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2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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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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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2.2018 집이 좋아요
    지난 주에 한 분을 만났습니다. 70대로 보이는 미국 남자분이었는데, 공사관계로 물건을 매매하게 되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교회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서로의 삶의 간증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57세되었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였던 것입니다. 2년전에 신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반반이라던 삶의 도전에 죽을 고비를 넘겼고, 지금은 Lupus(면역관련질병)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마음속에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분은 정말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감사하고, 기도하고,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찬양하며 산다고 합니다. ‘우린 짧은 이 세상을 산다. 언제고 우리는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격려하자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천국갈 준비하고 있다고 하며 환하게 웃습니다. 뜨겁게 끌어안아주고 격려하고 헤어졌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제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돌아오는 차에서 여운이 남았습니다. 저 외국인과 천국에 대해서 대화하는 동안 제 마음이 뜨거워진처럼, 우리 한국인, 우리 신앙인들과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뜨겁게 대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경직되는 것일까? 사람마다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죽으라는 말이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우린 자주 천국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정말 정말 우리 가슴에 천국이 있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 가슴에 배운 천국만 있고, 진짜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일까요?여행을 하다가 보면 정말 멋있고 아름다운 곳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아, 이런 곳에서 몇 주간 머물며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정말 좋은 곳은 이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정말 편히 쉴 수 있는 ‘집(Home)’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집만큼 편한 곳, 아름다운 곳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집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삶이 아름답고 좋아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준비해 두시고, 우리 예수님이 계신 그 천국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천국(집)이 없는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곳에 사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그 천국을 소망하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나보고 빨리 죽으라는거냐?’고 할 것이 아니라, 환하게 그 천국을 소망하는 그 소망이 묻어나야 할 것입니다. 천국이 없다는 것은 예수가 없다는 것이고, 예수가 없다는 것은 구원의 천국이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땅의 신앙생활은 그저 종교생활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 생활로는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없습니다. 종교 생활은 결국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 종교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나의 만족이 아닙니다. 천국이 말에 지난 상상속의 나라가 아니라, 실제 내가 경험할 실재의 세계임을 생각할 때, 천국! 그곳은 기쁨입니다. 우리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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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2.2018 설교철학
    목회자가 되어서 설교 사역을 해 온지가 30년이 넘지만 설교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설교를 시작한 초년병 시절이나, 사역을 마무리해가는 노년병의 시절이나 설교는 항상 설레임과 동시에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쉽지 않은 사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펼치는 은혜의 세계요, 복음이 전달되는 능력 있는 도구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고 또 그냥 놓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저는 전통적인 장로교 중에서도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교회에서 군입대로 교회를 떠날 때까지 한 교회를 섬기며 자랐습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대학 졸업을 하기 까지 여러 역할을 하면서 교회의 성장과 영광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교회란 언제나 어머니의 품과 같은 분위기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수십 년을 같은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청년시절을 거치고, 은혜를 체험한 시기를 지나서 이젠 말씀의 사역을 하는 사역자가 되어서 늘 아쉬운 점은 역시 ‘설교’였습니다. 그동안 자라온 환경탓에 설교는 ‘성경적 설교’가 최고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언제나 성경적 설교라는 이름으로 성경에서만 인용된 설교,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 무슨 이단처럼 취급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고, 청중도 달라지고 있는데 ‘성경적 설교’라는 이름아래 무슨 예화를 들어도 성경에 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성경의 이야기를 벗어나면 무슨 세속적이라고 하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설교학을 전공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설교는 청중이 듣던 안듣던 무조건 알아서 ‘들어라!’는 선포적 메시지도 있지만 설교는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청중이 듣지 않고, 먹지 않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냥 들어라!’라고 하는 것은 설교자의 직무유기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설교자는 청중의 자리에 내려와서 청중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이며,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그랬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죽도록 하신 사건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적 설교란 그저 성경을 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의 내용을 풀이해 주면 그것이 성경적 설교가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만 이야기하고, 성경만 인용을 해야 하고, 그것이 아니면 마치 성경적 설교가 아닌 것처럼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우리의 삶으로 끌고 내려와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본문이 이렇다! 설명하는 것이 성경적 설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적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본문 주해가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Communication’입니다. 하나님과 청중 사이에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그것을 서로 소통하게 해야 합니다. 설교를 단순히 성경주해하는 것이 성경적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통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마다 다른 강조점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소통’이라 믿기에 적용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그것이 제 설교철학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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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5.2018 Power (힘)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일 110도가 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돈을 벌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땀을 흘리며 일을 합니다. 저 역시도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밖에서 일을 하다가 보면 비지땀을 흘리기 일쑤입니다. 잠시 시원한 음료와 피난처를 제공하며 공사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신앙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서 Bob Cat이라는 중장비를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조심스럽게 다루어 보면서 새로운 것을 대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장비를 다루는 것을 배우는데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계가 정말 힘이 좋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삽, 곡괭이를 가지고 땅을 파고 묻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하지만 기계의 발달로 이런 힘 있는 장비가 개발되어서 손쉽게 그리고 빨리 효과적으로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저도 다루어 보았습니다. 정말 힘이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힘 좋은 기계들을 잘못다루다가 전선을 끊어먹기도 하고, 파이프를 끊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땅속에 묻힌 gas나 수도관을 건드려서 사고가 난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서 파면되지 않나 생각해 보았지만 직접 해 보니까 느낌이 없습니다. 그저 힘 있는 대로 밀고 나갈 뿐입니다. 여기에 걸리면 쇠건, 줄이건 무엇이든지 밀고 나갑니다. 손에 느낌이 없기에 무엇이 걸렸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힘대로 밀고 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불도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힘, 권력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잘못 다루게 되면 엄청난 사고가 납니다. 때로는 국가가 망하기도 하고, 절제되지 않는 힘을 사용하다가 인격과 관계가 망가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말(언어)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저 같은 초보자가 그런 기계를 다루는데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공사하러 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그 기계를 다루는데 얼마나 솜씨 있게 다루는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입니다. 마치 자기 몸에 붙은 팔을 다루듯 정교하고도 빠르게 그 기계를 다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초보자에게 힘이 주어지면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좌충우돌하면서 힘을 사용하기에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숙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무쇠덩어리에게 신경도 감각도 없지만, 깊은 경험으로 마치 신경이 있는 듯, 감각을 느끼듯 다룹니다. 그것이 숙련자입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성숙한 사람입니다.야고보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혀가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생의 바퀴를 사를 정도로 위험한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 신경도 감각도 없는 그 무쇠덩어리를 감각이 있는 팔처럼 사용하는 성숙함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신경도 있고 감각도 있는 힘을 가지고도 우리는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모습일 때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힘이 주어졌을 때 잘 사용해야 합니다. 물질의 힘, 말의 힘, 지위의 힘, 관계 우위의 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잘 사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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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9.2018 나쁜 경험
    세상을 살다가 보면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쁜 일을 경험하기도 하고, 사고에 접하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하며, 때론 사람들 사이에서 속임을 당하거나 오해와 관계단절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처들이 쌓여서 우리 내면의 모습은 엉망진창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속사람은 통곡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밖의 ‘나’와 안의 ‘나’가 심한 unbalance를 겪고 나면 심할 때는 우울증이나 자기포기 혹은 인격장애를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참 무서운 것이지요.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항상 파란 신호등이 켜진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때로는 빨간 불이 켜질 때도 있습니다. 노란 신호등도 켜지기도 하고, 좌회전 신호등도 켜집니다. 늘 파란 신호등만 켜지면 빨리 갈 수 있고, 기분이 좋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항상 가는 곳곳마다 빨간 신호등에 걸려서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경험들을 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망가뜨려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인생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하면서 활짝 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건강한 인생을 사는 것이지요. 문제가 생긴다고 짜증을 내거나, 관계가 깨지고, 아픈 경험들을 가질 때마다 속상해 하고, 자꾸만 움츠러 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만 망가뜨릴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마지막 강의(Last lecture)라는 책을 낸 랜디 포시 교수는 자신의 생애의 남은 육개월을 정말 멋있게 마무리하고 간 사람입니다.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에 그가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나 살 수 있나요?” “앞으로 6개월은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들은 랜디는 후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약 의사가 ‘6개월밖에 못삽니다’라고 했다면 나는 절망했을텐데 6개월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말에 용기를 가졌습니다” 남들은 심장병으로 교통사고로 준비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 비하면 자기는 6개월이나 시간을 주셔서 잘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같은 6개월을 어쩌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빨간 신호등에 걸리면 주변을 바라보십시오. 내게는 빨간 불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파란불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쁜 경험들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탁월한 삶의 해석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28)고 하심을 믿고 자신에게 일어난 나쁜 경험이나 환경을 믿음으로 재해석해 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의 경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나쁘면 나쁜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그것들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이런 현상은 아무나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축복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인내와 고통이라는 쓴 맛을 견뎌내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또한 가능할 것입니다.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보도록 잘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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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2.2018 자연의 신비
    93년에 유학을 막 왔을 때입니다. 당시에는 혼자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어느 여름날에 장대비도 아닌데도 뿌리는 비를 맞이하는데,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서 비를 맞고 돌아다니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아마 비가 귀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여름에는 장마라는 이름의 비를 신물나도록 보았던 나는 이렇게 하는 학생들이 왜 그러나 싶은 마음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비가 귀해서 그런가보다고만 추측되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보니 더욱 그러합니다. 오래 전에 이곳에 왔을 때엔 제 기억으로는 비가 그리 많지 않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에 주인 없는 건물에 나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아직 우리가 주인이 아닌데도 나무를 살리려고 모든 목장 식구들이 구역을 나누어 5 gallon통에 담아 차로 실어 나르면서 살리려 애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물을 쏟아 붓는데도 땅에 쏟아진 물은 네로의 눈물방울처럼 좀처럼 갈증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비라도 내리면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던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에 두어 번 연중행사로 내리던 비가 요즘은 마치 우기(雨期)라도 되는 듯,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낙비가 자주 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뜨겁고 더운 열기를 식히는 소나기 비가 반가우면서도 마냥 또 반갑지 않은 것은 교회의 공사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땅이 물러져서 실컷 준비된 것들이 헛일이 되어, Test비용도 늘어나는 불편이 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이번 비를 바라보면서 문득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시에도 물이 부족한 잔디가 죽어가고, 나무가 말라가는 현상을 보면서 열심히 물을 아침저녁으로 주고 다니는데, 그렇게 노력했던 것에 비해서 나무가 그리 살아나는 것을 보지 못해서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비가 내린 후에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에서 푸릇푸릇 새싹이 움터오고, 말랐던 나무에 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는 순간에 인간의 노력보다는 자연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이 더욱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수돗물보다는 빗물에 녹아있는 영양소가 더 많기 때문일까요, 아님 우연의 일치일까요, 비온 후에 나타나는 결과는 내 손으로 한 결과보다 훨씬 강력하고 빨랐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솜씨, 하나님의 능력입니다.사도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롬1:20) 했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 우리는 그저 자연의 현상이라고 부른 것들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신성, 그분의 솜씨, 그분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보다는 그분의 능력이 더 큽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그분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각과 그 분의 뜻은 우리보다 높고 커서 우리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풍성한 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세상의 어떠한 것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지혜롭고 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직 내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들이 있다면 그 분의 손에 옮겨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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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15.2018 기차여행
    여행은 언제나 설레입니다. 낯선 곳을 향한 미지의 탐구이든지, 이미 가본 곳이지만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든지, 그리고 함께 가는 사람에 따라서 여행은 참으로 갖가지 형형색색의 맛과 멋을 풍기며 우리 가슴속에 고요하게 평안을 심어줍니다. 계획하는 단계에서 찾아가는 모든 것이 사람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지요. 또한 교통수단도 다양합니다. 자가용, 기차, 비행기, 버스 등의 여행은 그 나름대로 좋은 의미와 낭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어느 날, 저는 마음속에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한 가지 해 보았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를 하기 위해 LA에서 San Diego쪽으로 차를 몰고 갈 때면, 해안선도로를 잠간 타고 내려갑니다. 그러면 하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와 그 옆을 기차가 같이 달리는 구간이 나올 때면, ‘아, 언젠가는 나도 저 기차를 타고 여유 있게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되어 Orange county에서 San Diego, California surf line을 타고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한 번도 기차를 타보지 않은 탓에 좀 얼떨떨한 마음으로 기차를 타 보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기차보다, 값비싼 비행기 보다 훨씬 안락했고, 여유가 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이런 여행이라면 장거리를 타보아도 불편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고 날 걱정을 하며, 자그마한 돌출상황에 의해서 가슴을 졸이는 자동차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내가 잘못을 하든, 남이 잘못을 하든, 누군가 잘못을 하면 여지없이 사고의 여파가 내게 부딪히는 위험성이 있는 자동차와는 달리, 기차는 그저 의자 깊이 몸을 맡긴 채로 자유로운 생각과 바깥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편안함을 즐기며 마음의 평안과 함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장거리 여행을 기차로 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말입니다.이런 감상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내 인생의 핸들을 붙잡고 온갖 걱정을 하면서 여기 저기 살피고, 잠시 여유도 가지기도 하지만 언제나 긴장을 하면서 운전을 해야 하는 자동차 운전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었구나! 반면에 모든 것을 다 예수님께 맡기고 그저 평안과 신뢰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즐기면서 감사하면서 인생을 사는 기차여행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그렇습니다. 인생을 자동차 운전하는 것 같이 살 것인가, 아니면 기차여행같이 살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자동차 운전을 하는 것처럼 삽니다. 그러나 기차 여행처럼 모든 일을 기차이신 주님의 손에 의지하고 편안하게 마음을 먹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맡긴 우리의 인생가운데서도 때론 어려움과 불안과 사고와 아픔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그 나름대로 그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나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감사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운전해야 속이 시원한 분도 있겠지만, 기차여행처럼 모든 것을 맡기고 기차 여행(?) 한번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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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01.2018 당신도 연.예.인
    우리 교회 형제 가정이 한국에 나갔다가 친척인 연예인 g.o.d. 멤버 두 명과 함께 찍은 사진을 페북에 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박진영씨를 친척으로 둔 장로님도 있는 것이 생각나서 토요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웃으며 담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대화중에 ‘요즘은 연예인이 많아서 다들 연예인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그래, 정말 연예인도 많아. 요즘은 아무나 연예인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알리는 사람도 가만히 보니, 정치인이나 경제인보다도 연예인들의 힘이 더 큽니다. 오죽하면 ‘문화 대통령’이라 부르겠습니까? 그들은 목사의 설교보다도 더 영향력이 있어 보입니다. 목사가 가는 곳에는 사람이 없지만, 연예인들이 가는 곳에는 수천, 수만명이 몰려다닙니다. 얼마전 베가스에 방탄소년단이 왔다고 하여 난리가 난 것도 그런 현상입니다. 이젠 어느 나라를 가던 K-pop, K-drama가 더 인기를 얻습니다. 한국은 몰라도 그들은 압니다. 연예인이 되는 것을 꿈으로 삼는 청소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그런데요, 가만히 보니 우리도 연예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연예인이었습니다.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가 아름답고, 노래를 잘해서 연예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연.예.인’입니다. 예수님을 연모하는 사람, 연.예.인.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연예인입니다. 당당하게 연예인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스스로가 ‘연예인’이 되어서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분을 드러내는 일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연예인이었고, 또한 우리도 연예인입니다.이 연.예.인이 되려면 세상 사람들처럼 돈 많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얼굴이 예뻐야 하고, 끼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하나 있으면 됩니다. 성경시대속의 사람들과 인간의 신앙역사를 삶으로 쓴 위대한 신앙인들은 연예인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부활과 능력 그리고 재림을 이 땅에 선포할 연예인입니다. 세상의 연예인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연예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낳는 연예인입니다. 우리의 활동무대는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는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험난한 음지이기도 합니다. 빛도 없고, 화려함도 없지만 우리 “연.예.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 섬기기 위한 삶을 사신 것을 본받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걷는 “연.예.인”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감사합니다. 가다가 깨져도 툴툴 털고 웃으며 일어납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않아도, 내게 남는 이익은 없어도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사람, 바로 당신이 ‘연.예.인’입니다. 오늘도 이 행복한 일에 보람을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세상을 위한 연예인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멋진 ‘연.예.인’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남들이 연예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연예인입니다. 멋지고 아름답게 생을 <연.예.인>으로 살아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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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4.2018 잘 가르치고, 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위임명령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 우리가 제자훈련에서 배운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교회 숫자를 늘리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제자의 수를 늘려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제자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그분의 삶을 닮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수(傳受)하는 사람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그런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물론 주변에 God fearer들이 있어서 그들의 무리 가운데 섞여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 문턱이 높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인이 되는 것은 곧 손해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제자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함부로 교회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문턱이 너무 낮아졌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로 인하여 손해나는 일은 커녕 오히려 이득이 되는 일이 많기에 누구나 교회에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제자들과 섞여 삽니다. 그러다가 보니 제자들의 영적 감화력이 세상을 감화시킬 능력이 되지 못하고, 단지 교회의 숫자 불리기에 관심을 더 갖게 되면서 인원 감소를 두려워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교회 생활을 하게 함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상한 교회가 되고 말아버렸습니다.초대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건을 통하여 교회가 무섭도록 질서를 지켰습니다. 거짓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속임수가 작동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헌신된 신자인 제자냐, 아니냐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박해가 풀리면서 상업화된 개념이 교회에 흘러들어와 교회의 순수성을 무너지게 한 것이 뼈아픈 경험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속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한번 적셔진 세속은 쉽게 털어낼 수가 없고,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사람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낮아짐을 두려워하고,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교회는 죄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틀린 것에 대해서 주님의 권세를 가지고 고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비신앙, 부정직, 비웃음, 불경건, 무능력과 무기력이 판을 치는 교회가 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봤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을 안 지켜도, 예배 시간에 딴 짓을 하고 있어도, 성실하게 집사의 직분과 제직의 사명을 다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교회에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예법도 지키지 않습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다른 교회에 가보면 기본이 안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교회도 있고, 아, 저 교회는 정말 기본이 잘 되어있다는 부러움을 사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갑니다. 내가 주님을 어떻게 대하고, 교회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교역자는 잘 가르쳐야 합니다. 아프더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는 속상해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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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
    아름다운교회 Jun 17.2018 나는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가?
    지난 한 주간, 우리는 제3차 전교인 선교주간으로 설정하고 나름대로 작은 봉사를 실천하며 바쁘게 지낸 한 주간이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새벽기도회, 목요 연합집회, Three Square & Rescue Mission 봉사활동에 집중하고, 교회 공사에 또한 매진하면서 피곤하고 힘든 한 주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앞장서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봉사활동을 나가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이 미국 사회가 봉사자들에 의해서 돌아가는 나라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먹고 살기도 바쁘고 힘든데 다른 사람 돌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봉사는 시간여유가 있거나 건강하거나 남들보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할 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봉사하는 분들을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도 힘들고 아프고 연약해도 나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사랑이라도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말이지요. 저는 Rescue Mission에 노숙자 음식도우미를 다녀왔는데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에 대한 소회(素懷)입니다.식당에 들어서면 음식 serving하는 Kitchen 바로 위에 banner가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07:1). 이글을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노숙자들은 이 밥 한 끼를 위하여 여기에 왔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분들은 무엇을 감사할까? 그리고 배식 받은 식사 한 끼를 식탁에 놓고 두 손을 펴서 기도를 하는데 그냥 형식적인 기도로 보이지 않는, 상당히 오랫동안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분을 보면서 아, 이 분은 무엇을 그렇게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분들인데, 그냥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분들인데 무엇이 감사할 상황이 되던가 말입니다. 그에 비해서 나는 얼마나 부유합니까? 가족들이 곁에 있고,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이 있고,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환경에 있고, 가끔은 취미생활도 우아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속에서 얼마나 마음으로 말로 불평을 쏟아 놓았던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면서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 숨을 쉴 수 있고, 아직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아직 작은 여유나마 나눌 수 있는 환경이 있다는 것만으로 춤을 추며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감사를 유지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절대감사이지 않겠나 싶습니다. 비교의 감사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감격만으로 이미 우리는 감사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 한 분만으로도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니 이 세상에 있는 삶과 많은 것들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과 내가 갖지 않은 것을 비교하면서 늘 불평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감사만 해도 부족한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깨닫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나는 무엇을 감사 못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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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아름다운교회 Jun 10.2018 Caliche(컬리치, 컬리쉐)
    타타타… 투투투… 지축을 흔드는 소리는 교회 공사를 위한 도로를 파내는 작업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하수도 연결을 위하여 도로를 파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까이 현장에서 한참을 듣고 있으면 귀가 아플 정도로의 소음이며, 사무실에 앉아서 들으면 몸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공사 계약을 할 때에 비용을 계약하고도 이면 계약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땅을 파다가 Caliche가 나오면 햄머 포크레인으로 깨내야 하는데 그 양이 얼마나 될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파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얼마에 계약할래, 깨는 시간단위로 계산할래 결정하라고 해서 모험을 하고, 시간단위로 지불하기로 하고 시작했습니다. 3일째인데 아직까지 돌을 깨내고 있습니다. 그 돌이 바로 Caliche라고 부릅니다. 그냥 Rock이라고 하면 될텐데 싶어서 사전을 찾아보니 Calsium Deposit같은 것으로 단단히 뭉친 것이라고 합니다. 그냥 자갈이나 흙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무게로 인하여 마치 바위처럼 뭉쳐있는 땅의 암덩이리와 같다고 할까요? 그냥 표면에서 보면 포크레인으로 떠내면 될 것 같은데 중간 중간에 이런 Caliche들이 박혀있어서 중장비로 깨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단단해도 이런 해머 기중기에 남아나지 못하고 깨집니다. 부드러운 흙이어서 그냥 파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땅속을 파다가 보니 4피트, 8피트, 심지어 9피트 속으로 들어가있는 하수관(Sewer line)을 찾아 들어가는 작업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Caliche가 작업을 방해하고 돈을 잡아먹는 암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 심령에도 이런 Caliche가 있을 수 있겠구나. 교회 안에서도 이런 Caliche와 같은 존재와 시스템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온갖 풍상과 경험들, 자기들의 생각들, 이런 저런 경험들이 굳은 돌덩어리는 Caliche가 되어서 내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내 영혼과 심령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안에 이렇게 Caliche와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을 깨내야만 무엇인가를 할 수가 있겠다 싶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마음밭을 기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단단하게 굳어졌으면 그럴까요? 잘못된 신앙적 경험이나 아픔들로 인하여 이렇게 단단히 암세포처럼 자리하고 있는 우리 안의 이 Caliche들은 무엇으로 깨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능력 외에는 깰 수가 없는 견고한 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도바울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즉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충격적인 그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 깨지지 않는 Caliche 때문에 그냥 예수반대자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안에 Caliche를 깨트리시고 그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안의 이 침전물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Caliche를 이루기 전에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을 보내고, 경험의 온갖 침전물들이 서로 엉켜져서 아무도 깨트릴 수 없는 이런 Caliche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런 것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온유한 것 같아 보이고, 겸손한 것 같아 보이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아도, 내 안에 침전물, Caliche가 도사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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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
    아름다운교회 Jun 03.2018 뿌리까지 적시는 은혜
    지난 9개월 동안을 공사를 하기 위한 온갖 설계와 permit을 받는데 다 소모를 하고, 이제 겨우 연장신청을 다시 8개월을 받아 드디어 공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계산을 해야 하고, 섭외를 해야 하고, 우리 형편에 맞고 예산에 맞는 공사자를 찾기 위하여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일들로 인하여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산을 절약할까, 수없이 연구하고, 돈을 절약하는 방안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 하는 이 일이 가끔 저를 짜증나게 합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공사판 공돌이 신세처럼 거칠어지는 심령을 느끼며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나를 다스리지 않으면 정말 내가 아닌 남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다시 앞으로 8개월을 지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공사를 하는 과정 중에 하나를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수도를 연결하게 되면 잔디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주 정부의 보조를 받아 Desert Landscape로 바꾸는 일을 위하여 잔디를 파내는데, 잔디 밑은 거의 메말라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소나무 뿌리가 여기 저기 잔디 밑에 뻗어있는 것이 보이면서 이 뿌리들이 그동안 잔디에 뿌려진 물을 먹고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물을 충분히 줬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물들은 잔디의 뿌리 밑까지 들어가지 전에 메말라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물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흥건하게 표면을 적시도록 물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물들은 그저 표면만 적실뿐이었고, 그 속은 여전히 말라있음을 본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우리 잔디뿐만 아니라, 나무에 물주는 방식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신앙생활과 비유해 볼 때에 같은 원리가 작동된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겉을 보면 번지르르하게 은혜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의 뿌리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메마르고 척박한 환경을 가진 우리의 모습말입니다. 은혜의 물이 뿌리 깊은 곳까지 들어가 심령을 적시어야 그 물을 마시고 촉촉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텐데 겉만 적셔지고 말아버린 것 말입니다. 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목회자로서 은혜의 물을 충분히 흘려서 그 심령 밑바닥까지 적셔야 하는데, 적당하게 물을 주고는 다 됐다는 자세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는 충분히 물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 물이 그저 표면에 흘러 적시기만 했을 뿐, 심령의 밑바닥까지 그 물이 닿지 않아 저렇게 각박하고 강팍하게 살아가는가 싶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물에 충분히 적셔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심령의 뿌리 깊은 곳까지 물이 미치지 못하고 말라버려 더 이상 자랄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속은 것입니다. 겉에 뿌려진 물들 때문에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않을까요? 뒤돌아 보아야합니다. 실제로는 심령 깊은 곳에 은혜에 적시지 못하고 있으면서 겉에 흐른 물만 보고 간과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뿌리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나무에 얼마나 깊이 물이 닿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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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27.2018 기발한 아이디어?
    여름이 이제는 다가옵니다. 몇 년 전부터 더위가 늦게 찾아오고, 빨리 여름이 끝난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데, 올 해에도 5월말이 다가와도 큰 더위가 없이 지나는 것 같습니다. 베가스에 사는 것이 무엇이 좋은지를 찾아보면 많은 것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베가스가 좋지 않은 것을 찾아보면 그 또한 무수히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어느 곳에 마음과 눈을 고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사는 방향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어느 곳에서나 적응하는 그 적응력을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는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어느 곳에 갖다 놓아도 사람은 적응하며 사는 능력이 천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가진 그 적응력을 십분 발휘하면서 기기묘묘한 생각을 짜내어 삶을 사는 지혜를 발휘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주방에 에어컨을 가동시켜야 했습니다. 창문형 에어컨이 있는데 리모컨으로 작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군가 작동을 시켜놓았는데, 오후가 되어 정리하는데 에어컨을 꺼야 되는데 리모컨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고 돌아다녀도 찾을 수가 없어서 수동으로 끄고 나왔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는데 누군가 수소문하는 내용을 듣고, 자기가 봤다고 하는데 기상천외의 장소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냉장고 냉동칸이었습니다. 세상에! 누가 감히 냉동실에 리모컨을 넣었을까요? 아, 이건 분명히 치매 걸린 사람이 넣어 놓았을거야라고 상상을 하고 있는데, 어느 권사님이 “아마도 누군가 배터리를 연장하느라 냉장고에 넣었을 것이야” 그러는 것입니다. 엥? 들어보니, 배터리를 냉동칸에 넣으면 배터리 수명이 오래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라면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통할 수 있도록 선물 즉, 은사를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을 만들 때에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워서 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성막에 쓰일 모든 기구를 만들도록 하셨습니다(출31장).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능력 없이 그 일을 감당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부어서 그 지혜와 영광으로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쓰일 여러 기구들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디자인 해 주셨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디자인을 잘 해 놓으셨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을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에 우리가 더욱 기도가 필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여름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하면서 뜻을 구하고, 함께 협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아름다운 교회에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도록 명하셨는데 그 일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천해 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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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20.2018 위로 아닌 위로
    지난 주에 WAVE Conference가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지역 사회 청년들을 향한 각 교회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베가스의 청년들과 기도하는 성도들을 잊지 않으시고 계시며,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는 말을 실감할 만큼 그 진지함은 정말 감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자기 비용을 들여서 자비량으로 Seattle에서, Los Angeles에서 집회를 섬기러 오신 모든 분들의 눈물 어린 섬김은 우리의 가슴에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하루 강의를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은 차치하고라도, 당일치기로 LA를 오가기도 하고, 3박4일을 이곳에 붙잡혀서 보상도 없는 헌신을 위해 머물며 기도하는 찬양팀과 휴가까지 내고 방송을 위해 따라 나온 집사님 등에게 보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자비량으로 휴가까지 내고 이곳에 단지 섬기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강사진들도 그렇습니다. 정말 시간 많은 한가한 강사들이 아닙니다. 없는 시간 쪼개서 이곳에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휴가까지 반납하고 가족들 데리고 선교지를 다닐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복음을 향한 ‘passion’을 보는 것은 큰 도전이었습니다.반면에 이런 섬김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지역 교회와 청년들의 참여열정은 너무나 민망스러웠습니다. 가끔은 설교자요 목회자로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모이지 않을까?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어할까? 내가 전한 말씀이 너무나 시시해서 그럴까?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나의 능력부족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가지 나 스스로에게 위로(?)가 된 것이 있었습니다. 아,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구나, 뭐 이런 것 말이지요. 은혜가 넘치는 현장에도, 유능한 강사진에도 불구하고 모이지 않는 것을 보니 나의 무능력만은 아니구나~!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이지 않는 것은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를 해 보았습니다. 왜 이리 모이기를 힘들어 할까? 과거에는 이웃 교회에 집회가 있으면 일부러라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교회 집회는 물론이고, 다른 교회 집회는 더더욱 참석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관심의 부족일 수도 있겠고, 인터넷이 발달해서 구태여 그런 집회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은혜의 공급을 충분히 받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내 방식이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판단으로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영적 무관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고 하는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것 하나만으로도 바쁜데 이런 저런 것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쁘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 안에서 영적 성장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해! 라고 생각하는 영적 게으름이나 교만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제자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저 내 행복을 위해 예수를 두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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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13.2018 형설(螢雪)의 공(功)
    청정지역에서만 산다는 반딧불이, 어릴 적 까만 밤에 점멸하며 깜박거리던 반딧불이는 아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 반딧불을 보면서 선생님들은 형설의 공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반딧불을 불빛 삼아, 밤에 달빛에 반사되는 하얗게 쌓인 눈을 불빛 삼아 우리 선비들이 공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 진(晋)나라 효무제 때 사람인 차윤(車胤)은 가난해서 등불을 켤 기름을 살 수가 없어 반딧불을 모아 그 불빛으로 글을 읽었고, 손강(孫康)은 한겨울 눈에 반사되는 달빛으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형설지공(螢雪之功)의 고사성어가 생겼습니다. 아, 그렇게도 열심히 책을 읽었구나, 부러워했던 그 이야기 말입니다. 반딧불을 얼마를 모아야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반딧불이 밝히는 불빛은 대략 3 lux정도라고 합니다. 지구상에는 2100여종의 개똥벌레라고 불리워지는 반딧불이가 있는데 그 중에 8종이 한국에서 서식한다고 합니다. 이 반딧불이는 6월 중순에서 7월 초순에 저녁 9시경에 짝짓기를 위해서 불빛을 내는데 1분에 120회정도 점멸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반딧불이, 한 마리에 3룩스정도 밝기의 반딧불이를 가지고 책을 읽으려면 적어도 150마리는 모아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무실의 밝기가 500룩스정도 되니 말입니다.저는 부모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만,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한 상황속에서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게 길러낸 그 부모님의 사랑은 이렇게 희미한 3룩스의 불빛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읽게 만들어 주는 그 엄청난 인고(忍苦)의 세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서 자녀들이 다 성장했지만, 아직도 때로는 어머니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직도 어머니의 배려와 생각 그리고 그분의 염려와 사랑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의 고차원 방정식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오묘하고 깊은 것이 부모님의 사랑인 것이지요. 요즘, 욕을 먹는 부모와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패륜(敗倫)의 부모와 자식이 고발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한 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직도 고귀한 사랑과 희생으로 부모됨과 자녀됨을 찐하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많이 있음도 간과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알아갈 때 더욱 그러합니다. 말씀을 참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생각도 남다르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통계적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라간다면, 하나님 사랑과 같은 부모님의 은혜나, 십자가의 은혜같은 부모님의 사랑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게 된다는 것을 많은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 부모된 어른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무조건 요구하고 받으려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된 성도들은 부모님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공손하게 인내를 가지고 섬김의 도를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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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06.2018 주일학교 교육을 위하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없는 교회절기이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린이들이 어른의 종속개념으로 이해가 되면서 어린이들이 학대와 소외계층으로 남았기에 바른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 필요한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는 어린이와 여성들을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어서 어린이날이 따로 필요가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 주일을 기점으로 우리의 주일학교를 돌아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이민 교회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주일학교 교육을 기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크기나 재정적 규모 등이 언제나 제약조건으로 작용하여, 의욕은 있으나 여건이 되지 못해서 지지부진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부모의 유랑벽으로 인해 자녀들이 정상적인 주일학교를 받아보지 못한 채 Daycare수준의 주일학교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 보니, 성경의 기본적인 줄거리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신앙인이 되고 말아버립니다. 이렇게 성장한 어른들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전혀 양육의 기본기도 없이 직분자들이 되는 악순환을 겪기도 합니다. 다시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무엇보다도 부모들의 의식전환이 필요합니다. 내 아이의 신앙교육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그냥 자라지 않습니다. 교실에서 배운 것이 다가 아닙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불신앙을 보고 자라면서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신앙적으로 살고,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매일 주일예배에 늦으면서, 아이들에게 주일학교 교육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불신앙의 언어를 쏟아 놓으면서 신앙의 언어를 지키도록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부모의 삶이 자녀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부모들이 예배와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일학교 교육은 대학교육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 교육을 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교회 봉사와 이런 저런 일들은 하지만 정작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달라고 하면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교사는 소명감도 있어야 하지만, 믿음과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최고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제일 먼저 주일학교 교사를 지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변두리에 있는 사람이,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교사를 하라고 현장으로 떠밀어냅니다. 가장 실력 좋은 신앙자가 교사로 나서야 합니다. 교육에 남녀노소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아는 분들이 가장 앞장서야 합니다. 장로님, 권사님, 안수 집사님들이 먼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도 자녀 교육을 책임질 수 있도록 모든 지원과 프로그램 계발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냥 돈을 지원하는 것으로 다 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교육적 안목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먹을 것 노는 것 마음껏 지원한다고 주일학교가 살아나지 못합니다. 소명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합니다. 주일학교의 존재 목적을 이해한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교육행정이 필요합니다.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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