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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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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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14.2023 기도하는 교회는 살아있다
    안식년을 보내는 첫 주간을 시애틀의 mission house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 곳은 제가 딱 한번 만나 교제한 목사님이신데, 선교관에 대해서 소개하시면서 한 번 방문하라고 하신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언제 그런 기회가 오랴는 생각에 가볍게 넘어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안식년을 갖게 되면서 어디에서 요양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곳이 그때 잠시 언급했던 선교관이었습니다. 목사님께 상의하고 의견을 물었는데 흔쾌히 허락을 하셔서 궁금했던 선교관에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을 기거하면서 많이 안정이 되어 그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이젠 하루 걸러서 하루씩은 잠을 잘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한 주간이 왜 이렇게 긴지, 휴식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곳에서 3주를 머물게 되는데 아직도 2주를 더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좋은 곳에서 두 번째 휴식의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첫번째는 서울 방배동의 아파트생활). 사실 목회자가 본교회를 떠나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더더구나 같은 교단이나 신학의 배경이 다른 곳이라면 더더욱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서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정말 따뜻한 대접을 해주시는데 많은 위로와 힘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다른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또다른 도전과 위로를 받게 되는데, 이곳 교회의 형편과 지나온 과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시 기도하는 길만이 교회가 사는 길이라는 이 당연한 답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곳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놀라게 되는 것이 두 가지인데, 대체로 많은 교회가 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새벽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 교회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일 외에는 한번도 빠짐이 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팬데믹 기간에도 기도의 문을 닫지 않았더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성장이라는 열매도 주셨다고 간증하는 교회입니다. 지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힘이 나고 있다는 대답을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 시간만 40-50분을 할애하여 강해한다는 것인데, 온 성도들이 아무 부담없이 이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는데, 새벽예배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나와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설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설교를 마치고 어느 성도가 인사를 해 오는데, 제가 참으로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에 정말로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우리 목사님 설교하실 때와 같이 은혜를 받았어요’ 그 분이 누구인지는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강사 목사에게 ‘목사님, 말씀에 은혜받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도 ‘우리 담임 목사님 하시는 말씀처럼 은혜를 받았다’는 말에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분들이 참 귀한 훈련을 받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에 자신의 교회 담임 목회자를 최고의 설교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교회가 희망이 있다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이민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도의 문을 닫고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기도의 문을 활짝 열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기도하는 교회가 될 때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여전한 희망의 등대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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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07.2023 상식이 뒤집히는 시대
    그동안 세상의 과학과 상식이 발전하고 넓어진 것은 문명의 최첨단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신선하고 달콤한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빨리 발전 하는지, 기성세대나 나이든 분들에게는 따라가기가 벅찬 세상이 되었고, IT의 발전으로 이루말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Platform이 만들어지면서 하루하루가 변모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만 알아서는 이제 살 수가 없고, 둘, 셋, 넷을 동시 에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되면서 analogue시대의 사람들은 살기가 고되다고 이구 동성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면에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는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님을 보면서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기존의 상식들이 뒤집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돼지기름(삼겹살), 라면스프등 우리가 안좋은 것이라고 거부감을 가졌던 것들에서부터 의료와 최첨단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알고 있던 상식이 뒤집히는 것들을 보는 것은 이제는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거의 상식처럼 현대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있 는 ‘물’에 관한 것입니다. 하루에 무조건 2리터를 마셔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들이 그동안 많았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아주 강력하게 권하는 분들도 만나보았습니 다. 그런데 얼마전 유튜브를 통해서 그렇게 물을 무조건 마시면 오히려 독이된다고 말하는 화학자 한 분을 보았습니다. 이분에 따르면 그렇게 물을 마실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수분을 공급받는 공급처가 단지 물만이 아니라, 모든 음식물에서도 제공되고 있으니 몸의 상태를 보아가며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상식은 정말 절대 불변의 진리일 것 인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상식, 인생에 대한 상식, 믿음과 삶에 대한 상식등이 나도 모르게 오염(?)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 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상식이 통하는 시대에 살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비상식이 상식이 된 시대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일반상식 조차도 이젠 믿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닌지 싶어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절대 진리적 상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더욱 실감이 납니다.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갑니다. 앞으로 세상은 환경이 바뀌게 될 때마다 우리의 상식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도덕의 기준도 바뀌게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말씀의 가치와 진리를 숭앙하는 자세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이 가치 기준이 바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진리를 진리로 바꾸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사람의 속삭임에 넘어가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실과 진리를 오용하게 되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삽니다. 상식이 뒤집어지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그 가치를 영원히 보존해 주는 절대 진리에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미련하도록 진리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미련하다고,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비판을 한다해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흔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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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30.2023 당신의 믿음을 RESET 하라!
    예수님을 만난 것이 일생의 최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20대 초반이 었습니다.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자, 내 삶은 기쁨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단조롭고 형식적이고 의무감에 가득찬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던 똑 같은 내 일상의 삶은 그야말로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감사하고 긍정적이며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청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삶을 돌아보면 비관적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내 삶은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짜 만났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시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어두움의 시기가 찾아와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넘치는 은혜가 내 환경을 이기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환경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내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늘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받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첫 사랑이었습니다. 달콤하고도 힘이 넘치고, 결코 세상의 기쁨이 참된 기쁨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이 주는 만족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자그마한 가슴이었지만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는 바다같이 넓고 깊었습니다. 그런데 늘 이렇게만 살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삶의 굴곡앞에서 절대로 무너질 수 없을 것 같던 그 첫 사랑이 바람처럼 사라진 것을 느낀 것은 훨씬 후에 일입니다. 삶은 다시 고달파지고, 고통이 더 커보이고, 되는 것보다 안되는 것에 더 무력감을 느끼면서 원망과 불평의 삶이 찾아왔습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알게 된 것은 그 문제의 중심에 언제나 ‘남이 아닌 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 스스로의 문제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마귀의 생각에 꼴깍 넘어가 문제의 원인을 내게서가 아닌 나 아닌 것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 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reset button입니다. 가끔 컴퓨터나 핸드폰이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오작동이 일어나고, 속도가 느리고, 문제가 발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reset을 누르면 다시 시작되고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reset button은 바로 ‘회개’입니다. 주님과 우리 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off track이 된 상태로 끊어진 철길을 질주하는 기관차 같이 살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사가 없을 때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일생일대에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울도, 이방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앞에 범죄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진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적을 받았을 때에, 그의 영혼은 활짝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왕으로서 체통도 없이 그는 선지자의 책망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참된 용기입니다. reset button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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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23.2023 조기은퇴를 결정하면서
    목회자의 은퇴는 70세에 하는 것으로 한국교회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각 교회의 형편과 목회자의 형편에 따라서 조금 일찍 하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는 교회 내규 제5장 22조에 담임목사와 항존직의 시무연한을 70세로 정해두었고, 65세부터 본인의 청원에 의해 일찍 은퇴할 수 있다라고 규정해 두었습니다. 한국의 어느 유명한 교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조기 은퇴를 결정하면서 그런 소회를 밝혔습니다. 70세까지 갈 수도 있는데, 교회안에 젊은 세대가 들어오는 것을 볼 때, 내가 과연 저 젊은이들에게 바른 목회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오더랍니다. 그 분은 한국 교회에서 충분히 인정과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들에게 자신이 혹시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사실 안해도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젊은 세대를 위해서 일찍 목회를 내려놓기로 결심하시고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조기 은퇴를 입에 담고 주변 목회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어김없이 하시는 말씀은 ‘절대로 조기은퇴하지 말라. 후회 한다’는 조언이었습니다. 저 역시 70세까지 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그 이상도 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능력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조기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교회가 바르게 성장하고, 후세대들에게 좀더 양질의 양육과 영성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게 보장된 기득권을 내려놓고 67세에 은퇴를 하기로 결심하여 선언한 것이 몇 년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드는 생각은 67세도 많다. 66세, 아니 65세면 어떤가 싶은 생각이 납니다. 교회가 더 바람직하고 좀더 아름답게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빛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후임목사가 와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아름다운 퇴장을 하고자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약간의 Transition의 기간을 ‘동사목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아름답게 퇴장을 결심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제가 건강이 나쁘고, 몸이 아프다고 목회를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몸이 부서져도 저는 그것이 사명이라면 그렇게 해 왔습니다. 한가지 이 자리를 통해서 제 변명을 하자면, 제가 조기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몸이 아파서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한가지,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입니다. 왜 제 마음에 서운함과 아쉬움이 없겠습니까? 개척해서 제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 이 아름다운 교회에 대한 미련 이 왜 없겠습니까? 좀더 누리고 싶고, 좀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순간 순간 밀려 오지만, 이를 악물고 제 갈 길을 가려고 결심하면서 내려놓는 훈련과 연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추스르고,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얼마간의 안식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동안에는 안식년을 갖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형편과 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득이하게 해야만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유약 해 질 때가 있기 때문이고,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아름다운 마무리와 퇴장 을 위해서 우리 성도님들이 조금 더 이해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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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5
    아름다운교회 Apr 16.2023 나는 어떤 거지인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상을 받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우등상을 받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었지만, 그런 상을 못받아도 개근상도 자랑스러웠고, 하다못해 며칠 결석한 것도 상을 받아 ‘정근상’이라도 받으면 자랑스러웠을 때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출석을 할 수 있는지, 이 개근상은 성실함의 상징이 되어 타인의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상이 귀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개근거지’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여, 우리 기성세대의 개념이 털리는 역조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개근거지?’ 개근 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개근거지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려옵니다만, 내용을 알고 보니 씁쓸한 마음이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요즘은 개근하는 것이 성실함의 상징이 아니라 ‘가난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현장학습의 일환으로 해외로 여행을 다녀오게 되는데, 집안이 넉넉한 가정의 아이들은 해외도 나갈 정도의 부자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꼬박꼬박 출석을 하게 되니, 이것이 성실함의 상징이 아니라, 해외도 못나갈 정도로 가난하다는 상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학생들끼리도 위화감이 조성되어서 ‘너는 가난해서 여행도 못가지?(현장학습)’라고 놀려대니까, 자녀들이 울면서 돌아오는 모습에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어떻게 해서든 현장학습용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부모님들의 한숨을 들었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실하게 학교 공부에 충실하여 개근상을 받았던 우리 기성세대는 이제는 감히 개근상을 자랑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가 오면서, 기존에 있던 거의 모든 가치 개념들이 뒤집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시대속에서 과연 신앙인들은 바뀐 개념은 없을까요? 혹시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예배생활을 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성도들이 ‘개근거지’로 바뀐 이 현세대의 정의처럼, 돈이 없어서 어디도 못가고 매주 성실하게(?) 예배출석 꼬박 꼬박하는 성도들 사이에서 ‘저 사람은 개근 성도!’라는 이 칭찬이 ‘개근거지’(?) 정도로 비추지 않을가 싶습니다. 그래서 교우들 사이에서 자녀들이 ‘우리도 거지 소리 안듣게 주일을 빼먹고 놀러가자’는 눈물의 호소를 따라 ‘개근거지’가 되지 않으려 들로 산으로 놀러가는 현상은 앞으로 없을까 미리 걱정을 해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기존의 가치개념들이 완전히 바뀌어 사용될 날이 머지 않다는 기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 세상 풍조(the pattern of this world)를 따르지 말라’(롬1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조, 이 세대가 만들어 놓은 가치 개념을 따라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오염될 것을 오래 전부터 염려했던 것같습니다. 시대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추어 사람들의 생각또한 하루가 멀다고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세상에 묻혀살면서 세상의 풍조를 반영하면서 성경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방식이 기준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가치에 묻혀사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짠 바다에 살지만, 소금에 절여지지 않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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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4
    아름다운교회 Apr 09.2023 부활의 아침에...
    그날 아침,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날 아침을 생각하면 마음에 두 그림이 그려집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소위 제자라 불리웠던 제자그룹입니다.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동이트는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려, 달음질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였습니다. 손에는 행여 다 못한 장례식의 향유가 애뜻한 마음과 함께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시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 받았지만 현재의 난감한 상황에 상상조차 못하고 낙심과 좌절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등으로 문을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근 채,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더 칭찬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두 그룹 중에 누구를 더 예쁘게 보셨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찾아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시고, 안 찾아 가는 제자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의 부활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증거되었고, 성령의 내재적 역사의 능력으로, 믿을 수 없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은혜까지 믿음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조명, 그분의 도우심으로 이해할 수 없던 사건이 이해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부활을 믿고, 경험하며, 증거하 는 수준에 이른 것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속으로 뛰어든 것과 같은 사 건입니다. 가끔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너무나 강렬하게 주님의 부활을 경험 한 나머지 이를 증거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 아니 부활을 목격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있어서 부활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기력한 인생을 에너지가 넘치는 삶으로 바꾸었고, 목적이 없는 삶이 분명한 방향을 가진, 눈빛이 또렷하게 빛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의 심령에, 이제는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두려움과 맞서 기꺼이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두려움 대신에 확신의 자랑으로, 그리고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등의 새로운 내적 기질이 심겨지면서 곁사람을 벗어던지고, 성령의 속사람의 향기를 뿜어내면서 삶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과 증거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예수 부활과 함께 증거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합니다. 한국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자신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찬송을 틀고,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이단’이라고 정죄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방식의 전도를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여기는 동안 그들은 열심히 전도(?)하면서 그들의 종교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 먹히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 아침에, 조용히 제자들에게 찾아와 ‘성령 받으라’고하시던 우리 주님은 우리로 부활의 증인이라 하십니다. 부활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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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02.2023 넘어지며 배운 스키
    오래전 어느 분의 배려로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L.A 근처 스키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님이 만들어 주신 나무 스키로 동네 비탈길에서 타본 후 처음 타보는 것이었습니다. 스키장에 도착해보니 동네 비탈길 과는 다르게 초보자용 코스 중급자용 코스, 그리고 상당한 기술이 있어야 하는 아주 가파른 내리막 코스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운동신경이 뛰어나다고 자부(?) 하고 있었던 터라, 초보자용을 건너뛴 채 곧바로 중급자용 코스를 선택하였는데 마음먹은 것과 달리 제대로 설 수도 앞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민망스러울 정도로 계속 넘어지자 스키를 가르쳐주시던 장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만약 넘어지지 않는다면 스키를 배울 수 없습니다. 계속 넘어지십시오 넘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 말을 들은 후 용기가 생겼습니다. 넘어지면 계속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게 되자 점점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굳었던 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몸의 중심이 잡히기 시작하여 중급자용 코스를 신나게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유를 아무리 많이 쏟더라도 젖소만 잃어 버리지 않으면 문제없다.” 우리의 시선이 쏟아진 우유에만 쏠려 있을 때 좌절에 빠지게 되지만, 쏟아진 우유보다 그 우유를 계속 공급하여 줄 젖소에 우리의 시 선이 간다면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대다수 사람은 실수나 실패를 병균이라도 되듯이 회피하거나 두려워 하지만 성공은 역경과 실패를 통해서 익힌 것들입니다. 실패를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실패를 정복한 사람들의 노예가 됩니다. 절대 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수하는 사람들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성취도가 높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실수를 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실패하거나 실수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겁쟁이 보다는 과감하게 무엇인가를 계속 시도해서 결국은 일을 해내는 도전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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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6.2023 팔자타령 뚝!
    우리는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자기 뜻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쉽게 체념하거나 포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팔자타령 내지 팔자 신세를 언급합니다.이렇게 팔자타령에 익숙한 것은 우리나라의 유교적 영향으로 인해 생긴 것 같습니다.'사람은 사주팔자대로 살아간다.'라는 유교적 운명론의 사슬에 묶여 너무 쉽게 삶을 포기하거나 체념합니다.'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을 너무 쉽게 망각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래서 팔자와 관련된 속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회자하는 속담은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속담이 아닐까 합니다.자신의 노력과 수고에 비해 바라던 성과가 없을 때, 아무 생각도 없이 놀고먹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개가 부럽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속담일 것입니다.이렇게 '팔자'는 우리 삶과 생각에 하나의 우상이 되어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것을 수긍하려고 합니다.'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이희아 자매가 있는데, 이 자매는 두 손을 합쳐 손가락이 네 개이고,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는 '선청성 사지 기형'의 1급 장애우입니다.그녀는 연필이라도 쥐게 하려는 부모의 의지로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어렵다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이희아 자매는 자기 삶에 주어진 신체적인 장애를 운명으로 보거나, 그 장애를 바라보며 팔자타령을 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이 겪고 있는 그 험난한 장애를 믿음의 기중기로 들어 올리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해 소망의 불도저로 밀어붙혔습니다.이제 우리도 오직 믿음과 소망으로 '팔자'를 고치며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을 만들며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이 순간부터 '팔자타령' 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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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1
    아름다운교회 Mar 19.2023 다르게 보기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8의 절반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주 쉽게 “4인데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맞는 대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그러나 숫자 ”8“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긱해 본다면 하나의 대답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8"의 형태를 보자면 작은 "0"을 두 개 결합해 놓은 것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 "0"을 다른 하나의 "0" 꼭대기에 올려놓은 형태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8"의 절반은 "0"이 되는 셈입니다. 더 살려보면 새로운 것을 벌견하게 됩니다. 세로로 "8"의 중앙을 절반으로 자르면 마주보고 있는 "3"을 두 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8“의 절반은 "3"이 됩니다.우리는 가끔 이런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한 시각과 고정관념과 편견과 선입견을 품고 별생각 없이 오직 '한 가지의 답'을 산출해 낼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편견은 말 그대로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것입니다. 편견은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개인적인 편견과 민족적인 편견과 종교적인 편견과 성별과 나이에 대한 편견 등이 있습니다.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느낌으로 어떤 일이나 대상에 대해 지레짐작하는 것이죠. 편견과 비슷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띠지만 예측한다는 게 다릅니다.고정관념은 오래도록 내려온 생각으로 잘 바뀌지 않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라기보다 사회 일반적인 생각일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말이나 고사성어 가운데는 여성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여자 셋이 모이면 그릇이 깨진다.'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필종부-(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한다)'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사람들에게 달갈을 세우는 방법을 묻자 모두 대답을 못 하였습니다. 바로 이럴 때 콜럼버스는 달걀밑을 깨어 세웁니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는 달걀을 세울 수 없었지만. 그것을 깼을 때 달걀을 아주 쉽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다르게 보기’를 시도한다면 우리에게 놓인 아주 큰 달걀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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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
    아름다운교회 Mar 12.2023 세상이 시시해 졌어요
    몇 년 전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같은 자리에 앉아계시던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전해 주신 이야기는 이것입니다.어느 날 목사님 아들이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이렇게 말했답니다.“아버지 세상이 시시해졌습니다!”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아들을 한참 쳐다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고 합니다. 세상이 시시해졌다고 하는 이야기는 현재 자기가 하는 일이 하기 싫은 경우, 그리고 본인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에 그런 말이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런데 아들하고 한참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이 아들이 세상이 시시해졌다고 한 말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공부와 일들이 다 중요하고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상위의 가치와 개념을 발견함으로 나오는 진솔하고 겸손하고 행복한 고백이었음을 알게 되어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구원하여주신 예수님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보물로 여겨 “세상이 시시해졌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번쯤은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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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9
    아름다운교회 Mar 05.2023 독립문
    어느 지인으로부터 장문의 카톡을 받았습니다. 독립문을 아느냐는 것이고, 그 독립문의 역사를 가르쳐 주는 글이었습니다. 독립문, 하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거나, 3.1운동의 독립선언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 일제 식민지의 폐혜를 들었던 터이라 독립문이라고 하니, 일제로부터 독립을 기념해서 지어진 문인가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는 중국의 속국으로 여겨질 정도로 중국의 심한 간섭을 받았습니다. 요즘 시진핑을 비롯해서 중국인들이 심심치 않게 언급하는 것중의 하나가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만합니다. 왜냐면 그 중국의 영향을 600년간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중국 황제의 승인없이는 우리나라 왕은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오면 조선의 왕이 나가서 그들을 영접하는 영은문(迎恩門)이라는 장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억울한 역사를 가진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하자 마침내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데, 이것을 기념하여 지은 문이 바로 독립문이라는 곳입니다. 역사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는 미안함이 들었습니다. 어설픈 지식은 우리를 이렇게 우수꽝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도 모른채 그저 독립이라는 한 단어에 필을 받아서 대한독립만세를 일제와 연결시키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가 이제 창립1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2009년 경제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에 모든 이의 우려와 걱정으로 출발했던 지난 14년의 시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잘못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교회의 복도를 지나는 작은 통로에 창립 1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게시판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고스란히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그대로 실려져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교회가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와 은혜가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교회 개척부터 몸담고 있었던 목회자로서는 한 땀, 한 땀이 고통스러움과 보람의 시간이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현재 교회의 구성원으로 남아있는 분들이나,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함께 섬기기 않는 분들을 한분 한분 떠올려보면, 나름대로 그 당시의 위대한 역사의 한 부분을 쓰고 가신 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교회를 베가스에 세우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을 믿으며 그 사명을 되새겨 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모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머물러 버리고, 소아시아의 책망받은 교회들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후대에 남겨질 것임은 자명한입니다. 독립문에 대한 오해처럼, 교회를 오해하고, 그 사명을 오해하면 그렇게 잘못 이해할 수도 있게 됩니다. 교회는 누려야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명 때문에 달려가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채로 살면서 엉뚱한 곳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꼴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간섭이 필요하고, 우리들은 그분의 뜻에 민감하도록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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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8
    아름다운교회 Feb 26.2023 역사에 한 획을 그으려면
    미국 영화중에 ‘Men of Honor’가 있습니다. 한 가난한 농촌에서 자란 흑인이 미 해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출중한 수영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해난 구조사가 되는 잠수부가 되기를 원하는 그는 엄청난 반대와 경멸을 받고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당시에는 잠수부라는 역할은 흑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Carl이라는 이 주인공은 주변의 시선과 멸시와 조롱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맞서서 마침내 모두가 인정하는 잠수부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를 당하여 한쪽 발을 잃을 정도의 부상을 당하여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그는 한쪽 다리로 잠수부로 군복무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지만, 난관에 부딪힙니다. 아내로부터 계속 군복무를 하려면 곁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듣습니다. 다리를 치료하여 은퇴한 후 가족과 행복하게 사느냐,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다리 하나를 치료보다는 잘라내는 결단) 평생 꿈이던 잠수부로 군복무를 하느냐의 갈림길에 그는 잠수부로 군복무를 하기를 결단합니다. 그래도 난관이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군인, 그것도 흑인이 미 해군을 상대하여 법정투쟁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군복무가 결정되어 흑인 최초로 Master chief이라는 영예를 얻는, 인간승리의 영화입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였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신념을 이루기 위하여 호된 아픔과 상처 그리고 반대와 압박을 받으면서 한 곳을 향하여 가는 사람의 명예로운 길을 이루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마지막 소명을 위하여 달려가는 모습과 겹쳐서 보이는 것이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 험한 길에는 영화에서처럼 자기를 괴롭혔던 상사의 마지막 든든한 정신적 후원을 받으며 견뎌내게 되는데, 그 길을 가는 곳에는 수많은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도움은 디딤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도움은 때로는 거침돌도 그 사람을 되게 하는 도움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게 실질적인 도움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움이란, 경제적 지원을 받았거나, 디딤돌로 사용될 자원을 여러 측면에서 제공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생을 돌이켜 보면 사실은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다음 주면 창립 14주년을 맞이하고 15년차 역사를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시간을 맞습니다. 창립의 과정을 지켜보지 않은 분들과 달리, 이 일의 중심에 있었던 제게는 한 해 한 해가 기적이고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도왔습니다. 때로는 플러스로 도왔고, 심지어 마이너스조차도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도움으로 다가왔 습니다. 이 아름다운 일에 한 획을 그으려면,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결연한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작은 소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속의 교회를 꿈꾸면서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교회 입니다’라는 의식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모를까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예쁜 돌도, 모난 돌도, 작은 돌도, 큰 돌도, 심지어 없어도 좋을 작은 모래알같은 존재도 교회를 위하여, 한 획을 그을 믿음의 재료로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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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7
    아름다운교회 Feb 19.2023 자랑하지 말라
    이솝 우화인줄 알았는데, 몽골에서 전해지는 민담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나는 개구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가뭄이 들었습니다. 연못이 마르기 시작했고, 그곳에 살던 청개구리가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것을 보면서 살 길을 모색했습니다. 유일한 길은 멀리 떨어져 있던 호수로 이사가는 길인데 방법이 묘연했습니다. 그러다가 묘책을 떠올렸습니다. 연못에 찾아오는 기러기에게 부탁해서 자신을 옮겨 달라고 하는 것인데, 기러기 두 마리가 나뭇가지를 물고 날면, 내가 그 가지를 물면 하늘을 날아서 저 호수로 옮길 수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기러기들을 설득해서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밑에 있는 사람들이 기가 막혔습니다. ‘야, 저것 좀 봐, 개구리가 하늘을 나네? 신기하네. 신기해!’ 이 말을 들은 청개구리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도 꾹 참을 수 밖 에 없었습니다. 입을 열면 떨어져 죽으니까요. 그런데 다음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정말 기가막힌 아이디어인데, 멍청한 청개구리가 했을 것 같진 않고, 아마도 기러기가 아이디어를 냈을거야. 기러기들, 정말 대단한데!!’ 이때까지 잘 참고 있던 개구리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니, 이건 내 아이디어인데, 기러기가 아니라고’ 자기 대신에 기러기가 칭찬을 받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어서 청개구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야, 기러기가 아니라 나라고... 나!!‘ 말하는 순간에 그는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인정받아야 할 영광이 남에게 돌아가는 것을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이 청개구리만일까요? 우리 인간은 그 보다도 더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괜찮다는 품격을 갖추어도 인간의 질투심만큼은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명품을 사는 나라가 어디냐고 하니, 대한민국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이냐? 그렇지 않습 니다. 그 이면에는 아마도 자랑하고 싶다는 충동과 자족감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명품산다고 행복해지는가? 아니라고요. 자랑도 한 두 번이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이지요. 신앙간증하는 사람도 잘못하면 자기 자랑에 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그것을 모두가 부러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랑이 넘어서면 교만으로 변질됩니다. 이 교만은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항목입니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도 가만히 보면 정 반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을 소문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잘 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 자랑으로 인해 상대방이 오히려 부끄러워질 때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랑이 많아진다면 사람에게서 받는 상은 커집니다. 그들의 칭찬도 많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받을 상은 없어집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네 상을 이미 받았으니라.” 마태복음 6장에서는 신랄하게 이 자랑성 신앙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 남이 내 것까지 받을 것 이라는 이 질투심을 깨야 자랑이 멈춥니다. 주님의 칭찬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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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6
    아름다운교회 Feb 12.2023 부르는 곳 없어도 갈 곳은 많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감동적인 일들이 많습니다. 누구도 생각지 않은 상황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남들이 똑 같은 생각을 할 때,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식과 환경을 보면서 안된다고 하지 않고, 길을 열어가는 그 마음이 참 감동적입니다. 요즘 시대에 교회가 어렵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줄어들고, 교회가 위축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몇 교회의 예외적인 상황을 빼고는 전반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자 신학교도 어려움이 왔습니다. 과거에는 수많은 경쟁을 치루어야 입학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미달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고, 심지어 졸업을 해도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는 신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교회가 어려우니 신학생을 받아 줄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느 목사님이 이런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도전했다고 합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 도 갈곳은 많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있어도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불러주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아직도 갈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군대에는 군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군목이 없거나 극소수여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오지의 군대가 많다는 말도 있습니다. 시골이나 산골, 혹은 섬등에도 목회자가 없어서 아우성인 곳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험한 곳은 누구나 가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목회경력에 이익이 되는 곳, 좀 더 내가 목회하기에 나은 곳을 찾다가 보니 갈데가 없는 것입니다. 노년이 되어 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 불러주는 곳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노인이 되는 것도 모자라, 더 기운빠진 노인이 되어져 갑니다. 마음도 생각도 행동도 점점 노인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해 보면, 갈 곳 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갈 곳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명을 따라 살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불러주는 곳이 없으면 복음 때문이라도 서울역에 가서 노방전도 라도 하겠다는 사명감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불러주셨는데, 내가 갈 곳이 없다고 한탄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일을 하도록 돌봐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러주기를 원합니다. 불러주는 곳이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 다. 사명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는 곳입니다. 결혼도 사람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명으로 갈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장소는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한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그 곳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닙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하나님이 보낼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가고싶은 곳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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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5
    아름다운교회 Feb 05.2023 기분 좋은 장례식
    항상 선한 영향을 주었던 목사님 한 분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71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노회와 해당 교회에서 진행하는 장례식에 California로 급히 다녀왔습니다. 11명의 형제자매를 둔, 대 가족안에서 막내로 자라셨다고 합니다. 생전에 4남매를 두셨는데, 자녀들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11명 안에서 자라셨는데, 당신은 4명으로 그쳤다고 조크를 하면서 조사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4명만 낳아도 무슨 우주인 만난 듯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 분들은 多産(다산)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여기에는 그들의 성경적 세계관이 삶에서 녹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태동에서부터 노회에서 우리 교회를 위하여 많은 조언과 사랑을 부어주셨기에 마음 깊이 남겨진 미국 목사님이셨습니다. 장례식을 다녀보니 우리 한국인이 하는 장례식과 미국 사람들이 하는 장례식에는 참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장례식은 아주 거룩하고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잃었다는 슬픔이 더 강조된 장례 문화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슬픔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눈물도 있고, 탄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없는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영광’입니다. 이번에 참석한 장례식에서도 어김없이 발견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이름조차도 funeral service가 아닙니다. ‘Celebrating ...’입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아름다운 회고입니다. 박장대소가 터지고, 때론 눈물이 터집니다. 이 미묘한 두 사이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두 가지 축제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 대한 영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음껏 높여드리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장례식의 주인공은 망자가 아니라 하나님 이시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축하입니다. 말 그대로 Celebrating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다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겼다는 기쁨입니다.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장례식은 바로 이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도 내가 죽거든 그런 장례식을 치루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봅니다. 죽은 나 보다는, 나를 이 땅에서 그 분 품안에 있게 하시고, 그리고 다시 영원한 그 나라로 부르실 하나님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이 되시는 그런 장례식, 생각만 해도 멋집니다. 우리의 장례식이 죽은 자를 슬퍼하고, 남은 유족을 위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면, 이 색다른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유족을 위한 것도 아닌 것도 아니 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장례식, 그것도 슬픔이 주제가 아니라,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울고 웃고, 그리고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남겨지게 할 수 있는 장례식이 이토록 기분좋게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치고 나오면서 가슴속 에 깊은 여운은 ‘기분 좋은’ 장례식에 다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저절로 입에서 찬송이 나왔습니다. 차가 막히고 답답한 길을 달려가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나오면서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우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이 기분 좋은 장레식을 닮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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