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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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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15.2022 죄가 반드시 가는 곳
    20년 동안 도박에 중독되어 지독한 어려움과 아픔을 겪던 어느 형제가 기적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를 믿게 되면서 하루 아침에 도박중독을 끊어내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사는 그 동안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이 마를 낳이 없이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몇 년간의 꿈과 같은 은혜의 시간을 보내고 지난 팬데믹 기간동안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성도들과의 교제도 소원해지면서 점차 무료함을 느끼던중 우연히 딱 한번 카지노를 지나가다가 재미삼아 게임을 했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지요? 그때부터 끊었던 도박에 대한 양수가 살아나면서 그냥 재미로, 이번만 하는 순간에 상당한 돈을 잃어버리고 정신이 바짝 들어보니 '지금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저는 도박의 도시에 살면서 이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카지노에 가서 돈을 따는 순간 망하는 길로 들어섭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아채리고 처음 카지노 가는 사람을 신기하게 알아차리고 돈을 따게 해줍니다. 그러니 돈을 따서 돈 맛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돈을 따는 줄알고 카지노 출입하다가 결국에는 망합니다. 그래서 돈을 따면 정말 안됩니다.' 내 경험을 보면 그렇더라구요. 돈을 따니까 계속 딸줄 알고 자꾸만 카지노에 출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돈을 잃는 것이 차라리 은혜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돈을 잃어도 더 카지노에 매인다고 합니다. 돈을 잃으면 오기가 생겨서 잃은 돈을 만회하고 싶은 욕심이 나기 떄문에 돈을 잃어도 카지노에 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돈을 따노 문제, 잃어도 문제인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여다 보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망하고 나서야 끝을 보게 되는것이 도박 중독입니다.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죄성,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성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근분은 욕심/탐욕입니다. 그 욕심이 우리안에 본성과 연합하는 순간 죄의 씨앗이 되고맙니다. 일단 죄의 씨앗이 심겨지면 놀랍게도 그것은 자랍니다. 그냥 묻혀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욕심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더 자랍니다. 그리고 죄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그 죄가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은 '죽음/사망'입니다. 옛말에도 '바는 도둑이 소도둑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안에서 욕심은 죄를 향하고, 죄가 결국에 맺는 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초기 단계에서 우리가 잘 정리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한번 드러내면 우리 주변의 온갖 스마트 기계들이 나의 욕구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부지런히 끌어다가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더욱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여 결국에 사망으로 끝냅니다. 우리는 은혜의 자녀들입니다. 이겨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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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7
    아름다운교회 May 08.2022 십자가는 가정의 중심
    오늘은 미국에서는 Mothers day이지만,교회력으로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현대 사회가 핵가족 중심으로 변화되면서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가족 중심으로 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 들어선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가족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작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가치 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의 첫 번째 가치도 가정중심의 활동이 주를 이루는 것도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기도 합니다. 더더구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가족은 더더욱 핵심 가치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다가 보니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깊은 곳에서는 어느 새 가족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Russell Moore목사님은 그의 책 ‘폭풍속의 가정’에서 가족 우상화’라는 단어로 기존 가치관에 풍파를 만들었습니다. 그 분의 논리는 가족 (가정) 이 정말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을 우선시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을 음미해 보면 어떤 때는 정말 우리가 가족을 우상화하고 절대 가치를 부여함으로 어느 것도 비집고 들어올 강력한 요새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가족이라는 가치는 정말 중요합니다. 부모됨도,자녀됨도,형제 자매됨 그리고 인간의 기초 사회생활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가정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부부는 부부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부모와 자녀간에도 엄청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우 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역기능 가정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시작했던 가정이 바로이 역기능의 가정을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간의 행복한, 가정에 일어난 것들은 견제와 비방 그리고 살인과 폭력등이 사라지지 않고 인류의 가정을 위협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떠난 가정의 모습입니다.가정은 행복의 원천이자,아픔의 장소입니다.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가정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간에 갈등의 연속입니다. 자녀들의 탈선에 가슴을 새하얗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부모 때문에 평생 가슴에 멍을 지고 살아가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더 큰 아픔은 그것들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드러내야 치유가 가능한데,드러내는 순간에 우리는 천박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함부러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이혼과 불신,온갖 불편한 일들이 가정안에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처럼 웃어야 하는 웃픈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Moor목사님의 말대로 가정은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아픔의 장소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장소이지만,형벌과 고통이 따르는 아픔의 장소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그래서 십자가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바라보아야 하고,십자가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 주장이 지금까지 사회 심리학적 방법으로 가정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보다 신선해 보입니다. 복음은 이것들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비록 우리의 성향들이 방해를 해도 복음을 깨달은만큼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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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6
    아름다운교회 May 01.2022 보이지 않는 손
    미국에 살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집을 비운 적이 처음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흩어져 살면서 이번에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이고 방문하는 시간을 가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힐링’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가족됨의 뿌듯함과 만남의 소중함,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 깊은 감동과 은혜가 있음을 배우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었던 터라, 첫 방문지를 마치고 일부러 렌터카를 해서 6-7시간 운전을 하면서 광활한 미국 대륙을 지나 보려고 했습니다. 역사책에서만 보던 미시시피 강을 건너보기도 하면서 미국의 대 자연의 멋을 느껴보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interesting spot을 가보지도 못하고 냅다 달려가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연도 신비하고 아름다웠지만,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은 모든 공간들,그 공간들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나름 유명한 곳도 있었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신비롭기도 한 여러 자연과 조형물들,그것이 사람이 만들었든,자연의 혜택이든지 정말 가볼만한 곳은 수없이 많이 펼쳐져있었습니다. 긴 운전을 하는동안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언덕 사이를 헤치며 달리는 눈에 들어온 벌판은 가끔씩 비가 그친 틈새를 타고 수줍은 듯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아무래도 땅이 넓어서인지 넓은 광야에 그림같은 농경지와 주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와,아름답다!’ 감탄을 하면서 지나가거나 방문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멋진 광경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부가 이른 봄에 씨앗을 뿌렸고, 공을 들여서 여기까지 가꾸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이면에는 농부의 피땀이 고여든 아름다움이었던 것이지요 우린 그것을 모르고 보이는 결과만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건축물도 그렇습니다. 시카고에 파리의 세느강변에 비할 수 없는 멋진 장면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했지만,그 역시 그렇게 만들기 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고와 땀이 만들어 낸 것이지요. 그런 손길이 없었다면 그 아름다움을 우리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우리는 누립니다. 그러나 누림의 그 이면에는 뿌림과 수고와 눈물이라는 것이 배어져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 인생이 거친 수고의 떡을 먹기도 하지만 누리면서 드는 생각은 그 누림의 뒤에 바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만 따먹지만 열매가 맺기까지 일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느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합니까? 그것을 때론 자녀들이 몰라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의 수고로운 손길이 부모를 돌보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 모든 는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 뒤에는 보이지 않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우리의 삶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일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우리는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돌아보는 5월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의 자녀,평생 한 방향으로 함께 걸어준 부부,일평생을 희생해준 부모님,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지탱하게 한 힘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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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5
    아름다운교회 Apr 24.2022 구원의 확신
    이번주 내내 구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숙희 집사님의 죽음을 보면서 구원 받은자와 구원받지 못한자,택함을 받은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자의 마지막 삶의 끝자락들을 그려 보았습니다.누가복음 23장 말씀에서 “해골이라 하는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두 행악자중 한사람은 예수를 비방했고,한사람은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서 행악자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할때 낙원 (천국)에 있을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번주 월요일에 천국에 입성한 박숙희 집사님의 마지막 날을 들으며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년동안 그분을 가끔씩 교회에서 뵈었지만,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시는것 같이 보이지 않는것 같다고 (감히)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암에 걸려서 고통속에 계시면서도 이제는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아버지집에 가서 너무 좋다고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심방 가실때 마다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믿음과 구원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여질까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습니다.예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다 사하여 주심을 믿기만 하면,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입성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숙희 집사님의 돌아가신날의 모습을 우리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아닌,환하고 고와서 너무 아름다우셨습니다. 어린애기 같이 고운피부로 평안히 주무시는듯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목자방에 올려 주신 글에서 발췌 했습니다.)좋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확신과 소망의 닻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구원의 확신을 가집시다. 요한복음 1:12절 영점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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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4
    아름다운교회 Apr 17.2022 부활의 증인
    죽은 이가 살아났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내 눈앞에서 분명히 죽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데 그가 살아났다? 이것처럼 기적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그 부활을 증언하려고 하지만 부활을 어떻게 증명해 낼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상상불가한 모습으로 싹이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것을 어떻게 설명가능하다고 여기겠습니까? 자라게 하는 원인도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데,심지어 보이지 않는,아니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을 어떻게 세상의 과학과 말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적은 그냥 기적일 뿐입니다. 그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입니다. 각종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고,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계가 그분의 말씀에 복종했으며,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그 분이 단순한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위하여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신비하고도 놀라운 기적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이후,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이 부활의 증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온통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전도 또한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중심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것의 증인이 되라고 주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은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증인’ 즉 Witness가 있어야 합니다. 목격을 해야만 합니다. 목격하지 않았다면 믿음으로라도 목격이 가능합니다. 믿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확한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분명히 전할 수 있습니다. 확신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00년전 갈보리 산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히 11:3). 믿음으로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본 것보다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아야 보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보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진 부활 의 증인들입니다. 세상에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직도 우리에게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 우리보다 더 못나서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진 이유는 바로 부활증인으로서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부활의 주인이십니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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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3
    아름다운교회 Apr 10.2022 김치가 살았어요?!
    김치가 살았다는 말을 하려면 김치가 생명체여야 하는데,김치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김치가 살아있다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김치를 담그려면 먼저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여러 시간을 소금을 뿌려서 소금물에 담가 놓으면 배추가 흐늘 흐늘 숨이 죽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도 ‘죽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소금과 소금물 속에서 이미 ‘죽었어야 할’ 배추가 소금기를 씻어내는 과정에서 그만 어떤 배춧잎이 빳빳하게 서 있는 것을 가끔씩 보게 됩니다. 아니면 이미 양념까지 묻혀져서 단지에 들어간 배춧잎이 빨간 양념 옷을 입었으면서도 죽은 상태로 버무려있지 않고 그 역시 뻣빳하게 기세 등등한 모습을 보이는 배춧잎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김치는 죽어야 맛이 있습니다. 그렇게 뻣빳하게 서있는 것은 김치 특유의 맛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배추,즉 절여지지 않은 배추는 김치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맛이 없는 배추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절여진 배추가 자신이 소금으로 절여져 (죽어서) 배추의 맛도 아니고, 양념의 맛도 아닌 ‘김치’의 환상적인 맛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숙성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설명불가능할 정도의 맛있는 고차원의 음식으로 바뀝니다. 숙성이라는 말은 익는다는 말입니다. 이 ‘숙성(熟成)’이라는 말을 뒤집어 놓고 보면 성숙(成熱)'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익었다,온전해졌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린애가 되어간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좀 더 어른스러워지고 인생의 생각과 마음의 깊이가 넓고 깊어져야 합니다. 무르익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헛된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숙은 그냥 세월이 지나서 나이가 먹는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생각의 깊이와 마음의 넓이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그릇 이상을 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인생을 꿈꾸려면 배워야 합니다. 부지런히 부단히 배워야 합니다. 이 배움은 내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남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몰랐던 것,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혜가 남의 삶과 지혜에서 번득이는 것을 보게되고 그것을 우리는 내 것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수요 영성훈련을 통해서 배웁니다. 정말 많이 배우게 됩니다. 그 배움을 하찮고 귀찮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나 고상해서 기도로만,성령으로만 성숙하려고 합니다. 영성파입니다. 특별한 은혜를 가진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매우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위험성이 늘 상존합니다. 말씀을 중시하기도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모두가 한계가 있습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숙을 향한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삶의 경험이든,책을 통한 남의 경험에서든,기도와 말씀을 통해서든 우 리는 숙성되어야 합니다. 익어야 합니다. 익지 않고 살아있는 배춧잎처럼 벌떡 일어서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면 맛도,모양도,역할도 하지 못하고 입에서 맴돌다가 쓰레기 통에 던져집니다. 이왕 죽으려면 숙성되어야 합니다. 성숙을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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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2
    아름다운교회 Apr 03.2022 말의 권세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고등의 언어,의사전달 체계를 완전하게 구사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한 존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을까요? 그 언어체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을 때,하나님은 그 언어를 혼미하게 하십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인간은 언어를 이용해서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과 대적하는 곳에 사용하려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이 아닌 언어의 혼란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셨을 정도이니까요. 인간이 사용하는 수많은 도구중에서 언어라는 도구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지만 ‘힘(능력)이 있습니다. 상황 바꾸기도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옛 말에도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칼이 글보다 강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이치이지만, 칼은 글에 의해서 설득당해서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글은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품위있게도 하고,비천하게도 합니다.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권세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롭게 하소서라는 방송에서 어느 집사님이 울면서 고백하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집사님의 아버지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갑작스런 사형선고앞에서 아버지가 의사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요?’ 의사는 차가운 말로 사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6개월’ 이 말대로 그 아버지는 6개월이 되는 날 돌아가셨답니다. 이 집사님이 울부짖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그래 의학적으로 6개월이라고 하더라도,환자에게 한번 해보자,노력해보자’라고 소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단지 3음절,6개월! 이 말을 하는데는 3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말한대로 아버지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6개월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의사가 10초만 할애해서 희망을 말해주었다고 하면 아버지는 그 희망을 따라서 노력해보다가 6개월은 더 살지 않았겠느냐는 절규였습니다. 그 이후에 이 집사님은 사람들의 외로움과 절망을 치유해주는 마음치유사로 삶의 방향을 전환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간증을 들으며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의 권세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생명을 다른 이에게도 나누는 것입니다. 그 말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이고,함께 해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찾아 ‘물을 달라, 젖을 달라’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그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말, 헤치는 말,비판하는 말,험담하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원해야 하는데 하고나면 불편한 마음이 남습니다. 왜냐면 해서는 안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듣는대로 행하시겠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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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7.2022 착시현상
    페북에서 신기한 영상이 올라와 눈여겨 보았습니다. 분명히 평지인 땅바닥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쓱쓱 그림을 그리는데 깊은 계곡 사이에 징검 다리 같은 다리를 그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 그렸는지 정말 잘못 디디면 수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평면입니다. 벽에 큰 독수리를 그려놓았는데 각이 진 면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려놓으니 금방이라도 새가 날아 오를 것만 같은 입체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평면입니다. 너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일까요,우리의 눈 이렇게 쉽게 착시 현상을 일으켜 실체처럼 보이는 것일까요?이러한 착시현상은 단지 그림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런 착시가 아주 중요하게 작동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생 가치관’이 바로 그 중의 하나입니다. 가치관이란 사물을 어떤 가치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중요하고,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과 투자를 높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저 마다 삶의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세상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살게 되는데,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치가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될 수 있지만,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이땅의 삶만 살고 가지 않기 때문에 영생의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보고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보면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라고 조통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반대입니다. 우리가 부유한 자입니다. 돈이 있어서 부유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런 세상적인 것은 없어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면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잃고 모든 것을 얻으면 무엇이 유익하느냐’고 하십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소중한 것을 누리며 살아도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가치관이 ‘착시현상’으로 인해 잠시 그렇지 않게 보일 뿐입니다. 바울 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뼈를 깎는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가치를 깨닫게 하시고,할 마음을 주시고,할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것을 막는 우리 육체의 의지를 꺾어야 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착시를 걷어내고 진짜인 것을 붙잡아야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 착시를 모르기 때문이고,자기와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기대하고,성령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 전력질주하고나면 창공에서는 여유로운 항해를 즐기는 것처럼 그 영광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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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
    아름다운교회 Mar 20.2022 책 읽기
    어려서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좋은 습관이 있다면,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뭐 이런 부지런함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좋은 습관/유산은 '책읽이'입니다. 학창 시절, 신문들 읽고, 일기를 쓰고, 시를 쓰는 일에는 웬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부족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린 자녀들도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가지고 있는지라 어떻게 보면 책을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을 것입니다. 책장 넘기기 보다는 화면 넘기기가 더 익숙해진 아이들입니다. 누구나 자기 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인터넷이든, 책이든, 경험이든 모든 것을이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책읽기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진 세계에 그려진 풍성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가 담긴 것들이 많기 때문 입니다.우리 교회가 팬데믹 기간동안 수요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편안함 속에 묻혀있을 수 없어서 책읽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제한되고 편협한 세계를 위인들의 생각을 빌려서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수요예배를 영성훈련의 시간으로 삼아 여러 저자들의 저서들을 섭렵해가며 우리의 영성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책을 구입하려면 '투자'를 해야 하는데 우리 교우들이 자신의 돈을 들여서 책을 읽자면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다행스럽게 CRC교단에서 제공하는 'Just Show Up'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책을 읽고 나누는 공동체가 있을 경우 무료로 책을 제공해 주고 있었습니다. 공짜잖아요! 그래서 얼른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막상 수요훈련식나에 등장하는 분들이 10여분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책읽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돈을 주면서 책을 읽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돈이 많아서 돈 쓸데가 없어서 그런 곳에 투자하는 사람일까여? 무었인가 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의 영혼에 빛을 주고자하는 선한 마음에서 출발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까지 책을 사다가 바치는데도 책을 읽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것은 우리 현대인의 심각한 질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벌써 3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얻은 유익이 있다면, 저나름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책 속에서 흘러나오는 저자들의 지혜로운 시간에 감탄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일정한 시각과 틀에 갇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구나.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 책읽기는 내가 가진 제한된 시각을 깨우쳐 주고, 나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이 깨달은 지혜를 통해서 우리도 점점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각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것이 최고라는 교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울 것도 없고, 배우고 싶지도 않고, 그냥 편하게 살면된다는 생각, 그러니 '나 그냥, 내버려둬'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가까이 대해보십시다. 성경이든, 영성책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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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9
    아름다운교회 Mar 13.2022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컵 라면에 물을 붓고 일을 하다가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지나서야 컵 라면에 물을 부었다는 것이 생각나 뚜껑을 열어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라면은 툴툴 불어 있었고 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먹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 결국은 먹었습니다. 아까워서... 그럼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물을 북기 전에는 '에고... 이 자그마한 컵라면 두 개는 먹어야하나?'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하나만 부었는데, 불어터진 라면은 생각보다도 엄청나게 불어나 얼마나 많아 보이는지요! 이 작은 컵라면이 우리의 위속에 들어가 저렇게 불 생각을 하니, 우리가 상당히 많이 먹는 것 같습니다. 허긴, 탐욕스러운 짐승을 돼지에 비유합니다. 많이 먹는 대명사로 말이지요. 그런데 해부를 해보면 돼지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자기 적량의 80%만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용량을 초과한다고 합니다. 탐욕의 대명사를 돼지에서 인간으로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소홀하게 되면 어느 새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뭐 이것 쯤이야... 그러나 넘겼는데 그것이 모아져서 무감각해진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뭐 이것 쯤이야... 그래서인가요?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말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까짓것 바늘 하나 쯤이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고 자위를 하면서 범죄를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반복해보면 어느 사이 큰 도둑이 되어 발도 저리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현대 과학과 의학이 압도적으로 발전한 시대에 코노나로 인해서 공식적으로는 600만명이, 비공식적으로는 1800만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하니 인간의 무기역감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 Pandemic이 Endemic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특별히 교회의 지형을 얼마나 많이 바뀌게 했는지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이 기간동안 두 가지 극단적 변화가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 변화'와 '소도둑이 개과천선한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믿음의 길을 타협하며 가는 사람들에게 교회와 신앙은 언제나 바꿀수 있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나 싶습니다. 작은 오류가 신앙을 먹어버린 마치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 그런 느낌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뼈를 깍는 아픔을 경험하며녀서 교회의 어누 누구인가는 소도둑이었음을 자인하고 회개하면서 믿음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야말로 개과천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소한 것들을 그냥 넘기면서 적당하게 죄를 덮어두는 행위는 바늘도둑이 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우는' 자신을 치는 차가운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영원한 생명을 읽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미련한 다섯처녀'일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바늘 도둑 성향을 고쳐내지 않으면 우리는 후에 큰 소도둑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고,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해도 도둑은 도둑일 뿐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의 흐름을 역류하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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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8
    아름다운교회 Mar 06.2022 교회, 그 사명을 위하여
    13년 전에 아름다운 교회는 모두의 기대와 염려를 안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면서 태어났습니다.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난관과 보람이 있었는지 똑똑하게 지켜보아온 목사로서는 이러한 기적을 이루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창립하여 지금까지 영적 부흥과 성장이라는 발판과 시련과 아픔이라는 수렁을 겪어오면서 두 번째 임직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시련과 아픔이라는 수렁을 겪어오면서 두 번째 임직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이루말할 수 없는 감격이 됩니다. 8년전에 한번 임직을 했고, 이번에 두 번째에도 다섯 분의 일꾼들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과 교회에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소원과 비전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반석위에 나의 교회를 세운다'는 주님의 말씀은 오순절 성경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교회는 예수님의 강렬한 소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문제와 비진리에 연루되어 불명예스러운 대명사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신자'(교회 안나가는 신자지칭)를 양산하고, 코로나 시대를 맞아서 교회는 더욱 더 위축된 시대적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삶으로 인해서 교회는 그 영광스러운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비록 수많은 문제를 내포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교회는 예수님의 소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지나온 2년의 시간은 우리에게도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은 우리를 성숙을 향한 밑걸음을 디디게 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에 하나님께서는 2분의 안수집사님과 3분의 권사님을 교회에 허락하셨습니다.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따로 세워서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별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면모는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늘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사도로 칭함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배반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여전히 사도성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참된 사도로 거듭나,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꿈을 마침내 불을 붙인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부족한 나같은 사람도 목회자로 쓰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임직을 받는 5분을 쓰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또한 쓰임받을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서 능력있게 쓰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쓰일 준비가 되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쓰임받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이사야처럼 '주여, 제가 여기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세요' 결심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하실 것'(눅12:48)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과분한 은혜를 받은 '복음에 빚진 자'들 아닙니까? 교회를 세워서 13년을 달려오게 하시고, 일꾼으로 세워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이어갈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는 우리 모든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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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7
    아름다운교회 Feb 27.2022 싸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냉전 시대를 겪은 우리들은 지독하게 사상적 이념의 대립속에서 자라왔습니다. 다행스럽게 저는 민주사회에서 태어나 자라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 반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 소련과 중국이 무너지면서 철의 장막이 해체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을 보고 자라오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세계는 커다란 냉전의 시대를 접고 세계 평화속에 각자가 경제구축에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신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가슴아픈 소리를 듣습니다. 대결과 대립으로 끊임없는 명분싸움과 전쟁의 위협속에 인류가 다시 또 다른 숙제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정치 평론가도 아니고, 군사전문가도 아닙니다. 페이스북을 보니 러시아 전차가 질주를 하면서 민간인 차량을 보고 그대로 밀어부쳐서 깔아뭉게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수십만명의 난민이 생기고 평화로운 세상에 전쟁의 참혹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동등합니다.아침에 차를 고치러 샘스에 들렀다가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어느 미국인과의 대화를 들어봐도 그랬습니다. 아마 이런 시각이 거의 모든 미국인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인권이나 한 국가의 권리는 '힘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네가 약해서 당한 것이니 왜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자연스러운 미국인의 냉철한 답변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자력으로 나라와 민족을 지킬 수 없다면 수치와 모욕은 당연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려는 의지가 있는 대통령이나 자국민의 의지가 보이자 이젠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하나 둘씩 돕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전쟁이 과연 먼 나라 우크라이나의 것일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쟁'을 이야기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랴는 안일한 서방의 대처가 이런 비극을 불러 왔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 삶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우리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남이 지킬 수 없습니다. 자국의 방위를 자기 백성이 결국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 나라를 책임지려는 국민이 없다면 이런 수모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일제의 침략에서, 북한의 남침에서 피흘려 싸웠던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사가 증명하듯이, 각자의 신앙은 누가 지켜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부자와 나라로'의 예수님 비유에서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눅16장). 본인이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본다해도 믿지 못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제게는 그렇게 읽혀집니다. 힘없는 민족은 저토록 처참하게 당합니다. 누가 도와주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비록 연약해도 자력으로 싸우려는 국민들이 있을 때에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을 치루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우리 삶에 제자된 걸음을 걸으려는 의지가 없거나 준비없는 사람은 결국은 마귀의 밥이 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자로서 살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 주님은 충분히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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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6
    아름다운교회 Feb 20.2022 경견의 훈련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어느 신문 기사의 제목처럼, 문제가 많은 올림픽이지만 선수들의 투혼은 어느 때보다 빛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4년마다 동계, 하계 올림픽이 열립니다. 선수들은 4년의 긴 시간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스포츠로 온 지구를 하나로 묶어냅니다. 어떤 선수들은 눈물로 대회를 마감해야 하고, 어떤 선수들은 찬란한 영광으로 금의 환향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아파하고, 누군가는 기뻐합니다. 결국 승리하는 사람 혹은 그 훈련 자체로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대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모두가 패자가 없는 승자입니다. 나름대로 그 대회를 땀흘려 준비했고, 나름대로 성장하고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말 죽을 각오로 훈련을 이겨낸 용사들입니다. 모두가 박수를 받을 만한 선수입니다. 근래에 (고)이한진 집사님의 천국환송에 이어서 이번에는 (고)김재봉 장로님의 천국환송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하나님앞에서 수고한 것에 대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이기는 것은 단지 올림픽 선수들이 벌이는 것을 바라보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올림픽에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만이 겨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부름의 상'은 특별한 어떤 사람들의 잔치가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서야하는 경기의 끝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들어가라 하지 않으시고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 좁은 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올림픽 경기를 치루기 위하여 엄청난 땀과 노력을 퍼붓는 선수들보다 더한 '훈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가 교회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성경공부를 하거나 직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눅13장). 운동장에서 달음질을 하지만 상을 얻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함께 달렸다고 사이좋게 나누어 갖는 메달이 천국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훈련'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경건의 훈련'입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사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훈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린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미워하고 분노하고 싶을 때에 그것을 거스릴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순종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막아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네 눈이 범죄하면 빼내어 버리고, 네 손이 범죄하면 네 손을 잘라버리라'라는 이 혹독한 말씀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이 서로 싸울 때에 육체의 편에 서서 가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듯이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지만 그것을 위하여 단 한움큼의 마음을 담아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훈련은 고통이지만 영광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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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13.2022 의복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외식하는 것을 죄짓는 만큼이나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표리부동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바리새인들이 외식함으로 잘못하셨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만큼은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을 믿기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편의주의에 따라서는 안됩니다.어느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옮긴 동기는 목사님 때문이었습니다. 평상시 예배 때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하는데, 어느 날은 정장을 입고 강단에 서셨답니다. 그 이유는 자기 형님이 돌아가셔서 그분을 애도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였는데 이것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형님의 죽음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양복을 입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앞에서도 같은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발 때문에 교회를 옮겼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목사로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 형님이 더 중요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의복은 우리 삶의 편안함과 멋을 표시합니다. 나를 접대하는 만족함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명품옷을 입기도 합니다. 만족감이며 자존감이고  또 자기 표현인 셈입니다. 반면에 의복은 내 멋을 위하여 입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회적 언어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의 인격과 품격 그리고 지위에 맞도록 옷을 입음으로 인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러가면 그냥 입던 옷 입고가지 않습니다.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옷을 입든지, 아니면 사서 새 옷을 입고 갑니다. 그것은 대통령앞에서 나를 보이기 위함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을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거지를 만나러 가면서 양복을 바꿔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만나는 대상이 거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대통령을 만난다든지, 자녀의 결혼식장에 귀한 옷을 입고 가는 것은 관습이기도 하지만 혼인자와 하객들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혼인집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끌어내었다고 비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잔치집에 예복을 입은 것은 그를 불러 준 분에 대한 존중의 차원입니다. 그것이 예절입니다. 청년들이 취업면접을 보러 갑니다. 면접관앞에 어떤 옷을 입고 갑니까? 덜렁 티셔츠 걸치고 흙먼지 묻은 옷 그대로 입고 가지 않습니다. 자기 과시이기도 하겠지만 그 면접관을 존중하는 의미가 큽니다. 가끔 동부에서 신앙생활하다가 서부에 오시는 분들이 적응이 안된다고 합니다. 동부에서는 교회에 올 때에 양복을 입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는데 서부에는 슬리퍼  신고, 반바지입고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예배 자세도 그래야 합니다. 예배에 올 때에 가장 최선을 다한 마음가짐과 함께 옷차림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특별히 기도자를 비롯한 예배 청지기들 역시 옷을 갖춰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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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06.2022 무용지물이라면?
    베가스의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남쪽 지역에 심방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어두워진 시간, 심방이 끝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출발을 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의 navigation을 켰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오래된 지도에는 신도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update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휴대폰에 있는 지도를 켰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신호가 잡히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자동차 지도는 광야이고, 핸드폰 지도는 신호를 못잡아 버벅대고, 밤이어서 사방은 어두워져있기에 길이 어떻게 뻗어있는지도 구분이 안되고, 좌충우돌하면서 겨우 겨우 빠져나온 곳은 내가 가야 할 도로가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한참을 헤맨 후였습니다만 다행히 잘 오게 되었습니다. 자동차의 navigation과 cellphone의 google map은 그야말로 최첨단의 장비들이 아닙니까? 아무리 그런 장비들이 곁에 있어도 update되지 않은 지도나 신호가 잡히지 않는 전화기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오직 감각만이 오직 쓸모있는 기관이었던 셈입니다.가끔 우리 신앙생활이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자기 상식이나 습관 혹은 배운 지식이 update가 되지 않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들입니다. 가끔씩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왜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냐, 아는 찬송가를 부르자, 반대로 왜 찬송가만 부르냐, 열린 예배는 경건성이 떨어진다고 싫어합니다. 교회에서 반주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면 여기가 노래방이냐 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현장에서 연주하냐, 녹음해서 연주하냐의 차이뿐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고정관념, 자기가 은혜받은 것만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데, 끊어진 신호인지도 모른채 헤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무리 최신식의 개념과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신호가 끊겨져 있다면 문제입니다. update가 안되도, 하나님과의 신호가 끊겨져 있어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너무나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지금 이렇게 살아도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나도 열심을 낼 수 있고, 다시 영성을 회복할 수 있고, 환경이 만들어지면 그때에 잘 할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못합니다. 오랜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녹이 슬도록  쳐박아둔 영성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제대로 작동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순간, 모든 시간동안 every moment를 영적 감각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update해야 하고, 항상 신호를 잡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열처녀 비유를 통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만 믿고, 준비를 해 두지 않은 미련한 5처녀들처럼 말입니다. 끔직한 결과를 당하기 전에 사전에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깨어 있어야 나중에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좀더 자자, 좀더 눕자! 아닙니다. 성도여, 교회여, 무용지물을 의존하지 말고 깨어있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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