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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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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07.2021 행복한 성도의 모습
    교회가 행복한 공동체인지를 보려면 성도가 교회에 머무는 시간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가 13년 전에 첫 출발을 할 때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예배 처소가 없을 때에도 모이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만나는 것이 그리워졌습니다. 한번 만나면 헤어지기가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 같았습니다. 초대 교회가 그랬습니다. 모이라고 한 적이 없지만, 교회가 태생되면 주일이면 반드시 모여서 모이라는 규정을 예수님이 만들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일 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모여서 은혜를 나누고 성장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들은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행복한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모임의 시간이 줄어듭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합니다. 섬기는 사람도 하나 둘 끊어집니다. 그러니 더욱더 차가운 공동체가 되어져 갑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행복한지를 측정하려면 성도들이 머무는 공간을 보면 알 수가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어제 하루 종일 교회가 들썩였습니다. 마치 잔치집처럼 느껴졌습니다. 특.새 기간이기도 하지만, 새벽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모여서 김치를 담그고, 교회 공사를 하면서 서로 서로 돕는 모습이 정말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침체한 듯한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달라보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도우니 일의 효율도 빨라졌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만 하다가 돕는 사람들이 생기니 일하는 사람도 보람과 사랑을 느낍니다. 어느 권사님과 집사님은 일하는 분들의 수고를 생각하여 자원하여 음식을 사다가 먹이고, 만들어 먹이고 서로를 배려하고 챙기고 돕는 모습, 교회 물건을 사는데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앞장서 물건 구입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모처럼 따듯하고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니 더욱 더 신이 납니다. 이러한 일은 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나를 희생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는 말씀의 은혜, 기도의 은혜, 사랑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이많고 문제가 많다고 싫어합니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이 불때마다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가지가 없는 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죽은 나무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없이 구경꾼만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하다가 보니까 서로 생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니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문제가 대두될 때에 어떻게 성숙한 모습으로 그 문제를 다루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안다니면 먼지도 없습니다. 청소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면 청소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부흥하기를 원하면서 청소하려고 하지 않으면 모순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문제있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문제를 잘 다룰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행복은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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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31.2021 입맛을 점검하면 건강이 보입니다.
      과거의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2003년, 베가스로 목회하러 교회에 부임했을 때부터 지난 10여년의 시간의 메모리를 가끔씩 facebook에서 보여줍니다. 그때 제 모습을 보면서 정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과거에 얼마나 살이 많이 쪘었는지 보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그 살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에서 최고로 살이 빠졌습니다. 입던 옷들이 맞지 않아 다시 사야할 때가 많았습니다. 허리 사이즈 36에서 30이 되도록 빠졌으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많이 빠졌습니다. 그럴 때의 특징은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습니다. 집에서 해주는 일상의 밥도 맛이 없습니다. 하도 맛이 없어서 아내가 밥을 맛있게 안해준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정말 먹고 싶은 것이 없고, 식사 시간만 되면 힘들었습니다. 점점 말라가는 저를 바라보면서 가족들과 교우들의 염려도 커졌습니다. 어떤 권사님, 집사님은 한약, 보약, 음식으로 제 건강을 살펴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밥이 왜 이리 꿀맛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지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음식이 나온 것도 아니고, 아내의 정성스러운 평상의 식사 그대로였습니다. 무척 맛있게 식사를 한 후에 샤워를 하고서 몸무게를 달아보니 5파운드가 늘어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지?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이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제 입맛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의 건강을 살피는 척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식사를 얼마나 잘하느냐는 것입니다. 확실히 식사를 잘 못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식사를 잘 하시면 얼굴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옛말이 틀린 것이 없습니다. ‘밥이 보약이다’ 그것은 바로 ‘입맛’에 달려있습니다. 입맛이 좋아지니 저절로 음식을 더 먹게 되고 그만큼 살이붙고 건강해졌습니다. 음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입맛’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음식 탓을 합니다. 음식이 짜다, 달다, 싱겁다, 왜 같은 재료를 가지고 이렇게 밖에 못하냐, 별 투정을 다 부립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겪어 보니 진짜 문제는 제 입맛이었습니다. 내 입맛이 살아나니까 모든 것이 맛이 있습니다. 그게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남 탓을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지지부진하거나 영적 침체를 겪을 때면 항상 하는 이야기는 말씀에 은혜가 없다에서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이 불만과 불평으로 다가옵니다. 영적 입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입맛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모든 것에 불평이 따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불평에 물론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영적 입맛’을 이미 잃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음식 탓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빼빼 말라버려서 깍쟁이가 되어버립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항상 감사합니다. 스스로 이겨나가는 법을 배웁니다. 맛이 없는 음식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입맛을 어떠합니까? 밥맛이 없으면 입맛으로 이겨냅시다. 빨리 입맛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이요, 건강해지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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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24.2021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
    지난 주간에 우리는 두 분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분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의 보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에배였고, 다른 한 분은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신 분의 훈훈한 예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당하는 유족의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준비도 없이 맞이한 당황스럽고 슬픔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런 기회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무슨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생각보다는 많은 분들이 예배에 참석해서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금요일에 드린 환송예배는 우리 교회에서 진행이 되다고 보니, 마침 전도의 기회가 되고,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유족들에게 자그마한 힘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이 되어서 긴급하게 목장에 광고를 하여 참석하도록 안내를 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몇 분들이 열 일을 제쳐두고 참석해서 유족들에게 따듯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들은 ‘품앗이’라는 제도아래서 농경사회속에서 서로 서로가 일손을 도와서 농사도 짓고, 작은 마을 공동체의 애경사를 서로 서로 도운 미덕을 가진 사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계모임’등이 발달되어 있고, 적금제도가 잘 형성되어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제법 큰 규모의 교회를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다녔는데 제법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받아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다니게 되고,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이렇게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다니면서 뿌려놓은 부조금이 얼마인지 아느냐? 나도 내 애경사에 그동안 투자한 것을 챙기기까지는 교회를 못옮긴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교회 공동체가 어느 새 ‘품앗이’ 공동체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네가 이만큼 나를 도왔으니 너도 나를 이만큼은 해주어야 하지?’ 그런 마음입니다. 교회안에서도 서로 서로 돕는다고 할 때에 내가 받은 도움만큼 남에게 도움을 주고 또 그것을 기대하는 사회적 관습이 어느새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정말 교회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일까요?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받은 것은 없고, 도움받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댓가없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면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도움받은 사람이 아니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어서 사랑과 위로를 나누는 마음을 자제한다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기 힘든 전도의 기회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열고, 따뜻한 교회의 모습에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 먹은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을 먹기까지가 어렵습니다. 품앗이 공동체, 안면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이 세상을 사는 제자들의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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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17.2021 평생 습관 바꾼다는 것
      학창시절에 테니스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몇 번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때마다 포기를 했습니다. 이유는 나는 테니스를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공을 치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치는 것 이전에 폼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빈 스윙을 하고, 폼을 따라서 해보라고 하는데 끝도 없는 빈 스윙연습의 폼을 만드는 것이 귀찮아서 결국은 테니스 배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선 오랜 시간 후에 유학을 할 때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보고서 치고 싶은 욕심이 나서 운동을 했는데, 폼을 배우지도 않고 감각으로 공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테니스가 재미있어서 제법 오랜 시간을 테니스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력이 늘지가 않는 것입니다. 좀 더 잘 쳐보고 싶어서 유튜브를 보고 흉내를 내보는데 결국은 폼이 문제였습니다. 기본기를 배우지 않고 내 나름대로 감각으로 치는 테니스는 기본을 무시하고 배운 것이라서 이미 몸이 내 나름대로의 스윙에 익숙해져서 기본기대로 따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미 내 모든 근육이 잘못된 스윙에 익숙해져서 아무리 배워도 과거의 잘못된 스윙방식으로 따라 갑니다. 왜냐면 이미 내 몸이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잘 배웠더라면 이런 고생하지 않아도 될텐데 잘못 배운 스윙을 고치기에는 너무 큰 고생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운동을 조금만 잘해보려고 해도 잘못된 것들, 이미 습관이 배고, 잘못된 방식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그것을 고친다는 것은 피눈물나는 훈련을 통해 몸이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몸의 모든 근육이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수십년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신앙생활이 잘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수십년동안 세상에서 배우고 익히고, 습관에 배인 옛 사람의 생활방식이 나도 모르는 가운데 남아있습니다. 큰 틀은 바뀌어도 작은 것들에서 바뀌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활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을 때에 얼마나 많은 잘못된 습관이 많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어느 정도 틀이 바뀌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과거에 익숙했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에 다닙니다. 내 속에 ‘옛 사람’이 살던 세상의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새 사람’의 방식으로 바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도 안 바꾸고, 남도 안 바꿉니다. 그러니 적당하게 신앙생활하고,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도 바뀌지 않는 사람의 삶의 방식을 답습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습니다. 운동의 잘못된 습관하나 바꾼다는 것도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데, 영적인 삶에서 잘못된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사니, 내가 그렇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모습이 ‘반인반수(반은 사람, 반은 짐승인 희랍의 신화)’처럼 반은 신앙인의 모습과 반은 세속인의 삶을 섞어 삽니다. 옛 사람의 몸에 익은 생활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처절한 영적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새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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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10.2021 영적 리모델링
       세상의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집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사도 시간이 가면 헌 집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타도 시간이 가면 고장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래서 새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새것이 낡아지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유행에 따라서 감각을 새롭게 하기위하여 나름대로 헌 것을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늘 새것만을 사용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집은 리모델링을 통해서 분위기를 바꿔보기도 하고, 헌 집을 새 것처럼 바꾸어 보려는 노력을 합니다. 돈을 들여서 리모델링을 하면 정말 감쪽 같습니다. 겉은 낡아있어도 리모델링을 해놓으면 새 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리모델링을 합니다. 사람도 리모델링을 합니다. 성형입니다.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늘어집니다. 나이가 들어서뿐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도 좀더 예뻐지기 위하여 리모델링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리모델링에 익숙해져 있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리모델링이 사치인 것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리모델링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생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발전하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가변적인 세상에서 그저 과거의 전통이 좋다고 머물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이 담겨지는 그릇은 변하기에 그 변화에 맞추는 것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도 리모델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십년간을 살면서 우리의 집을 리모델링할 마음이 생기는데, 우리의 영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으면 안됩니다. 과거에는 찬송가만 ‘찬송’이었습니다. 복음성가는 ‘찬송’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복음성가는 흘러간 유행가처럼 받아들여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기타와 드럼을 치는 것은 경건치 못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뀌어 지금은 복음 성가를 부르지 않은 곳이 없고, 기타와 드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찬송가만 부르면 1세대 성도들은 익숙한 찬송이니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은 그런 류의 찬송가는 ‘진부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도 세대간의 갈등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리모델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전해야 하는 세상은 자꾸만 변합니다. 나만 변지 않는다고 세상이 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한 영혼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바꾸겠다는 결단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육신의 삶에 리모델링에는 관심을 갖지만, 영적 생활에는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충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기도하고, 다시 주님앞에서 ‘다시 성령충만’했던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번 받은 은혜를 수십년간 리모델링없이 써먹다가 마르고 닳아서 삐걱대며 신앙생활합니다. 우리의 영적 리모델링은 항상 이루어져야 합니다. 11월부터 우리는 ‘제13차 다니엘 특.새’를 진행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어떤 부들은 그 변화를 싫어합니다. 왜 같은 것을 십수년을 반복하냐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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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Oct 03.2021 향기가 그립다
    미국에서는 좀처럼 꽃에서 향기를 맡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저 혼자만의 느낌일까요? 물론 어느 꽃들은 나름대로 향기를 은은하게 뿜어내는 것들을 보았습니다만 대체적으로는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과일의 향기도 그렇습니다. 맛있는 과일을 고르기 위하여 코의 감각을 의지할 때가 있는데 이 과일마저도 향을 좀처럼 의지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다가 보니, 복걸 복이라는 요행수에 맡길 수 밖에 없지요. 꽃도 과일도 겉은 화려하지만 향기없고 맛없는 과일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세상사람들과도 그런 구분점도 없어서 향기도 없는 화려한 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구분하기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시간외에는 세상 사람과 믿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존재들 앞에서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욥을 신뢰하셨습니다. 욥이 끝까지 시험에서 이겨낼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향내나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 혹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편지는 글로써 마음을 전달합니다. 향기는 냄새로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사람들은 편지와 향기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항상 ‘자기’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자신의 본질의 냄새를 풍깁니다. 자신의 편지, 자신의 향기이기 때문에 거기엔 자신의 자랑, 자신의 역겨운 냄새를 풍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냄새는 그런 냄새가 아닙니다. 크리스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독특한 냄새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냄새는 그리스도의 냄새입니다. 내가 사는 삶에 나의 냄새가 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읽어집니다. 정치가는 정치를 해야하고, 경제가는 경제를 합니다. 운동선수는 운동을 합니다. 배우는 배우의 역할과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운동이든 하는 것은 각자의 역할이지만, 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향기’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제 가슴을 두드렸던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인데, 이 책이 신학적으로는 맞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사는 신앙인에게는 정말 두려운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정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영화배우 허준호씨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배우 허장강, 나이드신 분들은 다 아시는 분입니다. 유명 배우의 아들도 유명 배우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불교를 신봉했습니다. 삶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부르는 찬양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온 마음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며 그에게서 예수님의 열정을 느꼈습니다. 노래는 그 사람이 부르는데 느끼는 것은 예수님이라면 그것이 향기입니다. 요즘 세상에 향기를 품은 꽃이 없듯이 향기를 내는 그리스도인도 별로 없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온갖 화려한 꽃들이 많이 있지만 냄새가 없는 꽃이 많은 것처럼, 화려한 신앙인은 많은데 정작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문제이지 싶어 반성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의 걸음에 주님의 향기를 풍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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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26.2021 기본으로 돌아가자
    운동 선수를 비롯한 예쳬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피땀어린 노력으로 좋은 열매들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눈물이 담겨져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UN을 방문했던 BTS의 멤버들을 보면 온 세상이 좋아하는 K-pop을 만들어 낼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명성은 온 세상의 사람들을 열광에 빠지게 합니다. 연예계든 체육계이든 그들의 성공의 뒷면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피땀어린 노력과 눈물의 결정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노력없는 결과는 참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성공을 거둔 이들도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가령 운동선수도 그러합니다. 평상시대로 움직이고 하는데 갑자기 감각이 무너지고, 뭐하나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프로라해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분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 기본 훈련으로 다시 시작하자’ 그렇습니다. 무너져 내릴 때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하는 것은 바로 ‘기본’입니다 이 기본만 잘 다져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버팀목입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그 버팀목이 무너져내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운동선수들처럼 기본으로 가서 다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어디서 잘못되었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잠시는 늦게 갈 수 있지만 멀리 그리고 힘차게 제대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제공해줍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 감정은 다양한 환경앞에서만 서면 자신의 이성과 훈련조차 무기력하게 만드는 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앞에 어김없이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다윗도 광야에서 고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성숙해져 갑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나발’이라는 어리석은 사람을 통해서 자기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무너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만일 그에게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없었다면 다윗은 아마도 거기서 끝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기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기본이 뭐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습니다. 거창한 영적 거인에게는 너무나 쉬워서 기본으로 가기에는 수치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얼마나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겨우 유치원 수준으로 다시 내려가라고? 그러면 안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쉬운 것이지만, 너무나 쉬워서 자존심 상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대학원을 나온 박사가 유치원으로 들어가 다시 배운다는 것은 분명 수치이기는 하지만 그 기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에 있습니다.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려 예수님께 책망받은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도 ‘어디서 떨어졌는지 돌아보라’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워졌습니까? 내 뜻대로 잘 안됩니까? 늘 아쉬움이 남습니까? 기본으로 돌아가십시오. Basic은 쉽지만 다시 살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면 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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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19.2021 뿌리는 것이 헛되지 않기에
    지난 주간에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지역에 사신다는 이분은 교회의 정보를 묻고 조만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화중에 참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오래 전에 주일 설교를 CD에 담아서 전도사역을 했었는데, 이분은 그 CD를 들으면서 은혜 생활을 대신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 입장에서는 설교 시디사역을 오랜 동안 하면서 때로는 지치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무용론을 입에 거론할 정도로 그 노력에 비해 효과가 좋지 않다는 논리로 그만하자고 하던 분들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D Media가 세상에서 인기가 시들해지고, 인터넷 문화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몇 년 전에 그 사역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디를 들었던 분이 교회를 찾는다고 하니, 정말 감회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울림이 내 안에 일어났습니다. ‘아, 우리의 작은 사역이 헛된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는 사역이 너무나 초라하고, 보이는 열매가 없고, 그냥 지쳐만가는 듯한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가 하는 일이 하도 적어..’ 그냥 무너져 내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감도 없고, 자괴감에 휩싸여 우리의 사역에 물러서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로 인하여 몇 번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나서는 다시 그런 사역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시편의 기자는 ‘울며 씨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시126:6)’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고전15:58)’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향은 어렵고 힘들고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도망가고 싶어합니다. 함께 망할 수 없다고 함께 타고 있는 배에서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렇게 도망하면, 그 도망이 자신의 습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내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지금의 아픔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그 고통을 견디면 그 사람은 ‘성장과 성숙’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고난을 먹고 자랍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처럼 우리의 자람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진면목은 인생이 행복할 때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어둠의 고통속에서 보여집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아마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업과 삶에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뜻하지 않은 아픔속을 지나고 있을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역을 내려놓고,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내려놓고, 조금 더 편한 곳에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자그마한 수고와 헌신 그리고 우리의 핏땀흘린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실망시킬 때도 있습니다. 욕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진면목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며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작아도 우리가 주님을 위해 뿌리는 것이 있다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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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
    아름다운교회 Sep 12.2021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하니라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가면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동화시간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철가면’이라는 동화였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재미있게 들려주시는지 이야기 재미 홀짝 반해서 주일학교 예배시간이 기다려졌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삼손’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삼손은 위대했고, 힘이 장사고, 영화까지 나올정도니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야기로 듣던 성경에서, 내 눈으로 읽는 성경 그리고 설교자로서 다루는 삼손 이야기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새벽기도회 본문으로 다루고 있는데 삼손을 다루는 본문앞에서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영웅 삼손이 아니라 부끄러운 신앙인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출생의 예고 때부터 세례요한과 예수님처럼 기적적인 은혜를 타고 난 하나님께 바쳐지고 성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나실인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삶 자체가 방탕한 삶이었습니다. 사람은 친구와 노는 곳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듯이, 삼손은 항상 ‘거룩’과는 상관이 없는 곳인 블레셋 주변에 머물고 그들과 교분을 쌓으며 삽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인생이 한 순간에 들릴자라는 여인을 만나서 털려버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자신도 자기가 ‘나실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도 그렇게 살다니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실이 없이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속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절망의 한숨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눈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맷돌을 돌리고 있던 그에게 성경은 이런 말을 씨앗처럼 심어 놓았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16:22). 삼손의 삶이 거기서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절망의 비극으로 인생이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함을 암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인가 소망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털에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징이 머리털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삼손의 머리털이 자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새싹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싹은 삼손이 마지막 기도에서 응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마지막으로 이번 한번만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교회들마다 위축이 되었다고 한숨을 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됩니다. 그 교차지점에 우리의 믿음과 신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우리를 다듬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에게는 그에 맞도록 쓰시고, 하나님께 절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에 상응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권능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함을 봅니다.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사슴의 발처럼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믿음으로 붙잡고 일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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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
    아름다운교회 Sep 05.2021 곱게 나이드는 연습
       베가스에 올 때에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어느덧 20년 가까이 되어가는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알아왔습니다. 처음만날 때엔 아이였는데 어느 새 청년이나 어른이 된 사람들, 어른으로 만나서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 그나마 그동안 한참였던 분들이 곁에 남아 있어도 모두들 하는 말, ‘나이앞에 장사없다’며 늘 한숨을 짓고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들 세월만 간 것이 아니라 내 세월도 갔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요즘입니다. 힘이 쇠퇴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각과 굳어지는 기억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아이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고, 인간의 본질인 흙으로 돌아갈 때에 어른 역시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무한한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는 능력있는 존재이지만, 그 마지막의 길은 초라한 성적표를 가지고 창조주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을 향하여 가는 노중(路中)에서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자극을 받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수요일부터 지성과 영성을 갖춘 믿음의 사람들의 저술을 통해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영성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려는 우리들의 노력입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 중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지식의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나 자신만의 세계’속에 갇혀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정관념’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정관념은 잘 깨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내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아의 세계가 깊고 높을수록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요즘 제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만의 세계, 내 안의 지식과 경험, 그래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면서(다른 세계도 있음을 알았음에도 여전히 갇혀살 수도 있는 세상) 자기만의 잣대로 세상을 살려는 게으름(?)이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성채를 쌓아올리고 있는 사람들,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현상이 너무나 많은 보게 되었습니다. 변화도 두렵고, 변화할 수도 없고, 그저 자기 만의 세상속에 갇혀 살면서 더 이상 발전도 하기를 기대하지도 못한 채, 고집스러운 늙은이로 전락해 버리기 딱 쉬운 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지요. 때론 나의 지혜보다 남의 지혜가 뛰어날 수 있음을 보게 되고, 내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축복일 때도 있습니다. 남의 것을 볼 수 있는 지혜 때문입니다. 그냥 인생의 재미를 위해서 사는 사람과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이 다릅니다. 어느 100세 철학자가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늙어가면서도 늙지 않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구는 그러러면 부지런히 머리를 써야합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인생으로는 가질 수 없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앞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해서 부지런히 발전과 변화를 시도해야겠습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일 나이가 된 것도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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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
    아름다운교회 Aug 29.2021 유익한 인생
    세상일을 돌아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면서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게 했습니다. 특별히 신앙인들에게는 이 혼란의 시간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시고, 그들의 백성을 돌아보고 계신지에 대해서 지속적인 질문을 꺼내고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들이 사냥꾼의 총에 반항 한번도 못하고 쓰러져가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당연한 보호도 없이 죽음으로 몰리고,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며 그 분의 주권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이러한 문제는 단지 아프가니스탄의 백성들 뿐만 아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은 빈 손이거나 빡빡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효율적인 면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걸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삶을 꾸려가기 보다는 남의 도움에 의지해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건장한 삶을 가지고서도 정부나 다른 이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도움 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남의 필요에는 눈과 마음을 닫습니다. 오로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삽니다. 뭐,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겠지요.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의 필요를 채우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물질이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넘쳐나도 내것은 아깝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는 인색해도, 남을 위해서는 아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삶이 더 보람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폐가 되는 인생이나, 자기만을 위한 인생으로 우릴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남은 것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채우고, 그들의 남은 것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고후8장). 그리고 우리는 남은 것이 있도록 열심히 일하여 남을 돕도록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영적인 가난외에는 우리를 삶의 가난한 가운데 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가 넉넉한 것으로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수고하라고 말씀하신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엡4:28).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남을 위하여 살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 중의 하나도 역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요하심으로 가난한 자들을 불러야 합니다. 선교주일입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우리를 도우라’는 목소리는 온 천지를 울립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것을 나누어 필요한 이웃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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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
    아름다운교회 Aug 22.2021 아름다운 인생
    2020 도쿄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아픔속에서 치루어진 올림픽이 막을 내리면서 여러 이야기들이 훈훈하게도 하고 가슴 아프게도 합니다. 지난 올림픽에서 창던지기 분야에서 은메달을 딴 폴란드의 마리아 선수는 그녀가 자신의 생애 처음으로 목에 건 은메달을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이유인즉,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 수술을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 어린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그녀의 결정에 폴란드 대형슈퍼체인에서는 12만 5천불에 낙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돈을 지불하고서는 낙찰받은 그 은메달을 다시 그 선수에게 돌려줬다고 합니다. 한쪽의 승자가 아니라, 모두의 승자로 기억하게 만드는, 참으로 가슴훈훈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가 금메달을 딴 사람들입니다. 올림픽 선수들은 매 4년마다 경기를 치루는데요, 그 경기를 위해서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그 하나의 대회를 위하여 희생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대회를 기다리고 준비한다고 합니다. 각자가 받을 상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뼈를 깍아내는 인내와 고통의 훈련을 기다리는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상’입니다. 그 상을 받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지난 2020 도쿄 올림픽이 연기되거나 취소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선수들이 절망에 가까운 탄식을 쏟아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기다려온 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이 없다면 운동 선수로서의 존재의미를 잃는 것으로 생각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떨까요? 우리 역시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빌4:19).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영원한 인내와 고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을 상급이 있고, 고생의 끝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이거나 세상에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이 먼저일지는 모릅니다만, 분명 우리 역시 올림픽 운동선수들처럼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 목표가 없다면 정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힘들게 유지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전15:19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달려갈 분명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갖고 앞을 향하여 달려갈 것이지만,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다만 이 땅의 행복만을 위하여 살 뿐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정말 눈에 불이 튈정도로 바쁜 삶을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가 바쁘게 밥먹을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하루를 지나다보면 세월이 1년 10년 20년을 훌쩍 지나고 맙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보면 어느날 갑자기 인생을 왜 이리 살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때가 있습니다. 때론 목표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인생은 목표와 삶의 이유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신 일들을 성실하게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앞에 서는 날에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서겠지만, 주앞에서 부끄럽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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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
    아름다운교회 Aug 15.2021 이게 뭐지?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식재료에 원산지 표기가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7년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상당히 강력한 법을 만든 것이지요. ‘한국산’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기호에 편승하여 돈을 벌 목적으로 중국산이나 기타 저렴한 곳에서 들여온 싸구려 상품을 ‘한국산’으로 둔갑시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을 범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한국의 의정부시에서 ‘흑산도 홍어가 아니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광고를 써붙이고도 사실은 일본산 냉장 홍어를 써왔다가 사법당국에 적발이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런 곳, 즉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판 곳이 경기도 일정지역에서만 57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차라리 그런 광고를 하지나 말지, 자신있게 광고를 써붙이고도 거짓을 일삼아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비양심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현상이 왜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정치인들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자기가 한 말을 떡먹듯 뒤집기도 합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도 도무지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항변을 하기도 하고, 기가막힌 논리로 호도를 합니다. 정말 역겹기 그지 없습니다. 경제인들, 법조인들, 교육계, 종교계 할 것 없이 총체적으로 이렇게 만연된 거짓을 일삼는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실험실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쥐의 뇌에서 ‘두려워하는 DNA’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쥐가 고양이를 만나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들고 까불어댑니다. 두려워하는 DNA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마치 그런 것일까요? 누가 인간의 뇌나 마음에서 ‘부끄러움아는 DNA’를 빼낸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수치심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DNA가 인간의 삶에서 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생각나는 것이 ‘감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남에게 준 것만 생각하지 자기가 어떤 것을 받은 것은 다 잊어버린 채, 지금 당장 서운한 것 하나만 가지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인간이 처참해지는 것은 수치심과 감사의 DNA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라고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에 대해서 묻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든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부끄러움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나면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내면의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보다는 하나님앞에서 정직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주변에 신하들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자, 그는 변명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왕의 지위를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뻔뻔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요즘 시대에 이런 다윗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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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8.2021 올림픽과 신앙인
       지금 도쿄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2020 올림픽이 치루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 작년에 치루어야 할 올림픽이 올 해로 연기되었고, 끝나지 않은 팬데믹으로 관중없이 올림픽이 막을 올려 종반으로 다다르고 있습니다. 체육을 통해서 세계가 하나가 되고, 진정한 sportsmanship을 통해 우정과 기량을 뽐내는 세계인의 잔치가 반쪽의 행사로 끝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수들은 이 때를 위하여 각고의 시간을 다듬어 온만큼 마음껏 기량을 뽐내고 있고, 여기 저기서 훈훈한 소식들이 들려지고 있어서 기운을 잃은 지구에 조그마한 숨통을 열어주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올림픽이 치루어지는 동안에 예수를 믿는 체육인들이 나름대로 자기의 신앙을 피력하면서 복음을 세계에 전하고 있는 것은 정말 감동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육상선수는 메달을 따고 한 손에 자신의 국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은 사뭇 경의롭기도 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 현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심심치 않게 보아오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내가 알고, 내가 믿던 예수 그리스도를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그들의 신앙이 정말 위대하고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방향이고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올림픽 선수들은 자신의 몸을 잘 만들고 갈고 닦은 실력을 가지고 세계의 정상에 우뚝섭니다. 우리 한국은 양궁으로 유명합니다. 세계의 양궁인인들은 한국의 양궁을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쉽사리 그 위업을 물려줄 기회도 주지 않을만큼 양궁강국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바람, 소음, 긴장,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를만큼의 심박수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원인들을 맞서 이기는 훈련을 다양하게 경험하면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1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 분야에서 세계의 정상에 우뚝서기 위해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것들과 우리의 신앙생활을 견주어 보는 것이 무의미할까요? 무엇인가 쉽게 얻으려고 해도 얻어질 수 없습니다. 땀과 피 그리고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진주가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난의 시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입니다. 고난 없이, 기도없이 축복을 받는 것이 오히려 저주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과정이 없는 사람은 ‘싸구려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쉽게 만들어서, 싸게 팔아 먹으면 그만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숱한 고난을 격습니다. 어쩌면 남들보다 더 뜨거운 풀무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신앙의 영성(작품)은 잔치속 풍악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고된 비바람의 폭풍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마치 땅속의 다이어몬드가 엄청난 기압의 압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듯이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래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요즘 우리들은 훈련을 귀찮아합니다. 그것을 option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는 눈물/고통의 훈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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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1.2021 물 (Water)
    라스베가스 답지 않게 요즘 잦은 비소식을 접합니다. 그래서인지 8월에 100도를 밑도는 날씨는 거의 이변에 가까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날씨를 즐기고 있습니다. 비가 자주오다 보니, 습도 때문인지, 문이 빡빡하게 늘어나는 현상도 피할 수 없습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반가운 현상입니다. 베가스의 마른 목을 축이게 하는 단비이지만 그것도 그저 지표만 식힐 뿐인 듯, 가뭄해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요. 하여간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이 있기에, 라스베가스라는 도시가 지탱해갈 수 있습니다. 지구의 2/3이상이 물로 덮혀있는데 이 물 때문에 우주에서 보는 지구가 푸른 색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도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물이 60%로 떨어지면 노화가 일어나고, 50%에 이르면 사망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과 생물이 살아가기에는 이 ‘물’이 절대적인 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의 날’을 만들어 그 중요성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은 인간의 삶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데, 건강학을 다루는 사람들에게서도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짜릿한 음료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탄산음료이지요. 하지만 이런 음료는 잠시의 갈증을 풀어줄 수는 있어도 궁극적 방법은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이런 탄산음료를 마시지 못하게 규제하는 곳도 허다하지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탄산음료등이 점점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마시고 나면 화확인공 맛이 나는 듯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물보다 좋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은 맹숭합니다. 맛도 별로입니다. 그런데 그런 물이 실제로 내 몸에 활기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짜릿한 맛은 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 물은 맛도 별로고, 톡 쏘는 것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물이야말로 생명인데 그동안 그것을 무시했단 말이지요. 예수님과 만났던 수가성 여인이 그랬습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물가에 그 물을 길으려고 나왔습니다. 그녀를 만난 예수님은 ‘생명의 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우물물을 먹는 자는 먹고난 후에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 주는 생명의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었습니다. 그 물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지금까지 여인은 우물물이 영원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물을 뜨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목마름이 없는 생명의 물이라니요? 이것을 깨달은 여인은 동네에 물동이 버려두고 뛰어들어가 이 생명의 물인 예수님을 전합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물받아 놓은 물동이 버려두고 갔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물은 물이고, 생명의 물은 예수’라고 믿으면 되었지 물동이를 왜 버리고 가노~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여인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은혜이었기에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물! 늘 마시는 물이지만 그냥 물맛입니다. 거기에 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은 생명을 주는 물입니다. 늘 다니던 교회, 늘 드리던 예배, 뭐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처럼 새롭습니다. 생명의 생수이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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