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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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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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21.2019 사막에 꽃이 피다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는 한국의 최초 개신교 선교사로 들어와서 31년을 복음의 불모지였던 조선에 희망을 선사한 믿음의 인물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 제물포 항구에 발을 디딘 이후에 암울한 어둠의 땅에 그리스도의 빛을 생명처럼 전했던 분입니다. 그가 본국인 미국에 보낸 기도편지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하고 화부터 냅니다…” 이것이 당시 우리 조선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어둠의 땅에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조선에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지난 겨울에 사막에 많은 비와 눈이 내렸습니다. 16년 이상을 살았지만 이렇게 풍성하게 눈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 사막의 도시 베가스 뿐만 아니라 남가주 일대에도 오랜 가뭄을 일시에 해소할만큼 많은 비가 내려서 덕분에 사막을 달려서 잇는 로스앤젤레스와 라스베가스에 진풍경같은 꽃들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다녔던 LA까지의 길에, 사막의 황량함이 익숙해졌던 터, 이번에는 그 사막의 익숙함을 벗어나 세상에, 사막에도 꽃이 피다니요… 정말 신비스럽다 여길 정도입니다. 풀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탐스럽기까지한 꽃을 본다는 것은 자연의 신비로움 그자체였습니다. 교회의 뜰에도 생명의 신비는 놀랍기만 합니다. 다른 나무들에는 물이 오르고 싹이 나는데, 몇몇 나무들에는 그런 소식이 없어서 죽었나보다 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 뽑아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보기에 영락없이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죽어 보였던 그 가지가지마다 생명의 싹이 움트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생명의 신비에 감탄을 뿜어내었습니다.이런 모습속에서 제 마음에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막에서, 물도 없어서 식물도 자랄 수 없는 이 환경속에서도 그렇게 수분이 공급되니 꽃밭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면서 갖는 희망입니다. ‘아, 물만 주면 이렇게 꽃이 피는구나. 이것이 생명이구나!’ 이런 생각에 우리의 신앙환경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만 주면 신비스럽게 피어오른 저 들판의 생명처럼, 우리 베가스에도 그렇게 메마른 심령들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싶은 이곳에도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을 흘려보낸 다면 얼마든지 생명의 꽃이 피울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은혜와 성령의 물이 흐르지 못했고, 메마를대로 메마른 채, 죽은 생명처럼 방치해 두었다는 안타까움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이번 부활 주일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이 사막에 흠뻑 적셔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 더 희망이 보입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았던 우리들이었는데, 성령의 물이 흐르니, 은혜의 물이 흐르니 그 은혜에 감격해서 살아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지 않았나요? 부활의 아침에 주께서 그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적셔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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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14.2019 나눌수록 커지는 꿈
    근래에 우리는 교회의 체질 개선을 위한 비전을 선포하고 이를 교회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깊은 고민과 갈등 끝에 만난 한 책이 마지막 목회열정을 불태울 거룩한 불씨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다소 무모하기도 하고, 우리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현실론도 주변에 포진해 있지만, 거룩한 두려움으로 이 일을 진행하기 위한 몸부림을 지속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영적, 교회적 체질 개선에 동참하여 주님이 우리 교회를 향한 참된 목적을 재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저는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모든 물건에는 쓰일 목적이 있습니다. 지은 이의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못 같은 세상의 미물들도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지듯이, 우리 인간도 그저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자기를 행복하게하기 위하여 부름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는 ‘사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우리의 ‘사명’이기에 우리는 그 사명을 좇아서 따라갑니다. 우리는 그것을 ‘래디컬 비전’이라고 부르자 했습니다. 첫째는 ‘한 가정이 한 미전도 종족을 입양하여 그들을 품고 기도하고 후원하는 것, 둘째는 우리 삶의 2%인 일주일간을 복음 전하는 데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배당속에서의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예배 (선을 행함과 나눠주는 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을 살자는 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운동이요, 제자화운동입니다.지난 주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출타를 했습니다. 암 투병하시는 목사님을 위로하는 일과 새로운 예배처소를 구하고 예배하는 교회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삶을 살 것을 결심했기에 주저함없이 피곤하지만 급하게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주신 이 ‘래디컬 비전’에 대해서 다른 목회자들과 그 뜻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러한 뜻을 십분 공감하면서 당신의 교회도 이 운동에 참여하겠다며 함께 그 길을 걸어가자고 격려와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감격스럽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가려는 이 비전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나눴더니 일하는 직장 동료들 가운데서도 자기들도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달해 오기도 하였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운동이 이러한 작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미전도 종족을 입양하려는 우리의 비전에 관심있는 분들이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물은 파묻혀 있으면 더 이상 보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비전을 나누면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들로 가득 채워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꿈이 있다면 나누어야 합니다. 더더구나 거룩한 꿈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꿈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꿈입니다. 그 꿈은 주님의 꿈이시기에 멈추어 설 수 없습니다. 꿈은 키워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품는 꿈은 결국은 커집니다. 나를 위한 꿈이 아니라, 예수와 그의 나라를 위한 꿈은 생명력이 있기에 나눌수록 분명히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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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07.2019 돼지 껍데기의 배신
    어느 신문 일간지에 이러한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내용인즉, 사람들의 피부노화를 방지하는 성분인 ‘콜라겐’이 돼지 껍데기에 많아서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돼지 껍데기를 선호하고 많이 먹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콜라겐도 나름이어서 일본 어느 연구진이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에서 피부노화를 방지하는 것은 돼지 껍데기에 있는 콜라겐이 아니라, 다른 콜라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동안 피부노화 방지를 위해서 열심히 돼지 껍데기를 먹은 사람들이 황당해 할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돼지 껍데기의 배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목의 선정이 발칙(?)해서 재미있어서 열었던 기사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신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거에는 00이 좋다고 해서 맹신하듯이 먹었던 건강식, 일반 상식들이 여러 사람,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뒤집혀 버리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지식정보의 홍수 사회’에 살면서 만나는 우리의 당황법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리 말해도 믿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젠 자기 자신만이 믿을 것이 없는 세상된 것 같습니다.이러한 돼지 껍데기 배신처럼 황당한 역전이 우리가 사는 삶속에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그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의 단 한번의 삶을 살면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정하고, 그 가치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돈이 중요한 삶의 기준이면 이 사람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에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매겨질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건강의 가치 우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러한 가치를 매기고, 매겨진 가치에 의해서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돈과 명예와 건강 그리고 미모와 실력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는 ‘돼지껍데기 상식’을 가르쳐왔습니다. 교회는 부흥되어야 하고, 신앙인은 부유하게 잘 살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맹목적인 ‘돼지 껍데기 신앙법칙’을 자연스럽게 구가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일까요? 늘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말하고 가르치는 것처럼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때에 돼지 껍데기를 탓할 수 있을까요? 내 인생의 목적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고, 제자를 삼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돼지 껍데기의 배신감을 맛보게 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교회의 비전, 인생의 비전을 바꾸는 체질개선의 비전을 제시받았습니다. 가장 성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레디컬’이라는 책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교회의 체질개선을 시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앞으로 ‘돼지 껍데기의 배신’을 방지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뜻으로부터 off track하지 않아야 한다는 위기감입니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언제가 찾아올 배신에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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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31.2019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3월의 끝날에 접어들었습니다. 세월이 날아간다(Time flies)는 말처럼 시간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빠르게 지나, 겨울이 지나고 완연한 봄을 머금고 파릇하게 돋아났습니다. 겨우내 죽은 것 같아 마른 가지에도 어느 새 봄기운이 올라 연두빛깔의 이파리를 밀어내며 생명의 신비를 지켜보게 합니다. 이렇듯 시간은 자연의 섭리와 함께 오늘도 어김없이 지나갑니다. 이런 세월이 가면서 얼마 있지 않아 주님앞에 선다고 생각하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주님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지혜가 아닌가 싶어서 조바심이 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세월은 얼마나 주님의 목표에 다가섰는지, 앞으로 달려갈 얼마남지 않은 세월은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제대로 방향이 잡혔는지, 숙제를 해야겠다는 마음의 부담이 밀려오는 시간들입니다.Zion Canyon을 가면 웅장한 산자락들에 우람한 바위를 돌아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올라가 바위 터널을 지나는 길이 있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 이 길을 90도를 꺾는 길 뿐만 아니라 180도를 꺽어야 하는 스릴있는 길을 돌아 올라가면 Zion Canyon의 우람한 근육질을 볼 수 있는 전망대를 갈 수가 있습니다. 이 길을 오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산 밑에서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을 나침반을 가지고 간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러면 가야 되는 길은 북쪽(N)인데 90도 135도 180도를 꺽을 때마다 동쪽(E), 서쪽(W), 남쪽(S)을 가리킵니다. 그런데그 길을 좁게 잘라서 보면, 분명 가는 길은 북쪽인데, 방향은 서쪽이나 동쪽을 가리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걱정이 됩니다.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 길은 북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잠시만 서쪽이나 정반대인 남쪽을 가리킬지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잠시 보이는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북향으로 가는 길에 잠시 동, 서, 남쪽으로 나침반이 가리킨다 할지라도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은 그것은 잠시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본향, 영구한 도성’이라는 우리의 믿음의 방향이 정해지면 그 여정가운데서 보이는 다른 방향처럼 보이는 것들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방향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가야합니다. 어려움이 있기도 하고,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향을 틀지 않습니다. 인생을 좁고, 짧게 보면 전혀 엉뚱한 방향에 서있다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길고, 높이 보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미에게는 아무리 굽은 길이라도 직선의 도로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냐면 보이는 시야가 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 위로 올라가면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시야를 넓히면 볼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만 제대로 설정되었다면, 설혹 우리 곁에 일어나는 여러 환경들에 의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방향은 ‘천국’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당하는 여러 어려움들에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향이 분명하다면 바람이 불어도, 파고가 높아도 가야합니다. 주님이 계신 방향, 영원한 도성에 맞추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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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4.2019 다시 세운다는 것은…
    교회 공사가 다 마무리 되었습니다만, 수정해야할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감당해야 할 몫이기에 되도록 빠른 시간에 마무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 다시 배우게 됩니다. 공사를 다시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처음 할 때에는 두 사람이 주도적으로 일을 해내던 것을 이제는 5-6명이 달라붙어서도 끙끙거립니다. 그만큼 수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한번 세워진 것을 다시 수정하려고 재공사를 하는 일은 처음 시작할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고, 힘도 몇 배나 더 소모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 과정을 지나보면서도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허물고 새롭게 세우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쉽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우리의 옛 말에도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려서 몸에 밴 습관은 그만큼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신앙습관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습관이 평생을 좌우할 자기의 신념이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처음 습관을 잘 들여야 평생이 편합니다. 교회생활이 바로 그런 것과 같습니다.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미 오랜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습관이 배어있습니다만, 처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시작하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습관을 갖지 못한 채, 기존 성도들의 잘못된 습관을 따라서 행동을 배우는 일이 99%입니다. 불평과 원망을 일삼거나, 자그마한 시험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습관, 예배시간 늦고, 매사에 협력하지 않는 습관들은,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가장 쉽게 배우게 되는 잘못된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배웠다면 잘못 배운 것들을 수정하려 할 때에 얼마나 많은 심리적 저항과 고통을 드러내야 하는지요. 심지어 그런 잘못된 습관들이 세워진 다음에 수정하려고 외부적인 힘이 가해지면, 개인적으로도 고통스럽고, 더구나 교회에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며 심지어 교회가 깨지는 고통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처음 습관이 잘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 성도는 믿은 지 몇 년도 안 되어 목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처음 교회에 나간 교회가 서로 섬기고 열심을 내는 분위기여서 자연스럽게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 배움은 누구로부터 왔습니까? 함께 신앙 생활했던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받은 좋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좋은 것에서 배우지 않고, 나쁜 것에서 배우고 그것이 교회생활인줄 착각하며 평생을 삽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고쳐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된 습관에 젖어있다면 나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 체질개선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해야 되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고통이 와도 해야 합니다. 더 큰 아픔이 오기 전에 처음부터 잘 세워져야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순종의 훈련이 잘 되어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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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7.2019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나면서부터 깊어집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이 남의 사건이 아닌 나 같은 죄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뼈저리도록 가슴에 파고들면서 비로소 참된 신앙생활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해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사건 소식에 감격으로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다짐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살아야지… 이러한 다짐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리잡아갑니다. 그래서 에배에도 참여하고, 목장과 각종 성경공부에도 참여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참 잘하는 신자처럼 추앙도 받습니다. 받은 은혜가 어떠하다고 가끔씩 다른 이의 심금을 적시는 간증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까지입니다.원칙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고, 그래야 됩니다. 큰 그림에서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그림, 각론, 그 디테일에 들어가서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진리처럼 느껴집니다. 다 맞는 말을 하고, 맞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 살아내려는 삶의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커다란 목표와 원칙에 맞게 가고 있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삶이라는 디테일과 결탁하게 되면 전혀 문제가 달라집니다. 다들 내 것, 내 삶의 무게, 내 삶의 형편과 부딪히면 언제나 우리가 선택하는 쪽은 우리의 유익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주님의 제자로서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하지 못한 채,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바빠서, 몸이 아파서, ~~이런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디테일에 가면 무섭게 빠져나갑니다. 주님이 필요한 시간에, 주님이 원했던 일에, 주님이 나를 원했던 곳에는 아랑곳없이 우리 삶의 디테일에 마음이 가 있기에 여기에 부딪히기만 하면 언제나 사정없이 무너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마귀도 우리의 신앙생활의 대 원칙에는 동의해줍니다. 주님을 사랑해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자, 아멘! 그럽니다만, 정작 삶의 디테일의 문제에 들어가면 언제나 내 일이 먼저고, 내 삶이 먼저입니다. 교회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가 부흥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와 사명에는 다같이 마음을 모으고 기도를 하지만, 정작 교회가 우리의 삶을 필요로 할 때에는 너무나 바쁘고 힘이 들어서, 아니면 내 관심사가 아니어서 은근슬쩍 나는 아니야~라고 빠져나갑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아름답고, 은혜로워지려면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헤이지만, 그 은혜는 우리의 ‘디테일의 헌신/희생자’의 통로를 통해서 흘러옵니다. 주님이 초청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밭을 샀으니, 소를 샀으니, 장가들었으니…’라고 빠져나갑니다 (눅14장). 그것이 디테일입니다. 주님의 초청은 응해야한다는 원칙/큰 그림은 있는데 막상 디테일에 들어가면 모두가 핑계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희생과 손해 그리고 포기함이 없이는 절대로 디테일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악마는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삶의 디테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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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0.2019 봄은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베가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날씨의 변화에 대한 이상 현상들을 전해오는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진기하게도 베가스에 눈이 내리고, 추위가 지속되는 현상으로 인해서 주차장에 심은 나무가 얼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그동안 자주 내리는 비 소식에 심겨진 나무가 잘 자라겠다는 안심이 되다가도, 갑자기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지니 자랄 것으로 기대했던 나무들이 얼어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기대와 염려가 교차되는 시점에,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얼어붙은 추위속에서도, 강풍과 눈바람속에서도 버텨내고 가로수에서 찾은 봄은 신기하게도 늦춰지지 않고 오고 있었습니다. 교회 뒷마당의 뽕나무에도 가지가지마다 움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겨우내 얼어서 더 이상 꽃을 피울 수 없을 것만 같은 나뭇가지 사이에서도 봄은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어 죽을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도 마치 무덤으로 막을 수 없었던 예수의 부활처럼 무거운 겨울 문을 뚫고 봄은 그렇게 화알짝 꽃봉우리에 묻어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우리 삶에 무거운 겨울이 머무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인생의 끝이 오나 싶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겨울에 눌려서 영원히 봄을 보지 못할 것과 같은 절망의 시간이 있었고, 패배와 낙심의 시간도 우리의 인생에 머물렀던 시간들을 아프게 기억하기도 합니다. 긴 터널을 지날 때, 그 끝이 언제 오나 싶을 정도의 두려움도 찾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터널의 끝에 다다를 때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는 것처럼, 인생의 겨울과 같은 긴 터널을 지날 때,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망’ 혹은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어려움과 역경이 진할수록, 소망의 향기는 더욱 진하게 풍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5:4~5)고 하였습니다.우리 아름다운 교회가 지난 10년의 시간을 견뎌왔습니다. 때론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감격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정말 쓰고도 신물나는 고통의 시간도 지나온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니, 그래도 고통의 시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준비한 ‘봄의 시간’은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봄이 다시는 오지않고 이대로 삶의 나무들이 얼어죽을 것만 같은 상황속에서도 안된다고, 죽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어 죽은 것 같지만,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기도하며 소망하면 없을 것 같은 봄이 어느새 우리 곁에 머무르는 시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지나고 보면, 안될 것 같은 상황,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될 시간들이 있었지만,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에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소망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봄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반드시 봄을 준비해야 합니다. 농부는 봄이 올 것을 기다리며(확신하며) 씨를 준비하고 농기구를 손질합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합니다. 인생이 어려울 때가 있다면 봄을 준비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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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03.2019 아름다운 교회 10주년을 생각하며…
    지나간 10년이 주마등처럼 흔들리며 지나갑니다. 급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와 함께 전혀 예기치도 못했던 개척의 깃발을 들고 시작한 아름다운 교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하심과 성도들의 한 땀 한 땀의 정성으로 세워진 교회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견디며 아름답게 세워졌습니다. 만감(萬感), 온 감각을 통하여 느껴오는 추억 하나 하나는 감동과 감사, 아픔과 기쁨, 회한과 새로운 사명 등으로 얽히며 새로운 길을 마음에 내고 있음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지나놓고 보면, 후회할 일이 많은 법이겠지요. 목회자로서 지난 10년 동안의 사역을 돌아보며 아쉬웠던 많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때로는 목회자의 무지와 아집 그리고 무능한 목양의 기술이 어우러지며 주님의 교회를 어려움에 처하게 한 일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위험한 고비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는 이러한 연약한 목회자를 가려주시는 축복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개척의 소망을 주시고, 성전 건축의 뜻을 품게 하셨던 몇몇 성도님들의 얼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의 조용한 헌신은 교회의 토양을 비옥하도록 가꾸어준 거름(?)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일을 자기 일처럼, 몸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최선의 방법으로 교회를 섬겨주신 분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희생해 주신 몇몇 분들의 섬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은혜의 터전이 되도록 그리고 주변의 눈치 보지 않도록 목회자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면서 성심성의껏 목회자의 손과 발이 되신 몇몇 분들의 사랑도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마음에 다 흡족하게 받아들지 못할 환경 속에서도 목회자를 믿어주고, 비난과 비판 대신에 묵묵히 기도해 주시며 믿고 따라와 주신 분들은 바보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었습니다. 어려울 때에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남몰래 울며 삼켜야 했던 눈물, 마음속에 한없이 좌절하고 싶은 낙망이 앞날에 드리워질 때, 홀로 외로운 고통과 서글픔의 마음을 기도와 말씀으로 달래야 했던 시간들을 뭐라고 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나의 나됨, 교회의 교회됨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이었던 것입니다.이제 지나간 10년의 세월은 미래를 위한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제부터입니다. 근래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비전(아니, 이미 있는 것이었는데 다시 새롭게 보는 것이겠지요)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유람선타고 유유자적하게 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며,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땅의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이곳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나, 우리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사명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은 주님이 주인이셨지, 사실은 우리가 주인행세를 했던 것에서 주님께 주권을 돌려드리고 오직 우리는 복음 곧 영혼구원을 향한 참된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새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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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
    아름다운교회 Feb 24.2019 유람선을 탈 것인가, 전투선을 탈 것인가?
    이제 10주년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준비하면서 벌써 교회가 10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수많은 생각과 회한이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눈물로 견뎌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에서부터, 순간 순간 행복에 겨워서 울고 웃었던 순간까지 참 말로 다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이 교회의 촛불을 끄지 않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10년! 수십년 혹은 몇 백년이 넘은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겨우 걸음마도 못뗀 어린 아이와 같을지라도, 저와 우리 교회의 체질과 역사를 추억해 보면 이 10년은 기적처럼 존재한 시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긴박했고, 우리의 힘은 너무나 연약했기 때문이고, 이곳에 목회자로 세워진 저는 정말 능력도 없는 종이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10년을 한결같이 교회를 섬기시는 분들도 있고, 지난 10년의 세월속에 함께 가족이 되어서 여기까지 이루어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근자에 하나님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목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위태한 길을 걸어 왔지만, 과연 지금부터 걸어야 할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 몇 주간의 휴식기간을 통해서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도전의 말씀은 ‘바른 교회, 성경적 교회, 제자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그러한 생각으로 목회를 해 왔습니다만, 내 안의 성령님께서는 허울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David Platt목사가 지적한 대로, 오늘 날의 교회는 성경적 교회나 성도의 모습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람선을 타고 유유자적하게 먹을 것이 풍부한 곳에서, 밤마다 파티가 벌어지고, 그저 자신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그냥 ‘여행’이 목적인 유람선을 탄 교회의 모습이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참된 제자의 표식을 다 벗어 던지고, 그저 행복하게 살고, 안락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말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교회를 그렇게 이야기 하지도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걸음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심지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그만큼 제자의 삶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전투선을 탄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투선을 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냥 호화유람선을 타고, 오늘은 여기서 놀고, 내일은 저기서 놀고 싶어 하는, 그것이 마치 삶의 목적인양 살아가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삶의 살기로 한다면 유람선 타는 교회는 아닌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투선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유람선 의식을 벗고, 하나님의 나라와 제자의 삶, 목적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동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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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3
    아름다운교회 Feb 17.2019 레디컬(Radical)
    레디컬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온지는 2011년이니(한국어 번역) 꽤 오래 전의 책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2015년에 69번을 다시 찍어낼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 책은 몇 년전에 청년부와 대학부에서 book sharing으로 다루었던 책입니다. 당시에 책의 제목을 보고서 쉽게 대면하지 못했고, feedback역시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제 손에 잡게 된 것은 지난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도전적인 내용들로 가득차 있었고, 우리의 편안한 신앙생활을 질타하는 내용들은 과연 평범한 교인들에게는 불편하겠다는 공감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읽다가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자에 제 마음속에 일종의 깊은 탄식과 회의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하셨는데 이 고민 끝에 만난 ‘레디컬’이라는 책은 불편하다는 것보다는 내가 고민하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대변해 주는 내용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난 후에 결론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목회와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저에게는 그야말로 깊은 성찰을 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같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왜 ‘레디컬’(급진적인, 진보적인)이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저자의 의도적인 충격요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반 교회의 교인들이 들으면 불편해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급진적인 사상이나 주장이 아니라 가만히 뜯어보면 그것은 지극히 ‘성경적인(biblical)’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극히 성경적인 정신을 ‘급진적’으로 대해야 할만큼 현대 교회가 비성경적인 요소와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이야기입니다. 가장 성경적이라고 자부하던 교회가 가장 성경적인 것의 내용을 급진적이라고 대해야 할만큼 우리의 처지와 살고 있는 환경이 한참 성경적 원칙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변질되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세속주의 기독교’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가 가졌던 세상의 가치관이 예수를 믿어서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뀌어져야 하는데, 지상의 성공주의의 사고방식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물량적 가치관이나 배금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의 기류가 교회의 성경적 가치관을 훼손하고 차고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 교회가 이제 창립 10주년을 맞이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새로운 도전과 각오를 새롭게 하셨고, 인생의 마지막 목회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이 시기에 갖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야할 방향이 분명해졌다고 저는 믿습니다. 아니,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집니다. 이를 함께 이루는 동역자들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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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
    아름다운교회 Jan 20.2019 고백
    “오늘 사사기 5장, 드보라의 찬양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찬양이 나오지 않는데 믿음으로 감사로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의 찬양은 승리의 찬양이었습니다. 이길 수 없는 그 전쟁에서 이긴 다음의 그 찬양이었습니다.기적을 보이시며 승리케 하신 놀라우신 그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리아니 하실지라도 감사하십시다. 이것만 되풀이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나도 승리의 노래도 부르고 싶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목사님은 여러 모양으로 고난을 당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험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래도 하나님을 붙잡고 일어서려고 애를 쓰시는 귀한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그분의 고난을 이해하고 자주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이런 문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마음에 닿았습니다.“하나님, 저도 승리의 노래도 부르고 싶습니다!” 고난에 지쳐서 항상 울 일만 있음에도 말씀을 붙잡고 기뻐하고 찬양하라고 하시니 찬양을 합니다. 뺨맞는 일 앞에서도 억울하다 말도 못하고 그저 눈물의 기도로 예레미야처럼 기도실에 박혀서 기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도 승리의 노래도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제 기도가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말씀을 익히 알고 있기에 감사로 고난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무서운 현실속에서 빠져나갈 고난의 시간앞에 서 있을 때, 욥의 기도를 배웠습니다. 고난의 무게는 사실 누구에게는 쉬울지는 몰라도, 막상 그 짐을 진 사람은 죽고 싶을 정도의 아픔을 느낍니다.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 그것들이 결과를 드러낼 때에 비로소, ‘아하, 하나님이 이것 때문에 나를 이렇게 거칠게 다루셨구나’라고 고백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고난 받을 때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상식이 안 통합니다. 고난 중에 어찌 기쁨이 자연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울라고 하지 않으시고 기뻐하라고 하신 이유를 우리가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냥 시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으면 그 분 손안에서도 자유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같은 기도를 올립니다. 그냥 당연한 감사와 기도와 찬양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하박국이 올렸던 기도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이 메마를 때입니다. 그 메마른 광야에서도 주님은 성령으로 다듬고 보듬어 주셔서 그 영혼으로 주님을 만족하며 찾는 시냇가의 사슴으로 바꾸어 주시는 은혜를 보고 싶습니다. 나도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기도 분명히 주님은 들어주실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주인이신 주님이, 말씀 한 마디로 주관하시는 주님의 능력이라면 우리도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날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서는 아닐지라도 충성된 종에게 불러주시는 그 하늘의 영광의 노래가 분명이 있을 줄 믿습니다. 삶에서 고단할 때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승리의 노래, 꼭 우리의 작은 입술에 큰 고백으로 부르게 하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나도 승리의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마음 놓고 부르고 싶습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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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아름다운교회 Jan 13.2019 설화(舌禍)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이 점점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작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고, 녹녹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갈수록 삶이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 중의 어려운 점은 바로 ‘언어생활’입니다. 평생을 말하는 설교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골이 났을 법합니다. 그런데도 말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부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인생의 지옥 같은 나락을 갔다 온 적도 있습니다. 내 의도는 그것이 아닌데, 전혀 엉뚱하게 해석되어서 주워 담을 수 없을 어려움을 당한 것도 있습니다. 평생 상처가 되고도 남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차라리 입을 닫고 살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말 하나로 관계를 깊게도 하고, 관계를 허물기도 합니다.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잘 하다가도 말 한마디 삐걱해서 삶의 바퀴가 다 타버린 경우가 허다합니다. 말로 화를 자초하기도 하고, 말 때문에 공동체가 힘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이것을 설화(舌禍)라고 부릅니다.특별히 개인 생활이 아닌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에서는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생각 없이 한 말, 걱정해준다고 한 말, 배려해 준다고 한 말,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이런 말들이 비수가 되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김없이 남의 말을 듣고 판단했으며, 당사자 앞에서가 아니라 본인이 없는 곳에서 뒷담화(?)로 한 이야기로 인한 것들로 인해서 생겨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의 위험성을 아주 신랄하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혀는 불이요…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약3:6)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을 주시고, 그 안에 혀를 두셨습니다. 입은 의사를 전달하는 일에, 먹고 건강을 유지하라고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더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라고 합니다. 즉, 우리의 입을 가지고 생의 바퀴를 불살라 버리는 악한 일에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이 거룩한 사명에 부름을 입은 것이 바로 우리의 입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본인이 없는 곳에서는 그 사람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목장에서 서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걱정을 해준다고 한 말들이 돌고 돌아서 본인의 귀에 들어가서 결국 관계를 망치고 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은 상처를 받고 떠나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도 그런 문제를 가지고 가슴앓이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허물을 들쳐 내는데 가장 흥분되는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려,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면, 아무리 친한 사람들 앞에서라도, 아무리 걱정해 주는 말일지라도, 본인 앞에서가 아니면 하지 않아야 됩니다.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은 절대로 없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 귀에까지 들어옵니다. 그럴 때 실망이 됩니다. 설화(舌禍)에서 벗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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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06.2019 말씀이 육신되어 사는 삶
    새해 첫 주일입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과거의 시간을 뒤로 한 채, 우리에게 유의미(有意味)한 시간을 새롭게 맞이한 것입니다. 지난 한 해에는 ‘세상에 빛 비추는 교회’라는 목표를 정하고 달려왔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었는가, 누구에게 우리는 빛으로 살았는가 생각해 보면 많은 후회가 앞서기도 합니다. 목표를 정했다고 그 목표가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개인과 교회가 조금이나마 빛된 삶을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는 그러한 동력을 한 해 동안 얻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빛이 아닌 이상, 우리는 빛을 반사해 낼 수 있는 반사체라도 될 수 있어야 하기에, 빛되신 예수님을 품는 은혜의 역사가 지난 한 해에 부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는 그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또 한 해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기도 중에 이번 2019년도의 교회의 표어를 정했습니다. “말씀이 육신되어 사는 삶”입니다.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기도시간에, 찬송시간에, 설교시간에 가슴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그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뺨을 적시는 눈물이 은혜의 징표였을까요? 그러한 것들은 단지 ‘느낌’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진짜 은혜는 그러한 감정이 아니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생활, 즉 말씀을 살아내는 삶이 바로 은혜받은 증거가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요14:21)라고 말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은혜 받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받은 증거는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것에 있지 않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우리는 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주시는 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고,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너의 진보(성숙함)를 나타내라”(딤전4:15)고 하였습니다.말씀이 육신되어 사는 삶,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성경공부를 통하여 우리가 성경지식을 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몰랐던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1:1,14)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고, 그 분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분이셨습니다. 이것을 가르치신 분도 성령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이 놀라운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으셨다는 것은 사람이 바퀴벌레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한 것입니다. 그처럼 낮아지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시다 못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죽음의 지배아래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되신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삶을 사는 것이 은혜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한 해를 달려갑니다. 주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동안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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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30.2018 한 해를 돌아보며
    오늘이 2018년에 드려지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이면 우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통해서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시간을 맞으면서 우리 모두는 시간이라는 엄숙한 진리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거스릴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공평한 시간앞에서 우리가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후회하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하며, 때로는 감격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감정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지난 한 해 2018년은 우리 교회에는 축복의 한 해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곳 성전으로 이사를 와서 5년 남짓한 시간을 ‘공사모드’로 살아왔습니다. 더욱이 지난 2018년은 공사에 집중하여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시간들을 보내야했습니다. 새벽예배가 마치면 청바지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늦은 밤시간까지 공사를 해야하는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쉬는 날도 없이, 몸이 아파도, 쉴수가 없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내온 지난 한 해였습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는 이 시간에는 모든 공사를 거의 마무리하고 inspection을 기다리고 있는 요즘은 그리 편하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공무원들에게서 받은 어려움을, 다른 공무원의 배려로 아주 순조롭게 마무리를 할 수 있게도 하셨습니다. 재정적인 문제도, 성도들이 부담을 갖지 않으면서도 순조롭게 조달되어서 모자람이 없이 마칠 수 있게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목회는 목회일정대로 돌아가야 하고, 공사는 공사대로 해야하는 이 빠듯한 시간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시간들을 고통으로만 남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흐릿하게 남아있는 은혜의 불을 지난 다니엘 특새를 통하여 꺼져가는 촛불을 횃불로 타게 하시고, 우리가 가야될 방향이 어디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사탄은 교회가 저절로 술술 풀려가도록 절대로 그냥 방관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은 은혜의 불을 끄고자 하는 사탄의 바람이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겸손과 사랑을 배우게 하셨고, 참된 교회의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아프지 않고는 성숙하지 않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아픔 속에서만 피는 꽃이 있었습니다. ‘연약함’속에서만 보이는 ‘강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동안 아팠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꽃을 피우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임을 보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언제나 선하셨습니다. 그 분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고, 참 감사를 무한히 올려드립니다.한 해를 보냅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이 시간을 그냥 흘려만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후회와 회한의 시간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처도 많았지만 남은 상처가 다시 덧나게 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나고 헤어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분의 만드신 길을 따라 만들고 고민하는 시간만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는 우리 모습 때문에 속지 말고, 정말 나를 이곳에 보낸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며 그 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이 일어나는 연말연시가 되기를 고대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갈망하며 한 해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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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3.2018 성탄선물
    먼 나라에서 선물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은 너무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 포장지는 이미 걸레처럼 더러워졌고, 뜯기워졌습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누가 봐도 선물이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그것이 선물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선물, 그런데 그 선물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인류는 그 선물을 받아들고 당혹했습니다. 선물인데 선물같지 않은 선물 때문에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 선물을 없애기로 다짐합니다. 많은 사람들도 그 선물을 천박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엔 폐기처분하기로 결정하고 골고다로 보내버렸습니다. 선물이 선물되지 않았던 것입니다.그 선물은 인류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선물을 거절했습니다. 왜냐면 ‘흠모할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귀하게 보여야 믿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시를 합니다. 명함을 파서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좋은 차, 큰 집을 사서 내가 얼마나 존귀한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있어야 선물가치를 인정해 주는 이 시대의 맘모니즘을 따라서 삽니다. 눈에 그럴 듯해야 조금이라도 믿어주고, 존중해 주고, 알아줍니다. 그런데 막상 뜯어보니 얼마나 초라한 것들이었는지요. 그 모습의 화려함이나, 언어의 출중한 설득력 앞에 한두 번 속은 게 우리가 아니었던가요?예수님은 인류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초특급 선물이었습니다. 그 선물을 받고, 그 선물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평강과 은혜가 있었고, 구원의 기쁨으로 인생이 바뀌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치고 망한 사람이 없습니다. 망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망한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입니다.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선물문화에 젖은 우리들은 저마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쁨과 감사를 나눕니다. 새로운 선물, 멋있는 선물을 건넵니다. 그러나 정작 주어야 할 선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선물을 건넬 때가 많습니다. 성탄절에는 선물이나 산타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선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선물의 중심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원합니다. 예수없는 인생, 예수없는 교회, 예수 없는 신앙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깊은 탄식으로 구원을 기다리던 암흑의 백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00여년동안 종살이 하면서 고통스럽게 부르짖었습니다. 애굽에서의 고통은 결국 하나님의 귀에 들려졌습니다. 만일 이 고통이라는 아픔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렀겠습니까? 그들의 애굽 이민생활이 행복했더라면 하나님을 찾기나 했겠습니까? 이 땅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신음하는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선물은 크게 다가옵니다. 이 선물이 나에게 큰 선물로 다가서는 이번 성탄절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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