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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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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0.2022 책 읽기
    어려서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좋은 습관이 있다면,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뭐 이런 부지런함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좋은 습관/유산은 '책읽이'입니다. 학창 시절, 신문들 읽고, 일기를 쓰고, 시를 쓰는 일에는 웬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부족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린 자녀들도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가지고 있는지라 어떻게 보면 책을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을 것입니다. 책장 넘기기 보다는 화면 넘기기가 더 익숙해진 아이들입니다. 누구나 자기 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인터넷이든, 책이든, 경험이든 모든 것을이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책읽기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진 세계에 그려진 풍성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가 담긴 것들이 많기 때문 입니다.우리 교회가 팬데믹 기간동안 수요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편안함 속에 묻혀있을 수 없어서 책읽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제한되고 편협한 세계를 위인들의 생각을 빌려서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수요예배를 영성훈련의 시간으로 삼아 여러 저자들의 저서들을 섭렵해가며 우리의 영성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책을 구입하려면 '투자'를 해야 하는데 우리 교우들이 자신의 돈을 들여서 책을 읽자면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다행스럽게 CRC교단에서 제공하는 'Just Show Up'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책을 읽고 나누는 공동체가 있을 경우 무료로 책을 제공해 주고 있었습니다. 공짜잖아요! 그래서 얼른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막상 수요훈련식나에 등장하는 분들이 10여분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책읽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돈을 주면서 책을 읽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돈이 많아서 돈 쓸데가 없어서 그런 곳에 투자하는 사람일까여? 무었인가 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의 영혼에 빛을 주고자하는 선한 마음에서 출발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까지 책을 사다가 바치는데도 책을 읽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것은 우리 현대인의 심각한 질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벌써 3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얻은 유익이 있다면, 저나름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책 속에서 흘러나오는 저자들의 지혜로운 시간에 감탄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일정한 시각과 틀에 갇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구나.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 책읽기는 내가 가진 제한된 시각을 깨우쳐 주고, 나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이 깨달은 지혜를 통해서 우리도 점점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각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것이 최고라는 교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울 것도 없고, 배우고 싶지도 않고, 그냥 편하게 살면된다는 생각, 그러니 '나 그냥, 내버려둬'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가까이 대해보십시다. 성경이든, 영성책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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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9
    아름다운교회 Mar 13.2022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컵 라면에 물을 붓고 일을 하다가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지나서야 컵 라면에 물을 부었다는 것이 생각나 뚜껑을 열어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라면은 툴툴 불어 있었고 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먹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 결국은 먹었습니다. 아까워서... 그럼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물을 북기 전에는 '에고... 이 자그마한 컵라면 두 개는 먹어야하나?'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하나만 부었는데, 불어터진 라면은 생각보다도 엄청나게 불어나 얼마나 많아 보이는지요! 이 작은 컵라면이 우리의 위속에 들어가 저렇게 불 생각을 하니, 우리가 상당히 많이 먹는 것 같습니다. 허긴, 탐욕스러운 짐승을 돼지에 비유합니다. 많이 먹는 대명사로 말이지요. 그런데 해부를 해보면 돼지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자기 적량의 80%만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용량을 초과한다고 합니다. 탐욕의 대명사를 돼지에서 인간으로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소홀하게 되면 어느 새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뭐 이것 쯤이야... 그러나 넘겼는데 그것이 모아져서 무감각해진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뭐 이것 쯤이야... 그래서인가요?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말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까짓것 바늘 하나 쯤이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고 자위를 하면서 범죄를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반복해보면 어느 사이 큰 도둑이 되어 발도 저리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현대 과학과 의학이 압도적으로 발전한 시대에 코노나로 인해서 공식적으로는 600만명이, 비공식적으로는 1800만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하니 인간의 무기역감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 Pandemic이 Endemic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특별히 교회의 지형을 얼마나 많이 바뀌게 했는지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이 기간동안 두 가지 극단적 변화가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 변화'와 '소도둑이 개과천선한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믿음의 길을 타협하며 가는 사람들에게 교회와 신앙은 언제나 바꿀수 있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나 싶습니다. 작은 오류가 신앙을 먹어버린 마치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 그런 느낌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뼈를 깍는 아픔을 경험하며녀서 교회의 어누 누구인가는 소도둑이었음을 자인하고 회개하면서 믿음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야말로 개과천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소한 것들을 그냥 넘기면서 적당하게 죄를 덮어두는 행위는 바늘도둑이 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우는' 자신을 치는 차가운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영원한 생명을 읽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미련한 다섯처녀'일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바늘 도둑 성향을 고쳐내지 않으면 우리는 후에 큰 소도둑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고,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해도 도둑은 도둑일 뿐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의 흐름을 역류하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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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8
    아름다운교회 Mar 06.2022 교회, 그 사명을 위하여
    13년 전에 아름다운 교회는 모두의 기대와 염려를 안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면서 태어났습니다.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난관과 보람이 있었는지 똑똑하게 지켜보아온 목사로서는 이러한 기적을 이루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창립하여 지금까지 영적 부흥과 성장이라는 발판과 시련과 아픔이라는 수렁을 겪어오면서 두 번째 임직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시련과 아픔이라는 수렁을 겪어오면서 두 번째 임직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이루말할 수 없는 감격이 됩니다. 8년전에 한번 임직을 했고, 이번에 두 번째에도 다섯 분의 일꾼들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과 교회에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소원과 비전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반석위에 나의 교회를 세운다'는 주님의 말씀은 오순절 성경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교회는 예수님의 강렬한 소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문제와 비진리에 연루되어 불명예스러운 대명사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신자'(교회 안나가는 신자지칭)를 양산하고, 코로나 시대를 맞아서 교회는 더욱 더 위축된 시대적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삶으로 인해서 교회는 그 영광스러운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비록 수많은 문제를 내포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교회는 예수님의 소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지나온 2년의 시간은 우리에게도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은 우리를 성숙을 향한 밑걸음을 디디게 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에 하나님께서는 2분의 안수집사님과 3분의 권사님을 교회에 허락하셨습니다.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따로 세워서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별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면모는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늘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사도로 칭함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배반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여전히 사도성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참된 사도로 거듭나,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꿈을 마침내 불을 붙인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부족한 나같은 사람도 목회자로 쓰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임직을 받는 5분을 쓰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또한 쓰임받을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서 능력있게 쓰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쓰일 준비가 되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쓰임받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이사야처럼 '주여, 제가 여기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세요' 결심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하실 것'(눅12:48)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과분한 은혜를 받은 '복음에 빚진 자'들 아닙니까? 교회를 세워서 13년을 달려오게 하시고, 일꾼으로 세워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이어갈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는 우리 모든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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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7
    아름다운교회 Feb 27.2022 싸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냉전 시대를 겪은 우리들은 지독하게 사상적 이념의 대립속에서 자라왔습니다. 다행스럽게 저는 민주사회에서 태어나 자라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 반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 소련과 중국이 무너지면서 철의 장막이 해체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을 보고 자라오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세계는 커다란 냉전의 시대를 접고 세계 평화속에 각자가 경제구축에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신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가슴아픈 소리를 듣습니다. 대결과 대립으로 끊임없는 명분싸움과 전쟁의 위협속에 인류가 다시 또 다른 숙제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정치 평론가도 아니고, 군사전문가도 아닙니다. 페이스북을 보니 러시아 전차가 질주를 하면서 민간인 차량을 보고 그대로 밀어부쳐서 깔아뭉게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수십만명의 난민이 생기고 평화로운 세상에 전쟁의 참혹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동등합니다.아침에 차를 고치러 샘스에 들렀다가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어느 미국인과의 대화를 들어봐도 그랬습니다. 아마 이런 시각이 거의 모든 미국인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인권이나 한 국가의 권리는 '힘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네가 약해서 당한 것이니 왜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자연스러운 미국인의 냉철한 답변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자력으로 나라와 민족을 지킬 수 없다면 수치와 모욕은 당연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려는 의지가 있는 대통령이나 자국민의 의지가 보이자 이젠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하나 둘씩 돕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전쟁이 과연 먼 나라 우크라이나의 것일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쟁'을 이야기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랴는 안일한 서방의 대처가 이런 비극을 불러 왔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 삶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우리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남이 지킬 수 없습니다. 자국의 방위를 자기 백성이 결국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 나라를 책임지려는 국민이 없다면 이런 수모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일제의 침략에서, 북한의 남침에서 피흘려 싸웠던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사가 증명하듯이, 각자의 신앙은 누가 지켜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부자와 나라로'의 예수님 비유에서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눅16장). 본인이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본다해도 믿지 못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제게는 그렇게 읽혀집니다. 힘없는 민족은 저토록 처참하게 당합니다. 누가 도와주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비록 연약해도 자력으로 싸우려는 국민들이 있을 때에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을 치루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우리 삶에 제자된 걸음을 걸으려는 의지가 없거나 준비없는 사람은 결국은 마귀의 밥이 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자로서 살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 주님은 충분히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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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6
    아름다운교회 Feb 20.2022 경견의 훈련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어느 신문 기사의 제목처럼, 문제가 많은 올림픽이지만 선수들의 투혼은 어느 때보다 빛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4년마다 동계, 하계 올림픽이 열립니다. 선수들은 4년의 긴 시간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스포츠로 온 지구를 하나로 묶어냅니다. 어떤 선수들은 눈물로 대회를 마감해야 하고, 어떤 선수들은 찬란한 영광으로 금의 환향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아파하고, 누군가는 기뻐합니다. 결국 승리하는 사람 혹은 그 훈련 자체로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대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모두가 패자가 없는 승자입니다. 나름대로 그 대회를 땀흘려 준비했고, 나름대로 성장하고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말 죽을 각오로 훈련을 이겨낸 용사들입니다. 모두가 박수를 받을 만한 선수입니다. 근래에 (고)이한진 집사님의 천국환송에 이어서 이번에는 (고)김재봉 장로님의 천국환송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하나님앞에서 수고한 것에 대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이기는 것은 단지 올림픽 선수들이 벌이는 것을 바라보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올림픽에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만이 겨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부름의 상'은 특별한 어떤 사람들의 잔치가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서야하는 경기의 끝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들어가라 하지 않으시고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 좁은 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올림픽 경기를 치루기 위하여 엄청난 땀과 노력을 퍼붓는 선수들보다 더한 '훈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가 교회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성경공부를 하거나 직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눅13장). 운동장에서 달음질을 하지만 상을 얻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함께 달렸다고 사이좋게 나누어 갖는 메달이 천국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훈련'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경건의 훈련'입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사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훈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린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미워하고 분노하고 싶을 때에 그것을 거스릴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순종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막아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네 눈이 범죄하면 빼내어 버리고, 네 손이 범죄하면 네 손을 잘라버리라'라는 이 혹독한 말씀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이 서로 싸울 때에 육체의 편에 서서 가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듯이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지만 그것을 위하여 단 한움큼의 마음을 담아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훈련은 고통이지만 영광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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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5
    아름다운교회 Feb 13.2022 의복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외식하는 것을 죄짓는 만큼이나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표리부동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바리새인들이 외식함으로 잘못하셨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만큼은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을 믿기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편의주의에 따라서는 안됩니다.어느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옮긴 동기는 목사님 때문이었습니다. 평상시 예배 때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하는데, 어느 날은 정장을 입고 강단에 서셨답니다. 그 이유는 자기 형님이 돌아가셔서 그분을 애도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였는데 이것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형님의 죽음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양복을 입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앞에서도 같은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발 때문에 교회를 옮겼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목사로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 형님이 더 중요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의복은 우리 삶의 편안함과 멋을 표시합니다. 나를 접대하는 만족함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명품옷을 입기도 합니다. 만족감이며 자존감이고  또 자기 표현인 셈입니다. 반면에 의복은 내 멋을 위하여 입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회적 언어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의 인격과 품격 그리고 지위에 맞도록 옷을 입음으로 인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러가면 그냥 입던 옷 입고가지 않습니다.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옷을 입든지, 아니면 사서 새 옷을 입고 갑니다. 그것은 대통령앞에서 나를 보이기 위함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을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거지를 만나러 가면서 양복을 바꿔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만나는 대상이 거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대통령을 만난다든지, 자녀의 결혼식장에 귀한 옷을 입고 가는 것은 관습이기도 하지만 혼인자와 하객들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혼인집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끌어내었다고 비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잔치집에 예복을 입은 것은 그를 불러 준 분에 대한 존중의 차원입니다. 그것이 예절입니다. 청년들이 취업면접을 보러 갑니다. 면접관앞에 어떤 옷을 입고 갑니까? 덜렁 티셔츠 걸치고 흙먼지 묻은 옷 그대로 입고 가지 않습니다. 자기 과시이기도 하겠지만 그 면접관을 존중하는 의미가 큽니다. 가끔 동부에서 신앙생활하다가 서부에 오시는 분들이 적응이 안된다고 합니다. 동부에서는 교회에 올 때에 양복을 입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는데 서부에는 슬리퍼  신고, 반바지입고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예배 자세도 그래야 합니다. 예배에 올 때에 가장 최선을 다한 마음가짐과 함께 옷차림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특별히 기도자를 비롯한 예배 청지기들 역시 옷을 갖춰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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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
    아름다운교회 Feb 06.2022 무용지물이라면?
    베가스의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남쪽 지역에 심방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어두워진 시간, 심방이 끝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출발을 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의 navigation을 켰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오래된 지도에는 신도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update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휴대폰에 있는 지도를 켰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신호가 잡히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자동차 지도는 광야이고, 핸드폰 지도는 신호를 못잡아 버벅대고, 밤이어서 사방은 어두워져있기에 길이 어떻게 뻗어있는지도 구분이 안되고, 좌충우돌하면서 겨우 겨우 빠져나온 곳은 내가 가야 할 도로가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한참을 헤맨 후였습니다만 다행히 잘 오게 되었습니다. 자동차의 navigation과 cellphone의 google map은 그야말로 최첨단의 장비들이 아닙니까? 아무리 그런 장비들이 곁에 있어도 update되지 않은 지도나 신호가 잡히지 않는 전화기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오직 감각만이 오직 쓸모있는 기관이었던 셈입니다.가끔 우리 신앙생활이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자기 상식이나 습관 혹은 배운 지식이 update가 되지 않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들입니다. 가끔씩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왜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냐, 아는 찬송가를 부르자, 반대로 왜 찬송가만 부르냐, 열린 예배는 경건성이 떨어진다고 싫어합니다. 교회에서 반주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면 여기가 노래방이냐 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현장에서 연주하냐, 녹음해서 연주하냐의 차이뿐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고정관념, 자기가 은혜받은 것만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데, 끊어진 신호인지도 모른채 헤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무리 최신식의 개념과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신호가 끊겨져 있다면 문제입니다. update가 안되도, 하나님과의 신호가 끊겨져 있어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너무나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지금 이렇게 살아도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나도 열심을 낼 수 있고, 다시 영성을 회복할 수 있고, 환경이 만들어지면 그때에 잘 할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못합니다. 오랜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녹이 슬도록  쳐박아둔 영성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제대로 작동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순간, 모든 시간동안 every moment를 영적 감각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update해야 하고, 항상 신호를 잡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열처녀 비유를 통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만 믿고, 준비를 해 두지 않은 미련한 5처녀들처럼 말입니다. 끔직한 결과를 당하기 전에 사전에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깨어 있어야 나중에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좀더 자자, 좀더 눕자! 아닙니다. 성도여, 교회여, 무용지물을 의존하지 말고 깨어있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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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3
    아름다운교회 Jan 30.2022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민주주의의 폐단은 '부익부 빈익빈' (부자는 다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진다)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이유이며,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뿌리깊은 폐단이라고 봅니다. 생각해 보면 억울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더 노력하나봅니다. 노력하다 못해 로또나 잭팟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중에서 로또를 교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John Pipa목사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는 '인생을 파괴하는 도박, 영적 자살행위'이라며 로또를 구입하는 교인들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속여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에 열중하도록 만든다. ..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은 연소득의 6%를 로또 구입에 사용"한다고 지적하고 이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려는 심정을 이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또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 세워지지 않았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탈탈 털어 요행을 심어주는 행위임을 지적한 것입니다.영적인 세계속에서 그런 부익부 빈익빈과 같은 일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18에서 예수님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온갖 유혹과 시험을 안겨줍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봐도 그렇습니다. 길가에 뿌려지고, 바위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것은 마귀가 제공하는 '유혹과 시험' 때문입니다. 마13장에서는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깨닫지 못할 때'에는 마귀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이 내 잘못입니까? 아니라고 하겠지만, 깨달음을 얻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깨달음에 게으르면 내가 먹기전에 마귀가 먹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오면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입니다. 그냥 적당하게 지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있던 은혜, 쌓아둔 은혜까지도 하루 아침에 탈탈 털려서 노숙자 신세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우리의 심령밭에 떨어졌습니다. 좋든 싫든 그 말씀이 우리안에 심겨졌습니다. 그 말씀이 어떻게 자라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밭이 되도록 일구어야 합니다. 열매가 100배, 아니 못해도 30배가 열릴 마음밭이 되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 내가 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지를 돌아보고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는 문제를 남에게서 보게 만드는 기술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보는 재능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사람만이 그것을 봅니다. 있던 것마저 털리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많은 곳에서 은혜가 넘칩니다. 은혜가 은혜를 불러오고, 사랑이 사랑을 불러옵니다. 절대로 미움과 증오의 다툼이 은혜를 불러오지 않습니다. 열매맺어야 합니다. 처절하나 싸움을 해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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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
    아름다운교회 Jan 23.2022 예배의 힘과 능력
    지난 주에 우리의 사랑하시는 형제 이한진 집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몇 주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거듭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하나님의 품으로 안기셨습니다. 좀더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데려가시기로 결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고생하시는 것보다 차라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위하여 그곳에 가시는 것이 고인에게 더 나은 하나님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망과 희망의 시간을 오가며 기다렸던 유가족들은 급작스럽게 보내야하는 안타까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크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장례일정이 잡히면 3, 5일장을 치르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은 정말 숨막히게 바쁘게 돌아갑니다. 고인의 가족들이 지쳐있을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에 교회는 그 가족들을 위하여 매일 하루에 몇 차례씩 예배를 드립니다. 천국 환송예배를 드리는 날은 입관예배, 환송예배 그리고 하관예배까지 드립니다. 그리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위로 예배를 드립니다.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유족들도 힘들었지만 목회자도 지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만 쉬었으면 좋겠는데 또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지쳐있는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쉬게 해주는 것이 유족들에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러한 잦은 예배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를 회의해 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예배가 정말 중요합니다. 말씀으로 소망하고 위로하니까요.그런데 이번에 이것이 확실함을 깨닫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보내고 혼자서 너무나 힘들어 하는 집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사님, 바쁜 줄 아는데 전화기에라도 기도해주시면 안될까요?" 이미 오는 토요일에 자녀들과 함께 예배할 것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뜻밖의 전화였던 셈입니다. 급히 달려가겠노라하여 함께 첫 번째로 대면하여 위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위로가 무슨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말씀을 가지고 권면하며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를 드리고 집사님의 고백은 그날 그렇게 불안하고 슬픔이 몰려오는데 목사님 오셔서 예배하는 시간에 자신도 알 수 없는 평강을 얻었다고 간증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럴 것입니다. 슬퍼하는 가정에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 그냥 쉬게 해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위로를 얻고, 소망을 펼치며,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요? 그냥 말씀은 말씀이지,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의심하는 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장 힘든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가 나를 다시 살려놓습니다. 그것이 예배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성도이기에 의무감의 예배가 아니라, 예배속에서, 말씀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은 그 예배와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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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
    아름다운교회 Jan 16.2022 아무도 견줄 수 없는 사랑
    지난 주간에 어머니에게 다녀왔습니다. 작년 말과 연초 교회의 바쁜일정으로 인해 새해인사도 못드리고 있던차에 특새를 마치고 서둘러 새해인사를 다녀왔습니다. 늘 그러하듯이 아내가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한 보따리 챙겨놓았습니다. 그리고 용돈까지 챙겨서 준비한 모양입니다. 빠듯한 일정으로 다녀오자니 좀 무리가 된 듯해 보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코로나가 엄중하다는 경고가 있어서 평상시처럼 식당에서 식사를 하지도 못하고, 음식을 투고도 하고 만들기도 해서 오붓이 집안에서만 식사를 하고 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오는데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생일 용돈을 주셨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어도 어머니에게는 아직 용돈이 필요한 아들인 셈입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코끗이 찡해지는 것은 우리가 드렸던 용돈의 배가 들어있었습니다. 아들은 이것 저것 재고 드릴만큼만 챙겨드렸는데, 어머니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해서 아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이고 사랑이었습니다.견주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는 이유로 아주 필요하고도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릴 때가 대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색한 마음이 너그러운 마음보다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에 쌀을 사먹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되, 한말 그렇게 싸전에 가서 쌀을 사다 먹었습니다. 그러면 그 쌀가게 주인이 야속하게도 뒷박을 싸~악 깍아서 주는데 참 서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냥 고봉으로 올려진 상태로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치 싸전의 아저씨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렇게 인색한 반면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가 보여주셨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이미 우리에게 줄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세상에서 나 혼자만 덩그러니 있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 한 사람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내 주셨을까?' 그 질문을 하면서 얻은 결론은 '그렇다!'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정말 감격하게 만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면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한 생명밖에 없는 독생자를 나를 위해 아낌없이 주셨는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그 사랑을 인색하게 깍아드리고 있으니 참으로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수많은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고 그 사랑이 표현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말씀통독을 하면서 아버지의 그 마음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야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까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까로 뒤돌아 서야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가장 먼저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더 풍성한 것들을 준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넉넉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과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잠시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으로 들어가 보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의 바다에 머물러 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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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
    아름다운교회 Jan 09.2022 세상이 교회를 간 볼때
    2007년 7월 한국의 분당 샘물교회는 20명의 단기 선교팀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송을 했습니다. 당시에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의 활동으로 극도로 불안정하여 여행제한 국가 중의 하나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만 그들은 납치되었고 인솔 목사와 청년이 살해되는 끔찍한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에 한국 선교의 방식과 행동이 큰 비판을 받게 되었고, 그 교회는 정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인도 말이지요. 사건이 마무리 된 후에 그 교회 목사님이 베가스에 집회를 와서 당시 일을 이야기해준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제가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세상 사람들의 날카로운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당연히 그렇게 비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교회가 하는 일과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가슴아픈 것은 선교의 사명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것을 알고 있는 교회 내부와 기독교 사회가 그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비판이었습니다. 고칠 것은 고쳐야 하고, 선교의 방식을 제고해야겠지만, 이 일을 두고서 교회와 교회, 성도와 성도들이 가슴아픈 공방을 주고 받으며 서로 내탓, 네탓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셨을까요? 후에 그 담임목사님의 고통스러운 고백과 성숙한 문제해결을 듣고서 참으로 감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온 세상이 정말 이상한 일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혹독한 전쟁과 어려운 일들이 인류의 역사가운데 있었어도 세상은 이렇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 세상이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경제가 무너지고, 사람들의 삶이 바뀌어지고, 이상하게 되어가는 코로나 펜데믹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점점 그 영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도 이러한 문제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이제는 이 감염의 위험이 누구나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방역 잘한다고 한 것이 극도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면서까지 추적하고 나서서 감염자들이 '죄인'처럼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론에서도 누가 그 병을 감염시켰는지를 보도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코로나 걸리면 망신은 물론이거니와 망한다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게 00가 감염시켰다고 원망하는 악한 습성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지금은 '위드 코로나 (with corona)'라고 해서 그냥 감염자 수가 늘어나도 담담하게 대처해 나갑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한국 사람이고, 한국의 영향을 받아서 여기서도, 교회에서도 '00때문이야'라고 원망하는 씨앗을 심어서는 안됩니다. 누가 코로나에 걸리고 싶어서 그러겠습니까?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것은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옆사람 때문에, 먼저 감염된 사람때문이 아닙니다. 그분들도 피해자입니다. 이러한 원망은 개인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불평은 교회를 무너뜨리게 하는 '악한 염병'임을 알고 멀리해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때에 교회는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이해해주고, 안아주고, 함께 기도하고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이 하는 방식이 교회에 있으면 안됩니다. 세상은 코로나를 던져 놓고 교회와 성도를 간보고 있습니다. 승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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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
    아름다운교회 Jan 02.2022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간들이 모아지면 어느 새 우리의 육신은 끝이라는 정점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그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는 책 마지막 장에서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그냥 마지막이나 끝이 아니라 인간됨의 완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덴동산의 범죄는 사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후로 인간은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차 할 수 만 있으면 죽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 되었고, 이렇게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정말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의미있는 분석입니다. 우리는 한 해가 거듭해서 지나갈수록 우리가 인간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서게 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신앙인답게 사는 길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하루 하루가 지나가고, 일년 일년이 모아지다가 보면 어느 새 우리는 죽음이라는 인간됨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간다는 것은 '우리의 날을 계수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시90편).우리는 어김없이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올 해, 목양의 목표를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자랑스러운 성도'(빌2:6)으로 정하였습니다. 지난 표어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최근 수년 전부터 표어가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몸부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 땅에서 복을 받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경제가 튼튼해지고, 가정과 기업의 살림이 나아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행복중의 하나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공포스러운 고통의 위협앞에서 피하고 싶은 우리의 바램이 이루어지는 것도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자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영신 예배때에 묵상한 호세아 4장의 말씀처럼, 사람은 번성해 지면 그 번성의 주인인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아도, 열심을 기울여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성장과 성숙의 틀에 들어가지 않아도 더 잘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하나님을 떠나서 잘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분의 말씀을 멀리하면서도 우리는 잘되고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 괜찮다고 평가합니다. 평안하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적인 진짜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오늘도 살아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풍성하게 이어져 있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이는 그것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올 해의 목양의 주안점을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그분안에서 밝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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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
    아름다운교회 Dec 26.2021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벌써 일년이 다가서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무겁고 준엄한 마음으로 맞이합니다. 지난 2년을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환경속에서 모두가 삶과 마음을 움츠리고 살았던 기간이었는데, 백신이 개발되어 이제는 좀 발뻗고 살아보나 했는데 이제는 신종변이의 끊임없는 등장으로 인해 인류에게 커다란 위협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정부가 만들어내는 위기의식에 너무나 안일하게 맹종하거나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정부는 국민의 건강과 행복의 증진앞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위기의 확산을 막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과 공포 혹은 삶의 제한을 한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With Corona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극복할 수 없다면 마주 서야 하는 문제이기에 부딪쳐가며 이겨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백신이 개발되어 코로나 확진이 되더라도 감기몸살 정도로 앓고 지나갑니다. 사망률도, 입원률도 줄어든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공포보다는 이겨내려는 내성을 더 길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 삶은 항상 움츠러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지난 2년의 시간은 우리의 체질과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기에 너무나 충분했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영향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기앞에서 벌써부터 현기증이 납니다.사실, 우리 교회는 비교적 코로나에 대해서 잘 대처해 나왔다고 자부합니다. 코로나 초기에는 마스크를 구할 수 없을 때에 마스크 보급에 앞장서고, 철저한 방역의 노력과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열정의 힘으로 남들 어렵다 어렵다 할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배를 한번도 폐쇄하지 않고 대면예배를 끊지 않고 비대면과 병행하며 예배의 현장을 지켜왔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코로나의 환경속에 확진된 분도 있었고, 타 지역으로 이사가신 분들,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난 분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모릅니다. 가슴아픈 일들이 이어지기도 했고, 마음을 흩으려는 사탄의 별별 장난들이 난무하기도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외보적으로는 목사가 치매가 걸려 사임하고 다른 교회와 합했다는 소문도 제 귀에 들어오기도 할정도로 내외부적인 공략도 어느 해보다도 많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 머물러 있었고, 이 교회를 온갖 기적의 기적을 보여주시면서까지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교회의 촛불을 끄지 않고, 그 촛대를 옮기지 않으시고 마지막 시대의 복음의 산실로 거듭나라고 새 힘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풍부할 때에는 모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감사는 가장 어려울 때에 하는 감사가 제대로된 감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해의 어둡고 음습하게 달라붙는 사탄의 장난들을 걷어내고, 한 마음으로, 초대 교회에 사랑과 뜨거운 은혜를 부어주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 교회의 모습으로 앞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흔드는 사람이 없어지고, 흔들어대도 넘어지지 않는 강인한 믿음과 은혜를 소유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는 또 다시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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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
    아름다운교회 Dec 19.2021 다른 것일까, 틀린 것일까?
    "다르다 (different)"와 "틀리다 (Wrong)"은 그야말로 전혀 다른 개념이고 단어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삶에서는 자주 혼동하고 또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자주 그런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목회자로서 갖는 생각은 성도들이 갖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격하는 사람들은 '틀리다 (wrong)'고 말합니다. 목사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격을 받을 때마다 진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같은 집안의 한 피를 받아 한 날 나온 쌍둥이도 다르다고 하지 틀리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맞고 안 맞고가 없습니다. 다를 뿐입니다. 함부로 말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틀리다는 말을 때론 다르다고 하기도 하고, 때론 틀리다는 말로도 써먹습니다.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인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에는 더 성경적으로 성숙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뒷마당을 청소하다가 든 생각입니다. 한 주에 한번은 개 0을 치웁니다. 어떤때는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이 녀석들이 왜 여기에다가 볼 일을 보는거야? 일정한 장소에 가서 보고, 지들이 잘치우면 안되나? 뭐, 이런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개라는 동물은 쌀줄만 알지 치울 줄을 모르는 짐승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예, 정리정돈과 치운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냥 먹으면 싸야합니다. 그것도 아무 곳이나 하고 싶은 곳에 합니다. 완전히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가 볼 일을 보고나서 치우거나 덮거나 (하긴, 덮는 개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 짐승은 자기가 벌인 일을 수습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그래서 짐승이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벌인 일은 반드시 자기가 처리합니다. 아무 말끔하게 위생적으로 처리합니다. 그래서 사람입니다. 사람이면서도 그것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직 갓난 아이일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는 아직 그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만큼 반드시 잘 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지요.그런데 가만히 보면 저 자신을 포함에서 자기 벌인 일들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런데 처리를 잘 못합니다. 아니 왜 뒤처리를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아직 인간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00만도 못하다'고 비냥댑니다.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소망이 있는 것은,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철들 때입니다. 철이 들어야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고, 우리가 벌인 여러 문제들을 잘 수습하면서 인간답고, 그리스도인 답게 인정받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 갈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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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05.2021 이름 값은 얼마일까?
    세상에는 이름 값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값은 천차만별입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들을 살펴보면 물론 재료가 좋고 비싼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광고비와 인건비 그리고 재료비를 합하여 가격이 설정되지만 거기에 Name brand 라는 부가적인 가치가 더해져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갑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입니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비쌀수록 더 사려는 소비심리가 강합니다. 그래서 이 코로나 시대에 샤넬/에르메스 같은 명품들은 가격을 오히려 더 올렸다고 합니다. 나같은 사람은 감히 올려다 보지 못할 정도로 비쌉니다. 관심도 별로 없지만요. 어느 명품회사는 재고가 남아도 땡처리 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특별할인행사도 안합니다. 이름값이 떨어진다고 해서입니다. 남아 돌아서 쓰레기 장에서 태워없앨망정 헐값에 팔지 않을 정도입니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Brand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기막힌 아이디어가 창궐하기도 합니다. 이름 값이 생명이니까요. 사람에게도 이름값이 있습니다. 유명 강사를 부르려고 하면 그 이름값에 알맞은 강사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지난번 엘에이에서 BTS가 공연하고 어느 식당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식당은 장사진을 칩니다. 그러니 이름값이 만만하겠습니까? 교회의 강사를 불러도 그렇습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은 스케쥴이 바빠서 (바쁜만큼 몸값이 비싸지겠지요?) 웬만한 곳에서 부를 수도 없고, 불러올 기회가 된다고 해도 헐값에는 절대로 안옵니다. 사명감외에는 말이지요. 유명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 교육가들 이름값이 안매겨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성도들에게도 이름값이 있을까요? 황송하게도 이름값이 0값일 때가 있습니다. 그냥 무료봉사가 대부분입니다. 세상에서는 잘나가더라도 교회에서만큼은 이름값을 못 받습니다. 오히려 돈을 내가며 봉사합니다. 회사 사장님도 교회만 오면 주차장 봉사에, 주일학교 봉사, 주방봉사에 무료로, 아니 어떤 때에는 자기 돈을 들여서 봉사합니다. 해괴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제가 아는 히스패닉 사람의 이름은 문자로 'Jesus'입니다. 영어로는 지저스이지만 그들의 발음으로는 '헤수스'입니다. 제가 아는 이 사람은 영업사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욕을 먹을 지경입니다. 차라리 이름을 '헤수스/예수'라 하지 말고 '가룟 유다'라고 하라고 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 이름 때문에 공연히 우리 예수님이 욕을 먹는 것 같아 속상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게 신앙생활하는 저 신앙인을 보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교회가  붙인 이름이 아니라, 세상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불리워집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지 뒤돌아 보는 시간입니다. 냄새나는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책에 기록하여 구원해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해서, '불러만 줘도 감사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세상에서는 몸값이 비싼 분들이, 교회안에서 헐값(?)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주님의 이름값이 우리의 값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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