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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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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3.2025 저절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어느 농부가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랍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며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농부에게서 싯귀를 들은 느낌입니다. 이 말은 농부의 부지런함이 없이 곡식 농사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싯적 표현입니다. 농사도 저절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씨를 뿌려 놓으면 저절로 자라서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농부가 부지런히 김도 매고, 관리하고, 병충해 예방을 하지 않는다면 처참한 결과지를 들을 것이 뻔합니다.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베가스에 와서 연주를 합니다. 하루 전인 토요일에 연습을 할 장소를 찾느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교회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의 시간이 아니라 두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아닙니까? 한 두 번 무대에 선 분이 아니고, 노래라고 하면 이력이 날 정도로 세계 정상의 수준을 자랑하는 분이 뭐가 부족하다고 연주하기 전에 두시간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사람들은 전문가가 되면 그냥 먹고 놀고도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운동선수들, 내노라 하는 전문지식을 가진 분들은 언제나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자그마한 오차나 실수도 줄이려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고, 자기 절제에 투철하다는 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어설픈 사람들이나 아마추어가 대충 준비하고 교만하고 게으르다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잘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의 법칙도 이러한데, 신앙인들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덜렁 예배에 와서 수동적으로 앉아 있다가 그냥 듣고 즐기는 수준에 머물며, 신앙생활이 다 된 밥인줄 알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면 믿어집니까? 일주일에 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면 경건의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알라진의 요술램프를 하나 얻는 행운일까요? 만일 그리하고도 신앙 생활에 전혀 문제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성비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수지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둠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시 131:1)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도 전문가의 수준에 이르려면, 수많은 눈물의 씨앗을 심어야 하는 것처럼, 영적인 세계속에서도 그렇습니다. 물론 구원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서 신앙이력이 수십년 쌓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끝없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는 영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초보신앙에 머물러 버립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그냥 남아있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해골골짜기에 마른 뼈들처럼 말라 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교회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줄도 모르고 삽니다. 마른 줄도 모르고 자랑하며 삽니다.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말이지요. 바른 성도들이라면 경건의 능력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영성을 위해 고민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영혼을 위한 훈련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큰 유익이 기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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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12.2025 파도와 절벽
    바위에 계란을 던진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위에 계란을 던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을 할 때의 절망감을 빗대어 쓰는 표현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온 힘을 쏟아 붓는다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어느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입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으로 인해서 밀려오는 파도가 해안의 절벽에 부딪치며 하얀 물거품이 하늘을 치솟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삼킬 듯이 달려온 파도가 철옹성 같은 절벽에 엎어지며 허공에 산산조각이 나면서 물보라와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사연없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나름대로 기가 막힌 웅덩이를 헤집고 산 그런 삶입니다. 때로는 세상을 뒤집어놓을 기개로 온 세상을 호령하고픈 욕망을 쥐고 살았지만, 하염없는 물거품의 물보라로 공중분해된 삶을 산 사람들도 제법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바위에 계란을 던지듯 무모한 인생의 걸음을 살았다고 자조하면서 세월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실패한 인생, 루저의 인생, 던져도 던져도 꿈쩍도 하지 않은 바윗 덩어리같은 인생 앞에서 그저 낭패와 실망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가 인생의 끝인가 싶어서 모든 것이 부서진 파도처럼 조각난 자신의 인생을 움켜쥐며 절망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렇게 부질없는 인생을 살아만 왔을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살을 에는듯한 차가운 공기속에 서서 그 부서지는 파도와 바위절벽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위로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호기롭게 밀려온 파도가 절벽을 내리치켜 산산조각난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즈음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부서져 아무 존재감도 없이 흩어진 파도와 견고한 절벽중에서 '과연 승자는 철옹성같은 바위절벽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패배자가 파도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파도가 힘없이 무너지고 있지만, 훗날 수업이 부서지고 깨진 파도에 의해서 절벽의 바위는 깊은 파임을 당하고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양으로 깎이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먼훗날, 깎인 절벽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파도가 그리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긴 것은 바위같은 절벽이 아니라 파도이지 않았을까요? 아무 소용도 없이 물거품을 하늘로 날려버려 소용없는 바위에 계란 던진 격이 되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이치입니다. 한 해가 소리 없이 솟구치며 시작을 했습니다. 힘찬 태양도 떠올랐고, 지난 날 묵은 세월의 때도 벗겨내 호기롭게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부서져 없어진 지금의 파도가 아니라, 먼 훗날 물보라처럼 사라진 파도에 의해서 아름답게 다듬어진 절벽을 보아야 합니다. 철옹성 절벽이 이긴 것이 아니라 연약해 보이는 파도가 이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내를 귀히 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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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9.2024 인생의 멋진 연주를 위해
    지난 성탄절을 기해서 우리 어린 자녀들이 가진 재능을 바라보면서 참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일학교의 성장은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교회의 성장은 메마른 심령에 단비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는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이 가진 특별한 재능과 부모들의 열정적인 뒷받침을 읽으며 한 가지 잔잔히 흐르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연주실력을 갖추기까지는 부모님들의 자녀를 향한 열정적인 뒷받침과 함께 자녀들의 열정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아이들을 누가 가르치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실력이상을 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자기 실력 이상을 가르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 어려운 곡을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그래서 더 좋은 선생님, 더 실력이 있는 곳으로 보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가 싶습니다. 훌륭한 선생님또한 수준높은 연주를 하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훈련을 거듭했을까요?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저 혼자 악보보는 법을 배웠고, 피아노, 기타, 섹스폰, 톱연주등을 배웠습니다. 피아노를 예를 들자면, 저는 바이엘도 다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초고음과 초 저음의 악보가 나오면 거의 포기를 합니다. 내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선생님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어찌 악기를 다루는 문제일까요.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이미 익숙한 경험도 있겠지만, 어떤 것들은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이어서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인생의 멋진 연주를 만들어 내는 훈련, 높은 수준의 연주를 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연습의 과정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해 본 사람은 작은 고난은 문제되지도 않고 그저 웃으며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작은 고난도 힘들어합니다. 마치 늘 4인 가족의 밥만 짓는 주부가 100명분의 음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지요. 100명 밥을 지어본 사람은 10명분의 식사는 웃으며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도 크고 작은 많은 고난을 헤쳐본 사람은 더 아름답고 훌륭한 삶의 연주를 무난히 해결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큰 아픔을 겪었다는 것은 그것이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기는 하지만, 잘 이겨낸 사람은 인생이라는 고도의 훈련을 요하는 악기를 멋지게, 훌륭하게 연주해낼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고통이 저절로 양질의 인생연주를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서 잘 녹아지고 다듬어지고, 그 고난이 주는 의미를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이제 한 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저 행복한 한 해였을 것이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고 남몰래 울어야 하는 일을 만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고난을 믿음의 고난도 연주를 위한 훈련이 되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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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2.2024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들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와 성탄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일학교 자녀들의 발표를 준비하는 분주한 즐거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런 자녀들의 움직임을 부모들과 어른들은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눈길마저도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집안에 걸어둔 성탄 양말에 무엇이 채워지는 지에 대해, 이번 성탄절에 무슨 선물이 품에 안겨질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날을 기다립니다. 교회밖으로 나가도 그렇습니다. 유독 올해에는 여기저기를 다녀보지 않아서 그런지 성탄캐롤송을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탄 캐롤송은 다니는 상가마다, 음식점등에서 즐거이 불리워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성탄 특수를 기대하는 상인들과 기업들의 기대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성탄절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성탄절인가입니다. 저녀들의 재롱을 보고 싶은 것인지, 돈을 벌고 싶은 것인지, 이 성탄에 기억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말입니다. 하지만 2000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정작 성탄이 찾아왔음에도 불과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이 성탄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찾아오고, 예수님의 부모에게 찾아와 알려준 것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땅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의 탄생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몰라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희미한 빛으로나마 이 땅에 메시야가 어디에 오실지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귀를 기울이고 듣고자 했다면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을 연구하지 않아도, 그들이 들려주는 ‘유대인의 왕’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그렇게 소동을 벌일 필요도 없이 그 거룩한 탄생의 소식앞에서 기쁨의 환호를 지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 심취해 있던 모든 인류는 그 땅에 은혜롭게 오신 탄생의 소식을 모두가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헤롯정권의 Stance를 같이하면서 멸시와 조롱으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오늘 날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천사의 기쁨으로, 하늘의 영광으로 바라보고 기대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셨더래’ 정도, ‘good news’거릿정도로 맞이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헤롯왕과 당시의 종교지도자처럼 ‘메시야, 유대인의 왕’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림도 없었고, 아니 솔직히 오시면 안될 분으로 여기는 세상 부귀와 영화에 취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눈요깃감정도면 충분했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는 ‘내 목숨을 걸고 사랑해야 할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신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안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더더구나 그분을 생명처럼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큰 기쁨의 소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탄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계십니까? 기이하고 놀라운 소식입니까? 내 영혼의 지축을 흔들 ‘구원의 큰 기쁨’을 안겨줄 소식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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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15.2024 성탄절에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맞이하는 시간앞에 섰습니다. 목회적으로는 가장 분주하고 어렵고 마음을 기울여야 하며, 사탄의 공략이 가장 날카롭게 활동하는 시간이어서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역을 정리하는 시간에 서고 보니 지나 온 날들에 대한 깊은 회한이 밀려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시행착오’라는 말입니다. 인간이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인생을 배우기도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픔과 고통뿐아니라 유익과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40여년의 목회를 지나온 길에 어찌 그런 일이 작았을까요. 그 시행착오앞에 후회가 깊이 몰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 시행착오는 인간의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가정안에서의 부부/부모/자녀관계에서, 직장과 사업안에서, 교회안에서 겪어지는 현상입니다.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한마디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비판 한조각이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났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내가 무슨 말을 해서 누군가 아파한다는 것을 못깨닫는 사람도 허다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다른 것을 선택했더라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주어진 기회를 그리 허망하게 날리지만 않았더라면 등등의 시행착오가 우리 인생의 길목에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요.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런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성장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만물보다 더 심하게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성경이 지적하였듯(렘17:9) 그 마음으로 삶의 시행착오를 넘어서 더 나은 삶의 미래로 고쳐쓰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힘이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걸어가는 반면에, 2000년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으신 분(히4:15)입니다. 그분은 그래서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시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사역을 그렇게 아름답고 존귀하게, 모든 사람의 구원의 길을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권력을 가지고, 권한을 자기들의 기득권으로 이용하려한 종교지도자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척하면서 온갖 권한을 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의중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 예수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그저 눈에 가시일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진리의 빛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삶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인생의 아픔을 겪으면서 겸손을 배우고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이 꼭 필요한 분이심을 믿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는 사랑할 대상이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바라기는 이 성탄절에 마음이 높아져 예수를 시행착오로 가득한 내 인생에 주인으로 내주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나의 부유함을 내려놓고 나는 예수님없으면 존재의미가 없으며, 주님의 생명을 나를 위해 나누어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마음깊이 사모함으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가는 예수가 아니라, 내 안에 머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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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8.2024 속지 않도록 정신차려야 합니다
    어느 형제가 필리핀 선교를 다녀왔는데, 대한민국이 시끄럽더라고 한탄스레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처음에 누군가 대한민국에 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아, 세상에 또 가짜뉴스들이 판을 치는구나!’라고 한탄하여 그냥 반응을 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여러번 찍힌 것이 여러번이었지만 또다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엔 한국 뉴스에 발을 끊고 산지가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혼란을 가슴아프게 뒤로하고, 그냥 일부러, 애써서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문은 가급적 외면하고, 유튜브를 통해 제 관심사만 들여다 보고 있는데, 1주일이 지나자 유튜브에서서 한국뉴스가 싹 사라졌습니다. 세상이 떠들썩한데도 가뭄에 콩나듯 그런 기미가 보였지만 더 이상 계엄이니, 탄핵이니 그런 뉴스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제는 AI(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편향되거나 조작된 정보를 우리 마음에 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의 정치를 주로 검색해서 보면, 컴퓨터는 나의 관심이 그런 정치에 있는 줄로 판단을 하고, 내가 주로 검색하는 뉴스를 중심으로 모든 정보를 물어다 줍니다. 그러다가 보면, 세상 천지가 다 그것만 있는 것처럼 온갖 뉴스를 모아서 보여줍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나 생각은 ‘아, 나처럼 온 세상이 여기에 관심이 많구나. 다 나처럼 생각하는구나’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보수적 입장만 검색을 하니까 컴퓨터가 알고리즘에 의해서 보수가 좋아하는 뉴스만 모아주다가 보니, 그 색채가 강해진 사상을 갖게 되고, 반대로 진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온통 세상이 진보적 색깔뿐이라고 착각하도록 뉴스를 모아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나의 온전한 판단에 의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넓은 길’이 옳은 것처럼 보여서 그속에서 잘못된 가치관을 형성하며 착각속에 살 수 있는 위험이 다분히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정신차리지 않으면 세상이 물어다주는 가치관에 나도 모르게 오염되면서 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갖지 못하고, ‘넓은 길’로 다니다가 ‘좁은 길’을 놓치고 결국 멸망이라는 곳에 도달하게 될 위험이 과거보다 훨씬 더 높아진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속고 살 위험’이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정말 어느 때보다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쇼핑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그렇게 살도록 모든 정보가 모아집니다. 여행, 취미생활, 운동, 음식등 모든 것들이 관심을 내가 보이면 세상은 내가 그렇게 살도록 모든 입맛을 갖다가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물어다 주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면 됩니다.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을 선택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선택해서 더 많이 교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성탄의 계절입니다. 예수님을 더 찾으면 찾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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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1.2024 아름다운 교회
    벌써 달력을 1장, 덜렁 남겨놓은 12월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맞이하자 다짐하며 한 해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보낸 12월 첫주를 대하고 나니 세월의 폭주를 막을 방법이 없어 애를 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젊음의 시간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세월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겠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노년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회한의 세월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삶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세월앞에 우리 아름다운 교회도 어느덧 16년차를 맞이하며 새로운 도약을 힘차게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베가스에 여전한 교회가 되지않겠다고 다짐하며 새로운 ‘아름다운 교회’를 개척했지만, 세월을 지나오며 때론 이상(理想)의 교회가 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여상(如常)의 교회가 되기도 하면서 침체와 부흥의 길을 걸으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누군가 항상 물었던 질문 하나는 ‘왜 아름다운 교회라고 이름하였나?’였습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것이지만 새와 사람에게 안식과 그늘을 제공하는 사명을 가진 나무라는 생각에 ‘아름드리’에서 발전하여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후에 더 많은 의미가 붙여졌습니다. 다른 곳에 ‘아름다운 교회’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과 세상이 볼 때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머물고 있는 분들도 있고, 왔다가 간 분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있었든지 있는 그 자체로 교회가 되었고, 아름다운 사명을 나름대로 각자의 형편에 맞추어 역할을 남겼다고 저는 확실하게 믿습니다. 의미없는 존재가 없듯이 머물든, 떠났든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마다 가진 달란트와 사명을 가지고, 이곳 저곳에서 보석과 같이 빛을 밝히고 있는 성도들 한 분 한분을 바라보며 그것 자체가 아름다움이지 싶습니다. 이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건물이 아름다워서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가 아닐 것입니다. 수천명이 몰려오고, 수백억의 예산을 쓰며, 수많은 사업을 한다고 해도, 그 안에 불화와 불평과 원망 그리고 다툼이 있다면 그곳은 행복한 곳이 아닙니다. 와도 불편합니다. 만나도 힘만 듭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은 ‘관계’ 때문입니다. ‘아버지(하나님)과 나는(예수님)은 하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듯이 그 관계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에서도 ‘우리가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관계없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관계를 위해서는 자기 주장, 자기 욕심,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희생이 있고, 양보가 있고, 이해와 품어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나 역시 연약한 죄인의 한 사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겉모습에서가 아니라 ‘관계’ 때문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라, 슬픈 교회가 될 뿐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나를 살피고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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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24.2024 소중한 감사
    오늘은 한해의 수확을 정리하며 맞는 감사주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매일 매일이 감사의 날입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을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를 알기에 매일, 매주, 매 시간이 감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감사는 정말 귀합니다. 말세가 되면 ‘감사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예언을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미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감사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일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는 ‘감사’가 기본 예절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받으면 감사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받아도 그만입니다. 은혜를 입어도 반응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하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 일 경우가 많습니다. 감사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누구인가 SNS에 이런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자기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는데,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여서 공간을 마련해 주고, 기다리는 동안 무료로 차를 마시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짜로 먹는 음료임에도 청결하고, 예의있게 사용해야 하는데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공짜이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주인은 불가피하게 그 장소를 폐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서비스를 안해도 되는데 손님들을 배려한다고 시작을 했지만 사람들은 마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처럼 주장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예들은 넘쳐납니다. 공짜로 누리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감사보다는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면 주객이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생명처럼 귀한 것은 ‘공기와 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감사하며 사용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감사하기도 어렵습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것은 어쩌면 작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당연히 받은 사랑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더 귀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할 수 없는 환경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조건적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어애 감사를 한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전혀 감사하지 못할 환경인데도 뼈저린 감사를 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감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속에서도 감사를 찾아서 감사하는 것은, 받은 사랑 때문에 감사하는 것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감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다니엘의 감사기도입니다. 하박국의 감사도 그런 유형에 속합니다. 사람들은 감사할 조건이 있어야만 감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하박국은 도무지 감사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깊은 감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 어려움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음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이 크다 말할 수 있습니다. 빈손입니까? 나의 빈손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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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9
    아름다운교회 Nov 17.2024 역풍과 순풍
    하나님의 은혜로 마무리된 제16차 특.새는 각자의 사정과 환경에 따라서 다가온 은혜와 감동이 남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목회자로서도 성도들 이상으로 특.새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강도가 달랐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 금식기도를 마치기 전후에 그의 영성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지듯이, 목회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서도 그런 깊은 은혜가 있었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이번 특새를 지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은 지난 22년간 베가스 목회를 하면서 20년이상을 ‘다니엘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시행해 왔고, 우리 아름다운 교회에서도 개척했던 해부터 지금까지, 팬데믹의 어려운 상황속에서조차 한번도 중단하지 않고 이 기도회를 이끌어왔는데, 이렇게 기도회를 지속해 온 것이 정말 잘한 것이었다고 자찬했습니다. 왜냐면 기도야말로 우리의 뜻을 이루려는 욕심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위대한 변화와 도약을 이루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특.새는 베가스 어느 교회도 해보지 못한 기도회일 것입니다. 이 거룩한 일에 함께 마음을 묶어 달려온 온 교우들의 열심과 헌신에 사도 바울의 칭찬처럼 여러분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떻게 그렇게 3주간의 특별한 기도회가 가능하냐고, 팬데믹을 지나며 이젠 교회에 기도하러 나오는 일조차 불가능한 현실을 맞고 있는데 어떻게 아름다운 교회는 그것이 가능하냐며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오셨습니다. 때론 포기하고픈 유혹을 받을 만큼의 역경을 건너야 했고, 건강을 상할 정도의 힘에 부침도 있었지만, 베가스에서 영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없음을 지난 22년간의 목회를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기에 하나님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회를 경험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풍(逆風)은 그야말로 내 앞에서 마주하는 바람이어서 힘에 부칠정도로 어려움을 주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그 역풍을 당할 때, 내 몸을 반대로 방향을 바꾸면 이 역풍은 더 이상 역풍이 아니라, 등에서 밀어주는 ‘순풍’이 됩니다. 내 몸 하나의 방향만 바꾸었을 뿐인데 역풍이 순풍으로 바뀐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하지 않습니까? 역풍과 싸워야 할 때도 있지만, 내 몸의 방향을 바꾸어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는 생각전환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기도회를 통하여 이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지만, 정작 답은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곳에 있지 않고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인생의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순풍으로 바꾸어달라고 하기 전에, 이 역풍과 같은 인생의 풍랑으로 인하여 내가 의지했던 힘, 경제력, 성공, 부귀영화, 건강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이신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 바로 삶의 근원적인 방향전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역풍을 순풍으로 삼아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어쩌면 처음으로 아름다운 교회에 와서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방향을 바꾸게 되는 기적과 같은 시간이 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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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8
    아름다운교회 Nov 03.2024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 한국에서는 1027 연합예배가 광화문/여의도등에서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미국 시간으로는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집회에 온라인으로 참여해 보았습니다. 주최측에서는 110만명의 집회라고 하였습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모인 성도들은 한점 흐트러지지 않고 예배에 집중하며, 정치 집회가 아닌 순수한 나라와 민족 그리고 가정과 교회를 바라보면서 회개하며 기도하는 감동적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집회는 정치집회가 아니라, 정말 비성경적인 세상의 세태에 대항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마지막 대한민국이라도 ‘동성애’에 물들지 않도록 촉구하는 거룩을 향한 집회였습니다. ‘차별 금지법’제정을 반대하는 집회였기에 일부에서는 ‘아니 왜, 기독교가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반대하지?’라는 단순한 의문을 제기합니다만, 사실은 성소수자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법인데,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이미 입법이 되어 시행되어 이 세상의 ‘대세(大勢)’가 되어버렸지만, 이 파도처럼 치밀어 오르는 대세를 어떻게 작은 나라 ‘대한민국의 성도들’이 바꿀 수 있을까 염려가 되지만, 지금까지 이런 집회는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작은 몸부림이라도 함으로 이 땅에 비성경적 윤리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절규라고 생각합니다. 목에 피를 토하듯 ‘주여,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가 가슴에 파고 드는데, 정말 그런 일을 교회가 해야 하는가요? 연사들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영국과 독일에서 온 분들이 자기 나라들도 그렇게 당했고, 그것을 못막은 것을 회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성소수자를 보호하여 그들로 차별을 당하게 하지말자는 취지에서 금지법을 내놓았지만, 사실 이것은 역차별을 낳는 악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도 얼마나 많은 일들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가 똑똑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의 설자리가 없어지고, 복음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뜻있는 성도들이 100만명 이상이 모인 이런 집회에 과연 우리는 뒷짐지고 바라보아야 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이것이 얼마나 세상과 대척점에 서 있는가를 알려면, 이 집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입니다. 주요 방송과 신문들은 이 거대한 집회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는데, 언급을 했다할지라도 주제는 ‘이 집회로 인하여 교통혼잡을 가져다주고 시민들이 불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모였는지, 이들이 왜 이렇게 모여서 집회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느 방송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왜그럴까요? 세상은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집회가 정치집회였다면, ‘00 물러가라! 구속하라‘는 집회였다면 온 방송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지난 촛불집회에도 얼마나 방송이 무섭게 다루었습니까? 그런데 어느 방송과 신문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도 않고, 교통혼잡을 유발하는 ’나쁜 집회‘의 인상을 풍기는 보도 일색이었습니다. 건강한 가정과 거룩한 나라를 누가 싫어할까요?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데, 이 세상이 동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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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7
    아름다운교회 Oct 27.2024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많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인류문화는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공상만화에 나옴직한 수많은 기계들이 실현이 되었고, 또 앞으로 그 발전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그 능력은 ‘나아지려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좀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욕구가 없으면 아마도 인류는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더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 공부 잘해보고 싶은 마음, 더 잘만들고 싶고, 더 행복해지려는 마음등이 그러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운동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라도 운동을 해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돈을 주고 레슨은 받아야 했지만 요즘은 유튜브가 잘되어있어서 조금만 살펴보면 참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선생님처럼 유튜브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렇게 유튜브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기는 하지만 가만히 보니까 한계가 있습니다. 좀 더 잘하기 위해서 여러 채널의 유튜브와 경기를 보면서 와 맞아, 저렇게 해야지 힌트를 얻고 운동에 적용해 보지만 여지없이 잘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꺾이는 것은 실제 경기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으로는 유튜브에서 보았던 그 멋진 폼과 가르침을 따르고 싶지만, 공만 대하면 여지없이 무너져 다시 엉망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운동은 몸이 그 동작을 익히기까지 숱한 훈련의 반복을 통하여 된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그만큼 잘하기까지는 훈련이라는 반복적 행동을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땀과 노력을 했는데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잘못된 방법으로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해도 이룰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다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수많은 노력없이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운동에서 배운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대충 몇 번 해보고 안된다고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경건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해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유혹과 속성’을 순간 순간 잘 다루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만 오면 저절로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고 오해합니다. 언젠가 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과 싸움을 하면서 경건의 훈련에 집중하지 않으면 배운대로 되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도 그런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훌륭한 선수가 되는데, 하물며 영적인 경주를 벌이고 있는 신앙인들은 그냥 앉아서 잘하기를 기대하거나, 그렇게 믿는 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구원의 은혜외에는 공짜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주의 은혜를 구하면서 피눈물 나는 영적 씨름을 통해서 얻어지는 영적인 경건의 삶을 잘 달려가야 합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16번째 다니엘 세이레 특별새벽기도회를 시작합니다. 훈련없이 잘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마치 운동선수가 피땀흘려 몸에 익히듯,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훈련을 감당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주의 은혜로 온전한 삶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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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6
    아름다운교회 Oct 20.2024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
     인간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渴求)하며 삽니다. 사랑이 결핍이 될 때에 여러 가지 관계적 질병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 질병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줍니다. 이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지면서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사랑없이는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여자 청년이 거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려서 부모와 갈등으로 집을 뛰쳐나와 사회라는 거친 광야속에서 잡초처럼 살았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날, 우연한 기회가 두어지자 이 청년은 여러 푸념을 장난스럽게 늘어내다가 갑자기 울먹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엄마, 지금 비가 내리네? 이런 날이면 엄마가 부쳐주는 부침개가 가장 생각나요. 그런데 엄마, 내가 집을 나올 때, 나는 엄마가 정말 미워서 집을 나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인생을 살다가 보니까, 지금은 이 세상 사람들이 밉고 엄마가 가장 보고 싶더라?. 엄마가 미워서 내가 집을 나온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내 자신이 미워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하면서 내면의 고백을 울면서 풀어내더라구요. 순간 제 마음속에서 깊은 울림이 찾아 왔습니다. 미움이라는 저 깊은 속에서도 가장 깊고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깊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아침 큐티인 호세아서를 마무리지었습니다. 호세아서를 묵상하는 동안 저는 그 말씀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애타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피눈물나는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원/사랑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추구하기에 사람들은 그 대상을 세상으로 잡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돈이, 사람이, 건강이, 애정이, 여행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알고 그것을 따라가게 되는데, 재물이 많아지고 삶이 편안할수록 이상하게도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본질적인 사랑은 ‘먹어도 먹어도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콜라만 먹고서는 몸의 갈증을 풀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생수를 마셔야 삽니다. 그 생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합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마셔라’ 사랑에 목마른 자들아, 예수께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참된 사랑의 만족함을 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만족할 수 알았던 그 청년이 깨달은 것은 엄마가 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미워서 다시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듯, 지금 달콤하다고 거기에 빠지면 언젠가 후회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찾아서 세상을 향했다가 사막 가운데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우리의 본능적 사랑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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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29.2024 내가 편하다면...
    아뿔싸, 처음으로 아내 생일에 카드 쓰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매년 입에 바른 축하와 감사 편지를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선물과 함께 준비해왔는데, 올해에는 밖에 나갔다는 이유로 그것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긴 운전 끝에 피곤하여 생일 상이라도 차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내는 그냥 나가기도 귀찮으니 있는 것으로 먹자했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늦었지만 나가서 먹자, 어떻게 손에 물을 묻히게 하느냐며 고집을 피워서 식사를 간단히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식당에 와야만 우리는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할까? 그냥 집에서 만들어 먹어도 되는데, 그것은 큰 대접이 아니고, 식당에 와서 먹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대접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든 것입니다. 이래서 그러지 않을까요? 일단 식당에 오면, 내가 손으로 준비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장을 보고, 다듬고, 요리를 하는 등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서도 구태여 설거지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일 필요도 없고, 그냥 먹고 일어나면 됩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편안함을 담보로 서비스요금(봉사료)라는 댓가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내 수고를 네가 했으니 그 비용을 지불하고 식사를 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편안하게 식사를 우아스럽게 먹고 나면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할까요?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와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받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그 예배를 위하여 누군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성스럽게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 이면에는 전면에서 화려하게 보이는 분들도 있지만,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까지, 더러운 화장실까지 자기 손으로 청소하는 분들이 있고, 여기 저기 흩어진 물건을 잘 정돈하는 손길이 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 무더운 더위에 주방에서 준비하는 분들이 있으며, 모두가 내팽개친 채 가버린 빈공간을 Vacuum machine을 들고 땀흘린 분이 있으며, 내가 편하게 예배드리는 그 시간에 주일학교에서 어린 자녀들과 영적 싸움을 하는 교사들이 있으며, 행여 눈에 띌까 노심초사하며 교회안에 이런저런 필요를 아무도 보이지 않게 채워주는 손길도 있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개똥을 치우고, 주변을 말끔하게 치워주는 손길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편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휴지를 집어서 휴지통에 넣었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았지만 교회가 돌아가도록, 깨끗하게 보이도록, 예배가 지장이 되지 않도록 깊은 헌신이 묻어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편안하게 예배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나의 편안함은 그냥 봉사료 냈으니 그냥 당연히 누리는 권리쯤 생각되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고 맙니다.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그분들의 수고에 마음을 나누고, 그 헌신의 삶에 동참할 수 있다면, 우리 교회는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내가 편한 것은 그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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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22.2024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난 주간에 목회자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2022년에 우리 교회에서 대한민국 학사장교출신들 중에서 군에서 제대한 후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님이 되신 분들 가운데 북미주에서 목회활동을 하시던 목사님들을 저희 교회가 초청하여 팬데믹 이후에 지치고 힘든 목사님들을 섬긴 것이 도화선이 되어서 매년 목회자 세미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3차 모임인데, 모임이 거듭될수록 정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끈끈한 사랑과 섬김을 그안에서 찾고, 사모님들도 같이 모이면서 울며 불며 밤을 세우다가 치유함을 받는 은혜까지 경험하게 되니 자발적으로 오고싶은 모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지나서 수십년이 지나고 나니, 어느 세월에 제 앞에 선배기수는 2기이고 제가 3번째 기수여서 가장 어른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이도 연장자이고, 깃수도 앞 기수가 되어 있는 저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임중에 여러 돌발사태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가 보니, 이 어른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른 됨’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나이가 많다거나 오래 머물렀기에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어린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는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어린 아이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변의 어른들을 보면 ‘큰 어른이구나’라는 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른답게’ 성숙 모습을 가진 사람임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만 들어서 어른처럼 보이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여전히 ‘자기중심적, 이기적’ 어린아이 같다면 그는 어른이 아니라 그저 노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늘 자기 욕심이 앞서고, 헌신과 희생은 뒤로하고 자기 이익에 빠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 조차도 늘 자기 중심적이거나 배려와 타협과 용납이 없이 고집스런 삶을 자신도 모르게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론 자기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손해도, 속상함도 각오해야 합니다. 나보다 남을 배려하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도 찾아서 배려하는 것은 ‘이기적’ 마음이 아니라 ‘이타적’인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나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나 가정에서 ‘덕을 끼쳐야’합니다. 남의 아픔에 민감하고, 말한마디에 신중하고, 상처받았다고 되로 받고 말로 갚아주는 삶을 살아서는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여보니 알겠더라고요. 나이가 들었어도, 목사님이 되었어도 여전히 행동과 생각은 늘 ‘자기중심적인 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올바른 공의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사랑도 배려도 용납도 용서도 저버린채 판단과 정죄하는 것은 어른이 아니라 여전히 ‘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른의 위치에 있는 저의 모습에서 ‘어른’이 되어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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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5.2024 기도는 노인들의 전유물인가?
    ‘목사님, 새벽기도회가 힘이 좀 빠졌지요?’ 늘 새벽을 깨우러 오시는 어느 목사님의 대화중 말씀이었습니다.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아지다가 보니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 같아요’라고 변명을 하였습니다만 대답을 해놓고 보니 답이 틀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런가? 노인들이 줄어들고 젊은이들이 늘어서 기도하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이것이 맞는 말인가? 그렇다면 두 가지가 사실이라는 말인데, 첫째는 젊은이들은 기도 안해도 된다는 당연성, 둘째는 기도는 노인들이 하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맞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기도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시간이 나면 기도해라. 바쁘지 않을 때 기도는 해야하는 것이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노인과 젊은이를 구분하지 않고 ‘기도하라’ 명하십니다. 왜냐면 기도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축복’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 섭리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민자 젊은 가정들(한국도 마찬가지)이 물리적으로 받는 압박과 고충은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쫓겨 삽니다. 자신들 출근해야지, 자녀들 깨워서 학교보내고, 라이드, 픽업해야지, 과외활동도 해야지, 자신들의 사회/가정 활동도 해야하는 등, 정말 따지고 보면, 일분 일초가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어느 유식한 권사님 한 분이, 새벽예배를 다니게 되면 소비되는 시간과 개스비가 장난이 아니라서 집에서 기도한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가성비를 따지고 보면, 그냥 집에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라는 계산이지요. 이러 저러한 이유로 정말 기도하는 것은 가성비가 떨어지고, 시간 많은 노인들에게나 적합한 일이라는 이유가 너무나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요? 그렇다면 노인세대는 어떤가요? 사실 젊은이들의 시간사용 내용과 대조해 보면 노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노인이되어 보면 몸도 과거와 같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아프기 시작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고, 자기 몸 다스리기조차 힘이듭니다. 거기에 손주들 돌아보는 시간이 더해지고, 자신들의 취미생활을 고려해 보면 하루가 왜 그리 바쁘게 돌아가는지 젊은이들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기도 못하는 것도, 바빠서 기도 못하는 것도, 피곤해서 기도를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쩌면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핑계(?)일 수 있습니다. 피곤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더욱 기도해야한다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무엇이 우리의 우선 순위인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기도가 우선이냐, 내 피곤함(시간의 모자람)이 우선이냐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시간을 내거나, 어떤 비용을 지불해서든 이루고 싶어합니다. 피곤하냐, 시간이 없냐는 그다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기도는 노인이기에 기도해야 하고, 젊은이는 기도안해도 되는 법은 없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어떤 능력(유익)인지를 알면 기도하게 됩니다. 깨달게되면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성도는 마침내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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