 언젠가 그것이 자라 무성한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에게 필요를 제공하는 쉼터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이 아무리 적게 반죽에 들어간다 하여도 그것이 전체를 부풀리게 만든다고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점점 자라나 세상에 나타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불안과 혼란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안정과 확실한 답을 찾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 공허해집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상황을 지워버리는 희망이 아니라, 상황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평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더 많은 종교적 활동을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친절, 묵묵한 순종,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신실함이 모여 하나님 나라의 풍경을 이룹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살아갈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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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7
    아름다운교회 Dec 28.2025 마지막에 대한 짧은 생각
    우리는 대개 ‘마지막’을 잘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오늘이 반복될 것처럼, 내일도 당연히 올 것처럼 여기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돌아보면, 언제나 마음을 가장 깊이 움직였던 장면은 ‘마지막’이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 인사, 마지막 말, 마지막 선택. 그 순간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가볍게 말하지 못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마지막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평소에는 사소하게 여겼던 것들이 마지막 앞에서는 선명해집니다. 체면이나 계산보다 진심이 앞서고, 효율보다 사랑이 먼저 나옵니다.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본질에 다가갑니다. 그래서 마지막은 두렵지만, 동시에 정직하게 됩니다. 신앙의 자리에서도 마지막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마지막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때, 마지막 심판. 이는 공포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을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을 허투루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선택 하나가 영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죠. 예수님의 삶 또한 ‘마지막’을 향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던 그 길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배신자에게도 떡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이었고,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마지막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합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며, 관계도 책임도 쉽게 끊어냅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는 현재 또한 가볍게 만듭니다. 마지막이 사라질수록, 삶은 깊이를 잃게 되는 법이죠.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라는 말은 극단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따뜻하게, 더 진실하게, 더 책임 있게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예배라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까요.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라면 우리는 어떤 말을 남길까요.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의 태도를 바꿉니다. 마지막을 기억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마지막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는 자리에서 별이 떠오르듯, 끝이라고 여긴 곳에서 하나님은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두려워하기보다, 마지막을 통해 오늘을 새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충만한 오늘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곧 2025년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마지막 앞에서 후회도 아쉬움도 있지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026년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지난 시간보다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좀 더 정직한 모습으로, 좀 더 서로를 사랑하면서, 좀 더 본질을 향하여 가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환경이나 상황의 새로움이 아닌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의 새로움으로 시작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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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
    아름다운교회 Dec 21.2025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들려온 소식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울림은 깊고도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큰 별빛이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말구유 위에 머물렀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가지고 왕이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왜 이땅에 오셨는지를 알고 있는 듯 각각의 의미를 담아 예물을 드렸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소식,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희망의 소식이었습니다. 큰 기쁨이라는 것은 상황이 바뀐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큰 기쁨은 삶이 여전히 버겁고, 세상이 여전히 불완전할 때 찾아왔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항상 더 또렷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좋은 소식이 아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누가는 외쳤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부재를 약속해서가 아니라 문제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을 소망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은 화려한 무대가 아닌 평범한 일상으로 전해졌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조용한 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의 귀에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자랑이 아니라 나눔이 되었고, 소유가 아니라 관계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쥐는 힘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기 위해 내어주는 손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온 인류에 전해진 소식, 차별없이 들려온 소식, 가장 낮은 곳에까지 임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와 마찬가지로 매우 불안하고 어둡습니다. 너무나 빠른 세상 속에서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마음은 쉽게 지쳐버리는 일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은 오늘날에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의 가슴 속에 두려움이 기준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십니다. 가치가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과거에 전해진 소식이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를 초대하시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이 좋은 소식을 우리만 가지고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빛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듯이 이 진리의 소식이 세상 모든 곳에 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작은 친절, 묵묵한 신뢰, 포기하지 않는 희망, 이 모든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메아리로 우리의 가정과 이웃, 동네, 직장, 가게로 퍼져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좋은 소식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으로 흘러들어갈 때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이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역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세상에 흘러 들어가길 바랍니다. 이 소식은 생각보다 멀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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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
    아름다운교회 Dec 14.2025 성탄절을 기다리며
    한국에 살았을 당시에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마다 캐롤이 울려 퍼지고 건물들에는 온갖 장식들이 화려하게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백화점이나 대형마켓들은 누가누가 더 화려한가를 대결이나 하는 듯이 엄청난 돈을 들여 장식을 하고 사람들은 끌어 모았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유명 쇼핑몰이나 호텔을 가면 화려한 장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화려함과 연결이 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약 2,000년 전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오신 베들레헴은 화려한 불빛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했을까요? 그곳은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했을까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인구조사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권력 유지에 집착해 폭정과 불안을 낳았고, 백성들은 정치적, 경제적 억압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그곳은 화려하고 밝은 불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만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도 호텔이나 병원이 아닌 마굿간이었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함이나 권력이 아닌 겸손과 낮아짐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겸손과 섬김과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화려해지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려하고 멋있고 잘 갖추어진 곳에 가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화려함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은 없는지, 화려함 때문에 찾아가야 할 사람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화려함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소외된 이웃이 분명히 있습니다. 강한 빛을 보고 나면 눈이 뿌옇게 됩니다. 화려함을 한번 보고 나면 우리의 눈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화려함에서 일단 우리의 눈을 떼야 합니다. 그래야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우리의 이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섬겨야 할 대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찾아가서 일으켜 줘야 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우리가 낮은 곳을 향하여 갈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통해 이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요? 화려함의 유혹을 잘 피하시고 우리의 이웃을 돌보는 시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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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7.2025 함께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저녁예배에 에베소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을 한번 더 여기서 나누려고 합니다. 수요일에 오셨던 분들과만 나누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함께 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즘 수요일 저녁예배에서는 에베소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는데 지난 주에는 3장의 말씀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서 6절 말씀을 보다가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말씀에서 “함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들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도 감격스러운 사실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함께”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교회는 “함께”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는 우리들은 “함께” 하는 법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불완전한 우리들임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나온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나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죄로 인해 “함께”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해 이 부분에 대한 감각이 아예 부패해져 버린 것이죠. 죄는 인간을 나밖에 모르는 존재로 타락시켰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서로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나옵니다. 아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함께”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나옵니다.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함께”하지 않거나 “함께”할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이 모든 은혜를 받은 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함께” 이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이것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이 날마다 싸우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약간은 밀릴 수 있으나 결코 패배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담도 완전히 허물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해졌습니다. 그때 우리도 십자가에 함께 죽었습니다. 나밖에 모르던 나의 삶, 이기적이던 나의 삶,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만 하려고 하던 나의 삶,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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