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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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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14.2024 꽃이 피었습니다
    지금 캘리포니아에는 지난 해에 예기치 않은, 기록적인 강수량으로 인해 super blooming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15번 고속도로 주변에는 그동안 삭막했던 사막의 모습이 아니라 갖가지 색상의 꽃으로 덮힌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막을 달리는 또다른 재미가 있습니다만, 가는 목적지만 바라보고 가면 보이지 않는 꽃입니다. 꽃이 있다니.... ‘아, 꽃이 피었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릴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꽃은 피었지만 이 꽃이 보이지 않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달리는 것에만 마음을 쓰면 꽃은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꽃과 같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음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면 그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주장을 내려놓을 때에 비로소 그곳에 꽃이 있었고, 그 꽃이 정말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념이나 자기 생각과 주장에 몰두하게 되면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에 함몰되면 정작 남들은 보지만 나는 보지 못합니다. 바둑을 두거나 장기를 두어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축구 경기를 관중석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막상 뛰는 선수들은 보이지 않지만, 멀리서 보는 관중들은 공간도 보이고 수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관중들은 야유를 보내고, 마치 자기가 가장 잘 뛰는 선수처럼 흥분을 하고 비난을 합니다. 막상 뛰어보면 자기는 못합니다. 우리가 이땅에 이민자로 살면서 절박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야 하기에 ‘나 사는 것도 피곤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삶에 지쳐서 나도 모르게 needy person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여유를 주시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살라고 하심이 아닙니다. 나의 여유를 가지고 남의 필요를 돌보라고 우리에게 때론 시간과 물질과 지혜의 여유를 주십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의 넉넉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합니다(고후8:14). 이 넉넉함은 물질의 넉넉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마음의 넉넉함’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마음이 넉넉’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 중에 넘치는 연보’(고후8:2)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귀영화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서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왕상 4장). 사람에게는 한번 꽂히면 좀처럼 바꿀 수 없는 ‘고집’이 있습니다. 설령 내가 틀렸음을 알고도 그 고집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넉넉한 마음, 넓은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것이 열릴 때에 남이 보이고, 교회가 보이고, 이웃이 보입니다. 내 고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꽃이 피고 아름다운 산천초목이 열려도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내 마음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꽃이 피었습니다. 꽃을 보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지혜와 함께 넉넉한 마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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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07.2024 경건의 능력
    제가 알고 있는 파라과이 양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어려서 파라과이에 이민을 가서 살던 분인데 신학교를 제가 다녔던 총신에 유학을 오게 되어 같은 동기로 공부를 했습니다. 참으로 열정적으로 선교를 하시는 목사님인데, 얼마 전에 한국에 나와서 선교 보고와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하는 중에 그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팬데믹을 맞아 당신의 사역도 위기를 맞았답니다. 정부에서 실내 집회를 폐쇄하고 모든 선교의 길들이 막혔을 때에 선교의 길도 막혀서 내심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기도중에 이런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막혔다고 가만히 주저할 수 없지 않느냐? 예배당에서 모일 수 없다면, 사람을 모아서 군중과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정병훈련’을 통해서 사람을 양성하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빈민촌, 거리,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주일학교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주효해서 지금 파라과이에 복음의 새로운 운동이 일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선교는 예배당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팬데믹이 위기였는데 모이는 예배당 중심에서 흩어져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전략이 ‘뉴노멀시대의 선교’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교나 교회의 본질을 재 부각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신앙의 방향임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의 목회가 ‘모이는 교회’로 집중한 것이 사실입니다. 수백, 수천, 수만의 성도가 모이는 것에 환호하고 그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가슴을 치며 아파하는 것은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성장보다는 얼마나 우리에게 성숙함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까지 자랐느냐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고, 헌신적이라고 하면서도 한 순간에 쌓았던 모든 것들을 쏟아버리고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전락하는 일이 한 두 번의 일이었을까요? 자기 욕심과 자기 감정앞에 서스럼없이 무너지는 우리의 미숙한 모습은 교회의 자랑이 아니라 아픔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경건의 모양’을 쌓기에 얼마나 많은 열을 올렸는지 모릅니다. 어려서 존경하는 모교회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분인데 얼마나 신앙이 좋고 열심을 내셨던 분인지 모릅니다. 그 분이 맹장수술을 하는데, 예수님의 고난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마취도 하지 않고 생살을 째고 수술을 하셨던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그 헌신과 열심이 무너지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가슴아프게 지켜본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었을까, 무엇을 위한 헌신이었을까, 가슴아프게 지켜보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모이는 숫자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작은 숫자여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성령의 능력아래서 개개인이 말씀앞에, 성령앞에 내 개인의 욕심과 자랑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경건의 능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훈련, 말씀앞에 부딪혀 내가 깨지는 훈련을 지속해야 겨우 다듬어질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닌 능력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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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31.2024 부활 신앙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 교회는 지난 한 달동안 폭풍과 같은 힘으로 ‘기도와 말씀’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직시하며 브라가 골짜기 기도회를 통해 매일 저녁 한 시간 기도하는 일은 보통 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순절을 기해서 시작한 신약통독 40일과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며 ‘겟세마네 특별 기도회’등은 사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가능할 정도로 고강도의 훈련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교우들이 이 훈련에 동참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쉽지 않은 훈련을 견뎌낸 분들은 정말 위대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훈련없이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은혜받으면 저절로 성장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받은 은혜를 지속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고난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주변에는 받은 은혜를 쉽게 쏟아버리도록 유도하는 환경이 수없이 많이 근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지키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점점 더 쉽지 않은 것은, 팬데믹 이후 기독교 신앙의 결집력과 신앙의 초점이 많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신앙보다는 개인의 신앙이 더 중요한 주제가 되어서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 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60%정도에 지나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점점 교묘한 신학의 말장난성 주장들이 난무하여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혼돈될 시간이 올 것이 두렵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온 교회가 그 신앙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부활주일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신앙은 바로 ‘부활’에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고, 부활이 가짜라면, 우리의 믿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만일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세상의 종교중의 하나로 남아 고상한 ‘도덕주의’에 불과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겪을 장래의 소망으로서 부활을 확실하게 믿어서 그 모진 고통과 역경들을 부활신앙 하나만으로 견뎌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고전15장). 부활이 무너지면 기독교의 모든 신앙적 쳬계와 고백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이 부활을 확실하게 믿었기에 예수 부활을 확실하게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중심을 바로 이 ‘부활’에 두고 해석해 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부활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것이 단지 신학에 그칠 뿐만 아니라, 삶을 꾸려가는 가치관이 되었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육의 한계를 정하는 첫째 사망이 있고, 영원한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이 있고, 영원한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신자의 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걷게 됩니다. 둘째 사망을 거치지 않습니다. 이 신앙이 오늘의 욕망과 불신앙, 비성경적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다르게 만들게 됩니다. 부활의 영광이 한없는 우리의 영광이며, 이 영광에 찬란하게 동참할 성도가 진짜 성도입니다. 매년 우리는 이 부활을 외쳐야 합니다. 신앙고백으로서 외쳐야 합니다. 가짜 신앙이 내 안에 깃들지 못하도록 말씀속의 이 부활신앙을 확실하게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신앙,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면 全部(전부)이거나 全無(전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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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4.2024 고난을 넘어 영광으로
    프랑스 철학자요,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테카르트(Descarte)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Je pense donc je suis”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지요. 인간이 사고(생각)하기에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파스칼은 더 나아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roseau pensant’라고 표현했습니다. 생각, 즉 무엇인가를 상상해 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여러 정황을 들여다 보면서 생각을 통해 推論(추론)이라는 상상력의 열매를 도출하기도 합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영역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렇게 상상하여 추론해 낼 수 있는 독특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상상력의 날개를 펴서,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가능한 비행기를 만들게 되었고, 말이 끄는 마차에서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고, 이제는 인공지능을 탑재하여 사람이 구태여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운전자가 필요없는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만큼 상상력은 꿈이 되고 Vision이 되어서 인간문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그 상상력이 선하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심에 맡기면 그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상력은 세상의 과학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에도 무한한 상상력의 능력을 비전으로 주셨습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확실한 비전을 믿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과 상상을 뛰어넘어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내 생각을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 죽음이 당해졌습니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마음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먹는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진짜 평안을 경험하면 죽음마저 우리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진짜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상상력위에 믿음의 힘을 입혀주심으로 현재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8:18)고 함으로 보이지 않는 곳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영광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환호하며 ‘하늘의 왕’을 ‘호산나’ 부르며 예수님을 맞았지만, 그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 위하여 오신 것이지 영광을 얻기 위하여 들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라고 했습니다. 영광으로 가는 길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인 십자가를 참아야 했고, 부끄러움을 견뎌야 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화려한 무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신앙생활을 화려한 조명이 있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고난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주인공도 고난의 훈련이 따랐던 것처럼,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고난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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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7.2024 말하지 않는 지혜와 인내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순절이 낯설기도 합니다만, 구교의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다는 주님을 닮아 가고 싶은 기간을 은혜롭게 보낸다는 의미로 우리 교회는 여러 훈련 프로그램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먼저는 40일 신약통독의 시간을 보내며, 말씀을 읽는(듣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40일동안 신약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렵습니다. 읽기를 채우기는 잘 할 수 있지만, 읽은 말씀을 묵상하며 내 안에서 옥토밭에 뿌려진 말씀처럼 듣는 것은 솔직히 쉬운일은 아닙니다. 말씀에 붙잡히지 않고서는 ‘고통이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부흥집회’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권재호 목사님을 우리 교회에 보내주셔서 메마른 사막의 목마름속에 갈급한 우리 심령에 큰 은혜의 소낙비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 꽃을 피워낼 수 있는 하늘의 기운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뿐 아닙니다. 브라가 골짜기 기도회는 어떻습니까? 기도보다 급한 것이 없고, 기도보다 완벽한 치료제가 없음을 알기에 여호사밧이 보여주었던 기도의 모범을 우리 역시 같은 마음으로 한달동안 선포하고 전에 한번도 시행해 보지 못했던 ‘저녁 기도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루 한 시간 기도에 마음을 쏟고 보니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던 한시간 기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매년 ‘겟세마네 특별 새벽기도회’를 열고 새벽에 기도해 왔지만, 올 해에는 특별히 ‘저녁 기도회’로 돌려서 겟세마네 기도회를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이지만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급하게 몰아치듯 진행하는 사역에는 하나님의 급한 마음이 함께 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각 사람의 심령을 붙잡고 흐트려 놓으려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을 선포해야 하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말부터 합니다. 말이 지나치면 불평이 되고, 원망이 되고 분열이 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할 시간에 말 때문에 어려워집니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하는 배경을 알지도 못합니다. 남의 속사정을 볼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비난 받는 일에도 왜 그런 일이 있는지를 누구도 배경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상상할 뿐’입니다. 그랬을거야, 그래서 요렇게 했을거야, 마음속의 상상을 그려놓고 그 상상에 악한 감정이 묻어나면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를 몰고가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말같지도 않은 말이 정말 말이 되어 상황을 어렵게 하기도 합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안에 일어나는 온갖 상상력을 누가 붙잡느냐에 따라서 엉뚱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성령께서 그 상상력을 붙잡으면 꿈과 비전이 되어 새롭게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마귀가 붙잡으면 파괴하고 악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럴 때, 차라리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근질근질합니다. 말이 하고 싶습니다. 깨달은 것은 차라리 말하지 않는 지혜를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 배경도 모르고 내 상상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확증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것도 지혜이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더 귀한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것이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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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0.2024 브라가 골짜기에서 부른 승전가
    요즘 우리 교회는 창립이래 해보지 못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渴望(갈망)’이라는 자세로, 브라가 기도회를 선포하고 온 교회가 기도하고 있는 일입니다. 특별 새벽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새벽을 깨우는 일들은 지난 15년간을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한달간을 저녁 기도회로 선포하고 기도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권순혁 목사님과 사모님의 마음에서 나온 일입니다. 교회를 향한 무거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겠습니다’라는 그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제 마음도 움직이셨습니다. 젊은 종이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하는 이 ‘옳은 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으는 것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옳은 일’이기에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몇 사람만 할 기도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 온 교회가 함께 해야 할 기도의 자리임을 하나님이 명하신 일로 받아들이고 브라가 골짜기 기도회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 일을 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공식적으로 말은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교회의 혼란한 분위기를 놓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누구냐’라고 묻는 것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교회를 더 힘들게 하고, 분열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문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是非(시비)를 가릴 때가 아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묻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할 말이 왜 없겠습니까? 당연한 이유가 왜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에 지나면 교회는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사람이 바꿀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누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한 마음을 누가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에게 달린 문제는 아닙니다. 말하면 할수록 오해가 쌓이고 분노만 커진다면 해결할 기미는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나이다’ 여호사밧은 기도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앞에서, 사신을 보내는 일도, 나라를 구하는 일도 우리 손에 없음을 인정하고, 전쟁하며 죽이러 오는 이방 군사들을 보면서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를 모으고, 전쟁을 대비하는 대신에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그 말은 전쟁을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하는 전쟁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선지자도 분석했습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맞습니다.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손의 전쟁을 멈추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호사밧이 전쟁을 하러 나갈 때에도 군사를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를 앞세웁니다. 전쟁을 바보같이 치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른 찬송이 ‘브라가의 찬송’입니다. 승리의 찬송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도회를 진행합니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 기도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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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03.2024 창립 15주년에 되새기는 고백
    지난  새가족  환영회에서  교회창립에서  지금까지  발자취를  담은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가슴속으로 지나가면서 감동이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교회의 시작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역사를 경험했던 저에게는 우리 성도들이 느껴보지 못한 신비한 하나님의 손길을 생생 하게  경험하였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인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목격한’ 저 자신만의  감동이  아닙니다. 마치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전해진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 보지도  못했던  예수를  사랑했다고  하듯, 비록  시작부터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고, 초기의 성도들의 헌신으로부터 시작하였지만 지금 이 교회가 내가 몸을 담고, 내 영혼을 살리는 영적산실(靈的産室)이 됨을 알기 에 교회의 창립을 기념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뿌리를 인정하는 고귀한 자리임 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가  한  형제,  자매요, 한 교회를 섬기는 주님의 일꾼들이기에 이 교회는 너무나 소중한 곳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15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교회의  설립부터 자세하게  지켜본  저는  철저하게  무릎꿇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힘과 능력이 있어서 했겠습니까? 힘있는  어느  누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물론  그때마다,  어렵고  지칠  때마다, 교회에 헌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물질과 땀과  수고  그리고  기도와  사랑으로  제  힘으로는  풀수  없는  숙제들을  하나씩 풀어주신 분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워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는 데,  이곳을  교회로  용도변경하는  문제는  더더욱  큰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역시 ‘산이 바다에 빠지는 기적’처럼 눈물의 기도위에 이루어지게 되었습 니다.  결국  이  ‘주님의  교회인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저 종교적인 말이 아닙니다. 요즘의 상황속에서 더더욱 그것이 소중하게 느껴진 것이 없습니다. 잘못하면 말(신앙고백)은 그렇게 하면서 도  마음  어느  한켠에서는  ‘그래도  내가  했던  것이  있잖아!’라는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일처럼  생각되고, 나 없으면 안되는 것처럼 여기는 조짐들이 보였기에 나도 혹시 그런 사람들처 럼 이렇게 내가 한 것이 아까운 것은 아닐까? 남들이 안 알아주는 것이 억울하 고,  내  자리를  이렇게  견고하게  욕심스럽게  지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숨은 생각이 들켜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생겼습니다. 이 고백이 사심없는 고백이 되려면, 내가 이룬 것들을 잊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나의 수고, 헌신, 노력을 잊어야 정말 하나님이 하셨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순간 순간 본전생각이 나면, 내가 수고하고 헌신한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그  헌신과  수고는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내 수고와  헌신이  잊혀져도  주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고전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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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25.2024 말씀의 씨앗 관리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을 여러 각도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최고 설교를 담은 것 입니다. 그 중에서 ‘씨뿌리는 비유’는 제자들이 별도로 설명을 요구하면서 드러 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이 4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길가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 씨앗은  새(마귀)에 의해  즉시  먹어치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았기”(13:19)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깨닫지  못한  그 책임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있지 않고 본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 깨닫도록 말씀을 전해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이의가 가능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 책임 은 본인에게 달려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빼앗기는 것을 타인의 책임 에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책임입니다. 말씀이  뿌려져서  원수가 먹어버리도록 깨닫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 로 있으면 원수가 먹어버리면 내가 손해입니다. 그러니 기를 쓰고 들려지고 읽 은 말씀이  깨달아지도록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말씀 관리를 잘 안합니다. 목숨 걸고라도 내 귀와 내 심령에 떨어진 말씀이 최소 30 배에서 100의 열매를 맺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 니다. 무미건조하게 말씀을  읽기나 들을 경우,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할 경우,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들으라고 버티는 경우, 무관심으 로 방치할 경우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경우는 자신 안에 감정으로  치우쳐졌을  때입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해지면  말씀이  왜곡되기가 쉽습니다.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이 들리지 않고, 자꾸만 남이 들어야 할 말씀으 로 초점을  이동시키거나, 자기안의  분노의  감정이  있을  때에는  마치  스데반의 군중처럼, 들은 말씀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치는 기이한 현상도 나타납니다. 이것 이 위험합니다. 자기 감정을 다스리고 말씀앞에 서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에서는 은혜받아 눈물 콧물 쏟는데, 나만 악한 새를 배불리게 하는 잘못을 범합 니다. 왜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이를 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 안의 감정선이 건드러졌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는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살라고 부추키는 시대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교회안에 서도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씨앗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  안에서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니 말씀이 왜곡되어 들려지도록 하는, 내 마음의 깨지고 상한 부분 이 없는지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오늘도 악한 자는 우리안에 들어와 말씀 이 심겨지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자기 감정 선에 맡겨 말씀이 왜곡되거나 복이 되지 못하게 방치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하게 우리는 말씀이 들려오는 통로가 깨끗하도록 관리하고, 기도하 고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관리, 생명다루듯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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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9
    아름다운교회 Feb 18.2024 자기를 돌아보는 삶
    새벽에 집에서 나오면서 시간이 촉박하여 머리를 감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정돈되지 못한 머리를 반대결로 빚으며, 교회가서 다시 빗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예배인도를 하고 기도와 식사교제등을 마치고 내 방에 올라와 거울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가 엉망이 되어있었습니다. 교회와서 머리를 제대로 빗는 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방치한 탓에 이상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 모습을 예배 전에 성도들도 봤을 것이고, 아내도 봤을텐데,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는 말이야? 헐~~ ’ 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살피지 못한 제 불찰이었습니다. 예배 전에 거울을 한번 더 봤더라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실수를 경험합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본의아니게 실수하기도 합니다. 작은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여 되돌릴 수 없는 아픔을 가져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실족케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면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실수와 아픔을 통해서 배우고 강해지고 새로워 지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마다 비판과 공격의 기회로 삼지말고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갈6:1). 우리는 자주 그러한 유혹에 빠집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남의 잘못은 잘 보이는데, 내 잘못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남은 잘 비판하게 되는데 자신을 향한 비판은 어렵습니다. 심지어 자각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의 눈의 티끌보다 나의 대들보를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너무나 관대한 나머지 심지어 ‘나는 온전하다’고 착각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온전하여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니 너는 맞아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비판을 우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사람들이 현장에서 잡힌 죄인이라는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당장이라도 돌로 칠 듯이 손에 돌을 들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요8:7)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항상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손에 돌을 드는 것은 다음 일입니다. 나를 돌아보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의’가 ‘나의 악함’으로 변질됩니다. 내가 나의 모습을 반추해보지 않았기에 난장판 머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머리 잘 빗으라’고 이야기 했으니 얼마나 가증했을까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배 후에 어떤 분이 오셔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회개하라고 하셨는데, 제가 혹시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해 주세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말씀앞에 나를 먼저 세운 그분이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먼저 돌아볼 때에 우리는 한걸음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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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8
    아름다운교회 Feb 11.2024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니 여기저기서 카톡문자가 올라와있었습니다. 설날인사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실 신정보다는 구정이 더 익숙해져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오랜 미국생활에 익숙해져 구정인사를 받는 것이 낯설어집니다. 하지만 민족의 최대 명절중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멀리 계신 어머니에게 설 날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장수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가까이 하고 산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철이 좀 나서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에는 이미 늦어서 부모님이 안계신 것이 대부분인데, 아직 저는 아직까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고 계시니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복지로 삶을 사시는 어머님은 지금도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올 때면 빈손들려 보내지 않습니다. 궂이 밥값을 내시거나 어려워보이면 용돈까지 쥐어보냅니다. 아직도 당신의 손으로 베풀어야 마음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어머니께 가끔 선물도 하고 용돈을 드리는 것보다 어머니께서 제게 주신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내가 더 드리고, 내가 더 베풀고, 내가 더 어머니께 한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따져보니 어머니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것이 훨씬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드리는 용돈에 자랑스러워하고, 때론 아까운 마음으로 드린 적도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많다는 것을 잊는 불효이지요.이런 일은 단지 육신의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림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헌신과 충성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것을 드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참 부러울 정도로 많은 것으로 드린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에 비하면 많은 것일까 요? 부끄럽게도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많은 것을 계산합니다. 되도록 덜 드릴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단지 그것이 물질의 문제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헌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아까워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계산법입니다. 계산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드리든 가장 최고의 것을 주시기에 꺼려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8;32). 우리의 작은 것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것을 보시지 않고 이미 많은 것을, 아니 최고의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법과 하나님의 계산법이 틀린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린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만은 내가 드린 것으로 나의 헌신을 측정하려고 합니다. 만족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무기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헌신은 가증하고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미 드린 헌신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직 감사로 드린 것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드린 것에는 내가 남아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내가 받은 것이 항상 내가 드린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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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7
    아름다운교회 Feb 04.2024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과 교회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세우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가정을 세우고, 자녀들을 세우고, 기업을 세우는 노력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우는 노력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세워진 것들을 잘 관리하고 잘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몇해  전 한 가정을  심방하는데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LA에서 이름만 들으면 아는 회사를 운영하던 자기 사장님이 40대 초반이었는데 돈을 엄청나게 잘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급 차도 몇 대 가지고  있고, 거의  매일 골프를 치러 다녔습니다. 또 이렇게 잘 나가다 보니 건강을 챙기려고 헬스 클럽을 다니면서 온갖 영양제도 챙겨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잠을 자다가 갑자기 뇌에 문제가 생겨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제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교회를 한 동안 잘 안 나갔는데 그걸 보면서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제부터 이분이 신앙생활을 잘 하시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주 한주 기다려도 교회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옆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도 다시 신앙을 회복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얼마 전부터 새벽예배 후에 기도를 할 때마다 제 머릿 속에 계속해서 맴도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의 말씀이죠. 사람이 많은 것들을 세워보려고 온갖 힘과 열정과 수고를 쏟아부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되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세우는  것은 언젠가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을 더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열심히 모아놓은 재산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자녀들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쓰죠.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형통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 아름다운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많은 분들의 땀과 수고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도약을 하고있는 지금 시점에서 또 많은  분들이  교회를  세워보고자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교회는  든든하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어떤  비바람과  모진  풍파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떡하지 않고 든든히 세워져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지속적으로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를  세워주시도록  기도에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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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6
    아름다운교회 Jan 28.2024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러기에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끼리 잘 지내고, 사랑하며 지내자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산물입니다. 정말 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그리고 우선 순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올 해 표어가 그것을 향하여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예수님을 믿어 참되게 행복해 지는 것과 동시에 교회와 성도로서 잊지 말아야 할 사명이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여 영혼구원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혹자는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데리고 오는 것이고, 영혼구원은 목사님이 하는 것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목회자는 성도들이 영혼구원을 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전도는 성도들이 하는 것입니다(엡4:21).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배워야 하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특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영혼을 주님께로 안내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기에 전도자는 성령께 의지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부인에게 명품가방을 선물해주고 그것을 몰카에 담아 고발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영부인이 그 일로 구설수에 휘말리는 일이  정치적으로 좌파냐, 우파냐를 저는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에서 멀게 한 것이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앞으로 그 영부인은 기독교, 그리고 목사라고 하면 치를 떨것이 분명하고, 기독교에 부정적인 것은 물론이고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앞으로 기독교의 ‘기’자만 나와도 분노할 것이고, 목사의 ‘목’자만 나와도 치를  떨 것입니다. 그 일을 벌인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함하고 고발하는 일을 함으로 영혼구원의 기회를 날리는 일을 목사가 했다는 것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차라리 목사라 부르지 말든지... 한국의 대전에서 목사가 길거리에서 전도하다가 20대 여인이 교회를 안 따라온다고 폭행을 해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왜 전도를 하는것일까요? 영혼구원을 할 수 있는 절대기회를 모두가 놓친 것입니다. 그것도 목회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말이지요. 전도는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요? 화가 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런 사람들뿐일까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다를까요? 그들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것일까요? 교회안에서도 찾아온 사람들이 정착을 하지 못하도록 온갖 잘못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이 아닐까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는데 빛과 소금은 커녕 불을 끄고 다니거나 변질된 소금처럼 맛을 내지 않는 일을 하는 우리들은 전도의 방해꾼이 아닐까요? 빛과 소금의 역할의 본질은 녹아지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녹여서 밝히고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자신을 녹여서 예수님처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 잘못된 열심이 오히려 방해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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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5
    아름다운교회 Jan 21.2024 극상품 포도나무에 달린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을까요. 이것을 과연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피상적이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이나, 혹은 자기 사랑의 대체물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왜냐면 그 사랑이 열매없는 빈 깡통일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이사야 5장). 기름진 땅은 이스라엘 족속이고, 포도나무는 유다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는 ‘들포도’ 를 맺었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극상품 포도나무였을까?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하나님께 제대로 한번 순종했나요? 가나안에 온 이래 언제 제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 적이 있었나요? 늘 배반하고, 가슴 찢게 만들고 하나님의 슬픔의 대상이 되어 결국 하나님의 징계에 놓이지 않았던가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왜 하나님은 과한 표현을 했을까요? ‘극상품 포도나무’ 극상품이 아니라 최하품 의 백성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하셨을까요? 발견한 것 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극 상품이라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그 가치가 있다면 최고의 비용을 지불했을 것인데, 가장 비싼 가격을 주고 사왔기에 ‘극상품’이라는 표현을 했을 것 같습니 다. 그 비용은 십자가에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가장 비싼 값은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인 아들,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 예수를 아무 쓸모도 없는 죄인인 나를 위해서 몸값으로 줘버렸다? 그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롬8:32). 가장 귀한 것을 주셨기에 더 이상 아낄 것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극 상품 포도나무라 하신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주셨기에,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셨기에 더 이상 아낄 것이 없는 귀한 존재인 ‘극상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잘나가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그것을 ‘칭의’ (Jus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여겨주시는 것, 의롭지 않은 존재인데,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존귀한 자라 불리워진 그리 스도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존귀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로서 그 열매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내 잘남도 아닙니다. 실수도 많고, 고집도 세고, 고약한 냄새도 납니다만, 말씀으로 돌아가 회개하고 다시 늘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누군가 외칠 때 듣고 고쳐야 합니다. 아니면 가룟 유다의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는 내 감정에 충실하도록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신 사람은 내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서 순종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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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4
    아름다운교회 Jan 14.2024 목자를 세우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부적으로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려고 몰려들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사람들 12명을 불렀습니다. 충성스러운 베드로에서부터, 배반자 가룟 유다 까지 소수의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늘로 승천하시면서도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마28장).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능력이 모자라서 제자들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그 제자들도  못 미더워서  다른  제자를  두도록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인생 말년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대 위임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다시 제자들에게 사명을 위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고, 사명이 어떻게 세대를 이어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가정교회와 제자양육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핵심가치로 여기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사명이 좌절되기도 했고, 미약해지기도 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의 제3의 부흥을 기대하면서 다시 가정교회와 제자훈련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목사님과 함께 이 과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못해봤던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목장을 세분화하고,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분들에게 이 목장의 짐을 맡겨드리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또한 어느 때보다도 더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심정을 피력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눅10:3). 위험하고 험난한 사역이 이리에게 잡아먹힐 힘없는 어린 양인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이지요. 저 역시 그런 심정입니다. 새로 세워진 목자들에게 가야 할 그 길은 꽃길의 영광보다는 좌절과 상처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는 십자가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위하여 정말 처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목원들이 동역자가 되게 하시고, 거절과 비협조가 아니라, 같은 어린 양의 마음으로 동역하고 도와주고, 함께 그리스도의 부흥의 초원을 누릴 수 있는 참된 목자로 함께 세워 지는 분들이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수고와 아픔을 이해 해주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롬12:15). 그리고 그분들의 부족함을 폄훼하며 뒷담화 하거나 지적질하지 않고, 그 부족함을 목원들이 메워 주는 사랑의 마음 그리고 그 분들은 그리스도의 권세로 교회의 위임을 받아 이 사역을 하고 있음을 믿고, 그 분들의 영적권위와 리더의 지위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이 후에 세워질 목자들도 자신감과 위로를 가지고 헌신 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세워짐에 실패하면 앞으로 우리에게는 좋은 리더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이 ‘위임명령’을 완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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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07.2024 교회여, 회복을 위해 울고, 복음의 영광 위해 일어나라!
    누군가 말했습니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길도 아닌 곳을 내디뎠고, 그 후에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음으로 마침내 길이 되었다는 말인데, 여러 의미로 다가오게 합니다. 우리 아름다운 교회도 15년전에 시작할 때는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고,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혼란을 겪던 2009년에는 더더욱 두려움의 길이였습니다. 참 많은 눈물과 기도를 쏟아부으며 걷기 시작하니까, 다른 이들이 함께 걷기 시작했기에 오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함께 믿음으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 15년을 뒤로하고, 이제는 길이 된 이 길을 16년차를 향하여 다시 한번 미지의 길을 교회가 나서는 새해 첫 주일을 맞습니다. 기억하기는 지난 15년동안 한번도 경제가 좋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해마다 올해는 더 어렵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 해를 걸어가게 됩니다. 올 해 우리는 정말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또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이미 여러차례 언급해 왔듯이 올 한 해에는 세대교체를 위해서 제2대 담임목사님을 청빙하여 함께 사역을 하는 초유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실험과정이 순탄하게 진행되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성도들의 성숙한 자세가 필요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릇의 크기를 다루어 보고 계십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교회의 축복으로 누릴 것인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박 목사와 권 목사는 이 일에 하나가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아래,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제3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저기서 기도와 협력 그리고 사랑과 축복의 격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리 교회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생명력있는 은혜의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그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이 바람이 미풍이 아니라 강풍이 되기를, 아니 그것이 복음의 영광을 향한 태풍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보았던 작은 구름 이 미풍처럼 보일지라도 마침내 ‘큰 비’라는 태풍으로 바뀌어 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 교회에 2024년에 하나님의 주시는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에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새 길을 위한 목표/표어를 두 목사가 기도하며 제시합니다. ‘교회여, 회복을 위하여 울고, 복음의 영광 위해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허락하실 제3의 부흥을 바라보고 반드시 거쳐야 할 푯대라고 믿어졌습니다. 펜데믹 이후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부정적인 영향력과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갇혀있는 사회와 현실에 묻혀버릴 수 있는 이 시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회개하며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 살 길이 생깁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눈물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흥의 영광, 복음의 영광이, 파도같이, 태풍처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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