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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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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03.2024 창립 15주년에 되새기는 고백
    지난  새가족  환영회에서  교회창립에서  지금까지  발자취를  담은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가슴속으로 지나가면서 감동이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교회의 시작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역사를 경험했던 저에게는 우리 성도들이 느껴보지 못한 신비한 하나님의 손길을 생생 하게  경험하였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인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목격한’ 저 자신만의  감동이  아닙니다. 마치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전해진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 보지도  못했던  예수를  사랑했다고  하듯, 비록  시작부터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고, 초기의 성도들의 헌신으로부터 시작하였지만 지금 이 교회가 내가 몸을 담고, 내 영혼을 살리는 영적산실(靈的産室)이 됨을 알기 에 교회의 창립을 기념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뿌리를 인정하는 고귀한 자리임 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가  한  형제,  자매요, 한 교회를 섬기는 주님의 일꾼들이기에 이 교회는 너무나 소중한 곳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15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교회의  설립부터 자세하게  지켜본  저는  철저하게  무릎꿇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힘과 능력이 있어서 했겠습니까? 힘있는  어느  누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물론  그때마다,  어렵고  지칠  때마다, 교회에 헌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물질과 땀과  수고  그리고  기도와  사랑으로  제  힘으로는  풀수  없는  숙제들을  하나씩 풀어주신 분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워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는 데,  이곳을  교회로  용도변경하는  문제는  더더욱  큰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역시 ‘산이 바다에 빠지는 기적’처럼 눈물의 기도위에 이루어지게 되었습 니다.  결국  이  ‘주님의  교회인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저 종교적인 말이 아닙니다. 요즘의 상황속에서 더더욱 그것이 소중하게 느껴진 것이 없습니다. 잘못하면 말(신앙고백)은 그렇게 하면서 도  마음  어느  한켠에서는  ‘그래도  내가  했던  것이  있잖아!’라는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일처럼  생각되고, 나 없으면 안되는 것처럼 여기는 조짐들이 보였기에 나도 혹시 그런 사람들처 럼 이렇게 내가 한 것이 아까운 것은 아닐까? 남들이 안 알아주는 것이 억울하 고,  내  자리를  이렇게  견고하게  욕심스럽게  지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숨은 생각이 들켜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생겼습니다. 이 고백이 사심없는 고백이 되려면, 내가 이룬 것들을 잊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나의 수고, 헌신, 노력을 잊어야 정말 하나님이 하셨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순간 순간 본전생각이 나면, 내가 수고하고 헌신한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그  헌신과  수고는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내 수고와  헌신이  잊혀져도  주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고전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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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0
    아름다운교회 Feb 25.2024 말씀의 씨앗 관리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을 여러 각도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최고 설교를 담은 것 입니다. 그 중에서 ‘씨뿌리는 비유’는 제자들이 별도로 설명을 요구하면서 드러 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이 4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길가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 씨앗은  새(마귀)에 의해  즉시  먹어치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았기”(13:19)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깨닫지  못한  그 책임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있지 않고 본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 깨닫도록 말씀을 전해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이의가 가능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 책임 은 본인에게 달려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빼앗기는 것을 타인의 책임 에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책임입니다. 말씀이  뿌려져서  원수가 먹어버리도록 깨닫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 로 있으면 원수가 먹어버리면 내가 손해입니다. 그러니 기를 쓰고 들려지고 읽 은 말씀이  깨달아지도록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말씀 관리를 잘 안합니다. 목숨 걸고라도 내 귀와 내 심령에 떨어진 말씀이 최소 30 배에서 100의 열매를 맺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 니다. 무미건조하게 말씀을  읽기나 들을 경우,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할 경우,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들으라고 버티는 경우, 무관심으 로 방치할 경우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경우는 자신 안에 감정으로  치우쳐졌을  때입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해지면  말씀이  왜곡되기가 쉽습니다.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이 들리지 않고, 자꾸만 남이 들어야 할 말씀으 로 초점을  이동시키거나, 자기안의  분노의  감정이  있을  때에는  마치  스데반의 군중처럼, 들은 말씀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치는 기이한 현상도 나타납니다. 이것 이 위험합니다. 자기 감정을 다스리고 말씀앞에 서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에서는 은혜받아 눈물 콧물 쏟는데, 나만 악한 새를 배불리게 하는 잘못을 범합 니다. 왜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이를 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 안의 감정선이 건드러졌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는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살라고 부추키는 시대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교회안에 서도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씨앗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  안에서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니 말씀이 왜곡되어 들려지도록 하는, 내 마음의 깨지고 상한 부분 이 없는지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오늘도 악한 자는 우리안에 들어와 말씀 이 심겨지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자기 감정 선에 맡겨 말씀이 왜곡되거나 복이 되지 못하게 방치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하게 우리는 말씀이 들려오는 통로가 깨끗하도록 관리하고, 기도하 고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관리, 생명다루듯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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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9
    아름다운교회 Feb 18.2024 자기를 돌아보는 삶
    새벽에 집에서 나오면서 시간이 촉박하여 머리를 감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정돈되지 못한 머리를 반대결로 빚으며, 교회가서 다시 빗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예배인도를 하고 기도와 식사교제등을 마치고 내 방에 올라와 거울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가 엉망이 되어있었습니다. 교회와서 머리를 제대로 빗는 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방치한 탓에 이상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 모습을 예배 전에 성도들도 봤을 것이고, 아내도 봤을텐데,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는 말이야? 헐~~ ’ 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살피지 못한 제 불찰이었습니다. 예배 전에 거울을 한번 더 봤더라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실수를 경험합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본의아니게 실수하기도 합니다. 작은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여 되돌릴 수 없는 아픔을 가져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실족케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면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실수와 아픔을 통해서 배우고 강해지고 새로워 지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마다 비판과 공격의 기회로 삼지말고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갈6:1). 우리는 자주 그러한 유혹에 빠집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남의 잘못은 잘 보이는데, 내 잘못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남은 잘 비판하게 되는데 자신을 향한 비판은 어렵습니다. 심지어 자각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의 눈의 티끌보다 나의 대들보를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너무나 관대한 나머지 심지어 ‘나는 온전하다’고 착각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온전하여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니 너는 맞아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비판을 우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사람들이 현장에서 잡힌 죄인이라는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당장이라도 돌로 칠 듯이 손에 돌을 들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요8:7)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항상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손에 돌을 드는 것은 다음 일입니다. 나를 돌아보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의’가 ‘나의 악함’으로 변질됩니다. 내가 나의 모습을 반추해보지 않았기에 난장판 머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머리 잘 빗으라’고 이야기 했으니 얼마나 가증했을까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배 후에 어떤 분이 오셔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회개하라고 하셨는데, 제가 혹시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해 주세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말씀앞에 나를 먼저 세운 그분이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먼저 돌아볼 때에 우리는 한걸음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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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8
    아름다운교회 Feb 11.2024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니 여기저기서 카톡문자가 올라와있었습니다. 설날인사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실 신정보다는 구정이 더 익숙해져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오랜 미국생활에 익숙해져 구정인사를 받는 것이 낯설어집니다. 하지만 민족의 최대 명절중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멀리 계신 어머니에게 설 날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장수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가까이 하고 산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철이 좀 나서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에는 이미 늦어서 부모님이 안계신 것이 대부분인데, 아직 저는 아직까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고 계시니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복지로 삶을 사시는 어머님은 지금도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올 때면 빈손들려 보내지 않습니다. 궂이 밥값을 내시거나 어려워보이면 용돈까지 쥐어보냅니다. 아직도 당신의 손으로 베풀어야 마음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어머니께 가끔 선물도 하고 용돈을 드리는 것보다 어머니께서 제게 주신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내가 더 드리고, 내가 더 베풀고, 내가 더 어머니께 한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따져보니 어머니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것이 훨씬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드리는 용돈에 자랑스러워하고, 때론 아까운 마음으로 드린 적도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많다는 것을 잊는 불효이지요.이런 일은 단지 육신의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림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헌신과 충성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것을 드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참 부러울 정도로 많은 것으로 드린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에 비하면 많은 것일까 요? 부끄럽게도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많은 것을 계산합니다. 되도록 덜 드릴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단지 그것이 물질의 문제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헌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아까워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계산법입니다. 계산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드리든 가장 최고의 것을 주시기에 꺼려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8;32). 우리의 작은 것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것을 보시지 않고 이미 많은 것을, 아니 최고의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법과 하나님의 계산법이 틀린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린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만은 내가 드린 것으로 나의 헌신을 측정하려고 합니다. 만족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무기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헌신은 가증하고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미 드린 헌신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직 감사로 드린 것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드린 것에는 내가 남아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내가 받은 것이 항상 내가 드린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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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7
    아름다운교회 Feb 04.2024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과 교회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세우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가정을 세우고, 자녀들을 세우고, 기업을 세우는 노력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우는 노력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세워진 것들을 잘 관리하고 잘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몇해  전 한 가정을  심방하는데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LA에서 이름만 들으면 아는 회사를 운영하던 자기 사장님이 40대 초반이었는데 돈을 엄청나게 잘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급 차도 몇 대 가지고  있고, 거의  매일 골프를 치러 다녔습니다. 또 이렇게 잘 나가다 보니 건강을 챙기려고 헬스 클럽을 다니면서 온갖 영양제도 챙겨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잠을 자다가 갑자기 뇌에 문제가 생겨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제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교회를 한 동안 잘 안 나갔는데 그걸 보면서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제부터 이분이 신앙생활을 잘 하시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주 한주 기다려도 교회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옆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도 다시 신앙을 회복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얼마 전부터 새벽예배 후에 기도를 할 때마다 제 머릿 속에 계속해서 맴도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의 말씀이죠. 사람이 많은 것들을 세워보려고 온갖 힘과 열정과 수고를 쏟아부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되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세우는  것은 언젠가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을 더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열심히 모아놓은 재산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자녀들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쓰죠.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형통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 아름다운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많은 분들의 땀과 수고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도약을 하고있는 지금 시점에서 또 많은  분들이  교회를  세워보고자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교회는  든든하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어떤  비바람과  모진  풍파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떡하지 않고 든든히 세워져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지속적으로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를  세워주시도록  기도에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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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6
    아름다운교회 Jan 28.2024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러기에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끼리 잘 지내고, 사랑하며 지내자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산물입니다. 정말 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그리고 우선 순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올 해 표어가 그것을 향하여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예수님을 믿어 참되게 행복해 지는 것과 동시에 교회와 성도로서 잊지 말아야 할 사명이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여 영혼구원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혹자는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데리고 오는 것이고, 영혼구원은 목사님이 하는 것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목회자는 성도들이 영혼구원을 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전도는 성도들이 하는 것입니다(엡4:21).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배워야 하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특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영혼을 주님께로 안내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기에 전도자는 성령께 의지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부인에게 명품가방을 선물해주고 그것을 몰카에 담아 고발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영부인이 그 일로 구설수에 휘말리는 일이  정치적으로 좌파냐, 우파냐를 저는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에서 멀게 한 것이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앞으로 그 영부인은 기독교, 그리고 목사라고 하면 치를 떨것이 분명하고, 기독교에 부정적인 것은 물론이고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앞으로 기독교의 ‘기’자만 나와도 분노할 것이고, 목사의 ‘목’자만 나와도 치를  떨 것입니다. 그 일을 벌인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함하고 고발하는 일을 함으로 영혼구원의 기회를 날리는 일을 목사가 했다는 것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차라리 목사라 부르지 말든지... 한국의 대전에서 목사가 길거리에서 전도하다가 20대 여인이 교회를 안 따라온다고 폭행을 해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왜 전도를 하는것일까요? 영혼구원을 할 수 있는 절대기회를 모두가 놓친 것입니다. 그것도 목회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말이지요. 전도는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요? 화가 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런 사람들뿐일까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다를까요? 그들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것일까요? 교회안에서도 찾아온 사람들이 정착을 하지 못하도록 온갖 잘못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이 아닐까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는데 빛과 소금은 커녕 불을 끄고 다니거나 변질된 소금처럼 맛을 내지 않는 일을 하는 우리들은 전도의 방해꾼이 아닐까요? 빛과 소금의 역할의 본질은 녹아지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녹여서 밝히고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자신을 녹여서 예수님처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 잘못된 열심이 오히려 방해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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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5
    아름다운교회 Jan 21.2024 극상품 포도나무에 달린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을까요. 이것을 과연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피상적이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이나, 혹은 자기 사랑의 대체물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왜냐면 그 사랑이 열매없는 빈 깡통일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이사야 5장). 기름진 땅은 이스라엘 족속이고, 포도나무는 유다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는 ‘들포도’ 를 맺었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극상품 포도나무였을까?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하나님께 제대로 한번 순종했나요? 가나안에 온 이래 언제 제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 적이 있었나요? 늘 배반하고, 가슴 찢게 만들고 하나님의 슬픔의 대상이 되어 결국 하나님의 징계에 놓이지 않았던가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왜 하나님은 과한 표현을 했을까요? ‘극상품 포도나무’ 극상품이 아니라 최하품 의 백성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하셨을까요? 발견한 것 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극 상품이라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그 가치가 있다면 최고의 비용을 지불했을 것인데, 가장 비싼 가격을 주고 사왔기에 ‘극상품’이라는 표현을 했을 것 같습니 다. 그 비용은 십자가에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가장 비싼 값은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인 아들,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 예수를 아무 쓸모도 없는 죄인인 나를 위해서 몸값으로 줘버렸다? 그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롬8:32). 가장 귀한 것을 주셨기에 더 이상 아낄 것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극 상품 포도나무라 하신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주셨기에,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셨기에 더 이상 아낄 것이 없는 귀한 존재인 ‘극상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잘나가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그것을 ‘칭의’ (Jus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여겨주시는 것, 의롭지 않은 존재인데,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존귀한 자라 불리워진 그리 스도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존귀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로서 그 열매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내 잘남도 아닙니다. 실수도 많고, 고집도 세고, 고약한 냄새도 납니다만, 말씀으로 돌아가 회개하고 다시 늘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누군가 외칠 때 듣고 고쳐야 합니다. 아니면 가룟 유다의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는 내 감정에 충실하도록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신 사람은 내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서 순종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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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4
    아름다운교회 Jan 14.2024 목자를 세우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부적으로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려고 몰려들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사람들 12명을 불렀습니다. 충성스러운 베드로에서부터, 배반자 가룟 유다 까지 소수의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늘로 승천하시면서도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마28장).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능력이 모자라서 제자들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그 제자들도  못 미더워서  다른  제자를  두도록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인생 말년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대 위임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다시 제자들에게 사명을 위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고, 사명이 어떻게 세대를 이어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가정교회와 제자양육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핵심가치로 여기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사명이 좌절되기도 했고, 미약해지기도 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의 제3의 부흥을 기대하면서 다시 가정교회와 제자훈련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목사님과 함께 이 과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못해봤던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목장을 세분화하고,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분들에게 이 목장의 짐을 맡겨드리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또한 어느 때보다도 더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심정을 피력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눅10:3). 위험하고 험난한 사역이 이리에게 잡아먹힐 힘없는 어린 양인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이지요. 저 역시 그런 심정입니다. 새로 세워진 목자들에게 가야 할 그 길은 꽃길의 영광보다는 좌절과 상처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는 십자가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위하여 정말 처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목원들이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거절과 비협조가 아니라, 같은 어린 양의 마음으로 동역하고 도와주고, 함께 그리스도의 부흥의 초원을 누릴 수 있는 참된 목자로 함께 세워 지는 분들이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수고와 아픔을 이해 해주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롬12:15). 그리고 그분들의 부족함을 폄훼하며 뒷담화 하거나 지적질하지 않고, 그 부족함을 목원들이 메워 주는 사랑의 마음 그리고 그 분들은 그리스도의 권세로 교회의 위임을 받아 이 사역을 하고 있음을 믿고, 그 분들의 영적권위와 리더의 지위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이 후에 세워질 목자들도 자신감과 위로를 가지고 헌신 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세워짐에 실패하면 앞으로 우리에게는 좋은 리더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이 ‘위임명령’을 완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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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3
    아름다운교회 Jan 07.2024 교회여, 회복을 위해 울고, 복음의 영광 위해 일어나라!
    누군가 말했습니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길도 아닌 곳을 내디뎠고, 그 후에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음으로 마침내 길이 되었다는 말인데, 여러 의미로 다가오게 합니다. 우리 아름다운 교회도 15년전에 시작할 때는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고,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혼란을 겪던 2009년에는 더더욱 두려움의 길이였습니다. 참 많은 눈물과 기도를 쏟아부으며 걷기 시작하니까, 다른 이들이 함께 걷기 시작했기에 오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함께 믿음으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 15년을 뒤로하고, 이제는 길이 된 이 길을 16년차를 향하여 다시 한번 미지의 길을 교회가 나서는 새해 첫 주일을 맞습니다. 기억하기는 지난 15년동안 한번도 경제가 좋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해마다 올해는 더 어렵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 해를 걸어가게 됩니다. 올 해 우리는 정말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또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이미 여러차례 언급해 왔듯이 올 한 해에는 세대교체를 위해서 제2대 담임목사님을 청빙하여 함께 사역을 하는 초유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실험과정이 순탄하게 진행되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성도들의 성숙한 자세가 필요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릇의 크기를 다루어 보고 계십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교회의 축복으로 누릴 것인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박 목사와 권 목사는 이 일에 하나가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아래,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제3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저기서 기도와 협력 그리고 사랑과 축복의 격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리 교회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생명력있는 은혜의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그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이 바람이 미풍이 아니라 강풍이 되기를, 아니 그것이 복음의 영광을 향한 태풍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보았던 작은 구름 이 미풍처럼 보일지라도 마침내 ‘큰 비’라는 태풍으로 바뀌어 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 교회에 2024년에 하나님의 주시는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에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새 길을 위한 목표/표어를 두 목사가 기도하며 제시합니다. ‘교회여, 회복을 위하여 울고, 복음의 영광 위해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허락하실 제3의 부흥을 바라보고 반드시 거쳐야 할 푯대라고 믿어졌습니다. 펜데믹 이후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부정적인 영향력과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갇혀있는 사회와 현실에 묻혀버릴 수 있는 이 시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회개하며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 살 길이 생깁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눈물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흥의 영광, 복음의 영광이, 파도같이, 태풍처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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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2
    아름다운교회 Dec 31.2023 감사로 한 해를 닫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하루 남은 이 한해를 뒤돌아 보면서 누구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공평함과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지나 온 모든 날들 그리고 겪었던 수 많은 일이라는 한 해의 짐을 싸면서 그 마무리 한 마디를 ‘감사’라 적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지 않으면 감히 누릴 수 없는 선물이었음을 안다면 우리는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크고 작은 선물을 받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선물을 받을 때마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늘 받던 선물이 오지 않게 되자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건 가?’라는 생각이 들어오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화가 나서 따졌다고 합니다.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말이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공짜로 받고 있는 삶의 은혜앞에서도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 착각하며 감사하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로 경멸을 보냅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감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들을 주셨는데, 그중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이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특권’ 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요1:21).  그 특권과 함께 또한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욕구가 아닌 주님의 마음을 이 땅에 펼치는 제자로 살도록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력적 사역을 감당할 특권 또한 주셨습니다. 일하는 자에 게는 할 수 있는 능력의 특권을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특별히 성령의 보호와 은혜속에 하나님의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냐 아니냐는 나타나는 표적이 아니라 ‘열매’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열매중에 ‘감사와 믿음’이 포함되지 않았을까요? 묵상하다가 깨닫게 된 것은 성령의 열매의 결과는 결국 믿음과 감사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늘 감사와 믿음을 고백하는 삶을 삽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감사’로 보내고 싶습니다. 감히 받을 수 없는 죄인에게 베푸신 사랑도 감사하고, 살면서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도록 아픈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감사하고, 우리의 기대와 기도이상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열매를 따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의 고백과 함께 이 한해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원망하다가, 불평하다가, 망했던 광야백성이 되지말자’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억울하다고, 힘들다고, 왜 내게만 이런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이냐고 따져묻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자식처럼 살아도, 그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 릴 때가 오는 것처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감사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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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1
    아름다운교회 Dec 24.2023 성탄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매일 매일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적 삶의 예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성탄절, Christmas의 날을 기리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에게 성탄절은 White Christmas를 고대합니다. 하얀 눈에 덮힌 온 천지를 바라보며, 성탄 새벽송을 나섰던 전통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미묘입니다.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성도들의 가정을 돌기도 하고, 소방서, 경찰서등의 관공서를 들러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며 다녔던 일은 마치 내가 천사가 되어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기쁨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은 지금은 없어졌을 듯 합니다만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서 종교의 중심에 선 사람이 되었고, 수십년이 흘러,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성탄의 정신과 의미가 희미해져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성탄의 감사와 감격을 다시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강렬한 마음이 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요즘 제가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를 자리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히려 강퍅해지고, 굳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한 마디가 나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얼굴의 근육운동을 해 보세요. 너무 굳어있어요!’ 안타깝게 내 뱉는 아내의 이 한마디를 들으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굳어졌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이 완악해지고, 굳어져서 강팍해졌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마음의 쓴뿌리와 죄악의 쓴뿌리가 섞여져 내뱉는 신음에, 다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집회의 찬송과 기도를 유튜브로 동참하면서 깊은 회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집중하지 못하고 환경에 집중하다가 잃은 영성과 감사가 떠올랐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척박하게 했던가를 기억하며 회개 기도를 마음속에서 올렸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가장 고귀한 자리까지 버리시고’ 이 땅에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는데, 그것이 성탄절인데, 나는 이미 너무 높은 곳에 앉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어서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절의 정신이요 의미입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닌 사람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외치기를, 주님이 죄인을 위해 오셨다면 “내가 바로 그 죄인일 뿐만 아니라 죄인가운데서도 가장 질이 나쁜 괴수”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내 안에 그 은혜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은혜가 내 안에서 사라지니 미움이 대신하고, 원망과 전쟁이 자리하였습니다. 베가스에 눈이 내리지는 않습니다만, White Christmas를 기대했던 어린 시절처럼, 온 세상을 하얀 눈으로 덮인 것을 보면서 우리의 더러운 죄악도 덮어주시려 이 땅에 오신 주님 의 은혜를 기리고 감사하고, 나같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송 하는 은혜를 내 안에서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내 안에 다시 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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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
    아름다운교회 Dec 17.2023 자기 자리 찾기
    지난 15년동안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찬송가에 ‘하늘을 두루마리를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한다해도 하늘이 좁고, 바다의 먹물이 모자랄 정도라고 하듯이, 정말 하나님의 지극히 큰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물도 많고, 약점도 많고, 쓸모도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써주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내년 한 해를 보내면 목회의 현장에서 완전히 내려와 평신도의 자리에 앉게 되겠지요. 요즘도 후임목사님이 온 이후로 설교를 서로 분담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설교를 하지 않을 어느 첫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1인 목회자로서 앉아있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기에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만, 이제 설교 강단에서 내려오니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내가 편하고, 교인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만, 우리 성도들이 나름대로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어서, 저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는 것은 지금도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리가 있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그 자리, 부모의 자리, 부부의 자리, 자녀의 자리, 성도의 자리, 목사의 자리, 장로/권사/안수집사의 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자리가 안정감있게 실행되어야 내가 소속된 공동체가 아름답게 됩니다. 어느 누구의 자리를 누군가가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체하게 될 때에 혼란이 생기고 몸살이 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리를 지켜서 그 맡은 본연의 임무를 감당해야 하고, 장로와 권사도 섬김과 봉사라는 본연의 임무를 성실하게 실행해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의 자리에서 영적 성장과 사랑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아름답게 도모해야 합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강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자리가 뒤바뀌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형’이라고 부릅니다. 코가 눈의 자리에 붙어있거나, 다리가 팔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기가 흉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에 자기가 있을 때에 가장 안정적이고 보기도 좋고, 가장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팬데믹의 공황을 지나, 부흥의 불씨를 안고, 성령의 거룩한 은혜의 바람을 받으며 이제 제3의 도약을 하려고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있습 니다. 그래서 과거의 옷인 낡은 옷을 벗어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가 담임목사의 세대교체입니다. 이것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조직의 교체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씀처럼 새로운 담임 목회자가 와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잘 만들어 주는 일이 두 번째 작업인데, 교회의 의사결정기구와 목장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이런 일들입니다. 그 동안 내 손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이 남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속상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내는 ‘기쁨’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신의 은사대로 ‘자기의 자리’를 찾아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행복을 누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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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9
    아름다운교회 Dec 10.2023 내가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페북에서 본 영상중에 공감되는 것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중국의 어느 토론 자리에서 두 학자가 맞붙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주장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대체 뭘 잘못한 것입니까? 공산당 때문에 이만큼 먹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다른 학자가 진지하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제가 진실을 말해줄게요. 1950년부터 3년간 토지개혁이 있었어요. 개혁이 시작한 1년만에 땅을 갖고 있던 농민 중 260만명이 죽었어요. 농부가 없으니 굶주림이 시작되었죠. 1962년에 공산당 전체회의가 열렸어요. 자연재해라고 결론냈죠. 그렇게 굶어 죽은 사람이 4,300만명입니다. 중국역사를 통털어 굶어죽은 사람 숫자를 다 합쳐도 이보다 훨씬 적습니다. 그리고 1931년 일본이 동북삼성을 침략했죠. 당시 일본이 14년간 통치했는데 그때 죽은 중국인 숫자가 2,100만입니다. 1949년부터 마오쩌 뚱이 통치한 28년동안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는 동안 8,000만명이 사라졌습니다. 일본인 전쟁에서 죽인 중국인의 숫자보다 4배란 말입니다. 학자라면 진실을 말할 줄 알아야죠. 당신도 학자이고, 나도 학자입니다. 근데 차이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공산당을 사랑한 것이고, 나는 중국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토론을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습니다. 진실을 말하겠다고 이야기하는 학자의 진지함속에 묻어 나오는 한마디, ‘당신은 공산당을 사랑한 것이고 나는 중국을 사랑한 것이 차이점이다’고 하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울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매 주일 찬양과 말씀을 들으며 헌신을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열심히 섬기기도 하고 희생도 합니다. 내 몸이 부서져라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으며 모든 고난과 비난 그리고 수모와 수치까지 감당해 냅니다. 영광의 박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혜의 조명이 내 안에 비추일 때에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주님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의 명예와 자랑을 위해서 뽐냈던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 의견과 내 주장이 먹히지 않으면 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짜증이 납니다. 그동안 참고 인내해왔던 모든 것, 그동안 모든 것을 다 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것들이 아까워지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고개를 들고, 치떨리는 분노가 사라지지 않으며, 억울함과 야속함으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아니 었던겁니다. 내 명예, 내 위치, 내 자랑을 위해서 해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 중국의 학자의 이야기처럼, ‘공산당’(내가 누릴 유익)을 사랑했던 것이지, ‘중국’(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제 목회를 내려놓아야하는 시간앞에서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박목사, 그동안 네가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공산당이었느냐, 중국이었느냐?’ 내 명예와 내 헌신이 주님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깊이 반성해 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잘 정리될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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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8
    아름다운교회 Dec 03.2023 명품사랑
    명품, 솔직히 수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몇 가지 명품외에는 어느 부분에 어떤 제품이 명품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명품은 제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보니까, 아니 더 솔직하자면, 그것을 구입할 능력이 안되기에 일부러 외면 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펜데믹을 지나면서 명품시장은 전례없이 사상 최대의 성장을 기록했다고 경제계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 명품브랜드는 200%가 넘는 주식가치가 상승했다고 합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운 시대에 명품시장들은 오히려 더 성장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한국은 명품업체의 중요한 고객이라고 하는데, 한국인의 명품사랑은 유별나다고 하네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Open run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서, 제품이 들어오기만하면 줄서서 달려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명품은 ‘과시욕. 만족감, 자기애, 보상심리’등의 다양한 심리욕구에 의해 구매되어진다고 하는데 그것이 있음으로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기는 사회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연 명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비교적 가성비를 따지는 입장이라서, 명품의 가치는 인정 하지만, 명품을 쓰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요즘 자그마한 경험 하나가 명품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iPad를 여러 모양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데, 늘 Keyboard를 가성비를 따라 저렴한 것들만 골라서 사용하다가 보니, 얼마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여 속을 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명품(?)같은 것을 사기에는 너무나 비싸서 늘 미루고 있던 차에, 마침 고장이 나서 Black Friday Sale에 눈에 들어온 Keyboard 분야의 명품을 큰 맘먹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 이래서 사람들이 명품을 찾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너무나 편하고, 가볍고, 제대로 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무조건 비싸다고 명품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명품을 모르는 제게도 이렇게 좋은 것도 있다는 생각을 바꾸게 할 정도로 명품은 명품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명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조건 은혜받았다고 명품신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마7:6)고 하였습니다. 왜냐면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명품처럼 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주고 살 수 없는 귀한 보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내가 그것을 빛내지 못한다면 그 은혜 가 빛을 바래서 명품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명품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얼마든지  무가치하게  만들수가  있고, 보물이  보물로  드러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명품을 아름다운 사람이 사용하면 정말 아름 답게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되어야 하는데, 욕이 되게 하면 안됩니 다. 은혜를 받았어도 오히려 은혜가 욕으로 작용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 차라리 은혜가 없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품은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면  빛이  납니다만, ‘교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면  은혜의  빛이  망가집니다.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자에게  명품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 (잠 25:11)처럼 빛이 납니다. 신앙이 우리안에서 명품의 진가로 발휘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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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26.2023 보물을 찾다
    한 해의 사역과 그동안 평생을 달려온 목회사역을 정리하는 시간앞에 서면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평생을 목회라는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그 사역을 내려놓을 것을 작정하고 교회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기를 원해서 조기 은퇴를 겁없이(?) 결정하고 나니 주변에서 우려와 기대의 마음을 건네주었습니다. 이제 제2대 담임목사가 부임하고 하나씩 세대교체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허탈과 서운함보다는 정말 잘했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이 제게는 참 놀랍습니다. 언젠가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 목회사역 가운데 가장 잘한 것이 있다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는 것과 조기 은퇴를 결정한 것이 나와 교회를 위해서 정말 신의 한 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은퇴를 하고 싶지않아서 나이를 고치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오랫동안 머무르려고 합니다. 100세 시대에 나이 70도 젊다는 생각과 인생은 70부터라는 사회적인 격려가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이른 은퇴를 결정하고 나서 제 눈에 하나님은 한 가지 좋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서 원망하고, 섭섭하고, 가슴을 끊어내는 아픔도 있기에 당연히 그런 것들이 쓴뿌리가 되어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일들은 그저 감사하고 주옥같았던 일들만 가슴에 남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안보였던 보물같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눈에  콩깍지가 쓰였다는 말을 합니다. 사실 그 사람이 달라져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적 변화는 그렇게 만들기도 합니다만, 그렇지 않다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눈에 무엇인가 콩깍지가 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콩깍지’가 내 눈에 씌여지니 사람이 달라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버려진 폐기물이 아니라 감추어졌던 보물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분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세상의 온갖 찌꺼기같은 욕심과 욕망으로 뒤덮혀 살던 우리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 예수믿는 우리들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안에서 우리를 보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허물을 대신 지시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새로운 사람을 지어’ ‘보물’로 바꾸시기 위한 하나님의 극약처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보물’입니다. 만일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미움의 대상으로 보이면 내 눈에 은혜의 콩깍지가 없기 때문이고, 충분한 은혜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으면 세상이 달라보이고, 사람이 달라보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물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그야말로 보물찾기입니다. 오늘이 우리 모두에게 보물로 발견되어지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도 주안에서 보물이 되고, 다른 사람도 주안에서 보물로 인정되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보물은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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