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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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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27.2022 말을 잘해야...
    한국의 정치가 주는 유치함에 마냥 실소와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과연 저 사람들에게 나라의 미래가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유치한 말장난과 함께 도대체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 뭘까하는 안타까움이 정말 많습니다. 좀더, 나라와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앞에 있는 ‘적’을 향한 무조건적인 디스일 뿐입니다. 이는 여,야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들 가운데 요즘 내 생각을 잡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유감표명’입니다. 늘 의구심을 가지고 있고 불만이 있는 것이 바로 ‘유감’이라는 표현입니다. 정치권이나 외교가에서만 쓰는 어법인 것 같은데 그 사용법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정치언어, 외교언어에 점잖은 표현으로 한다고 사과 하는 것을 ‘유감’을 표명했다고 지금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 사과를 받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화가 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인들은 사과나 잘못에 대한 인정이라고 하지만,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오히려 찜찜한 마음을 남기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일 것입니다. ‘유감(遺憾)’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남아있는 섭섭하거나 불만스러운 느낌’입니다. 여기에는 사과라는 의미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정치권이나 외교권에서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말을 사과로 받아들이는 이상한 어법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상대방에게 사과할 때에 만일 외교/정치언어로 ‘유감이다’라고 하면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sorry’라고 분명한 메시지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어정쩡하게 사과합니다. 사과도 아니고, 사과가 아닌 것도 아닌 것,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더 관계만 나빠집니다. 사과를 받는 사람은 받고도 찜찜합니다. 정말 ‘유감(遺憾)’입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관계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싫든 좋든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하기에 관계를 맺으며 살 수 밖에 없 습니다. 그 관계가 늘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말이나 표정, 행동으로 관계를 어렵게 하는 일들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실수 이든 의도이든 그런 일이 벌어지면 관계가 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빨리 깨달아야합니다. 무엇이 이렇게 관계를 어렵게 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보다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상대방의 티끌속에서 대들보를 찾으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누군가 정말 속이 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들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뭐 이런 인간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화가 나서 상처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뭐가 그렇게 나를 보게 했을까? 나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놓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정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앞에 우리의 메시지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회개도 아니고, 회개가 아닌 것도 아니게 접근한다면, 영원히 관계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 정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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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20.2022 어느 때 가장 감사할까요
    지난 한 달동안 우리는 정말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14년째 이어지고 있는 다니엘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는 우리의 육신을 지치게 하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튼튼히 하는 영적 체력단련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 해엔 이 특.새를 바로 이어서 한 생명을 주님께 안내한 안드레 정신을 가지고 새생명 축제를 위해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 해의 마무리를 해야하는 시간앞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속에서 부부가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장소는 농촌의 밭입니다. 아마도 일하고 있는 중이었나 봅니다. 바쁜 하루의 일과에서도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리고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을 것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인생은 기도하는 시간이라는 그 멈춤이 필요 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빨리만 달려와 어디에 서 있는 지를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감사의 계절에 그런 멈춤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멈춰섭니다. 인생이라는 밭/길에는 두 가지 돌이 깔려있다고 했습니다. 원망/불평이라는 돌과 감사라는 돌이 그것입니다. 그 두 돌은 어디에나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닥에 널려있는 두 가지 종류의 돌을 담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이라는 돌을 들고, 어떤 이는 감사라는 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들려진 돌처럼 삽니다. 어떤 분들은 정말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인생을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물론 감사를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곧바로 다른 돌을 꺼내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원망과 불평의 돌이 감사의 돌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꺼내드는 것은 감사입니다. 결국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돌을 들 것이냐는 것은 자신의 결정입니다. 사실 원망하고 불평할 시간에도 감사하기로 결정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하기로 마음먹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카멜레온처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싸우고 있다가도 누군가 귀중한 분이 오면 안싸운척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함에도 그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어떤 상황이 오든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본인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무엇을 감사하겠습니까? 형식적인 감사가 아닌, 온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감사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아픈데 어떻게 감사하냐, 불행한데 어떻게 감사하냐,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감사하냐, 그렇게 반문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기로 마음먹으면 바뀔 수 있습니다. 왜냐면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다루시는 분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고백은 특정한 어느 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기로 결정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축복입니다. 결국 감사는 어려울 때 하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좋은 환경속에서 감사못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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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06.2022 새 생명 축제
    이제 새 생명 축제가 한 주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은 이 축제를 위하여 마음을 기울이며 노심초사하면서 한 생명을 찾기 위하여 마음을 갖고 기도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참 귀하고 사랑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몇 차례 새 생명 축제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보기좋게(?) 핑계만 있는 행사에 그쳤던 것과 그때마다 좌절과 자조스러운 한탄으로 남았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리더 스스로가 그 사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리더라고 하면 교회의 중추신경입니다. 그런데 그 중추신경이 마비가 되어 교회와 한 마음이 되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일이 잘될 수 있었겠 습니까? 그 리더의 한 사람이 목사입니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면서 목사 스스로가 찾아가지 않고, 남들이 해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리더 스스로가 열정이 머리열정, 가슴열정에 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스스로가 달라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전도하러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제 눈이 달라졌고,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 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기 때문에 주변에 안믿는 친구들이 없다고만 생각했습니 다. 그래서 전도할 대상이 없다고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러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 하였습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인 인구가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왜 교회에 나오는 숫자는 늘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한인만 영혼이겠습니까? 이제는 베가스를 선교 전초기지로 삼기 위한 선교비전을 갖고 보니 온통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내 주변에 전도할 대상이 없다는 말은 내가 주님의 마음과 전도의 마음으로 내 주변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살아가야 할 환경으로만 보았지, 주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곁에 대상자들 이 주변에 널려있어도, 그저 관계만 유지하려고 하지,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 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 돈이 보입니다. 심지어 시간과 사람도 돈으로 보일정도입니다. 여행에 관심이 있거나, 요리에 관심이 있거나,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으면 온통 그것과 마음이 밀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마음으로 본다면 전도 대상자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모래와 같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느냐 못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다음 주에는 그동안 마음을 기울였던 새생명 축제의 날입니다. 한 사람이 오든, 열 사람이 오든, 50명이 초청에 응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만큼 영혼 을 향한 마음을 가졌느냐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 교회가 얼마나 숫자가 늘어 나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영혼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느냐가 더욱 중 요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전하는 것이며, 자리를 채우는 것이며, 그 사람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할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또다른 영적 교만과 게으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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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30.2022 Halloween 과 종교개혁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울 이태원에서 할로윈 축제를 이틀이나 앞두고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작은 골목을 채운 사람들의 대열이 무너져 압사사고가 난 것인데, 이 사고로 무려 154명이 사망하고 74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10/20대 청년들이라고 합니다. 무슨 후진국에서 일어난 사고인줄 알았습니다. 8년전 세월호 사고이후에 가장 큰 사고라고 합니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안전불감증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도 아닌 한국에서 할로윈 축 제가 이리 큰 파장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Halloween은 All Saint’s eve라는 뜻인데 전통적인 서구 문화에서 로마 카톨릭의 영향으로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 (만성절)’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켈트족의 영향으로 10월 31일, 만성절의 전야에 죽은 영혼들이 나와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들어가는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온갖 싸늘하고 공포스러운 복장으로 그것을 막는다는 풍습으로 지키는 것이 Halloween입니다. 이 풍습이 자연 스럽게 한국의 원어민 교사들에 의해서 전달되어, 문화라는 이름으로 상업적 포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축제로 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10/20대 청소년들을 자극하여 이런 어처구니 없는 참사를 빚어낸 것이지요.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의 날’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이 날은 할로윈데이일 뿐입니다. 1517년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것을 기념 하기 보다는 귀신의 복장과 온갖 마귀적 장난들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미국의 문화로 정착한 것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상인들의 상술과 결합하여 발전해 온 것입니다. 기독교의 나라라는 것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조금이라도 유념했다고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이 해괴한 귀신숭배놀이가 문화로 정착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날은 철저하게 비성경적인 날입니다. 영혼을 다루는 성경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교적인 문화에서 비롯된 잘못된 문화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찬들 사이에서도 ‘문화이니 뭐 어때? 사탄 숭배하는 것도 아닌데?’라고 하면서 가볍게 자녀들을 세상의 복장으로 입혀서 이웃집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trick or treat!‘(과자하나 주면 장난질 안할지)에 동참시키는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찔한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왔으니, 우리 자녀들이 미국문화를 알게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만, 좋은 것을 알려주는 것보다는 나쁜 것을 알려 주는 우를 범하고, 간접적으로 비성경적 사고를 하도록 용인하는 잘못을 우리 부 모들이 너무 쉽게 범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철저한 단절을 하나님이 명령했지만,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남겨두었다가, 그 남겨진 것 들에 의해 세속적 종교로 전락해 버리는 최악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쳤던 믿음의 선조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부패한 심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듬지 아니하면 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정신과 신앙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에 먹혀버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Holyween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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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23.2022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 교회가 교회로서 생명력을 이어가고, 조금 더 견고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아주 소중한 자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예배를 통한 말씀과 성경읽기와 묵상 그리고 새벽 기도와 특별 새벽 기도회가 바로 그러한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출생하면서 육체를 가진 사람이기에 우리는 그 육체가 자라기 위해 영양을 공급합니다. 굶거나 모자라게 영양을 공급받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때로는 생명의 심각한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곧 성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생명유지와 관계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영적인 자양분을 섭취해야 그 생명력이 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먹을 것은 한끼만 굶어도 바로 느끼지만, 영적인 굶음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영적인 미성숙과 영양 불균형의 상태를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러한 것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것은 영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만 다니고 있다면 아직 어린 아이의 상태이거나 병든 상태일 것입니다. 수십년을 교회 다녀도 아직 어린 아이요, 병적인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자기 것으로 먹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이제 내일부터 우리는 3주간의 긴 영적 전쟁터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의도하든 안 하든, 우리 모두는 같은 영역 안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왜냐면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탄이 그냥 순조롭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무관심이나 방관의 마음을 줄 것이고,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못할 수 밖에 없도록 여러 환경을 동원해 핑계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의 삶에는 기도하기 전보다도 훨씬 많은 어려 움도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 전쟁에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오를 하고 함께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싸워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안에 내재되어있는 불순종과 싸워야 합니다.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하 나님께서는 이번 특새를 위해 기도하는 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그가 무덤에서 온몸을 동여맨 채로 나오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살아있으면서도 온 몸을 아직도 칭칭 감아 묶인채로 놓여있는 나사로같은 내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통곡하며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니 나를 묶고 있는 수많은 묶임으로 결박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결박으로 인하여 자유함을 잃어버렸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놓으셨는데 그 결박으로 인해 마귀의 종노릇을 했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통곡했습니다. 이 묶임이 어찌나 혼자만의 문제일까요. 이 마귀의 묶임, 원수의 결박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 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특. 새를 통하여 그 결박을 하나 하나 풀어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모든 신령 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의 부르심에 함께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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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16.2022 마칠칠 전도법
    새생명 축제가 앞으로 한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목회자인 제게 하나님께서 올 해 특별한 마음을 주신 것은 영혼구원을 향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하나는 대학에 들어가 다민족 학생들에게 한글을 통한 복음전파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 잃어버렸거나 얻어야 할 한 영혼을 위한 마음입니다. 대학에서 하는 사역은 이미 CSN/UNLV 두 대학에 서 이미 한글 교실이 열려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영혼을 얻는 새생명 축제가 이제 한 달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런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얼마만큼 우리 교우들의 공감을 얻고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일 또한 이루어 가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 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사역이기 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다가 보니, ‘마칠칠 전도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7:7 전도법’을 줄여 부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기도의 말씀이 있는 것을 전도에 적용한 것입 니다. 전도를 하려면 이 법칙을 따르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구하라’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이 말은 전도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전도,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우리 마음에 그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이동풍(馬耳東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구하면 뜨거워집니다. 둘째는 ‘찾으라’입니다. 전도하겠다는 마음이 일단 들면 찾아보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찾지도 않으면서 없다고 말합니다. 내 주변에는 안믿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찾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전도할 대상은 너무나 많습니다. 널려 있습니다. 그것이 안보이는 이유는 안 찾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두드리라’입니다. 일단 찾았으면 그냥 전도지, 안내지 한 장 덜렁 주면서 오라고 하는 것은 교만 입니다. 그렇게 해서 절대 오지 않습니다. 다가가서 두드려야 합니다. 커피한잔 사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집 식탁에 초대해서 차나 밥을 함께 먹으며 대화 하면서 관계를 쌓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에는 우리의 헌신이 요구됩니다. 시간, 장소, 물질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커피 값 1불50센트면 됩니다 (비싼 것은 더 하겠지만). 그것 없어서 전도 못한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 돈 조차 없으 면 제게 오세요. 제가 기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어느 전도 대상자에게 커피 3잔을 가지고 일터로 찾아갔습니다. 너무나 반가워합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두 었습니다. 11월13일, 기억하라고, 그랬더니 꼭 오겠답니다. 돈 많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 번째 단계는 ‘고구마 전도법’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관계 전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말로 오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카톡하나 보내 놓고 올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구하고, 찾았으면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는 마칠칠 전도를 기억하고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헌신하십시오.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이 축제가 기다려집니 다. 그냥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찬으로 알려주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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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09.2022 재미있는 신앙 생활
    많은 사람들이 상상속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주변에서 많은 분들의 간증을 들으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가늠합니다. 감탄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내 문제로 닥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줄 몰라서 당황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간접경험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서 망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교 현장에 나가지 않아봐서 부담스러워하고 겁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의 현장에 쏟아지는 놀라운 은혜를 가보지 못해서 말로만 듣고 상상만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섬기고 봉사하는 것도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대학에 들어가 전도를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속에 들어 가서 나이든 사람이 보여지는 모습이 어떨지 고민도 되었습니다. 소통이 잘 될 수 있을지,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 많은 생각과 고민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가 일단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재미가 있고, 반응이 뜨거워서 이거 뭐 이래도 되는거야? 싶을 정도입니다. 호응도 좋고, 마켓 에 한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보다는 정말로 부드럽고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라면 일찍 움직였을텐데 싶을 정도입니다. 왜 우리는 한국 사람만 만나면 긴장을 해야하고, 인사도 하지 않을만큼 부담을 느껴야 하는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외국인들을 만나면 전혀 그러지 않은데 말이지요. 유독 한국인만 만나면 인사도, 미소도 없이 그냥 지나치는 것을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마주 대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번 전도활동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유익하고 놀라운 열매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일이 힘들기는 해도 일에 요령을 배워하면서 인생과 삶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수많은 희열또한 느끼게 됩니다. 전도를 하기 전에는 그냥 마냥 부담스럽고, 긴장이 되고, 열매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 싶어서 아예 시도조차 안하는 경우가 많았지 않나요? 요즘 우리가 구약 통독을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봅니다. 하루에 4장을 읽으려면 사실 30분에서 1시간이면 넉넉한데 그 시간을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다른 일로는 몇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데 말이지요. 기도 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예배 생활을 힘들어 하는 것들도 사실은 잘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해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할만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노력이라는 희생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라는 선물이 있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하고 섬기는 것이 짜증스러운 영역의 것이 아니라 정말 감사하고 보람이 있고, 재미있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재미가 있어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해보지 않고서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반응, 부담감이나 걱정이 앞서면 그 재미를 누릴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해, 겁나, 어떻게 해,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이 힘드신 분들은 그냥 도전해 보십시오. 의외로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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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02.2022 안전판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양에 대한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참 많은 채널로 들어왔습니다. 99마리를 놔두고 단 한 마 리를 위하여 ‘찾아오기까지’ 찾는 주인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경제적 가성비에 맞지 않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애타게 한 영혼을 찾고 계신지를 우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얄미운 한 마리양은 왜 울타리 밖을 나갔을까요? 울타리안에 있는 것이 더 나아보였기 때문일까요? 한 울타리안에서 경쟁적으로 먹어야 하는 풀이, 저 밖에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결국은 깨닫게 됩니다. 비록 답답하고, 부자유스럽지만, 울타리 안이 바깥보다 훨씬 안전하고 풍성한 양식이 있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 울타리는 우리를 옥죄어 오는 방해선과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안전한 생명라인과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보면 가끔 졸리울때가 있습니 다. 아무리 꼬집고 눈을 비벼까도 졸린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잠깐 조는 사이에 차선 사이에 있는 하얀 점박이 라인을 밟게 되면 ‘드르륵~~ 드르 륵~~’ 하는 소리에 놀라서 정신을 차릴 때가 있습니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에는 왜 이것을 박아 놓았을까? 아스팔트를 깔아놓아 부드럽고 소음없이 운전하는 곳에 이런 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타이어 마모가 더 빨리오고 불편한데 왜 그랬을 까? 그런 의문은 쉽게 풀렸습니다. 졸음 운전을 해보니 알겠습니다. 그것은 귀찮은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설치한 고마운 자산입니다. 드르륵 소리가 날 때에 정신을 차리게 해 주는 안전판인 셈 이지요.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런 저런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위험한 순간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쉽게 낙심시키기도 하며, 좌절에 빠트리고, 삶의 활기를 훔쳐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한 암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하나님앞으로 돌려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나를 돌아보고, 말씀으로 돌아가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장애를 가진 어느 음악가가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장애는 오히려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선물이라고...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나 장애 등의 문제를 벗어나려고만 하지, 왜 그 고통이 나에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편해 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선물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복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생을 원망만 하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고, 그리고 나서야 되돌이킬 수 없을 즈음에야 그 하나님의 선물을 알아챌 때에는 이미 많은 후회를 거친 다음이 될 것입니다. 불평스럽고 짜증스러운 일들 이 우리 앞에 놓여질 때에는 생각해 봅시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안전판이구나. 나로 하여금 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는 싸인이구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안전과 생명을 주려고 하시는 싸인이구나라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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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7
    아름다운교회 Sep 25.2022 아는 만큼 보입니다
    베가스에 있는 대학으로 전도를 위해서 일주일에 두 번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느즈막한 나이에 자녀들과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 마주 대한다는 것이 멋쩍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 중에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음을 믿으며 좌충우돌 하면서 다니고 있는데 이 사역을 마치고 나면 뿌듯한 기쁨이 가슴에 차고, 복음의 미래에 대해서 찐한 미소가 떠오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대학을 다니다 보니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움 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배움의 도전을 하도록 격려하는 수많은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각보다 기회가 눈앞에 더 가까이 왔다는 표현에서부터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라는 희망의 메시지들 이 여기 저기 눈에 띄였습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보았습니다. 30세 초반에 미국으로 배움의 길을 두려운 마음으로 떠나올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 가정의 가 정이 되고, 목회 초년생의 시절에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사전에 준비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적지않게 언어적인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납니 다. 그 짧은 영어로 20년간의 이민생활을 더듬거리며 해 왔다는 생각이 나면서, 영어도 아는 만큼 기회가 주어지고 길이 보임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영어가 되려면 우선 어휘실력이 늘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치원/초등생 수준의 영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영어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손해 보는 일도 많 고 푸대접받는 일도 많습니다. 영어가 되면, 이 나라에서는 정말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나라가 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는 것이 그야말로 힘입니다. 영어가 되면 얼마 나 자유스러운지 모릅니다. 하고 싶은 공부들, 배우고 싶은 기술도 얼마드니 충족할 수 있는 기회가 이 나라에서는 제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안되니 차 려진 밥상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세상의 배움의 세계도 그런데 영적 세계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만큼 자유함이 있습니다.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무궁무진한 보배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는 아는 만큼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세계에 입문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교회의 마당만 밟고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저 주일예배에 한번 빼꼼하게 들여다보고, 한 주 내내 아무런 은혜의 통로를 다니지 못하고, 세상에서 이러 저리 휘몰아 치다가 다시 주일에 잠깐 교회에 들러서 갑니다. 그러니 그 은혜의 세계를 다 잊고 삽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패턴은 곧 얼마지 않아 습관적 교회 생활에 빠지고 맙니다. 은혜의 세계를 헤엄쳐 깊은 바다 한 가운데를 걸어야 하는데 밀려오는 파도가 겁나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 풍성한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려면 알아야 합니다. 그 맛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이면 또 다른 창공이 보입니다. 하늘 위의 하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알고 배우는 것은 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 녹아나야 합니다. 은혜가 삶에 녹아난 나를 볼 때까지 우리는 앎에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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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6
    아름다운교회 Sep 18.2022 이삿짐
    라스베가스로 이민 온지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목사라는 특성상 이삿짐속에는 아무래도 연구용 서적과 공부한 것들의 자료가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와야 했으니, 태평양을 건너기를 몇 번 한 것이지요. 나를 따라 가족들은 물론이거니 와 덩달아 살림살이와 목회자료들이 태평양을 건넌 것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목회와 신학을 하는데 중요한 것들이기에,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습니다. 읽고 공부한 것들이 아까워서 가지고 다녔던 수많은 책들과 바인더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법 버렸다하는데도 어느 새 보면 더 늘어나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 만큼 말이 지요. 그런데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IT산업의 발달로, 종이책이 사라 지고, 디지털 세계가 열리면서 책을 들여다 보는 기회가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여파와 함께 나의 게으름으로 20년동안 미안하게도 박스에서 빛도 못본 채 창고에 잠들고 있었던 책과 바인더들을 이번 기회에 완벽(?)하게 쓰레기 처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은 Downsizing을 하는 장소에는 여유공간이 하 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 20년간 안 열어본 박스에서 새롭게 책을 꺼내본다 는 일은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것을 누누이 아내가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운 생각에 치우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차피 못가져갈 형편이어서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자료들을 쓰레기통으로 집어 넣으면서도 그 중에 몇 자료들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꺼내들어서 새롭게 박스에 넣는 내 모습을 또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웬만한 것은 버리는데, 차마 이것은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료의 가치가 크다는 것, 아직은 그래도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 이런 좋은 책들과 자료는 버릴 수 없다 는 생각에 또 다시 쓰레기에서 서고로 다시 분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나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만나는 사람들, 삶의 가치들, 수많은 것 들이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는데, 이사하는 날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이와같은 일 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사람, 물건, 관계 등) 있습니다. 쓸모없다고 이미 판단한 것이지요. 버릴까, 아니 좀 아까운데?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버리기는 아깝고, 두기에는 선뜻 내키지 않는 것들도 있습 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말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꼭 가져가야 해, 이것만큼은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보관해야돼, 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보배일까요? 많은 분들이 자신이 썼다고 하는 책들도 받아 보았습니다만 미안하게도 이번 정리 대상에 포함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생은 모두가 쓸만한 것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럴 수만도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보배로운 것들도 만나지만 쓰레기 같은 것들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참으로 죄송한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아낌없이 버려도 좋을 대상으로 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남 하나 하나가 귀하고 소중합니다. 아까운 시간과 장소를 낭비하지 않는 만남이 있기를 이젠 더욱 바랍니다. 주님께도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죄송함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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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5
    아름다운교회 Sep 11.2022 Credit Score
    미국은 신용(Credit)사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credit card의 사용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reliable한 사람인지를 측정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책임감(reliability)이 있느냐는 무엇으로 측량하겠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것을 계량화하여 사람들의 신용평가의 등급을 매겨놓았습 니다. 그래서 1-850점까지의 수치를 정해놓고 높은 점수가 나올수록 신용이 좋다고 인정합니다. 점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믿을만한 사람이 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은행에서 우대를 해줍니다. 심지어 돈을 빌리거 나 Mortgage를 이용할 때에 남들은 상상도 못할 낮은 이자율로 혜택을 줍니다. 이것은 단지 은행뿐만 아닙니다. 모든 거래에서도 credit score가 낮으면 웃돈을 내야 하고, 더 많은 돈이 듭니다. 그리고 심지어 거절되어 일을 하지 못하게 될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신용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삶을 책임감있게 살았다는 평가이며, 편리함이며, 유익이 따르기 때문에 이것을 잘 유지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단지 경제적 이익의 평가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삶의 습관과 책임감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용 점수가 낮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책임감이 떨어집니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다던가, payment를 신경쓰지 않는다든가, miss하는 일은 없어도 날짜를 어기는 일은 자주 한다는가, 남들과의 관계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대로 credit score가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성향이 강하고, 계획성있게 일을 하는 등 자신의 삶을 management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책임성’과 관련이 있어보입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대체로 크레딧 관리를 잘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삶은 남들과의 관계 혹은 자신과의 책임성을 말해주는 이 credit score를 생명처럼 다룹니다. 우리는 이처럼 이 사회와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것이 남들에 대한 나의 신용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삶을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적용하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만약, 하나님께서도 신앙 신용평가 기관을 운영하셔서 1-850점까지 점수를 매겨서 우리의 신앙 credit을 관리하신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몇 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점수를 가지고 하나 님께 기도(?)라는 것을 통해서 대출같은 응답은 받으려 한다면 과연 우리는 응답을 잘 받을 수 있을까요? 만일 신용이 부족해서 봉사점수를 더 요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cosign을 요구받아야 하는 경우는 없을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렇게 신용관리를 철저하게 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신경조차 쓰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이나 어떤 보상을 바라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요구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성실(faithful)하다 면, 너는 나에게 성실하니?’ 하나님께 향한 나의 신용점수는 몇 점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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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
    아름다운교회 Sep 04.2022 이츠하크 (이삭)
    아브라함이 99세에 그토록 원했던 아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구체적으로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5년을 기다리 며 지쳐 포기하고 싶을 즈음에 드디어 아들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도 ‘웃었’습니다. 웃었다는 말은 원어로 ‘이츠하크’라 는 말입니다. 왜 웃었을까요? 실소의 웃음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젊은 나이도 아니고 100세에 아들을 가져?’ 뭐 이런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그건 말이 그렇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사람이 웃은(이츠하크)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의 아기 이름이 ‘이삭’(이츠하크, 웃었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웃겼을까 요? 그런데 이 웃음은 비관이나 실소 혹은 비웃음의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 (이크하크/이삭)’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이 사실 1년뒤에 이삭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도 웃었다는 의미로 ‘이츠하크(이삭)’이라 하였습 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못믿어서 실소의 웃음으로 웃은 반면에 하나님은 참된 웃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웃음으로 ‘이삭 (이츠하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word play는 우리 인생의 역전을 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뿐, 하나님의 하시는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 들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아버지의 능력은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천차만별의 경험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버지는 ‘전능’ 그 자체입니다. 말 한 마디면 다 들어주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고, 다른 어떤 이는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 그리고 상처로 인하여 아버지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의 능력은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세상적인 이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를 드러내는 곳이 바로 성경이며, 그분의 능력을 설명하는 것이 ‘신학’입 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믿음으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완벽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없이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믿음으로 돌아옵니다. 얕은 믿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하나님의 웃음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얕은 믿음이지만, ‘재대신 화관’을 씌워주고, ‘슬픔 대신 찬송’을 부르게 하십니다. 우리의 약점과 아픔을 유익한 것으로 바꾸어주시 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역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든지 기쁨의 이삭(이츠하크/웃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읽는 토저 목사님의 저서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책에서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려면 ‘포기, 집중, 매료의 법칙’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십년 믿은 신앙이 아직도 다이나믹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습관에 빠진,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삭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하나님 께 있음을 알고 미지근한 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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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3
    아름다운교회 Aug 28.2022 예수믿는 사람의 친절
    연로하신 어머니의 일로 관공서를 다녀왔습니다. 90세를 넘기신 분이라 누가봐 도 Walker를 의지하며 걷는 노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의 관공서에 출입하면 긴 줄은 쉽게 예상되는 일입니다. 비록 노인을 모시고 가는 일이지만 긴 줄에 많은 시간과 불편을 각오하고 관공서를 다녀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긴 줄이 이미 건물 밖까지 서있어서 오늘은 고생좀 하겠다 싶었습니다. 비록 예약을 하고 갔어도 그게 어디 쉬운 과정이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경비원의 도움으로 그 긴줄을 패스하고 앞으로 가서 접수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십분을 기다려 창구 담당직원에 갔는데, 형식적인 대화가 오간 다음에 잘못된 몇 부분을 수정하고 마지막에 사진을 찍는 일이 남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곳에도 긴 줄이 이미 서 있어서, 어머니를 창구 가까운데 앉히고 맨 뒤에 줄을 서서 잠시 기다리는데, 이전의 창구담당 직원이 오더니, 왜 그 뒤에 서 있느냐, 맨 앞으로 불러세우면서 그 긴 줄을 패스하도록해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야말로 1-2시간은 절약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진 찍는 곳과 창구 직원이 있는 거리는 그 큰 건물의 끝과 끝이 다른 곳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긴 줄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지, 이 끝까지 달려와서 장애 혹은 경로우대를 하는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맨 뒤에서 맨 앞으로 나오고, 행동이 느린 어머니, 손이 떨려 필기도 못하고, 사진 찍는 동안 옷매무새 와 머리를 정리해 드리는 과정을 보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한심하다든지, 짜증스러운 표정이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이지 않는 이해와 친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친절한 공무원들과 시민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구나, 감탄스러움이 흘러나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성령을 받으면 은사로서의 열매가 밖으로 보이고, 안쪽으로는 성품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친절’입니 다. 예수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성령의 은사가 아닐지라도 가지고 있는 ‘친절’ 이라는 사회적 합의나 마음속 성품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떨까 싶습니다. 앞의 공무원은 해주지 않아도 되는 친절을 보여주며 감동을 주는데, 나의 친절은 의무적 친절은 아닐까, Minimum에 그친 친절을 보이면서 나는 Maximum 친절을 보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해야될 친절을 보이는 것은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되는 친절을 베풀 때, 아니 내가 해야 할 친절을 넘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친절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가족안에서도 직정안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배려이고, 사랑이고, 이해입니다. 이 친절은 자기 중심의 인간에게는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이타적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중심적인 이해속에서 달라고 하고, 받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이 ‘친절’이 없다면 주님의 사랑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 다. 그 친절 또한 Minimum이 아닌 Maximum이 될 때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신 것처럼, 우리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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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2
    아름다운교회 Aug 21.2022 군계일학은 최선이 아닙니다
    꿩대신 닭이다. 용꼬리보다 뱀머리다. 뭐 이런 말들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대체재를 생각하면 위로삼아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가끔은 이런 말들의 진리(?)스러움을 체험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인간은 끝없이 비교하며 삽니다. 좋은 차를 갖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싶다. RV 하나 갖고 싶다. 보트를 타는 인생이 좋다. 해변에 집을 짓고 싶다. 뭐 이런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과연 열들감이 사라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바닷가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항만을 돌아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기에 자그마한 낚싯배를 가진 사람은 세상의 부러움이 없을까? 바고 그 옆에 정박해 있는 으리으리한 요트를 보면서 자신의 자그마한 낚싯배가 초라해 보이며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맞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열등간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열등의식이 심한 곳이 서울대와 하바드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고의 학부를 다니면 자랑스럽게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 줄 알았는데, 그곳에도 뼈저리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화려한 곳에 가서 초라하게 느끼면 사는 것 보다는 초라한 곳에 가서 화려한 조명받고 사는 것이 낫다는 것도 전혀 틀린말도 아닙니다.군계일학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수없이 널려있는 닭들의 세계에서 돋보이는 학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한 사람은 그 세계속에서 눈에 띈 인생을 살 수 있고, 남들의 이목을 집중 받으며 살수도 있는 행복이 있을 수있습니다. 그러면 그 세상은 한 사람을 위한 세상이 되어버립니다. Paradise의 세상은 그 한 사람을 위한 세상이 아닙니다. 주변이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지역에 화려한 집 하나가 있다고 좋은 집이 아닙니다. 주변의 환경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집도 좋아야 하지만, 옆집도 좋아야 하고, 그 동네가 깨끗하고 안전해야 하며, 그래야 좋은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나만 좋아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교회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어느 한 사람만 군계일학처럼 돋보여서 그 교회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교회에서 돋보이는 한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있다고 해서 좋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좋은 면을 드러내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슈퍼맨(우먼)이나 군계일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꼐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꿈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모두가 군계일학을 꿈꿀 때, 하나님은 함꼐하는 공동체, 사실 교회라는 말 그 자체가 이미 공동체이지요. 모두가 함께,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비전을 품고, 함께 수고하고, 함께 걸어가고, 함께 가야한다고 성경을 늘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튀려고 하거나 혼자 가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한 지체가 무너지며녀 함꼐 무너지는 공동체의 법칠을 알아야합니다. 목사를 깍아내리고, 장로, 권사, 집사를 깍아내리면 자기가 돋보이는 줄 착각합니다. 그것은 함께 망하는 마귀의 지름길입니다. 군계일학을 꿈꾸지 말고, 모두가 좋은 크리스챤으로 함께 성장해야 천국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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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4.2022 왜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실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민족이 포로로 팔리고, 주변 강대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치 물고기 낚시하듯 잡아채도 마냥 응답도 구원도 없으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잔뜩 원망에 찬 질문을 쏟아놓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런 질문이 왜 하박국에게만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보면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눈뜬 장님처럼 세상의 부조리와 악과 잔꾀가 많은 사람들의 사기행각들에 대해서 분노할 일들이 산더 미처럼 쌓여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에덴은 천국이었습니다. 악이 머물 수 없는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로 채우셨는데 이상하게도 그 동산의 한구석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로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와의 눈을 생명나무 보다는 선악과에 두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차라리 그 선악과를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동산에 두지 않았더라면 하와의 범죄로 이어지지 않았을텐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두어서 잔혹한 인간의 범죄로 잇게 하셨을까요? 이상합니다. 노아시대도 그렇습니다. 노아 방주로 피신시킨 동물은 정결한 짐승만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까지 태우셨습니다. 모든 것을 없앨때에 부정한 것들을 말살시켜서 정결한 것만 남겼더라면 이 후에 고민도 없이 인간은 정결법에 신경쓰지 않고도 살 수 있었을텐데,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함께 두셨을까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은 비단길이나 꽃길 이 아닙니다. 순종하기 위하여는 우리는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로봇처럼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한 길만 주어졌다면, 우리가 선택할 기회가 없이 그냥 그 길만 갈 수만 있으면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 때, 다른 것을 희생하고 하는 것일 때 가장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배우자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그 배우자만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가치가 있고, 고귀합니다. 만일 선택할 아무 것도 없는데 선택된 것이라면 그 선택은 바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인 선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노아 방주속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갈등의 요소를 두고서 그 갈등속에서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악이 성행합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은 우리로 침몰하도록 만드는 지뢰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길임을 증명하는 훈련의 장소입니 다. 왜 악을 만드셨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그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을 때에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선을 택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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