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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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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7.2019 무엇으로 보답할까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추수를 끝낸 농부들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추수감사절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집앞의 텃밭에서 뒤엄을 섞어 정성스럽게 기르던 무, 배추, 파가 있었는데, 얼마나 튼실하게 자랐는지, 그중에 제일 크고 좋은 것을 골라두었다가 추수 감사주일에 강단에 쌓아두었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농사를 크고 작게 했던 시대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금은 서비스 산업이 주가 된 세상을 살기 때문에 농사의 개념이 희박해서 일년에 무엇이 지나갔고, 무엇을 수확했는지가 불분명하게 지나갑니다. 경계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추수 감사의 의미가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12월 마지막에 연봉을 다 누리고 나서야 결산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천만한 계산법이 아닌가 싶습니다.인간은 먹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衣食住)는 사람의 기본에 속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하고 덜하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먹고 사는 것을 통해서 기본적인 생명을 연명하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필수 아미노산(essential amino acid)처럼 체내(體內)에서는 만들어지지 않고 (만들어진다해도 미미해서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음) 반드시 외부에서 즉, 먹는 것에서 섭취해야 하는 아미노산이 어른에게는 8가지, 아이들에게는 2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필수 아미노산이 없으면 발육이 안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사람에게 그러한 물질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존재인 사람에게도 육의 것만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이 감사입니다.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감사가 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있음에도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당연한 누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얼마전에 제게 치아가 문제가 되어서 이를 뺐습니다. 한번도 치아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것은 ‘아, 60평생을 아무 생각없이 누리고 산 이빨 2개가 그렇게 귀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늘 있었을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음식물을 자르고, 으깨어 갈아주던 그 이빨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빼고 나니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60여년을 수고해 준 그 이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빠지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느날 사라질 때에 그것의 소중함을 느끼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번 감사의 계절에는 내가 누리고 있음에도 존재감이 없었던 많은 것들, 혹은 사람들까지 감사의 조건들이 되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누릴 때에는 모릅니다. 누릴 수 없을 때에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주님이 주신 내 몸, 내 가정, 배우자, 자녀, 친구, 교우들, 그리고 교회까지… 너무나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음에도 그저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눈을 돌려봅시다. 그리고 시편의 기자처럼 ‘주님의 그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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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0.2019 이제는 말씀입니다.
    긴박하고, 갈증과 갈망이 있는 특.새가 끝났습니다. 11년째 지속된 특.새는 우리 교회가 지탱하는 샘물과 같은 믿음의 산실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특.새를 사용하셔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자아와 삶의 잘못된 습관들이 깨지는 것들을 경험하는데 귀한 산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역사앞에서 우리는 겸손히 순종할 수 밖에 없었고, 누구의 능력이 아닌 그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게 예수님을 알아가는 복을 감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아닌가 합니다. 삶에 지쳐있고, 강퍅해진 우리의 심령에 물을 붓고, 밭을 기경하는 일을 목이 터져라 했습니다. 그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능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각 사람을 이리 저리 만져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예년과 다르게 몇 분만의 간증을 들었지만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머리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신앙생활의 귀함을 제 체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체험적인 신앙생활이 있기를 저는 바라고 또 바랐는데, 그것을 이룬 분들의 생생한 눈물어린 간증이었습니다. 일방적 회복이 아닌 쌍방적 회복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사님 말대로 ‘이제야 반쪽 복음에서 눈이 떠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이제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새를 통해서는 우리의 감성과 체험이 강조되고 그 뜨거워진 감성은 우리를 다시 자극해서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귀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이내 식어 버릴 수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러한 감성은 딱딱한 상처만 남고 사라지는 것을 그동안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특.새는 우리를 깨우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온전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체험이 온전한 말씀을 만날 때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체험을 이끌어 내어 그 체험을 통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즉, 성령체험의 궁극적 목적은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없는 체험은 신비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체험없는 말씀은 교조주의(율법주의)로 머물 수 있습니다. 서로 보완이 되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바탕으로 말씀이 들어가면서 예수님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그렇게 딱딱하게 보이던 말씀이 눈에 들어오고 가슴에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지겨운 것에서 사모하고 감동이 있는 기쁨의 예배가 됩니다. 지겨운 설교 말씀이 내 삶을 쪼개내는 능력으로 다가오게 됩니다.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남의 이야기로 흘려듣거나, 남의 사건으로 여기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생활은 남의 이야기로 끝내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말씀이신 예수님이 능력으로 내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남이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믿음의 복은 내가 받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속에서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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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03.2019 영적인 눈,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금 제11차 다니엘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가 은혜중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는 어떤 은혜를 누구에게 주실까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지만, 이러한 강제적(?) 행사를 통해서 제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우리 성도들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알게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7-19)그렇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합니다. 왜냐면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밖에는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도들이 알아야 하는 것 중의 가장 첫 번째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을 받아야 하고,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지부진합니까? 교회를 다녀도 왜 그리 미지근합니까? 왜 나에게는 그 감동과 느낌이 안오는 것입니까? 속고 있기 때문이거나,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운동에 재미를 느낍니다. 삶은 피곤한데 운동하러 가자 하면 힘이 펄펄납니다. 어쩐 분은 샤핑에 희열을 느낍니다. 다른 것은 피곤한데, 샤핑하러 가자면 눈이 반짝거립니다. 왜냐면 그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그것과 같습니다. 알아야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대충 알아서는 안됩니다. 대충 알면 대충 대충 끝납니다. 정말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그렇게 대충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다메섹에서 바울의 눈을 여셔서 비늘같은 것들이 벗어져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을 만날 때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결국 이러한 특.새를 통하여 제가 원하고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한 눈이 열려져서 하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은혜의 샘이 터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덩어리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속적 기독교로 전락하여 아무 재미도 없고, 그저 의무감 때문에 질식하게 되어 ‘영적 침체’니 ‘Burn out’이니 하면서 무미건조한 신앙생활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신앙생활 자체가 회의가 생깁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그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나를 깨트리고, 자아가 깨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힘입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 자신을 버리고 주님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나를 위로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충 내가 교회와서 위로나 받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을 알 수없습니다. 내가 깨지고, 십자가에서 나의 아집과 교만과 욕심이 깨지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분을 알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베푸십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삶에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 은혜를 위해 지금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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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27.2019 은혜의 두 모습
    지난 해 다니엘 특.새때에 어느 권사님이 이런 특별한 은혜를 체험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런 간증을 이야기했습니다. 평상시에 코가 막혀서 냄새를 잘 맡지를 못하는 단점(?)이 있고, 항상 코에서 찝찝한 느낌의 냄새만 있었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막힌 코를 시원하게 뚫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회개가 터져나오는 동시에 향기가 진동을 하면서 누런 콧물이 코피같이 터져나오는데 이상하게 시원하게 코가 터지더니 모든 냄새를 잘 맡게되었다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권사님 말씀이 모든 냄새를 맡게 되어서 감사하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화장실 냄새가 아무리 독해도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그동안은 괜찮았는데 코가 뚫리면서 지독한 화장실 냄새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고쳐주신 것은 감사한데 그동안 맡을 수 없었던 악취까지 맡게 되어서 고역이라는 이 말을 들으며, ‘아, 그것이 바로 은혜받은 사람의 두 모습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쳐주셔서 좋은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고쳐주셔서 이제는 나쁜 악취까지 맡게 되는 어려움도 겪더라는 것입니다.우리가 은혜받을 때에는 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 콧물 쏟으며 그 사랑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정말 시원한 은혜의 생수 때문에 날아갈 것 같은 기쁨도 찾아옵니다. 세상이 달리보입니다. 사람이 달리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과 사람은 그대로일 뿐입니다.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변하니 세상이 달라보이는 것이지요. 그 은혜 때문에, 그 기쁨 때문에 신앙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이것이 예수믿는 기쁨임을 깨닫고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몰랐던 말씀이 깨달아지고, 고역인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에 재미가 있어지고 교회생활이 즐거워집니다. 마치 술취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자랑할 마음에 들뜨기도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악취를 맡게 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세상의 악취 말입니다. 잘못된 습관에 의해서 그동안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그동안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향기인줄 알고 마음껏 맡았던 죄의 모습에서 나오는 그런 악취말입니다. 코가 뚫리지 않을 때에는 은혜의 향수도 맡을 수 없었고, 세상의 더러운 악취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코가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게 되기에 그리스도의 향기도 맡게 되지만 세상의 악취도 맡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안맡을 수가 없습니다. 향기도 맡고, 악취도 맡아야 합니다.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나를 버리고 주님의 길을 택하며 가는 제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세상의 악취, 이것은 죄의 악취인데 이것의 냄새가 강렬해야 죄의 세상을 떠나는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코는 어떻습니까? 막혀서 아무것도 맡을 수 없습니까? 뚫려서 양쪽의 냄새를 다 맡을 수 있습니까? 악취도 맡을 수 있어야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두 모습입니다. 향기만 맡을 수 없습니다. 악취도 맡아집니다. 그래서 향기를 좇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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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
    아름다운교회 Oct 20.2019 제11차 다니엘 특.새를 준비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올 해의 다니엘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준비합니다.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부담도 되고, 염려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난 2018년도에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과연 이번에도 크게 임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두렵습니다. 둘째는 영적 분위기입니다.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과 형편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앞에 달려드는지에 대한 영적 갈망이 얼마나 뜨거운지에 대한 의구심입니다. 셋째는 이 집회를 끌고 가야하는 목사로서 건강이 예년과 같지 않은 상황에 접했다는 두려움입니다. 영적 싸움을 치열하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육신의 건강, 영적인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제게 근래의 최악의 체력에 근근히 버티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저질체력을 가지고는 아무래도 버텨나갈 힘이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담감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느끼게 하신 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의 복’에 대한 주제를 정한 것도 평소 저답지 않은 주제여서 마음의 부담감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부담감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제 안에 빠져나갈 수 있는 빛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의 마음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위로와 믿음의 약속으로 제 안에 새로운 은혜를 갈망하는 힘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이번 집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하셨습니다.말(馬, horse)을 물가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결국 물을 먹어야 하는 것은 말 자신입니다. 그런데 비관은 어디에 있느냐면 말이 물을 먹지 않으려하는 것입니다. 물을 필요로 해야 하는데 물을 먹지 않으려 하는 말이라면 아무리 물가에 데려다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물이 생수(生水, living water)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찾는 갈급한 것이 생수가 아닌 짜릿한 탄산수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 생수인데 사람들은 생수가 아닌 탄산음료를 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생수이지, 탄산수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탄산음료를 선호하는 것과 같습니다.하나님의 복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눈이 떠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절대적 소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들어가도 나가도 복이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마음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서 하나님의 복을 소원하는 것이 기복사상(祈福思想) 기복주의 (祈福主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을 배우고 깨닫고 힘을 모으는 것이 이번 집회입니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복을 우리에게 어떻게 주실지, 어떤 깨들을 주실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알게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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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5
    아름다운교회 Oct 13.2019 가정과 교회 사이에서…
    한 해가 가물가물하게 그 끝이 보입니다. 강렬하게 베가스를 달구던 뜨거운 태양도 가을이라는 자연의 섭리앞에 순응하여 이젠 새벽기도 나오는 옷차림에도 변화를 주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예년에 비해서 더위가 늦게 오고 빨리 물러간 듯하여 여름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그곳에서도 더위가 한풀 꺽였던 시기라고 했습니다. 화씨 9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였지만 우기철을 맞아서 비가 시원하게 내리기도 했지만 습도가 100%인지라 방문기간동안에는 스킨로션을 바를 생각도 나지 않을만큼이어서 베가스의 건조함속에 살던 저에겐 헉헉거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곳이나 그곳이나 사람들은 불평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의 적응력도 참 대단하다 보였습니다.오늘 아침 큐티의 내용은 대제사장에 관한 하나님의 규례였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일반 제사장들과는 달리 직계가족의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형제, 아내나 자식들의 죽음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자신을 더럽혀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슬픔을 표현할 길도 없었고, 사명의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가족을 희생해야 했던 것입니다. 시대가 지나서 오늘 목회현장이나 교회현장에서 가장 우선의 가치가 가정(family)가 되었습니다. 핵가족의 영향이기도 하고, 서구 문화에 안착한 덕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나 국가 그리고 모든 공동체에서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녹아서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국가도 바보같이 가정을 미루어놓는 선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이 불가능했습니다. 교회도 바보같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오늘 우리의 가정위주 가치관으로 인해 매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베가스의 어느 교회에 부임했을 때에 주일학교도, 중,고등부도 전멸인 상태였습니다. 교회의 중직자 자녀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중고등학생들을 자녀로 둔 가정들은 미국교회로 다 보내고 어쩔 수 없이 한국교회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만 교회에 오는 형편이었습니다. 영어를 하는 자녀들이어서 한국말을 잘 못하기에 이해도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보다 교육환경과 시스템이 좋은 교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은 그런 곳에 보내고, 주일학교가 부흥하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나와 내 자녀의 희생이 없이 교회가 잘되기를 어떻게 바랍니까? 부모들의 고통과 아이들의 호소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의 섬김이 있었기에 오늘의 주일학교가 존재할 것입니다. 내 아이만큼은 다른 곳에서 좋은 환경속에서 있게 하려는 부모의 바램은 누구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일학교는 어디서부터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반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때론 우리가 나의 형편, 나의 행복을 위해서 진력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사명이 부여되었을 때에 우리의 생복도 주님앞에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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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4
    아름다운교회 Oct 06.2019 독수리 날개를 펴고…
    캄보디아 선교를 마치고 피곤하여 지친 육체와 함께 그동안 건강검진을 받은 후 약해진 부분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한국에 한 주간 머무는 동안에, 한국은 몇 가지 Key words로 대변되는 사회적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국사태, 태풍, 북한 SLBM미사일 발사”라는 대표적 관심사로 사회가 들썩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영 가라안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가슴을 강하게 할퀴고 지나갑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적 문제이지만 개인의 문제 또한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삶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새롭게 나를 사로잡은 것은 Monitor에 보여지는 비행정보였습니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이 비행기가 가는 위치, 빠르기, 높이 등이 시시각각 펼쳐지는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뜨는 원리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양력’이라는 현상 때문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위로 뜨는 원리가 ‘양력’인데, 이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비행기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비행기는 위로 뜨는 힘이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국을 오갈 때에 이러한 편서풍(Jet stream)으로 인하여 약 2시간 반의 차이가 나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맞바람(Head wind)를 타고 가는 것과 뒷바람(Tail wind)을 타고 가는 것으로 인해 걸리는 시간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으로 오는 정보를 보니 빠를 때에는 시속 636마일(시속 1026킬로)로 날며 높이도 37000피트(11277미터)를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맞바람을 받으며 날던 한국행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속도였습니다.결국 바람을 활용하면서 비행을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바람(편서풍)을 잘 이용하면 어렵지만 쉽게 오갈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맞바람을 받을 때에는 이처럼 고통스러울 때가 없습니다. 삶의 무게, 마음의 무게, 고통의 무게로 인하여 짓눌림을 받아 느리게 그리고 힘들게 비행하는 시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편서풍을 타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마치 찬송가에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는 우리의 아픔과 어려운 문제들을 잘 이용하는 유능한 파일럿이나 선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독수리처럼 날개짓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강한 바람이 우리를 짓누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력을 발생하는 기류처럼 우리를 높게 뜨게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움츠러듭니다. 바람 때문에 폭풍우 때문에 기가 죽어서 감히 둥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러할수록 믿음의 날개를 펴고 폭풍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날개를 좌악~ 폅니다. 그러면 그 폭풍은 독수리로 하여금 높이 날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날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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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5.2019 서로 용납하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를 구태여 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모여서 사는 존재로, 의지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록 사람의 기질에 따라서 차이가 있어서 혼자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무인도에서 혼자 살라하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역시 사회적 동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규약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안전하고 질서있게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그런 법규나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작용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적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 새로 전입된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나름대로 고유한 전통과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을 잘 배우고 익혀야 공동체 생활에 무리가 없습니다.이미 소문이 퍼질대로 퍼져서 모르는 분들이 없기에 이즈음에서 정리를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 작은 풍파하나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라는 공동체를 혼란하게 한 것이 사실은 누구 한 두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일들을 살펴보고야 깨닫게 된 것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실수나 잘못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당사자들이 당한 문제도 그렇지만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이런 문제를 경험해 보았고, 비록 아프기는 했지만 이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은 그나마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서툴렀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당사자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주변인들도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명한 이해와 성경적 방식이 정립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저 ‘내 편이냐, 남의 편이냐’는 것에 둘러서서 바라보았기에 소란이 더 커졌다고 저는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감정을 가졌기에 자기감정이 너무나 소중해서 이것을 공동체, ‘예수님의 교회’라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생길지라도 내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보다는 이 주의 피로 세워진 이 교회를 욕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영광스럽게 보호할 것인가에 생각이 먼저 가야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문제는 그 문제를 넘어 더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제가 배운 한 가지는, 용서와 용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의인이라 칭함을 받아 감사함으로 사는 것이 이 교회 생활입니다. 그렇기에 이 공동체가 죄가 계속해서 침투해서 이 공동체를 상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회개한 죄인들을 받아주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용서와 용납’이라는 이 관계회복의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용서받은 죄인을 용납(받아들이는 사랑)하지 않으면 이 공동체에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받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처럼, 우리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공동체 안에 돌아오게 될 때에, 정말 주님의 사랑으로 그를 참되게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 원상복귀하여 받아들이는 용납이 있지 않으면 이 공동체가 바른 공동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용납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권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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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아름다운교회 Sep 08.2019 용서한다는 것
    “용서란 남이 우리에게 진 빚을 마음이나 장부에서 떼내어 멀리 보내버리는 일을 뜻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가 용서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보았더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신약에서 용서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피에미’라는 단어인데, ‘히에미(보내다)’라는 단어에 접두어 ‘아포 (여기로부터 떨어진 곳으로)’라는 단어를 부여서 ‘멀리 보내다. 놓아주다. 허락하다’라는 뜻이되어 신약에서 주로 ‘용서하다’라는 말로 쓰였다. 용서하다는 영어단어인 forgive라는 단어는 그래서 give(주다/내놓다)라는 말앞에 for(떨어져, 반대로, 완전히)를 붙여서 용서하다, 탕감하다는 말이 디었다”우리는 흔히 용서라는 행동을 ‘생각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받을 빚을 탕감해주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용서라는 것을 그렇게 보지 않고, 남이 나에게 남긴 빚을 마음으로부터 떼내어 멀리 보내는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미 멀리 떼내어 보냈기에 지금 내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내 마음 어느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 상황이 재현되거나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마치 트라우마처럼 다시 살아나서 우리를 괴롭히게 되거나, 용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그 용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일 것입니다. 인간의 용서는 그래서 불완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그래서 완전한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고 하였고, 시편의 기자도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103:11)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살아온 삶만큼이나 상처받은 것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만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니 이제는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남에게 받을 빚은 죽어도 잊지 않고, 남에게 줄 빚은 쉽게 잊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 받은 상처 때문에 치를 떨기도 했을만큼 아파했고, 또 남에게 준 상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간 일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서게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오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남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과 반대의 개념입니다. 사랑은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고 하셨지만, 용서는 내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에 용서는 먼 훗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다고 생각하니 용서하고 싶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떠나 보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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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
    아름다운교회 Sep 01.2019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소문은 정말 빠릅니다. 지구촌 구석구석이 SNS 발달이라는 인터넷망으로 뒤덮인 현대인의 삶에서는 이것은 과거의 어떤 형태보다 더욱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홍콩에서는 홍콩과 중국의 충돌로 인해 긴장관계가 연일 News보다 더 빠른 소식으로 Facebook이라는 도구를 타고 급속도로 세상에 실시간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소식도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민주사회를 받쳐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만큼이나 더 색다른 단점도 심각해서 가짜뉴스 등으로 무엇인 진실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혼란스러워져 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 후 현대주의의 결말인 절대진리와 권위를 부정하는 세상으로 가는 것임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식당에 갔습니다. 아는 분을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깜짝 놀란 것은 그 사람이 우리 교회의 일을 너무나 소상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불과 1-2주 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우리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리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 사람들에게 전화도 안하신다면서요?’라고 묻는 말 앞에서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목사가 심방을 안 하는 것까지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를 나간 사람들은 목사가 모셔가기를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니 섭섭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심방을 안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이 아직도 못 깨닫는 것이지요. 누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즉흥적으로 교회를 나가겠다고 선언하고 나가서 이제는 안 모셔 가냐고 성질내는 것과 같습니다. 안 나간다는 소문, 심방 안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교회 밖의 사람들도 알 정도가 된 것은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알게 된 것이겠지요. 누가 그랬을까요?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말을 했기 때문이겠지요.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는 이런 소문쯤이야~~하고 지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내가 그 말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도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기다림의 고통도 느껴보지 못하고, 자기감정에 호떡 뒤집듯 뒤집고 가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 궁금해집니다. 아픔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우리를 더 깊이 있게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 사도의 책망을 받고 속이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받은 책망을 통해서 더 깊은 사랑과 신뢰로 관계를 회복해 나갔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누구나가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자기편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라면 이렇게 했을까?’ 물어야 합니다. 거기에 기다림이 필요하고, 아픔이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소문을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발도 없는 소문이 천리만리를 가는구나.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덕을 끼칠 수 있을까를 깊이 반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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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
    아름다운교회 Aug 25.2019 강남 좌파, 신앙 좌파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은 어느 덧,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용어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씁쓰름하기도 하지만, 근래에는 강남좌파라는 새로운 개념이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는 그렇지만, 종북좌파라는 용어를 쓰는 보수층의 입장에서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을 뜻하는 말로, 정치적 대척점에 선 사람들을 공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과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학습에 몸담았던 사람들이어서 더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용어들을 뛰어넘어 이제는 ‘강남 좌파’라는 용어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용어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뜻하는 강남과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가진 좌파의 이질적 결합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훌륭한 목표지향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공평과 정의 그리고 평등을 외치지만 그래서 개혁을 통해서 기존 불평등과 사회부정의를 외치지만,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삶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모습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폐청산을 사회정의처럼 외치던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 사람들을 따라서 산, 그래서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실망을 넘어서 또 다른 분노를 사고 있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자사고, 외고를 없애자면서 이미 그들의 자녀는 그곳을 나왔고, 모든 혜택을 이미 다 누리고, 부동산, 병역, 특혜를 공격했던 사람들이 이미 누릴 것은 이미 다 알아서 누린 것입니다.우리 신앙인도 강남좌파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신앙좌파’로 부르고 싶습니다. 신앙좌파는 신앙이 자유주의적 성경신학을 바탕으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성경적 사고나 풍성한 성경지식이 있고, 오랜 신앙생활로 인해서 교회의 사역에서는 꿰뚫어보는 선구적 지식이 있지만, 생활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적폐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이 타락한 보수주의에 분노하면서도 자신들도 어쩔 수 없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고 살고, 반칙으로 사는 불공정의 세상을 탄식하고 지탄하면서도 막상 뒤를 뚫어보면 자신들도 온갖 반칙과 불공평의 세상에서 물타기 줄타기를 서슴지 않았던, 정말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과 삶이 같은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다르면 ‘외식’ ‘바리새인’등의 낙인이 찍혀버립니다. 근래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아니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가장 신앙이 좋고, 기도도 많이하고, 말씀도 많이 알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막상 삶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삶의 내용으로 산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좌파가 아니겠습니까? 생각따로, 믿음따로, 삶의 내용따로!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통렬하게 지적해 내셨던 바리새인입니다. 그러한 삶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신행일차(信行一致)하는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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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9
    아름다운교회 Aug 18.2019 하늘이 부럽다
    베가스에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자연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손타지 않은 자연을 몇 시간을 투자하면 아름답게 즐길 수 있는 자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것은 거짓이 없는 자연중의 하나가 하늘입니다.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찬란함과 뜨거운 기운, 낮에는 맑은 하늘에 시절마다 새롭게 그려지는 구름 그림들, 정말 잠깐의 시간이지만 지는 해가 그려내는 시시각각의 현란한 색의 잔치를 카메라에 담기에도 아쉬운 그런 하늘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자연은 거짓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래도, 입은 그대로를 보여 줄 뿐입니다. 인간이 그려내는 인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그림을 보다가 자연을 보는 그 맛은 정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거짓을 말하지만, 자연은 진실만을 말할 뿐입니다.이민주씨의 에세이 ‘그래도 오늘은 좋았다’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온갖 먹구름이 달려들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의 아름다운 색을 전부 끌어다 자신을 물들이던 하늘. 저러다 하늘이 산산조각 나는 건 아닐까 싶은 강력한 천둥 번개에도 다음 날이 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히 털어버리는 하늘. 면역력이 얼마나 좋은 건지 항상 고요를 되찾는 하늘, 그날, 하늘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우리의 마음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은 늘 삶의 고단함에 노출되고, 이민자의 외로운 삶을 살다가 보니 실패와 좌절,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얽힌 관계속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들이 뭉쳐져서 나름대로 자신 안에 트라우마를 갖고 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그려져야 할 마음의 그림들이 엉켜진채로 풀 수 없는 실타래의 모습처럼 피카소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는 자화상이 우리 안의 하늘이 아닌가 싶습니다.아무리 다른 그림을 그려도 바람한번 불고 지나가면 다시 그릴 수 있는 깨끗한 하늘처럼, 휘휘~ 멋진 그림은 아니더라도 멋대로 그려놓은 그림일지라도 시간이 가면 다시 원래의 하늘처럼, 우리 마음에 그렇게 상처입지 않은 그런 마음의 하늘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들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한번 마음에 새겨놓은 상처는 두고두고 곱씹는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있어서, 틀어진 그림틀을 만들고, 어떤 그림을 누군가 그리고 나면 거기 또 다른 그림을 덧입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그림이 나올 리가 만무합니다. 어떤 분은 그리 이야기합니다. ‘나는 걸레가 되어야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엎질러놓은 것들을 닦아주고, 깨끗하게 해주는 걸레가 좋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걸레의 입장으로 돌아가 막상 무엇인가를 닦아 주어야 할 즈음에서는 자신이 걸레임을 속상해 하는 것을 봅니다. 걸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더러워짐을 피할 수가 없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더러워지지 않으면 걸레가 되지 못합니다. 자신이 더러워지면 바닥을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늘이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묵묵히 주님의 길을 걸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받아낼 수 있는 그런 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기회가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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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8
    아름다운교회 Aug 11.2019 말(言)과 공동체
    빌립보서를 묵상하는 지난 한 주간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라는 여인을 필두로, 감옥의 간수들과 함께 교회를 이룬 유럽의 첫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기쁨, 자랑, 면류관’이라고 자랑스러워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바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물질로 돕고,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서 도왔습니다. 그런 교회에 사울은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며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옥에 티라고 할까요?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서인지 그 교회에 루디아 외에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성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지도자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에 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때론 심각한 분란과 다툼으로 이어지고, 교회가 갈라지는 경우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도 그런 전조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라고 권하고, 성도들에게는 그들을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후가 궁금합니다. 그들이 합했을까요?교회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생각도, 습관도, 방법도, 목표도,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죽고 못살게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한 부부도 막상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보면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호불호(好不好:좋아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끼리 끼리, 자기 관심사나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그런 것은 세상적으로 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단 예수를 믿는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되면 이것은 다릅니다.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을 가진 사람들이 사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것이 아닌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렇게도 다른 우리를 하나로 되게 하시는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나가 되어가는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바울 사도는 그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하나되게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해야 합니다. 아니, 이를 악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됨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을 깨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뒷담화’입니다. 사람들의 문화는 뒷담화를 즐거워합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때론 가슴이 시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됨을 깨는 ‘원수같은 일’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뒷담화는 때론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소문을 바탕으로도 합니다. 진실일 수가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뒷담화를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입니다. 사실일 때도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됨을 깨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일지라도 덕이 되지 않으면 입을 다물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입이 가벼우면 공동체를 깰 확률이 많아집니다. 우리의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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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7
    아름다운교회 Aug 04.2019 내 고향 남쪽바다
    이민자! 이 말처럼 외롭게 들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여행을 다니다보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레임과 호기심이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기도 하지만, 고향을 떠나서 삶의 뿌리를 뽑아서 낯선 땅으로 이민을 와서 겪는 그 수많은 story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요. 각자가 가진 인생의 두께만큼 수많은 사연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라고 성경이 지적했던 것처럼 나그네처럼 사는 것이 이민자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가끔씩 나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은 아니지만 고향땅을 향한 우리의 향수가 아련하게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얼마전, 교회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보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착륙을 준비하는 비행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덩치가 큰 것이 여느 비행기처럼 느껴지지 않아 하늘을 주목하고 있는데, 시계를 보니 4:50입니다. ‘아, 대한항공이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바라보는데 역시 대한항공 비행기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위로 지나가는 비행기 꼬리에서 태극마크를 선명하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십 수년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인 일인지, 내가 태어난 곳, 내 나라를 향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멀스멀 가락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이 잔잔한 고향바다…’ 고향 생각이 나던 시간이었습니다.그 시간, 그 비행기, 그 마크를 보는 순간에 어찌 하필이면 ‘고향’이었을까. 아마도 사람의 마음에는 본능같은, 귀소본능(歸巢本能, 낳은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연어처럼 말이지요)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한 본능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또다른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에 대한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잊으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심성안에는 우리가 이땅의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고향이 아닌, 본향(本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돌아가셨다. 소천하셨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그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사셨습니다. 사랑의 원자탄라는 별명을 가지셨던 손양원 목사님은 그런 찬송시를 지어 불렀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먼-하늘 이상은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우리의 본향을 바라보며 가슴절절하게 사모함을 드러냈던 것입니다.마음에 본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삶이 다릅니다.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는 사람은 그 본향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희망하고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거기엔 한숨과 아픔이 있다해도 본향이라는 소중한 청량제가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해줍니다. 그러나 본향이 없는 사람은 객기, 호기 다 부리다가 허무로 끝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구름만 봐도, 비행기만 봐도, 문득 고향생각에 옷깃을 여미듯, 우리의 삶에 문득 하나님의 손대시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거든 생각날 수 있는 본향이 있다면 행복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믿음과 기회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나를 힘있게 끌고가는 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행복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능력이 끌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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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8.2019 21세기에 박해받을 그리스도인들…
    지금 미국 의회에서는 Equality Act(H.R.5)라는 법안이 민주당의 발의로 하원을 통과하여 상원에 상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법안은 성평등을 주창하는 법안인데 이 법안은 ‘ 성,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바탕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입니다. 민주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제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의 행위와 정체성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거나, 기독교안에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법으로 제약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전통적인 결혼관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결혼은 그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전환이나, 동성애등을 죄라고 단정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성경적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이 법이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에서 통과가 되고, 미국의 대통령이 서명을 하면 이 법은 그대로 발효가 되어 이후에 일어날 후폭풍은 누구도 예측을 할 수가 없을정도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21세기에 박해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누가 진행하는 것일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 우리 앞에 다가서 있습니다.그런데 정작 앞으로 박해를 눈앞에 둔, 교회와 기독교안에서는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웃 California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 가까이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잠잠합니다. 우리들 도처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내 일이 아니니 별로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별 관심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설마 일어나랴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척에 있고,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도록 강요하는 미국이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 단순히 걱정이 앞서는 기우(杞憂)일까요?그동안 기독교는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가급적 외면하려는 자세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그렇게해도 거의 모두가 보편적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편적 가치와 사회적 통념이 변화되었습니다. 빨간 것도 많은 사람들이 검정색이라고 하면 그렇게 될 확률이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연 아직도 교회가 정교분리라는 이유로 입을 다고 있어야 할까요? 적극적으로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해야 할까요?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 감옥에 가야되고, 불이익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는 세상을 우리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요? 막대한 순교자와 희생자를 강요하는 21세기의 박해시대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을 그냥 외면해야 할까요? 만일 이러한 시대를 맞이한다면 1세기의 순교자들보다 21세기에는 교회가 망하든지, 막대한 희생자(순교자)를 양산하든지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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