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1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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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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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25.2018 나는 행복해요!
    당신의 신앙생활은 행복하십니까? 이 말처럼 다양한 대답이 가능한 것이 또 있을까? 자신의 신앙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지겹다고 하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너무 부담이 많다, 그저 먹먹하다 등등의 말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신앙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어느 집사님은 눈에 가득한 눈물을 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하는 것들이 죄인줄을 정말 알지 못했어요. 그러한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인줄을 깨닫고 보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회개가 나오는지… 눈물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목사님, 이제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천천히 변화되겠지만 이제는 옛날의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지금 정말 행복해요’ 이 고백을 들으면서 저절로 가슴에 찐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 안에 사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나의 옛 사람의 모습 때문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던 집사님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생각해 봅니다. 나는 과연 그런 행복이 있는가?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의 현장인 교회생활이 괴롭고 힘들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떠날 생각도 합니다. 교회 생활이 행복하지 못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나의 가슴에 멍이 들고 또 듭니다. 내가 은혜를 끼치지 못해서 저렇게 힘들어 하고 교회를 떠나는구나 싶어서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자책도 합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을 때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으니 지치고 지친 영혼들이 깡치만 남아서 서로를 들이받습니다. 가슴에 상처가 남도록 거친 말을 주고받게 됩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고, 아파하고 교회를 떠날 구실만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다른 교회로 간다는 말을 못해서 아예 타 주로 이사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갑자기 그런 은혜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과거의 나에 대해서 회개하기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옛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구원받은 그 은혜에 감사해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다시 하는 분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매주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매 주, 예배가 끝나면서 우리 안에 그런 고백들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정말 행복해요’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게 되면 행복해집니다. 광신자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이 비밀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해서 행복한 눈물과 웃음을 지을 수 있습니다. 불행하십니까? 교회 생활, 신앙생활이 권태로우십니까? 지금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그 분의 은총을 간구하십시오. 지금 주변에 그 행복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그 행복의 주인공이 될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아름답게 행복한 신앙생활하는 산실(産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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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8.2018 어떻게 보답할까…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단지 지난 1년을 향한 감사보다는 지나온 10년의 감사가 더 가까이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늘 새로운 한 해를 감사했는데, 왜 이렇게 이번에는 10년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시편116편의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탄식했습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라고 부른 찬송시인의 노래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나와 우리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초라해서, 거의 이기적인 헌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참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통해서 아사 왕의 종교개혁과 예배회복을 다루는 말씀 가운데서 아사와 그 백성이 드린 제물이 소가 700마리에 양이 7,000마리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화폐로 대략 계산해 보니, 약 40억원정도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치고는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소 몇 마리만 대표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드려도 하나님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사는 그 많은 돈을 들여서 한번의 제사로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 아깝지 않을까요? 현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고, 낭비라고 온세상이 들고 일어났을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 모습에서 아사와 백성들의 헌신의 각오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이 아까울 정도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지 않나 싶습니다.우리는 때로는 입술로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정작 헌신없는 감사만 외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헌신과 희생은 나와는 상관없고, 그저 입술의 감사만 한껏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감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고 자위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의 감사에는 희생과 헌신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마치 제물없는 제사가 의미가 없듯이 헌신과 희생없는 감사 역시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 지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도 다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물질의 감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물질의 감사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감사로 하나님께 감사하느냐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귀히 보신 예수님이 이 여인을 칭찬한 것은 그 물질의 작고 큼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난했기에 헌금을 안 해도 주님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드렸습니다. 자기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마치 엘리야 시대에 한 과부가 엘리야에게 자기 먹고 죽을 마지막 양식까지 바친 과부를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감사에는 입술의 감사도 있지만, 헌신과 희생이라는 물질이 담겨져 있을 때에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헌신과 희생은 고통입니다. 아픔입니다. 손해입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쉬운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손해가 따르지 않는다면 희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가 참된 감사가 되려면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감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껍데기 감사는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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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1.2018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3주간,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든 생각과 대화의 소재는 ‘다니엘 특별 새벽기도회’였습니다. 모이면 각자가 받은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은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우리의 표정과 삶이 바뀌듯, 은혜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많은 증거들이 우리로 하여금 신나게 합니다. 이래서 믿는 것이었구나. 이래서 기도하는 것이구나, 이것이 바로 은혜구나, 새로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인해서 감격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지난 특.새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이제 우리 교회가 10년을 달려옵니다. 격변의 시간들도 있었지만, 지난 10년동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많은 훈련이 있었고, 이제 그 열매를 10년만에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교회를 향한 걸음이 시작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과거에도 맛볼 수 없었던 은혜들, 그동안에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였다고 본다면, 이번에 받은 은혜는 교회 전체에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과 불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받은 자로 사는 삶을 잘 뿌리내려야 합니다. 받은 은혜에 그치지 않고, 성령의 충만을 계속 사모하면서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몇 가지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첫째는 생각의 변화, 영적인 변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삶의 변화입니다. 어느 성도님은 달라진 자신의 삶으로 인해 스스로 놀랍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말이 달라지고, 보는 것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질 수밖에 없더라고 고백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삶이 변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에서 탈피하게 됩니다. 둘째는 은혜받은 것은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교회를 어렵게 하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남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세워가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신앙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은혜는 나를 주님앞에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높여 주십니다. 셋째는 은혜받은 사람은 헌신의 사람으로 익어가야 합니다.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그것은 아직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은혜의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순종으로 함께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넷째로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는 안됩니다. 왜냐면 내 안의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안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은혜가 되도록 성령께 간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말씀과 성령께 순종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은혜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은혜를 쏟는 것은 쉽습니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가십니다. 말씀안에서 순종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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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04.2018 은혜를 주실 때
    어느 목사님의 자조섞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특.새가 은혜스럽다고 칭찬하면서 자기 교회는 특.새를 해봤지만 특.새를 하나, 안 하나, 항상 나오는 사람이 같아서 특.새에 대한 특별한 기대도 없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안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지난 10년 동안 특.새를 매년 진행해 왔습니다. 신이 나서 할 때도 있었고, 강권적으로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은 특.새가 필요했던 영혼들을 만나주셨고, 그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믿음으로 좀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있는 특.새이지만 육체적으로는 힘들고, 영적인 도전도 받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특.새는 지금까지 했던 과거의 어떤 특.새보다도 특별한 특.새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아침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새벽예배에 참여해 봤다는 사람부터, 이렇게 오랜 동안 새벽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 분들, 다들 스스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임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새벽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저 감사의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찬양에 은혜받고,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에 부어주시는 은혜로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식사 후에도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삼삼오오 앉아 대화를 나누는 기이한(?) 현상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단 한 가지만 생각이 납니다. “아,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내 실력과 능력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현장이기에 저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그 분의 만져주심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새벽시간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에 세례식에서 3명의 자매님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세례식을 집례해 왔지만 이렇게 눈물과 감격과 감사로 세례식을 드려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아 ,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감격이겠구나’ 그런 감격이 가득 차오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내 눈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아니, 무슨 일이 교회에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는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이제 때가 되어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는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신 말씀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것이라”는 말씀도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위한 말씀임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모한다고 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모함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며, 마치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리며 약속의 아들을 받아냈던 것입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교회생활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신앙생활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남은 한 주간의 은혜가 기대됩니다. 어떻게 만지시고, 어떻게 이루어지시는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주님의 솜씨에 기대를 갖습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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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28.2018 다니엘 특.새에 주시는 은혜
    특.새가 시작이 되면 목사는 영적으로 바짝 더 긴장하게 됩니다. 정말 피곤한 삶의 일정을 뒤로하고, 새벽을 깨워서 달려오는 성도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기를 소원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능력있게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여하는 지체들 가운데는 하루 2-3시간도 잠을 자지 못하고 오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특.새는 매일 매일이 부흥집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긴장을 유지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번 특.새는 교회의 막바지 공사를 하면서 충분히 준비할 시간도 없이 벌써 특.새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더 많이 기도로 준비하고,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준비해야 하는데, 공사 때문에 훌쩍 시간을 보내고, 급작스럽게(?) 특새가 다가온 것이 못내 부담이 되었고, 염려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피곤한 가운데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한 것은 이번 집회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은혜가 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날부터 많은 성도들의 관심과 참여로 시작하면서, 은혜로운 찬양과 고백들, 사모하는 심령들이 온 몸으로 주님께 다가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면서 숫자를 더해 가더니, 토요 새벽에는 어린 중.고등부 자녀들까지 함께 참석하면서 70명 가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감격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이번 특.새는 어느 때 보다도 이번에는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말씀을 받는 눈길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터져서 방언으로 고백하는 분들, 눈물로 회개와 고백으로 주님앞에 서는 사람들, 마음의 곪은 응어리들이 성령의 은혜가운데서 녹아져 서로 부둥켜 안고 사랑과 용납의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 평생에 이런 은혜 처음 맛을 보았다는 분들, 기도가 이런 것인 줄 이제야 처음 알았다는 분들… 이런 저런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간증들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0년째 특.새를 하고 있지만, 이런 은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새삼 놀랍고 놀랍다는 것을 다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감사한 것은 이전에 비해, 여러 성도들의 영적 성숙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 모습은 더욱 더 감사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어린 신앙이, 기도를 통해서 고백되어지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물로 고백하며 찬양하는 분들을 바라보며 가슴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찬양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공사로 인하여 새벽부터 밤 늦도록 공사하는 피곤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날을 새워 설교준비해야하는 고단함이 성도들의 받는 은혜로 인하여 상쇄되고도 남는 은혜가 저에게도 부어지고 있었습니다.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서는 온전한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함께일 때에야 온전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못할 수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들을 뒤로하고, 믿음으로 나갈 때, 하나님은 무한한 은혜를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져 주실 때에 그분 품에 안겨보는 은혜가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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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21.2018 걱정대신에 기도는 어때요?
    아내가 생일 날 받은 꽃을 꽃병에 옮겼습니다. 제법 싱싱한 꽃이어서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 꽃을 관리하면서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야, 이 꽃은 물을 많이 먹네요’ 그러고 보니 가득하던 물병의 물이 제법 눈에 띄도록 많이 줄었습니다. 싱싱한 꽃은 아마도 활동이 왕성해서 물도 왕성하게 빨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든 꽃은 생명력을 유지하는 활동인 물을 적게 먹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같은 원리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영적 활동에도 활발하다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러고 보니 삶이 건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도 그렇게 잘 빨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생활도 왕성합니다. 삶을 들여다보면 긍정적으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무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적합한 환경만 되면 언제나 불평을 합니다. 기도생활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과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깨달음이 많으면 살아야 되는데, 깨닫는 데만 발달된 사람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면 삶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안의 영(靈, spirit)이 건강해야 합니다. 신령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기도많이하고, 은사가 많으면 신령한 사람일 것 같은데 오히려 그들은 바울에게서 ‘어린아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성숙함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알았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영성을 가진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이를 위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일 년에 한 번, 3주간의 기도훈련을 합니다. 다니엘이 세 이레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런 은혜를 기다리며 매년 가을에 3주간의 치열한 영적 훈련을 쌓아갑니다. 물론 어떤 분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귀찮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실력은 시험을 치룰 때에 쌓여갑니다. 평가라는 시험이 없으면 사람은 그냥 도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치룰 때에, 그것을 준비하면서 실력이 부쩍 늘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벌써 이 교회를 개척하고서 10년이 되었고, 열 번째의 특별 새벽기도회를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시든 영성이 힘을 얻고, 무관심한 신앙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며, 건강한 영성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은혜가 이번 다니엘 특새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시작합니다. 기도는 싸움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와의 싸움, 삶과의 싸움, 그리고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얍복강의 야곱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건강한 영성을 바란다면 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염려함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염려하면 됩니다. 그러나 ‘너희가 염려함으로 머리카락 하나를 희고 검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의 자리로 나와보시기를 도전합니다. 기대가 됩니다. 이번 특.새는 누구를 위한 특새가 될지, 누가 하나님의 은혜에 만져주심을 받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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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14.2018 불러주신 은혜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얻는 간접적 교훈도 중요합니다만, 맛있는 사과맛을 먹어 본 사람과 들어서 안 사람의 경우가 다르듯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교회 공사를 통해서 요즘, 부목사님과 저는 무슨 일용직 근로자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새벽예배가 끝나면 옷을 갈아입고 온 몸에 흙을 묻히고 사는데 사실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되는 고생이지 싶을 때에는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목회자의 본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할 줄 모른다 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람 사다가 하면 이런 저런 원망을 안 듣습니다. 하지만 할 줄 모르지만 배워서라도 하는 이유는 성도들의 피땀어린 헌금으로 치루어지는 공사이고, 모자라는 펀드를 메꾸는 방법은 이것밖에는 없어서 이 일을 합니다. 월급 받는 고용인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밤낮없이 일용직 노동자 같은 삶을 살면서 배우고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을 때에는 Home Depot등에서 사람들을 사옵니다. 시간당 20불씩 달라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들은 맡겨서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몇 사람이 선택되어 따라옵니다. 그런 일꾼 중에서는 불성실한 사람, 요령만 피우는 사람,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 등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성실한 사람은 다음 날도 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도 부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할 줄 알고, 이것저것도 해 봤다고 자기 PR을 열성을 다해서 합니다. 그 말은 나를 다시 써달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품꾼의 비유와 같은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Angel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나이가 40중반은 되었고, 멕시코에 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10여년을 만나지도 못하고 일만 한다는 친구입니다. 성실하고 책임감도 있어서 며칠 데리고 일을 같이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열성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써준 사람에 대한 배려나 감사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열심히 할테니 자기를 써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 부르지 말고 자기를 불러달라고 합니다. 저는 매일 일당을 정성껏 봉투에 담아서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적어서 줍니다. 그러면 그는 고맙다고, 너 같은 보스가 없다고 칭찬하며 감사하다며 돌아갑니다.포도원의 품꾼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불러주셨고, 선택해주셨고, 나에게 일거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나는 써주신 주인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 이것을 시켰냐, 다른 사람 시키지 왜 나를 불렀냐, 왜 그렇게 임금도 조금 주냐, 먹고살기 힘들다, 불러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을 맡겨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감사하다고 해야 마땅한 것을 때로는 나는 원망과 불평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 일용직 근로자 Angel처럼 감사할 수 있는가? 나는 비싼 임금을 줘야만 하는 고비용 근로자라고 목에 힘주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제가 일하는 태도를 다시 일깨워 준 사람이 이 일용직 근로자 Angel입니다. 지금 주님이 써주신 것에 대해 나에게 찐한 감사가 있는지 가슴이 멍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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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07.2018 기초를 잘 놓아야 합니다.
    담 쌓기가 시작되어 이번 주 내로 외부 공사가 완료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제는 하나씩 Final inspection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공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 중의 하나는 정말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를 들어 벽돌담을 쌓는데, 그냥 우연히 그 벽돌을 놓는가했더니 나중에 보면 왜 그것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 기초가 잘되어 있어야 담을 쌓아도 일정하게 반듯한 벽을 세울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 기초가 잘못되었다면 다시 부수거나 보기가 민망한 담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새삼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초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기초를 모릅니다. 아예 기초를 생각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 나와서 복만 받으면 되는데 뭐 그리 기초가 필요하냐고 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교회 나오는 것으로 그치려고 합니다. 그나마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 잘 해보려고 시도합니다만 상당한 사람들이 뒤돌아서거나 중단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초체력이 문제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이 체력이 부족해서 힘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등산하는 분들도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 기초체력을 쌓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기초를 닦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다가 약간의 부딪힘만 있으면 그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랜 기간을 교회 다녔다는 이유로 자신이 기초가 잘 되어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것과 믿음이 좋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그러면 기초는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 없고 기도는 있거나, 기도는 있는데 말씀이 없으면 문제입니다. 분명히 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체력을 쌓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예배’와 ‘섬김’입니다. 이 기초가 잘되어 있는 사람은 예배와 섬김이 건강합니다. 삶의 문제가 다가와도 잠시 아파하기는 하지만 곧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천만인이 진을 친다할지라도 내가 어찌 두려워 하리요’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 영적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영적 자양분이요, 온갖 문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며,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세울 수 있는 기초체력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배생활 등의 경건활동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새벽을 깨우는 일꾼들이 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파고 들어오며 예배생활에 힘씁니다. 바람직하고 칭찬받을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초 체력을 쌓아야 합니다. 성경공부와 예배 그리고 기도생활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쁘고 힘들다고 하지 않으면 교회 다니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을 알고, 믿음의 성장과 영적 삶의 승리가 목적이라면 험한 산을 오르는 것보다 어렵고, 여행다니는 것보다 힘들지라도 믿음의 기초체력을 잘 쌓아야 합니다. 기회가 옆에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기초를 잘 닦아 두십시오. 꼭 쓰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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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30.2018 영감(靈感)을 얻는다는 것
    날씨가 이젠 정말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벌써 가을을 위한 옷들이 쏟아지고, 기온도 아침엔 이렇게 시원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당분간의 일기예보도 이젠 더위가 보이지 않고,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실감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가을은 놀러가기 좋은 계절도 되겠지만, 가을은 우리의 영성을 풍성하게 하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번 가을에는 성령의 바람을 타는 계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과 정직함으로 사랑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면 아느냐면, 그가 성전을 향한 마음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자기 손으로 짓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솔로몬이 짓도록 하나님은 다윗의 소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짓지 못하는 성전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 아들 솔로몬이 지을 성전의 재료를 성심껏 준비합니다. 그리고 역대상 29장에 와서 솔로몬에게 설계도를 설명하면서 성전건축에 매진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때에 솔로몬에게 성전의 모든 도구와 전의 설계도를 건네면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얻은 설계도라고 강조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성막에 대해서 받은 영감처럼, 다윗도 성전을 건축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감으로 설계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감으로 설계도를 받았다고 하면 언 듯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성령이 감동을 주셔서 뚝딱 날아왔다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서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설계도를 받았다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을 사모했는지를 먼저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면 영감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는 말입니다. 위대한 발명은 그냥 놀다가 우연한 영감에 의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노력을 하면서 수없이 실패와 반복을 거듭하고 고민을 하는 중에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그 하나의 아이디어가 바로 영감입니다.다윗이 설계도를 영감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과 같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으로 주님 앞에 늘 기도하며, 마음을 드리는 삶을 살았기에 그에게 그 사모함의 결정체가 영감으로 얻어진 설계도라는 것을 제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교회의 공사를 하면서 느끼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공사를 머리카락이 다 빠지도록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영감 같은 것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나의 공로와 상관없이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교감과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과 상관없이 살다가 알라딘의 램프처럼 갑자기 펑!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무릎이 까지도록 기도하며, 눈에 불이 날 정도로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서 주님께 가까이 가다가 얻는 능력이 바로 영감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는 만큼 주님은 나를 가까이 하시고, 깊은 영감을 주십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다. 기도를 가까이 하십시다. 정직한 길로 행합시다. 그것으로 영감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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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23.2018 나에게 자유를 달라
    여름 철에는 좀 불쌍하고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만, 우리 교회의 강아지들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개들이라는 행복(?)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들이 요즘은 늘 매여 삽니다. 워낙 잘 짖어대는 아름이(German Shepherd) 덕분에 도둑이 감히 넘볼 생각을 못해서인지, 지난 5년 이상을 있는 동안에 도둑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들이 요즘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울타리가 없어졌기에 늘 묶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강아지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어느 강아지는 하이퍼가 되기도 합니다. 늘 매어있어서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집으로 데려다가 뒷마당에 들여놓습니다. 그런데 뒷마당은 좁아서 돌아다닐 곳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면 다시 교회로 데리고 와서 넓은 뒷마당에 긴 줄로 묶어 놓습니다. 이러기를 반복합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강아지들에게 말입니다. ‘너희들은 넓은 마당이 있는 곳에 묶여있는 것이 좋으니, 비록 좁기는 하지만 좁은 뒷마당에 갇혀 있는 것이 좋으니?’ 그러면 애들이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묶여서 넓은 곳을 바라보고 동경을 하느니보다, 비록 좁은 공간이기는 하지만 묶이지 않아서 자유롭게 배회할 수 있는 곳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마음입니다.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와 같지 않을까요?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화려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거기서 무너집니다. 잘 살았던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는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넓은 장소로도 보았고, 풍요로운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화려한 들판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묶여있었습니다. 질긴 끈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된 자유를 억압하고, 끌리는 살아야 하는 강아지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롯의 인생과 같습니다. 삼촌 아브라함으로부터 분가할 때에 그가 선택한 것은 풍부한 물이 있고, 정말 아름다운 목축지가 놓여있는 소돔과 고모라 근처 소알 땅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자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자유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겨우 몸과 두 딸만 남겼을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84편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날이 세상에서 천 날보다 좋다. 세상의 악인들과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주의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좋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시인의 경험에 따른 신앙고백으로 보여집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고 하면서 막상 묶인 삶을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을 자유이며 번영이며 화려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묶인 자유일뿐이며, 참 자유는 아닙니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 무엇엔가 묶이지 않는 자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입니다. 묶인 것 같으나 묶이지 않는 참된 자유가 그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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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6.2018 말씀을 듣는다는 것
    지난 번에 Irvine의 어느 교회에 가서 말씀으로 섬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LA에 갈 때에 예배드릴 시간이 되면 자주 가던 교회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늘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은혜를 제가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그들의 예배는 언제나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예배드렸으면 좋겠다고 부러움을 갖기도 합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Staff들이나 찬양팀의 예배 자세는 눈에 불이 날정도로 집중력이 있습니다. 찬양인도하고서 뒤로 나가서 딴 짓 하지도 않으며, 예배 봉사자들도 예배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예배하는 모습이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예배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교회에 이번에는 말씀으로 섬기고 왔는데 제가 또 한 번 감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 설교가 끝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와서 기도를 인도하는데 제가 전한 설교 말씀을 잘 받아서 그것을 놓고 하나 하나 짚어 가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전한 말씀을 적용하여 회개하고,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신선했습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였습니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며칠 지난 다음입니다. 그 목사님이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저희 가족들과 함께 지난번 목사님이 전해준 말씀을 가지고 나누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그냥 잊어버립니다. 무슨 말씀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설교 한 편 들은 것일 뿐일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그날 말씀을 그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모아 놓고 다시 주어진 말씀을 가지고 나누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이 분들은 말씀을 사모하고, 주어진 말씀을 가지고 곱십어 보고 적용하고 누리고 은혜로 받아먹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전한 말씀이 그렇게 은혜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말씀이 은혜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분들은 말씀을 순종해내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들이었습니다.우리 교회가 목장모임을 할 때에 말씀 나눔을 합니다. 그때에 각 목장에서는 주일에 전해진 말씀을 가지고 나누라고 권면합니다. 가끔은 제가 민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전한 말씀이 무슨 은혜가 있다고 그러나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진 말씀을 가지고 나누라는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공통분모가 형성되어 말씀을 나누기 쉽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은혜가 안 된다고 투덜거립니다. 은혜도 불만도 결국 자신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살아낼 때에 말씀이 됩니다. 그냥 설교로 듣고 흘리지 말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 말씀이 그러한가 뒤적여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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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9.2018 하나님의 솜씨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설픈 실력으로 나섰다가 일을 그르치게 될 뿐만 아니라 곤경에 처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공사를 하다가 보니, 이것 저것 알게 되고 또 배우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Bob Cat이라는 장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대략은 하겠는데 세밀하게 작업을 하려고 하니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내가 잘 다룰 수 있으면 경비를 줄일 수 있을까 싶어서 시도를 해보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작업은 내 실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람을 불러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전문가는 다릅니다. 기계를 자기 팔처럼 다룹니다. 구석구석 요리저리 일을 하고 다닙니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전문가의 솜씨가 돋보이던 날이었습니다.인생을 조금 살았다고 하는 시기에 와서 뒤를 돌아봅니다. 늘 서툰 걸음을 걸어왔습니다. 패기도 있었지만 무엇인지 어설픈 삶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은 성공에 만족해 보기도 하고, 크고 작은 실패에서 오는 아픔과 상처가 늘 괴롭게 하곤했습니다. 결국 내 스스로 사는 인생은 마치 앞서 이야기한 Bob Cat을 다루는 내 솜씨와 같아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산 인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비틀거리는 인생의 걸음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시며 지금까지 저의 삶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에 어른들로부터 많은 잔소리같은 진리를 들었지만 그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인생을 다 보내고서야 깨닫는다면 너무나 가슴아픈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그것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삶이라는 무게에 눌려서 지내다가 그냥 떠밀려오지 않으면 다행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보다도 훨씬 위대한 것을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만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전문가입니다. 아니, 이 세상의 어느 전문가에 비교할 수 없는 분이지만 내가 내 삶을 만지며 다루는 것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아름답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다루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전문가라고 그 분에게 내 삶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알아서 할테니, 가만 계셨다가 내가 못하면 그냥 도와만 주세요’ 뭐, 이런 자세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우리를 맡아 주관하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고 현명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솜씨를 인간의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어설프게 만져서 고장나게 하는 것보다는 그 분께 맡기고 나갈 때,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전문성을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제는 주님께 주권을 내 드리십시다. 그리고 결정할 때에라도 두려움없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앞으로 나가십시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심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다시 빚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께 맡기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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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2.2018 집이 좋아요
    지난 주에 한 분을 만났습니다. 70대로 보이는 미국 남자분이었는데, 공사관계로 물건을 매매하게 되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교회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서로의 삶의 간증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57세되었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였던 것입니다. 2년전에 신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반반이라던 삶의 도전에 죽을 고비를 넘겼고, 지금은 Lupus(면역관련질병)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마음속에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분은 정말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감사하고, 기도하고,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찬양하며 산다고 합니다. ‘우린 짧은 이 세상을 산다. 언제고 우리는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격려하자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천국갈 준비하고 있다고 하며 환하게 웃습니다. 뜨겁게 끌어안아주고 격려하고 헤어졌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제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돌아오는 차에서 여운이 남았습니다. 저 외국인과 천국에 대해서 대화하는 동안 제 마음이 뜨거워진처럼, 우리 한국인, 우리 신앙인들과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뜨겁게 대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경직되는 것일까? 사람마다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죽으라는 말이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우린 자주 천국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정말 정말 우리 가슴에 천국이 있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 가슴에 배운 천국만 있고, 진짜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일까요?여행을 하다가 보면 정말 멋있고 아름다운 곳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아, 이런 곳에서 몇 주간 머물며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정말 좋은 곳은 이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정말 편히 쉴 수 있는 ‘집(Home)’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집만큼 편한 곳, 아름다운 곳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집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삶이 아름답고 좋아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준비해 두시고, 우리 예수님이 계신 그 천국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천국(집)이 없는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곳에 사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그 천국을 소망하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나보고 빨리 죽으라는거냐?’고 할 것이 아니라, 환하게 그 천국을 소망하는 그 소망이 묻어나야 할 것입니다. 천국이 없다는 것은 예수가 없다는 것이고, 예수가 없다는 것은 구원의 천국이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땅의 신앙생활은 그저 종교생활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 생활로는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없습니다. 종교 생활은 결국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 종교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나의 만족이 아닙니다. 천국이 말에 지난 상상속의 나라가 아니라, 실제 내가 경험할 실재의 세계임을 생각할 때, 천국! 그곳은 기쁨입니다. 우리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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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2.2018 설교철학
    목회자가 되어서 설교 사역을 해 온지가 30년이 넘지만 설교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설교를 시작한 초년병 시절이나, 사역을 마무리해가는 노년병의 시절이나 설교는 항상 설레임과 동시에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쉽지 않은 사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펼치는 은혜의 세계요, 복음이 전달되는 능력 있는 도구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고 또 그냥 놓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저는 전통적인 장로교 중에서도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교회에서 군입대로 교회를 떠날 때까지 한 교회를 섬기며 자랐습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대학 졸업을 하기 까지 여러 역할을 하면서 교회의 성장과 영광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교회란 언제나 어머니의 품과 같은 분위기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수십 년을 같은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청년시절을 거치고, 은혜를 체험한 시기를 지나서 이젠 말씀의 사역을 하는 사역자가 되어서 늘 아쉬운 점은 역시 ‘설교’였습니다. 그동안 자라온 환경탓에 설교는 ‘성경적 설교’가 최고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언제나 성경적 설교라는 이름으로 성경에서만 인용된 설교,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 무슨 이단처럼 취급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고, 청중도 달라지고 있는데 ‘성경적 설교’라는 이름아래 무슨 예화를 들어도 성경에 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성경의 이야기를 벗어나면 무슨 세속적이라고 하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설교학을 전공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설교는 청중이 듣던 안듣던 무조건 알아서 ‘들어라!’는 선포적 메시지도 있지만 설교는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청중이 듣지 않고, 먹지 않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냥 들어라!’라고 하는 것은 설교자의 직무유기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설교자는 청중의 자리에 내려와서 청중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이며,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그랬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죽도록 하신 사건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적 설교란 그저 성경을 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의 내용을 풀이해 주면 그것이 성경적 설교가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만 이야기하고, 성경만 인용을 해야 하고, 그것이 아니면 마치 성경적 설교가 아닌 것처럼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우리의 삶으로 끌고 내려와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본문이 이렇다! 설명하는 것이 성경적 설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적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본문 주해가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Communication’입니다. 하나님과 청중 사이에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그것을 서로 소통하게 해야 합니다. 설교를 단순히 성경주해하는 것이 성경적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통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마다 다른 강조점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소통’이라 믿기에 적용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그것이 제 설교철학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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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5.2018 Power (힘)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일 110도가 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돈을 벌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땀을 흘리며 일을 합니다. 저 역시도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밖에서 일을 하다가 보면 비지땀을 흘리기 일쑤입니다. 잠시 시원한 음료와 피난처를 제공하며 공사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신앙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서 Bob Cat이라는 중장비를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조심스럽게 다루어 보면서 새로운 것을 대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장비를 다루는 것을 배우는데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계가 정말 힘이 좋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삽, 곡괭이를 가지고 땅을 파고 묻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하지만 기계의 발달로 이런 힘 있는 장비가 개발되어서 손쉽게 그리고 빨리 효과적으로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저도 다루어 보았습니다. 정말 힘이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힘 좋은 기계들을 잘못다루다가 전선을 끊어먹기도 하고, 파이프를 끊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땅속에 묻힌 gas나 수도관을 건드려서 사고가 난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서 파면되지 않나 생각해 보았지만 직접 해 보니까 느낌이 없습니다. 그저 힘 있는 대로 밀고 나갈 뿐입니다. 여기에 걸리면 쇠건, 줄이건 무엇이든지 밀고 나갑니다. 손에 느낌이 없기에 무엇이 걸렸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힘대로 밀고 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불도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힘, 권력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잘못 다루게 되면 엄청난 사고가 납니다. 때로는 국가가 망하기도 하고, 절제되지 않는 힘을 사용하다가 인격과 관계가 망가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말(언어)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저 같은 초보자가 그런 기계를 다루는데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공사하러 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그 기계를 다루는데 얼마나 솜씨 있게 다루는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입니다. 마치 자기 몸에 붙은 팔을 다루듯 정교하고도 빠르게 그 기계를 다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초보자에게 힘이 주어지면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좌충우돌하면서 힘을 사용하기에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숙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무쇠덩어리에게 신경도 감각도 없지만, 깊은 경험으로 마치 신경이 있는 듯, 감각을 느끼듯 다룹니다. 그것이 숙련자입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성숙한 사람입니다.야고보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혀가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생의 바퀴를 사를 정도로 위험한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 신경도 감각도 없는 그 무쇠덩어리를 감각이 있는 팔처럼 사용하는 성숙함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신경도 있고 감각도 있는 힘을 가지고도 우리는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모습일 때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힘이 주어졌을 때 잘 사용해야 합니다. 물질의 힘, 말의 힘, 지위의 힘, 관계 우위의 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잘 사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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